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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통한 섭리
(에스더 4:1-17)
[ 서론 ]
누구나 삶의 위기를 겪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시험과 숙제라는 위기를 피할 수 없지요. 건강하던 우리 몸과 마음이 갑자기 아프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는 직장에서 버거운 일과 관계를 감당하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도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삶의 위기는 생생합니다. 생생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위기는 생생한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다가 “6월 25일까지만 견뎌라”라고 쓰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위기를 견딜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홍해를 가르시거나, 직접 나타나서 음성을 들려주지도 않으십니다. 모세나 엘리야 같은 지도자를 보내지도 않으시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생한 위기 속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살 수 있을까요? 에스더서는 지금 우리와 아주 비슷한 상황을 보여 줍니다. 에스더서는 분명히 성경인데,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표면에 등장하지 않으시지요. 등장인물 중에 그 누구도 기도하거나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위기를 겪습니다. 그것도 모두 죽을 정도의 큰 위기를 겪습니다.
보이는 위기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에스더서는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하시는지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기 가운데 섭리하시는지 들읍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에도 불구하고’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위기‘를 통해서’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기를 통해 섭리하시는 방식 세 가지와 적용점을 듣겠습니다.
[ 위기를 통해 문제를 드러내시는 섭리 ]
하나님께서 위기를 통해 섭리하시는 첫 번째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통해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에스더서 2장까지만 해도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을 비롯해서 모든 유다인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위기를 초래한 사람은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가 하만이라는 사람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지요. 하만은 일인지하 만인지상! 최고 관리직에 올랐습니다.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하만을 보면 꿇어 절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계속 거부했고, 자기가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하만이 왕을 회유해서 모르드개를 비롯하여 모든 유다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제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며 크게 울부짖었습니다. 이 죽음의 위기야말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를 통해서 더 큰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도대체 어떤 문제일까요?
사실 모르드개는 원래 자기가 유다인이라는 사실을 되도록 숨겨왔습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이민 3세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선조들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포로로 끌려갔지요. 에스더는 부모를 여의고 나이 많은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산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후가 폐위되고 놀랍게도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예쁘고 순종적인 아내를 원했던 왕의 눈에 들었던 것이지요. 에스더의 신분이 수직상승 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자기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티 내지 말고, 페르시아 제국과 왕이 원하는 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살라는 뜻이지요. “왕은 순종적인 왕후를 원한다. 눈 밖에 나지 마라! 동화되라!”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르드개”라는 이름은 바벨론 최고 신 “마르둑”의 이름을 땄습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별”이라는 뜻이지만, 여신 “이쉬타르”와 관련된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제국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에스더는 순종적인 왕후로, 모르드개는 충성스러운 중앙 공무원으로, 철저한 페르시아인이 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만이 최고 관직에 올랐습니다. 3:1은 하만을 “아각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아각은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아말렉 왕입니다. 이보다 앞서 민수기 24:7에도 아각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각”은 아말렉 왕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을 “파라오”, “바로”라고 부르듯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만은 아말렉 왕족 출신으로 보입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다인임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말렉 사람 하만을 마주하자, 잊었던 정체성을 되찾아갑니다. 유다인으로서 아말렉 왕족 하만에게 결코 절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말렉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오래된 원수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이 원수 관계는 약 1,000년 전 과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행렬은 아주 길었습니다. 먼 길을 가다 보니 노인, 아이, 병자 같은 약한 사람들이 뒤처져서 따라오고 있었겠지요. 그때 아말렉이 뒤에서 약한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모르드개는 유다인일 뿐만 아니라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도 아각 사람에게 절할 수 없었습니다. 2:5에서 모르드개가 베냐민 자손이라는 소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기스의 증손, 시므이의 손자, 야일의 아들이라는 설명이 붙지요. “베냐민 지파, 기스의 후손”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된 사울입니다. 사울은 기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고, 그들을 모두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말렉 왕 아각과 기름진 양과 소를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그 좋은 것들로 제사를 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사울의 왕위는 다윗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제 수백 년이 지나서, 사울 일족 모르드개는 아각 사람 하만과 대적합니다. 잊었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씩 회복합니다. 한평생 제국에 동화되어 살던 모르드개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자신이 유다인임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모르드개의 마음을 만져주신 것 외에는 이런 급격한 변화를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모르드개가 하만을 대적한 방식이 결코 지혜로웠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무모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만의 분노를 사서 유다인이 모두 죽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위기는 또다시 더 깊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모르드개가 충성하고 믿었던 제국이, 그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토록 동화되고자 했던 제국에 배신을 당한 것이지요.
그래서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은 장례를 치르듯이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며 통곡합니다. 금식하고 울며 부르짖지요. 본문 앞 장까지 페르시아 제국에는 잔치가 계속 열렸습니다. 유다인들도 똑같이 제국이 제공하는 잔치에 참여했겠지요. 하지만 죽음의 위기가 닥치자, 감춰져 있던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더 이상 잔치를 즐길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 말이지요.
하나님과 동떨어져 제국에 동화된 삶, 하나님이 아니라 제국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생각!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큰 문제였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처세술과 세상의 권력에 기대는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의 선조들도 똑같은 죄로 인해 멸망했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위기를 통해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너무도 매력적이고 은밀해서 자각하지 못하는 문제! 그 영적인 죽음을, 위기라는 충격요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에스더서에는 끝까지 “기도”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 상황이야말로 가장 처절하게 기도해야 할 상황일 텐데도, “기도”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이들의 울부짖음조차도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기도 같지 않은 기도, 어설프고 못난 기도도 하나님께서는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섭리하십니다.
[ 위기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섭리 ]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위기를 통해 섭리하시는 두 번째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위기에 처한 모르드개는 상복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 채, 대궐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각 지방의 유다인들도 상복을 입고 금식하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에스더는 매우 근심합니다. 사람을 보내서 모르드개가 상복을 벗고 일상복을 입도록 권했지만, 모르드개는 거부합니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에스더는 왕이 붙여준 내시 하닥을 통해 모르드개와 소통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 에스더가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모르드개의 모습도 볼 수 있지요.
7-8절에서 모르드개는 자신이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의 계략을 하닥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조서의 사본을 줘서 에스더에게 보이게 합니다. 또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간절히 구하다”라는 말은 “기도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모르드개는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에스더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왕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분명하게 기도하지 않았던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전히 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모르드개가 변화해 가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의 말에 에스더가 다시 답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에스더는 모르드개도 분명히 알고 있을 내용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 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 당시 왕들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왕이 먼저 불러야 왕을 만날 수 있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안 뜰로 가면 즉결 처형을 당했습니다. 대신, 먼저 왕을 찾아온 사람에게 왕이 금 규, 금 막대를 내밀면 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모르드개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에스더가 왕후이기 때문에 당연히 왕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에스더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에스더가 왕후가 된 지 5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의 사랑이 식어버렸습니다. 30일 동안 왕은 왕후를 찾지 않고, 다른 여자와 밤을 보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먼저 갔다가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하지만 모르드개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지금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유다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궁, 제국에서의 신분이 생명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모르드개 자신이 깨달은 문제를 에스더에게도 분명히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14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그분의 백성들이 자기 문제를 발견하도록 위기를 허락하시는 섭리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이들은 반드시 구원하시고, 돌이키지 않는 이들은 멸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말렉을 진멸하게 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을 다시금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는 않습니다. 같은 유다인인 에스더에게조차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에스더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그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할 것을 요구합니다. 14절 뒷부분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2장에서만 하더라도, 모르드개는 유다인임을 밝히면 에스더가 왕후가 되지 못할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왕후가 되어서도 유다인임을 밝히지 말라고 명령했지요. 더욱이 지금은 유다인임을 가장 밝히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때입니다. 왕에게 나아가기도 어려울뿐더러, 괜히 유다인임을 밝혔다가 에스더가 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가장 적절해 보이지 않는 이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다인으로서 행동하라고 처음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에스더의 변화입니다. 에스더는 또 다른 유명한 말로 답합니다. 16절입니다. “당신은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원래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에 일방적으로 순종하기만 했습니다. 수동적인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에스더는 비로소 왕후다운 모습을 갖추고, 유다인의 지도자와 같이 행동합니다. 도리어 모르드개에게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명령대로 다 행합니다.
그 명령은 조금 더 기도다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흩어져서 각자 슬퍼하고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게 하지요. 그냥 슬퍼하지 말고, 에스더를 위해서 금식하게 합니다. 그것도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않으며 금식하라고 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하나님”이나 “기도”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지만, 에스더를 위해 금식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에스더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그리 현명한 전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당시 미인의 기준은 꽤 포동포동하게 살이 붙고 기름기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밤낮 삼 일을 굶으면 몰골이 피폐해집니다. 안 그래도 30일 동안 왕이 부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식었는데, 에스더가 피폐해진 얼굴로 왕에게 나아간다면 실패할 확률이 더욱 높아지겠지요.
게다가 규례를 어기는 것은 왕이 매우 싫어하는 일입니다. 에스더 이전의 왕후 와스디도 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 폐위되었습니다. 악수(惡手)에 악수(惡手)를 더해서 위기를 돌파하려는 모습이지요. 그것도 오직 예뻐야 살 수 있는 황당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변화된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그 자신도 변화되었습니다. 처음에 에스더는 재를 뒤집어 쓴 모르드개의 소식을 듣고, 상복을 벗기고 일상복을 입힘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왕에게 나아가라는 모르드개의 제안을 듣고서는 실현 가능성이라는 기준만으로 문제를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에스더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섭리하시는 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말에는 가만히 왕궁에 있다가 유다인임을 들켜서 죽거나, 왕에게 나아갔다가 죽거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체념이 담겨있을 수도 있습니다. 힘찬 결단이라기보다는, 다소 맥빠진 혼잣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여 죽을 가능성이 높은 자리에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또한, 에스더는 지금 그토록 감추었던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왕궁에 살면서 유다인이 어떤 위기를 겪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불리한 이때, 위기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를 하나로 묶어 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위기를 통해 그분의 백성을 변화시키십니다. 먼저 모르드개를 변화시키셨고, 변화된 모르드개를 통해 에스더를 변화시키셨습니다.
[ 위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섭리 ]
하나님께서 위기를 통해 섭리하시는 세 번째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에스더가 결단하고 왕에게 나아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5:2을 보십시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33일 만에 본 아내가, 3일을 금식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매우 사랑스러”워 보이다니요! ...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3일 금식한 에스더의 미모를 유지시키신 섭리, 그런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러워 보이도록 왕의 눈을 만지신 섭리 말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에스더이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은 여전히 페르시아처럼 불의와 변덕과 위험으로 가득합니다. 불의한 제도, 변덕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위기 속으로 뛰어드셨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숨어서 섭리하셨습니다. 때로는 우연을 통해,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때로는 사람들의 악한 계획을 통해서도 섭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분명히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한1서 1:2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마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분명한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겪는 위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내린 잘못된 선택, 지혜롭지 못한 선택으로 위기를 겪습니다. 모르드개가 지혜롭게 하만을 대했다면 그와 유다인들은 위기를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30년 전,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모르드개와 에스더 가족이 수산에 남기보다, 스룹바벨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다면 어땠을까요? 100년 전, 선조들이 회개했다면 포로 생활 자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울 왕이 아각을 죽이고 아말렉을 진멸했다면,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왕족으로서 살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아니, 애초에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미 왕 노릇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잘못되었거나 어리석은 선택이 쌓여서, 오늘 우리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모두 진멸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진멸 당해야 할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과 그분 자신을 묶어 매셨습니다. 마치 에스더가 유다인들과 자기를 묶어 매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자기를 동일시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죽을 가능성이 높은 위기에 자신을 던졌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는 것이 확실한 십자가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에스더는 3일을 금식하고서도 왕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거절당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가운데 3일을 지내셨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하나님을 직접 부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목놓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셨지만,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초래한 모든 위기를 십자가에서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우리가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중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에 의한 의인의 죽음! 피조물의 죄로 인한 창조주의 죽음! 음란한 신부로 인한 순결한 신랑의 죽음! 세상 최악의 위기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 닥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위기 속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위기를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이라는 문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의 위기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내린 잘못된 결정, 지혜롭지 못한 결정 중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물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든 것”에는 우리와 다른 사람의 선택이 포함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위기는 힘겹고 버겁지만,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통해 우리 개인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울이 끝내지 못했던 아말렉과의 전쟁을, 사울 일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위기를 통해 끝내셨습니다. 이후 아각 사람이 진멸됩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보존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오던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의 전쟁”을, 십자가의 위기를 통해 끝내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백성,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며 전진합니다.
[ 결론 ]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하나님께서는 “위기에도 불구하고”라기보다는 “위기를 통해” 섭리하십니다. 먼저, 위기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드러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또한 위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 되도록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위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위기의 유익을 얻습니다.
이제 몇 가지를 우리 삶에 적용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감추어졌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로 나아갑시다. 학생 여러분, 열심히 공부했지만,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인 여러분, 업무의 성과를 내고 관계를 개선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자녀를 두신 여러분, 여러분이 쏟은 사랑이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위기를 통해 우리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때 자신이 정말 누구를 의지하며, 무엇에 소망을 두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위기 앞에 낙담하지 말고 다시금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설프고 못난 기도마저도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기도 같지도 않은 기도마저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둘째, 위기의 때에 서로를 권면합시다. 모르드개의 도전으로 에스더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개인 신앙에 갇히지 말고, 서로를 도전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해 갑시다. 때로 우리가 하는 말이 깔끔하지도 온전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체의 약간은 어설픈 언어와 생각과 표현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응답하도록 부르십니다. 지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전에 응답합시다.
셋째, 겸손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합시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도움, 섭리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 외모, 환경, 성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걸 얻을 수 있는 상황과 환경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섭리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응답합시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섭리를 이루시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위기에 빠진 교회와 자신을 묶어 매며, 하나님의 섭리의 통로가 됩시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의 위기를 짊어진 중보자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왕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신랑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만족과 안전과 사랑을 구합시다. 위기의 때마다 우리를 위해 위기 가운데 뛰어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어느샌가 그분을 따라 다른 누군가의 위험에도 기꺼이 뛰어드는 우리, 변화된 우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어떤 위기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사랑하며 다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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