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옛날에
군복무 시절이었습니다.
사나이로 대한민국에 태어나 기왕 한 번 가는 군대, 폼나게 갔다 오자 하는 마음으로 대학교 다닐 때 학군장교(R.O.T.C.)를 신청해 졸업 후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최후방에 배치되어 소위 때는 바닷가에서 회 떠 먹으며^^ 해안소초 소대장을 했고 중위 때는 사단신병교육대 교관을 했습니다.
해안 소초 근무는 3개월 단위로 중대 단위 근무교대를 했습니다.
최전방 지역의 경계근무와 같은 개념인데 3개월은 해안 소초로 투입되어 야간 경계근무를 하고 3개월은 내륙에 있는 예비대로 빠져나와 주간 교육 훈련을 하는 시스템이죠.
해안에서야 시간이 없지만 예비대로 나와 있는 3개월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휴식 기간이라 시간이 여유로웠습니다.
다른 소대장들이 퇴근 후 음주가무를 즐길 그 시기에 저는 뭘 했을까요.
네, 당연히 탁구를 치러 갔겠죠.^^
버스를 타고 조금 나가면 시내 탁구장에 갈 수 있었고 당직근무가 없는 날에는 거의 탁구장 죽돌이였습니다.ㅋ
자연스럽게 관장누님과도 친해졌고(혹시 상상하시는 그렇게 친한 거 아닙니다.ㅋ) 손님 뜸한 시간에는 둘이 연습파트너가 되어 공을 주고 받곤 했겠죠.
어느 정도 기간을 지속적으로 다니면서 관장누님과 연습하고 게임하다 보니 그 분의 게임 패턴이 자연스레 읽혀지더군요.
구력도 상당하고 스매쉬와 보스커트도 날카롭고 상당히 잘 치는 분이었습니다만 뜻밖에도 게임 패턴은 참 단순했습니다.
이런 코스로 이런 구질의 공이 가면 돌아오는 공은 늘 이랬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그 누님은 제 밥이 되었다는..
(표현이 좀 그래서 죄송합니다. 혹시 또 생각하시는 그런 내용 아닙니다.ㅋ)
둘이 치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핸디도 늘어나서 처음엔 서너 개로 시작했던 핸디가 나중엔 15개까지 드리게 되었습니다.
당근 21점 한 게임일 때 얘기입니다.
관장누님의 게임 운영 습관을 알고 나니 회전과 타이밍만 조금 신경쓰면 거의 모든 공을 받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일중호에 임파샬을 쓰던 시기였는데 제가 굳이 강하게 치지 않고 받아 넘기기만 해도 이미 파악한 단순한 게임 패턴 덕에 15개 핸디로도 제 승률이 높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 지역 고수 한 분이 오랜만에 구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제가 한 서너 점 이상 잡혀야 하는 실력의 고수였는데 관장누님과 먼저 게임하며 핸디 8개를 주시더군요.
박빙의 게임이 있은 후에 그분은 음료 한 잔 하고 쉬시고 제가 누님과 게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수분이 채점판을 만지며 누님께 묻습니다.
'핸디 줘?'
'아뇨, 제가 받아요.'
'아, 그래? 젊은 친구가 오목대(핌플러버^^) 잘 치나 보네. 몇 개? 세 개? 네 개?'
'아뇨.. 열 다섯 개..'
순간 얼음 된 그 분 표정.ㅋㅋ
내내 안 그러시다가 갑자기 공손히 제게 물어오시길
'선수세요?'
'아녜요, 관장님하고 자주 쳐서 그래요. 저 잘 못 쳐요.'
그렇게 15개 핸디를 주고 누님과 치른 게임에서 또 제가 이겼네요.ㅋ
그런 바로 다음에 그 고수분과 게임을 했습니다.
핸디 달라시는 걸 극구 손사래쳐 말려서 겨우 노핸디 게임을 하는데
이 분이 괜히 혼자 쫄아서ㅋ 실수연발.
저는 괜히 쉽게 이겼지요.
실력이 저보다 높은 분인 걸 저는 뻔히 알고 있는데도 저와 관장누님과의 높은 핸디 때문에 그 상관관계로 인해 과장된 추측이 작용하여^^ 저를 선수급 초고수로 오인한 데서 기인한 '괜히 몸 굳음 현상'이었나 봅니다.
중위 달고 신교대로 전출가기 전까지 저와 관장누님과 그 고수분과의 이상한 '핸디 꼬임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빠른 생일 때문에 친구 선후배 관계 꼬이는 거랑 비슷한가요.ㅋ
한 십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오픈 1부를 괜히 이긴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구장의 선출 관장님을 찾아 놀러온 손님이었는데 관장님과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본인은 백핸드 잘 치는 셰이크와는 참 어렵다고, 특히 백을 걸지 않고 앞에서 바로 때리는(백핸드 펀치) 스타일에는 쥐약이라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관장님이 옆에 앉아 있던 저를 가리키며
'우리 회원이신데 이 분이 딱 그래요. 백을 기가 막히게 때리시는데.. 한 게임 해보세요. 연습되고 좋죠.'
괜히 장난끼가 발동해 한 마디 덧붙이는 관장.
'나랑 맞쳐요.'
당시 그 관장님은 저를 7개 잡아주었습니다.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성사된 친선게임에서 저는 노핸디로 오픈 1부를 무참히 이겼습니다.
제가 백핸드 펀치를 칠 준비만 하면 상대가 바로 긴장해 굳어버리시니..ㅋ
더 재미있는 건 그 게임 후에 관장님이 아까 자기랑 맞친다는 건 뻥이었다고, 이 분 3부 쯤 치시니까 당신이 세 개 잡아주고 다시 해보라고 얘기한 후 한 번 더 하게 된 시합에서는 제가 핸디 세 개 받고도 무참하게 졌다는 사실입니다.ㅋㅋ
이런 경험들을 통해 얻은 생각.
실제 실력 외에 작용하는 정신적인 부분, 특히나 미리 갖는 선입견의 작용이 게임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나 봅니다.
선수들 사이에도 비슷한 작용이 분명 있겠지만 그리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아마츄어들 사이에서는 선입견이 꽤 크게 작용하는 것 같지 않은가요.^^
덧붙임: 저는 개인적으로 핸디 반대 입장입니다.
누구나 무핸디로 즐탁하는 게 제일 좋고
혹시 굳이 나누어야 한다면 비슷한 실력의 그룹을 지금 부수보다 훨씬 더 큰 덩어리로 4 개 정도로 나누어 운용하는 쪽이나 개인 레이팅을 적용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오늘도 옛날 일들 생각하며 재미있는
공룡
첫댓글 저랑 같은 해변대 나오셨나보네요^^ 탁구도 참 심리가 믾이 작용하는 운동 같습니다.
해변대.ㅎㅎ
바닷가 부대 해변대 맞죠.ㅋ
저도 해변대 나왔습니다..ㅋ
저도 말많고 탈많은 핸디 없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게요.
제가 시합을 절대 안 다니는 이유도 말 많은 부수와 핸디 때문입니다.^^
사실 핸디제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금이나 상품, 전적에 눈이 어두워 실력에 합당한 부수로 출전하지 않는 몇몇 몰지각한 하향 출전자들 탓이겠죠.
옛날에 시리즈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탁구를 잘 못치나봐요. ㅜㅜ 요즘은 연습탁구할 때보다 게임때 2~3알 줄어듭니다 (겉보기 등급으로).
마인드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게임에서는 최단 시간 내에 상대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상대의 장단점을 빨리 파악하여 그에 맞는 게임 운영을 할 수 있다면 실력 이상의 결과도 얻을 수 있겠죠.
발트너의 전성기 시절 최대 강점이 바로 상대 장단점의 파악과 그에 따른 변화무쌍한 전술 운용 능력이었듯이요.
그 덕에 초반에 밀리다가 막판 역전승을 참 많이 했었죠.
@공룡 조언 감사합니다. 이른바, ''탁구머리"를 써야하는군요. 상대의 장단점 파악 그리고 그에 따라 변화를 주는 것! 다음부터 이 점을 신경써봐야 겠습니다. ^^
@리누스 네. 탁구는 네트를 가운데 두고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 상대 파악과 상대에 따른 전술적 게임 운영이 가장 중요합니다.
배우고 익힌 자기 기술만 열심히 시전하려 애쓰면 뜻밖의 상대성 때문에 기술도 안 먹히고 게임이 전혀 풀리지 않을 때가 많죠.^^
그게 또 탁구의 특별한 묘미이기도 하구요.
@공룡 맞습니다. 느끼고는 있는데 막상 어떻게 상대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쓰고 자기 기술만 시전하려 애썼던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게임 경험이 좀 부족한것 같기도 하구요.
지금도 서로 맞치는 3명의 상대에게 한명에게는 2점 받고 비등비등하고, 나머지 두명은 3점을 받고도 한세트 따기 힘든 상황입니다. ㅜㅜ 분석이 필요할것 같네요.
@리누스 상대의 기술까지는 분석할 필요가 사실 크게 없고
실제로 게임을 하면서 뭐에서 실점하고 뭐에서 득점하는지 그 시스템을 파악해야 합니다.
실점이 나오는 시스템은 가급적 피하고 득점이 나오는 시스템으로 게임을 끌고 가셔야 좋겠죠.
아주 간단한 시스템의 예를 들면..
리시브를 길게 커트로 주면 상대가 무조건 걸고 들어와 내가 실점한다 하는 걸 깨달았다면 그 후로는 웬만한 리시브는 짧게 주거나 플릭하거나 날려주거나.. 그러다 잊을 만할 때 한 번 푹 길게 찍어 보내기도 하고.. 이런 식의 파악이 중요한 거죠.
상대가 잘 받지 못하는 듯한 서브가 있다면 자꾸 쓰지 말고 아껴뒀다가 마지막 승부처에서 써야 좋구요.
회전 많은 드라이브를 잘 받는 상대에겐 갑자기 회전 거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힘이나 회전 없는 공도 보내주고..
뭐 이런 전략들.. 할 수 있는 건 다양합니다.^^
@공룡 구체적인 예까지 설명해주시니 좀 감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게임 시에 이러한 사항을 고려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 후에 별 생각없이 시스템을 바꾸거나 했던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내가 무엇을 해보겠다'에 너무 집착했던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이기는 전략!"을 고려해서 게임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조언 감사합니다. ^^ (득점, 실점이 나오는 시스템 파악!!)
잼나게 읽었습니다 심리상태가 정말 큰 영향을 미치는 종목인거 같아요
재즈핑퐁님, 오랜만에 댓글로 만나네요.
이 정신없는 펜데믹 세상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탁구가 워낙 가벼운 공을 다루는 운동이라 그만큼 예민해서 그런가 봅니다.
참 심리적 영향을 많이 받죠.^^
@공룡 그래서 탁구가 어려운 운동인가 봅니다 ㅎㅎ
탁구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야, 탁구가 늘 다른 상대방과 겨루는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은 우둔한 일인입니다. 재미뿐만 아니라 아주 유익한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맞습니다.
탁구 초보자들이나 시간이 많이 지나도 게임 실력이 썩 늘지 않는 분들은 대개 자신의 기술, 자신의 게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봅니다.
탁구는 상대가 있는 운동인데 말이죠.
내가 오늘은 레슨 때 배운, 그리고 영상에서 본 멋진 양핸드 드라이브를 시전해야지~ 하는 종류의 마인드로는 절대 그 내용이 나올 수 없죠.ㅎㅎ
상대에게 맞추어 대응하는 게 가장 우선되는 중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