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 전쯤의 꿈이야기다.
나는 하늘 높이 솟은 하얀 설산을 마주보며 동굴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우주의 기운?이 전광석화 같이 가슴에 꽃혔고 순간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알게되었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지적인 이해차원의 앎이 아닌 그냥 존재를 통한 앎이었다.
너무도 강렬한 경험이었고 엄청난 희열이었다.
비록 꿈이었지만 지금도 그 순간의 기억은 생생하다.
스스로를 깨어났다고 하기도 그렇고 깨달았다고 하기도 민망하고 거북스럽다.
그냥 별다른 언어가 없어서 그렇게 표현할 뿐이다.
달라졌다는 표현이 더 좋다.
달라진 것은 예전처럼 생각이나 감정과 쉽게 동화되지 않고, '나'라는 자의식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관점도 나 중심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복합적으로 변했다.
불가의 핵심 가르침인 '중도'와 예수의 가르침인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마라'는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있음과 없음, 길고 짧음, 좋음과 나쁨, 정의와 불의, 선과악, 추함과 아름다움, 앎과 모름의 경계가 사라진것 같고 같이 공존한다.
또한 머리 속 생각의 세계에서 존재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됐다.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생각을 바라보는 내면의 또 다른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언듯언듯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 매순간을 '지금 여기'에서 존재로 사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알게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경이롭고 희열이었다.
1년전쯤 어느 영성 카페 모임에서 한 회원이 "실제로 사람의 내면에 '참나', '신성', '불성'이라 불리는것이 있는지?"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진솔하고 용감한 물음이었다.
이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아 내가 답변을 했다.
요약하면, "인간 내면에 신성, 궁극적 실재가 있으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 이다" 라는 내용과함께 "판단이나 추론을 하는 것은 마음(생각)의 영역인데 영성, 즉, 궁극적실재나 신성 등은 이 생각의 영역 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에고)의 영역을 넘는 것이 바로 '깨어남' 이고 궁극적실재나 신성을 접하는 관문이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 답변이 내가 '영성'에 대해 아는척을 하게된 최초의 계기였고, 이후 나의 아는척 병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아는 척'은 영성을 추구하는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자의 구도가 생겨 나기에 상당히 예민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
그래서 나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고 조심하지만, 내가 특별한 권위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승가집단 처럼 법통을 이어받을 일도 없다는 점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경험한 것을 누구에게나 알려주고 싶운 마음이 무엇보다 컸기에 가장 가까운 아내와 자식을 비롯한 가족과 친한 지인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에서 우연히 동굴에서 탈출한 사람이 햇빛이 찬란한 동굴 밖의 세상을 보고 다시 동굴로 들어가 그림자를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밖의 세상을 설명해 주는데 정확히 이런 욕구였을 것이라 이해한다.
그러나 동굴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동굴에서 비추는 그림자 세상이 진짜라며 오히려 동굴 밖으로 나가 동굴밖 세계를 설명하는 사람을 조롱하고, 밖으로 나가길 거부 했듯이 나 역시 가장 가까운 아내나 자녀들 혹은 친구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설명했지만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나의 경우 과거 신학을 배운 관계로 지인 중에 현직 목사들이 많이 있지만 소위 이러한 '깨달음',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성직자는 없었다.
신은 언제나 믿음과, 경배와 추종의 대상일 뿐, 신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천국에 대해 설명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로 가르치는 내용이 나온다.
농부가 씨를 뿌렸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쪼아먹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해가돋자 곧 말라서 죽어버렸다.
가시덤불에 떨어진씨는 가시덤불에 막혀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
나는 여전히 앎보다 모름이 더 많은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앎과 모름 등의 개념 너머에 있는 그 무엇, 내 안에 본래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험적 앎이야 말로 진짜 '앎'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비록, 내 이야기들이 뿌려지는 곳에 새들이 와 쪼아먹고, 태양에 말라죽고, 가시덤불에 막혀 죽더라도 당분간 나의 아는척 병은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첫댓글 작년 4월 쓴 글입니다.
제가 글을 올리는 곳은 이 카페가 유일합니다.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칫 '아는척', '잘난철', 으로 보일수 있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재작년 말 이 카페를 떠났던 것도 스스로 자중하고자 했기때문이었습니다.
심도학사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글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누가 되지 않는다면 별 볼일 없는 글이지만 종종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