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태식 동기의 글은 2027년에 8순을 맞는 대열동기생들의 인생회고집 편집을 위한 사전준비자료로서, 지난 9월8일 예문형식으로 올린 편집장 김명수의 첫번째 회고글 '구경꾼 내인생, 군문에서도' 에 이은 두번째입니다.
다른 동기생들의 줄이은 글이 답지하길 기대합니다. <대열역사자료편집장 김명수 올림>
대열 8순 인생회고 글 2-화개산에서 불암산으로 [한태식]
본인(한태식)의 모교인 강화군 교동면 교동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2006년)을 맞이하여 발간하는 기념문집에 투고한 글의 원고입니다. 이 글을 썻던 2006년과 비교하면 오늘날의 교동은 또다른 세상이 되어있다.
화개산에서 불암산으로
한 태 식 (47회 졸업생)
교동초등학교의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소식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화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모교의 아늑한 교정이었다. 그곳에서 마음껏 뛰놀던 넓은 운동장, 사랑과 꿈을 심어주시던 인자하신 선생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간직한 친구들의 해맑은 표정이 가득하던 교실. 이 모든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있음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모교의 소중함과 고향땅 교동의 포근함을 되새겨 본다. 교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경기도 서해안 아늑한 곳에 …….
그 때는 6.25사변으로 인하여 황해도 지역의 많은 피난민들이 교동에 머물렀던 시절이라서 동급생들도 많았다. 5학년 시절에는 4개 반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한 반이 60명 이상이었으니, 그 시절의 한 학년 학생 수는 100명 내외밖에 안 되는 현재의 전교생 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개중에는 동급생보다 나이가 네다섯 살이나 많은 형님 같은 친구들도 있었고, 누님 같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니 그 시절의 학교 분위기는 요즈음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추억 중에서 제일 생생한 것은 날씨 좋은 봄, 가을에 소풍갔던 일이다. 소풍 전날에는 맛있는 도시락과 보물찾기, 장기자랑 등을 기대하며 잠을 설치곤 했다. 소풍 장소로는 화개산이 단골이었다. 남쪽 기슭의 향교와 화개사, 정상 북쪽의 약수터는 가보지 않은 동문이 없을 것이다.
그 때의 화개산은 왜 그리도 크고 높아 보였을까? 고학년이 되어 바다 건너 보문사, 전등사로 소풍을 떠날 때는 뱃전에 서서 멀어져 가는 화개산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난다는 것을 실감하였고, 갔다가 돌아올 때도 화개산이 멀리 보이면 집에 다 왔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화개산은 교동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추석 연휴 기간에 모교를 방문하였다. 후배 재학생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만 질적으로는 어느 선진국의 초등학교 못지않은 좋은 조건을 갖춘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교실과 멋있게 정비된 운동장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고, 통학 버스로 등·하교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등잔불 밑에서 공부를 하고 화개산 허리를 따라 십리 길이나 걸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시절에는 이러한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더구나 최신형 컴퓨터와 인터넷, 영어 학습이 가능한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갖춘 전자도서관인 <늘새롬관>, 야외학습과 자연학습 공간인 동시에 휴식 공간이기도 한 <해오름동산> 앞에서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오직 자녀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던 부모님과,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던 훌륭하신 선생님 덕택으로 많은 동창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향학열에 불타서 교동을 떠난 유학생들은 주로 인천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월선포를 통해 카페리로 바로 육로로 나가지만, 그 때는 남산포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덟 시간을 가야 인천항에 닿았고 다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이상은 가야 서울이었다.
필자도 교동 유학생 중 하나가 되어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나에게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회갑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도 후배를 양성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는 서울 동쪽 끝 불암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화개산을 바라보며 아늑함을 느끼고 꿈을 키웠던 것처럼, 필자는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불암산을 바라보고 향수를 달래면서 미래를 설계하였다. 교동의 화개산 품에 살면서 부모님과 선생님이 나를 키우셨던 것처럼, 이곳 불암산 품에 살면서 나도 내 자식을 키웠다. 화개산을 떠난 나의 삶은 불암산으로 이어져 왔다. 화개산에서 불암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