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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한-영 정상회담
1996년 ---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
20세기 마지막 지구축제 96하계 올림픽대회가 1996년 7월 20일 오전 9시30분 미국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식을 갖고 16일간의 열전에 들어갔다. 인종 종교 국경을 초월한 온 인류가 한자리에 모인 제26회 하계올림픽대회 개막식은 '지상최대의 쇼'로서 올림픽 최대 하이라이트 '영웅들을 부른다'는 주제로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한국 선수단은 알파벳순에 따라 케냐에 이어 오전 11시10분쯤 남자배구의 기수인 최천식을 앞세우고 96번째로 입장했다.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유도 양궁 배드민턴 레슬링 등에 금 7개 은 15개 동 5개를 획득해 우크라이나(금 9개)에 이어 종합 10위를 차지했다. 1996년 8월 5일 주경기장서 폐막식을 끝으로 올림픽 창설 1백년 째에 거행된 애틀랜타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chosun.com-인용)
1994년 ---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폴 델보(Paul Delvaux, 1897~1994) 사망
벨기에 화가. 리에주 근방 안테이트 출생. 처음에는 건축을 지망하였으나, 그림에 뜻을 두고 브뤼셀왕립미술학교에서 고전회화를 공부하였다. 벨기에의 표현주의, 이탈리아 형이상회화의 G. 키리코, R. 마그리트 등의 영향을 받았는데 1937년을 전후로 나부(裸婦)와 반가공적인 건축 또는 도시의 결합이라는 앵그르풍의 정적에 찬 고전주의적 구도의 독특한 양식을 확립하였다.
고대 폐허 등의 건물은 나부상과 마찬가지로 그의 내면적인 꿈을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신비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 못박혀 있는 듯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렸다. 50년대에 모교의 미술교수, 65년에 교장이 되고, 79년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92년 발행-델보의 작품 'Le Rendezvous d'Ephese', detail)
1978년 --- 고리 원전 1호기 준공-국내 첫 원자력발전소
국내 첫 원자력발전소인 고리원자력발전 1호기가 7년 7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978년 7월 20일 준공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력발전소 보유국이 됐다.
당시 원자력 1호기의 시설용량은 58만7천kw로 우리나라 전체 발전용량 6백59만kw의 9%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외자 8백40억원 등 총 1천5백60억원의 공사비가 든 고리원전 1호기는 발전 시설용량 58만7천kw의 가압경수로형으로서 당시 국내 기술이 전무해 미국의 웰코사가 전반적인 건설책임을 지고 원자로 설비와 연료공급을 맡았고 영국에 제너럴일렉트릭사가 터빈 발전기 공급과 토건공사의 감독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현대와 동아건설이 원자로와 터빈 공사에 하도급업체로 참가했다.
세계각국이 급증하는 전력의 공급선을 공해가 비교적 적은 핵에너지에서 찾기 시작한 것은 고리원전 1호기 준공일로부터 불과 20여년전의 일이었다. 1956년 9월, 영국의 칼더홀 원자력발전소가 세계최초의 상업발전을 시작한 이래 각국은 다투어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에너지자원이 부족하기만 했던 우리나라도 새로운 에너지원 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962년 원자력발전소 건설구상을 하기 시작, 1971년 고리원전 1호기를 착공, 7년 7개월 만인 1978년 오늘 그동안의 온갖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준공됐다. (chosun.com-인용)
(1962년 3월 30일 발행된 '원자로 가동 기념' 우표를 참고로 올려보았다.)
1969년 --- 미국 아폴로11호 우주선, 인류최초로 달에 착륙
미국 아폴로11호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1969년 7월 20일 바위로 뒤덮인 달의 '고요한 바다' 표면에 인류최초로 발을 내디뎠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1호 발사와 함께 시작된 미소간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미국이 처음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순간이었다. 소련은 그동안 첫 유인우주선 발사, 첫 지구궤도 선회, 첫 우주유영 등에서 미국을 앞서 나갔다.
아폴로11호 착륙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달 착륙선 이글은 암스트롱과 올드린을 태워 모선 콜롬비아를 떠났고, 함께 출발한 콜린스는 달 주위를 110km 상공에서 계속 돌았다. 마침내 달 착륙선의 해치가 열렸고 인류최초로 달에 내린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의 작은 발자욱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도약"이라고 감회를 표현했다. 18분 늦게 달에 착륙한 올드린은 첫 발을 내디면서 "아름답군, 아름다워, 멋진 황량함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진의 주인공은 올드린이 차지했다. 암스트롱만이 카메라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시간 31분을 달에 체류하며 예정대로 임무를 모두 마친 이들은 달을 떠나 모선인 콜롬비아호와 도킹하고 지구로 귀환해 하와이 남서쪽 1500km에 위치한 태평양에 무사히 착륙했다.
17일 발사된 이래 119시간 18분이 소요됐고 120만km의 우주여행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비행사들을 직접 환영하기 위해 항공모함 호네트에 타고 있었으나 유리창 너머에서만 이들을 대면할 수 있었다. 비행사들은 엄격한 검역으로 3주간 격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검역이 끝난 후 뉴욕과 시카고에서는 국가적인 영웅을 환영하는데 어울리는 퍼레이드를 벌였고 전 미국은 열광했다. 이후 미국은 아폴로 11호를 시작으로 1972년 12월 17호까지 다섯번 달착륙에 성공했다. (chosun.com-인용)
1945년 ---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사망
프랑스의 시인이며 비평가, 사상가였던 폴 발레리가 1945년 7월 20일 74세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국장을 거쳐 고향 해변의 묘지에 안장됐다.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세트에서 태어난 발레리는 그의 대표적 평론집 '바리에테'에서 전생애에 걸친 그의 다양한 관심을 쏟아냈다.
1919년 이래 20여년간에 발표된 주요 논문, 연설, 강연, 수상 등을 다섯 권, 1천여 페이지에 수록한 이 책은 '다양성'이라는 뜻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 철학 미학 정치평론 시론 교육론 회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담고 있다. 탁월하고 명쾌한 지혜와 비평정신이 돋보이며 프랑스 산문 문학의 한 정점을 이룬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2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 뒤 수많은 문학ㆍ학술 단체의 대표를 지냈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시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발레리는 평론가나 사상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 어려서 법학자의 꿈을 간직했던 발레리가 첫 시를 쓴 것은 1888년이다. 주로 상징주의 영향을 받은 그의 시는 북유럽인과는 다른 지중해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지중해 정신이란 모호하고 신비하고 격정적인 정신에 비하여 명쾌하고 지적이며 정서적인 정신을 의미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시 '젊은 파르크'는 19세기 프랑스에 개화한 상징시의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레리는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도구로 시를 상정했다. 그에게 시란 자기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도구였고 그 과정을 엄격하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이 시였다. 발레리는 1888년∼1891년에 걸쳐 많은 시를 썼고, 그 중 몇편은 상징파를 표방하는 잡지에 발표해 호평을 받았지만, 예술적 좌절감과 짝사랑에서 오는 절망감 때문에 1892년에는 감정에 몰두하기를 거부하고 갖고 있던 책을 거의 다 처분해버렸다. 1894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몇시간 동안 과학적 방법론과 의식 및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묵상에 잠겼으며, 자신의 단상과 잠언들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유명한 '노트'로 출판됐다. (chosun.com-인용)
1944년 --- 나치 제국 총통 히틀러(Adolf Hitler) 암살미수사건 발생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
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保守帝政派)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1937년 ---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라디오 전신체계의 발명가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 사망
볼로냐 출생.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리보르노 공과대학을 다녔다. 1894년 H.R.헤르츠가 사망하자 헤르츠파(波)의 응용에 착안하여 아버지 집에서 무선전신(無線電信) 실험을 시작하였으며, 1896년 무선전신에 관한 영국 특허를 취득하여 런던 체신청에서 최초의 공개실험에 성공하였다.
1897년 런던 마르코니 무선전신사(社)를 창립하고, 도버해협에서 영국~프랑스 간의 통신을 실현시켰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송수신은 1901년 12월 12일 콘월주(州) 폴듀와 캐나다 뉴펀들랜드주 세인트 존스 사이에서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무선전신은 해저(海底) 전신사업계로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으나, 대선박(對船舶) 또는 선박 대 선박 통신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 외에도 1901년 단일 안테나에 의한 동조식(同調式) 및 다중전신동조(多重電信同調) 방식, 1902년 자기검파기(磁氣檢波器), 1905년 수평지향성 안테나 등을 발명하였다. 그 후 그의 회사에 J.A.플레밍을 비롯하여 많은 과학자들을 고문으로 맞아들여 통신거리의 연장, 동조(同調)의 개선 및 공전(空電)·혼신(混信)의 제거에 주력하였다. 1909년 K.F.브라운과 공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평화회의의 이탈리아 전권대표(全權代表)가 되었다.
1932년 --- 비디오-퍼포먼스 예술가 백남준(白南準, 1932 ) 출생
서울 출생.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음악학교·뮌헨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하였다.
J. 케이지·K.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아 M. 커닝햄 등과 전위음악 활동을 했다.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존 케이지예찬;테이프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연주하였고, 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등 관객에 대한 행위를 무대 밖으로까지 넓혔다.
63년 비디오전시회로서는 최초인 뮤직일렉트로닉텔레비전전시회를 가졌다. 64년 뉴욕에서 열린 제 2 회 뉴욕전위음악제에서 C. 무어맨과 함께 《로봇 오페라》를 공연하였고, 67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공연하다가 외설죄로 연행되기도 하였다.
69년 S. 아베와 함께 비디오신시사이저를 개발하고 미국·유럽에서 비디오아트전시회를 열었다. 84년 파리와 뉴욕을 통신위성으로 연결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기획, 지휘하였으며, 86년 《바이바이 키플링》이 한국·미국·일본에서 텔레비전을 통하여 동시에 중계되기도 하였다.
92년 서울에서 춤의 해 퍼포먼스 공연, 비디오예술 30년 회고전, 99년 양평 바탕골 예술관에서 설치미술전,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박물관에서 40년 회고전을 가졌다. 뉴욕시장상·독일 윌리그로상·미아티상·호암상·일본 후쿠오카 문화상·독일 괴테메달·베니스비엔날레대상·금간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 발행-백남준의 작품 'Video Sculpture, Beuys/Bois')
1919년 --- 뉴질랜드의 등반가, 남극탐험가 힐러리(Sir Edmund Hillary, 1919 ) 출생
오클랜드 출생. 뉴질랜드 알프스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1951년 뉴질랜드의 가르왈 원정대에 참가, 처음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접한 이래로 1952년에 초오유산 원정에 참가하였다. 1953년에는 영국의 에베레스트산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5월 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산을 첫 등정하였다.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54년에는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이 되었고, 1957∼1958년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1960∼1966년 뉴질랜드 ·미국 ·영국의 합동 히말라야 원정대 및 1967년 남극 히셀봉 원정대를 지휘하였다. 주요저서에 《대모험 High Adventure》(1955)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No Lautitude for Error》(1961) 《High in the Thin Cold Air》(1962, D.도익과 공동저술) 등이 있다.
1895년 --- 헝가리의 화가, 사진작가, 미술교사 모홀리 나지(László
Moholy-Nagy, 1895~1946) 출생
헝가리 태생의 미국 화가·조각가·디자이너. 바츠바로드 출생. 모호이노디, 또는 독일식 발음으로 모홀리나기라고도 한다. 부다페스트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으나 회화로 전향하였다. 22년 W. 그로피우스의 추천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수가 되어 28년 바우하우스가 폐쇄될 때까지 추상회화·조각·건축·사진 등 다방면에 걸쳐 창조활동과 지도를 하였고 《회화·사진·영화(1925)》 《재료에서 건축으로(1929)》를 <바우하우스총서>로 간행하였다. 바우하우스를 그만둔 뒤에는 베를린·암스테르담·런던 등지에서 무대미술·포스터·영화 등의 창작활동을 하였고 3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38년에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시카고에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하고 디자인·디스플레이·사진을 비롯하여 키네틱 아트의 분야에서 다채로운 업적을 쌓았다. 저서에 《새로운 시각(1946)》 등이 있다.
(1983년 발행-모홀리 나기의 작품 'Light Space Modulator, 1930')
1893년 --- 그리스의 왕 알렉산드로스(Aléxandros, 1893~1920) 출생
콘스탄티누스 왕(1913~17, 1920~22 재위)과 소피아 왕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왕이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측 압력으로 퇴위하고 그에 따라 그리스가 연합국측에 가담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시점에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올랐다(1917. 6. 12). 알렉산드로스의 즉위 직후 엘레우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그리스 총리가 되어 알렉산드로스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베니젤로스는 참전을 결정했으며 연이은 평화협상에서 성공적인 외교를 펼쳤고 터키와 불가리아로부터 이즈미르 지역과 트라케 동서지역을 얻어냈다(1919 뇌이 조약, 1920 세브르 조약). 알렉산드로스는 아나톨리아 지역으로의 팽창계획을 제시했다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애완용 원숭이에게 물려 패혈증으로 죽었다. ...
1890년 ---이탈리아의 화가, 동판화가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 출생
볼로냐 출생. 볼로냐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미래파운동에 동조하여 1914년에는 그들의 전람회에 출품하고, 1918~1920년에는 키리코, C.카라 등과 사귀면서 형이상파에 몸담게 되었으나 결코 그러한 예술운동에 적극성을 띠지 못하고 나름대로의 창작에 전념하였다.
풍경화 분야에서는 세잔과 코로의 영향을 받았으나 정물화에서는 조토나 초기 르네상스의 조형성을 바탕으로 형상을 단순화한 윤곽으로 처리하고, 흰색 ·회색 ·갈색 등 주로 찬 느낌을 주는 빛깔을 구사함으로써 지적이며 명상적인 회화세계를 조성해 나갔다.
1930~1950년에는 볼로냐미술학교의 교장을 지내고, 1948년에는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동판화와 수채화도 다수 남겼다.
(1990년 발행-모란디의 동판화 작품 'Still Life')
1890년 --- 그리스의 왕 게오르기오스 2세(Georgios II, 1890~1947) 출생
게오르기오스 1세의 손자로, 1917년 테살로니키 정부(1916년 수립)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이 최후통첩으로 압박하여 둘째아들 알렉산드로스(재위 1917∼1920)에게 양위한 부왕 콘스탄티노스(재위 1913∼1917, 1920~1922)와 함께 그리스를 떠난 뒤, 1922년 부왕이 퇴위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왕위에서 물러났으며, 1924년 그리스에 공화제(共和制)가 선포되었다. 그 뒤 왕정이 복고(復古)되어 복위하였으나, 1941년 J.메탁사스의 압력을 받아 영국에 망명한 뒤, 1946년 국민투표에 따라 귀국하였다. 그가 죽은 뒤 왕위는 동생 파울로스 1세(재위 1947∼1964)에게 계승되었다.
1873년 --- 브라질 항공기 산업의 선구자 산투스 두몬트(Alberto Santos-Dumont, 1873~1932) 출생
1909년 현대 경비행기의 전신인 '데뭐젤' 또는 '그래스호퍼' 단엽기를 생산했다.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항공비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1898년에 기구(氣球)를 만들었고, 이때 비행선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많은 실패를 거듭한 뒤, 1901년 생클루에서 에펠탑까지 주어진 시간 내에 최초로 왕복비행하여 독일상과 브라질 정부의 상을 받았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직후에 그는 동력비행기로 관심을 돌렸다. 수직-프로펠러 모형으로 실험한 뒤, 1906년 상자연(상자 모양의 연)의 비행원리를 이용한 기계장치인 '14-비스(bis)'를 제작했고, 10월에는 유럽에서 최초로 공인된 동력비행을 하여 '독일-대집사'(DeutschArchdeacon) 상을 받았다. ...
1864년 ---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의 시인 칼펠트(Erik Axel Karlfeldt, 1864~1931) 출생
폴케르나 출생. 향토중심주의(鄕土中心主義:regionalism) 신낭만파 시인으로서 다라나 지방의 사람과 평생 동안 자연을 노래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보조교사 등을 하면서 12년간이나 대학에 적을 둔 끝에 웁살라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아 졸업하였다. 그 후 1900년에 왕립도서관 사서(司書)가 되었고, 3년 후에는 농업협회의 사서직을 맡았으며, 한편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처녀작 《황무지와 사랑의 노래 Vildmarks och K
rleks visor》(1895)에 이어 발표한 《프리돌린의 노래 Fridolins visor》(1898) 《프리돌린의 낙원 Fridolins lustg
rd》(1901)은 그의 명성을 굳혀 준작품들이었다. 이 시들은 ‘다라나의 벽화시(壁畵詩)’로도 알려졌다. 1904년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912년에는 상임 이사에 임명되었다. 시집에 《플로라와 포모나 Flora och Pomona》(1906) 《플로라와 벨로나 Flora och Bellona》(1918) 《가을의 뿔피리 H
sthorn》(1927) 등이 있다. 생전에 그가 수상(受賞)을 사양했던 노벨문학상이 죽은 직후에 추증되었다.
1847년 --- 독일의 인상파 화가, 판화가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 1847~1935) 출생
베를린 출생. 바이마르미술학교에 입학하여 회화를 공부하고, 1873년 파리에 건너가 J.F. 밀레·J.B.C. 코로 등을 사귀었다. 75년 밀레가 죽은 후, 네덜란드에서 J. 이스라엘스의 화풍을 배웠으나, 다시 파리로 돌아와 E. 마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99년 베를린에서 반(反)아카데믹한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분리파>를 창설하여, 독일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인물·풍경·사회생활 등에서 소재를 찾았고, 개성이 부족하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으나, 반아카데미즘의 운동은 많은 전위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뒤의 표현파 발생에 큰 힘이 되었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획득한 후로는 화단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표작으로 《거위털을 뜯는 여자들(1872)》 《구둣방》 《염소를 데리고 있는 여자》 등이 있다.
(1972년 발행-리버만의 자화상, 1978년 발행-그의 작품 'Horseman on Shore')
1656년 ---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조각가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1656~1723) 출생
그라츠 출생.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조각에 뜻을 가졌다가 1682∼1685년에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배웠고, 나중에 빈 왕실의 건축가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후기 바로크 건축을 도입하여 프로이센의 A.슐뤼터와 함께 독일 후기 바로크 건축의 초석을 구축하였다. 그 건축은 장대한 공간구성이 특색이었는데, 다음 세대의 J.L.von 힐데브란트와 같은 유려한 곡선미는 볼 수 없다. 칼 보로모이스교회·궁정도서관이 대표작이다.
1592년 --- 스웨덴의 장교이며 뉴스웨덴 식민지의 총독 프린츠(Johann Björnsson Printz, 1592~1663) 출생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스웨덴에서 초기 교육을 받은 후 1618년 고향을 떠나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 약 1620년경 군에 입대해 30년전쟁 때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대공,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공작,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1625년 스웨덴 육군에 들어가, 13년 후에 중령으로 승진했다. 1639년 작센군에게 켐니츠 시(市)를 내주는 실책을 범했으나 스웨덴 군법회의에서 사면받았다.
1642년 4월 뉴스웨덴 식민지의 총독에 임명되어 이듬해 2월 2척의 선박을 이끌고 크리스티나 요새(지금의 델라웨어 주 윌밍턴 시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바렌스킬에 엘브스보리 요새의 건축을 명령하고 뉴고텐보리(티니키움 섬)에 자신의 거대한 관저를 지었다. ...
1304년 ---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 출생
토스카나주 아레초 출생. 아버지 페트라코로는 피렌체의 서기였으나, 귀족옹호파인 흑당(黑黨)으로부터 추방당했으므로 페트라르카는 망명지에서 태어났다. 1311년 피사로 이사하였으며, 그 후 아비뇽으로 갔다. 몽펠리에 및 볼로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아비뇽으로 돌아가 교황청에서 직업을 얻었다. 여기서 시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연애 경험이었다. 1327년 성키아라 교회에서 라우라(Laura:?∼1348)라는 여성을 만나 연애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녀의 모습을 노래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방대한 장서를 탐독함으로써 교양을 쌓았다.
30세를 넘길 무렵 그에게 예술적 성숙기가 찾아와 1337년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 Africa》의 집필을 시작했으나, 같은 해 로마의 여행에서 자극받은 고대에 대한 애착이 성숙해졌다. 현실 사회에 대한 혐오에서 이상으로 하는 고대의 연구였다. 여기서 이 시인의 인문주의의 밑뿌리를 받견할 수 있다. G.보카치오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였다. 1341년 로마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의 영예를 안았다. 이듬해 프로방스에서 그의 사생아가 태어나 주교(主敎)였던 그의 동생 게랄도의 개입으로 그에게 정신적 위기가 찾아왔다. 이때에 성아우구스티누스와 대화형식으로 자기의 고민을 고백한 라틴어 작품 《나의 비밀 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1342∼1343)을 집필하였다.
1347년 로마에서 일어난 콜라 디 리엔치(Cola di Rienzi)의 반귀족정치의 혁명을 지지하였으나 그 혁명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듬해 파르마 체재 중 라우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지상(地上)의 것은 덧없음을 호소하는 새로운 사건이었다. 만년에 그는 아르쿠아에 은퇴하여 단테의 《신곡(神曲)》을 모방한 이탈리아어 작품 《승리》를 집필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당시 속어였던 이탈리아어 작품을 경시했던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1342년경부터 집필한 이탈리아어로 된 서정시 《칸초니에레 Canzoniere》이다. 지상의 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전면적 헌신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그의 고민에 찬 의문이 발생한다. 그의 경우 지상의 것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생전과 사후의 라우라로 가득 채워진 이 서정시집은 인간적인 것, 성스러운 것의 투쟁의 증거로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미녀 찬양과 쪼아 다듬은 시풍은 소네트의 한 극치로서, 후년 ‘페트라르카 시풍(petrarchismo)’이란 이름으로 서유럽 각국의 시인의 규범으로 숭앙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