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자유파'들이었다. 라인하르트 2세 이전까지 로엔그람 왕조에서는 점진적으로 민주주의 사상이 전파되고 자유파의 세력이 넓어져갔지만 아직까지 그 세력은 제국 내에서 미미하였다. 전제선전수호국이 세워진 후 자체 추정집계에 따르면 자유파의 숫자는 수억명 규모였다. 규모만 따지고 보면 자유파의 수가 어마어마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었다.
하나는 이 집계의 의도였다. 전제선전수호국은 전제정치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수호할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민중들은 조상에게서 들은 사회질서유지국의 악몽을 떠올리며 불만을 가졌고 이 때문에 전제선전수호국은 자신들의 존립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유파의 규모였다. 그들은 이들의 규모를 실제보다 과장하여 그런 만큼 자신들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하려던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설사 그 숫자가 맞더라도 자유파를 칭하는 이들의 절대다수는 온건파 성향이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점진적으로 제국의 민주화를 추구했으며 이는 수십년간 이어진 제국의 선정 속에서 제국의 통치를 당연하게, 그렇지 않더라도 만족스럽게 여기는 대다수의 민중들의 민심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민주주의뿐 아니라 공화주의도 외치는 이들도 있었고 대다수의 자유파들도 민주주의 뿐 아니라 공화주의에도 호의적이었지만 공화주의는 단지 군주제의 대안 중 하나로 생각할 뿐이지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여기는 이는 얼마 없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맞더라도 폭증하고 있는 제국 인구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 수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아무리 자유파가 많아지더라도 그들이 전체 제국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그들을 흔들기에는 제국 인구 자체가 너무나도 많아서 별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언론, 교육, 학계 등에서의 헤게모니조차 전제정치를 옹호하는 쪽이 쥐고 있었다.
따라서 전제선전수호국의 통계는 시리우스 위협론처럼 엉터리였다. 황제와 전제선전수호국은 시리우스를 가상의 적으로 삼은 지구처럼 자유파를 가상의 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가상의 적이 된 시리우스에 식민지성들이 붙었듯 자유파에도 민중들이 붙으며 그 규모가 급속도로 커졌다.
원래 민중들은 민주주의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먹고 살만하고 말을 할 자유도 어느정도 주어져 있으니 교육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배워도 당장에 그것을 추구해야 할 가치도 안 느껴지고 또한 수십년 제국의 선정 속에서 그것이 당연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은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알겠지만 제국의 선정이 있으니 우리에게는 필요없다/당장에는 필요하지 않다. 식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2세는 실책을 저질렀다. 굳이 전제정치를 추구하지 않아도 자신들이야말로 고귀한 인간이라고 믿으며 민중 앞에서 행세하지만 자기네들끼리 피곤한 암투를 거듭해야 했던 문벌귀족들은 물론 마치 신적인 존재로서 군림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목숨을 건 궁중음모에 치이고 겨우겨우 오르더라도 평균 20년도 못해먹으며 오르더라도 궁중음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골덴바움 왕조의 황제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아주 편하게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지만 그는 그럴만한 능력이 됨에도 제 딴에는 결코 나쁜 의도로 절대권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으나 통찰과 고찰이 부족한 관계로 민중들의 신망을 잃고 그만큼의 신망이 자유파에 몰렸다. 민중들은 더이상 황제의 선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이제까지의 황제의 절대권력에 대해서까지 고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대안이 민주주의라고 여겨 이전부터 민주주의를 외쳐오던 자유파에게 대거 합류하였다.
그리고 재위 7년째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제는 자유파의 기세는 위협이 될만큼 성장했다. 과거 황제는 자신의 전제정치의 정당성을 위해, 전제선전수호국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위해 자유파를 과장하고 또한 자신들의 행보를 걸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신들을 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한번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자각한 민중들은 거리로 나와 반대시위를 벌였다.
라인하르트 2세는 1인독재를 추구하기 전에 생각해보아야 했었다. 왜 그렇게까지 자신들의 선조 세대가 절대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것을 경계했는지, 또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로엔그람 왕조는 민주정을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로엔그람 왕조가 골덴바움 왕조처럼 폭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제군주제 하에서의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결국에는 폭주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순 없었지만 그 폭주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사람들을 양산하는데 성공했고 또 하나 더 있었다.
만일 골덴바움 왕조였다면 이러한 반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개버렸을 것이다. 1억이든 10억이든 설사 100억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위해서가면 거리낌없이 뭉개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로엔그람 왕조에서는 달랐다. 이 시대에는 자신의 권력욕으로 40억을 도살한 루돌프, 같잖은 이유로 200만 베스터란트를 뭉개버린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름은 욕설처럼 통용되는 시대, 아무도 제2의 루돌프, 제2의 브라운슈바이크의 오명을 쓰고싶지 않아했다.
거기다가 라인하르트 2세도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권력에 미친 사람은 아니었고 인간성도 당연히 정상이었기에 민중과 타협하자는 온건파의 주장을 반려하면서도 유혈진압을 부르짖는 최고 강경파의 주장은 번번이 기각하며 민중들의 시위와 이에 대한 진압의 와중에 어느쪽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는 막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피해갈 수만은 없었다. 특히 시위측이나 진압측이나 서로간에 충돌은 자제하며 서로간에도 극단으로 치닫는 일을 만들지 않고자 했으나 진압과정에서 완전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고 양 진영의 과격파들끼리의 충돌에서는 그 규모가 더했으며 특히 전제선전수호국의 만행에서 사상작 많이 나와 몇년동안 계속해서 짜잘한 규모의 감정이 쌓여만 갔다가 결국 '1억인 시위'에서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자유파는 제국 전역의 시민 1억명이 궐기하는 것을 목표로 대규모 시위를 기획했다. 제국정부는 당연히 불법임을 선언하고 막으려고 했지만 자유파는 시위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6월 1일, 계획한 1억명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일으켰다. 문제는 이렇게 규모가 커지고 전국에서 일어나다 보니 양측은 과격파 통제가 어려웠다. 어느 곳에서 과격파들끼리 충돌하더라도 양측에서는 그것을 막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그날에만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이것은 전초에 불과했다.
다다음 날인 6월 3일, 전국적으로 충격적인 비보가 퍼졌다. 전날인 6월 2일, 오스터란트에서 벌어진 시위헤서 대규모 사상자가 벌어졌다는 것으로 문제라면 이전까지의 사상자는 충돌 과정에서 생길 수도 있는 있는 선에서 그쳤지 계획적인 유혈사태는 없었다. 그러나 오스터란트에서는 달랐다.
이는 오스터란트의 최고 책임자인 블라디미르 주가슈빌리가 최고 강경파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그간은 워낙 시골행성이라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의 기류가 강해서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로는 블라디미르가 불온의 싹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며 아무것도 안 함에도 불구하고 억압적으로 나와 답답함을 느끼던 중이었는데 이 때 하이네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학생들에 의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대표로 하여 억압적인 태도를 그만두어 줄 것을 청하기 위해 6월 1일에 찾아갔으나 블라디미르는 그들을 모욕하며 쫓아냈고 분개한 그들은 다음 날 사람들을 모아 시위를 했다.
하지만 시위를 했다고는 해도 억눌린 감정이 있었다고 해도 시위대는 다른 시위대들처럼 선을 지켰다. 애초부터 황제에 대한 지지가 강했던 만큼 그들은 황제에 대한 반역의 마음도 제국을 거역하려는 마음도 없었고 심지어는 황제의 대리인인 블라디미르에 대한 증오도 없었다. 모욕을 좀 당하기는 했어도 그들은 블라디미르가 사과를 하고 다시 종전대로 통치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반역의 싹이라며 유혈진압을 명령했다. 행성 의회에서는 이에 대해서 반발하였지만 주민들이 뽑은 의회가 황제가 임명한 대리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유혈진압이 시작되고 전날에 전국에서 벌어진 사상자 수천명이 오스터란트에서는 단 한 행성에서 벌어졌다.
이 같은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제국 전역이 난리가 났다. 일단 일은 해당 지역의 책임자가 멋대로 벌인 일일 뿐 황제와 연관된 것은 아니었기에 블라디미르를 경질 및 체포하였지만 이미 한번 불문율이 깨진 만큼 서로간에 쌓인 감정이 터지고 믿지 못하게 되어 시위가 거칠어지고 이에 덩달아 진압도 거칠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해 지난 3년간 벌어진 시위에서의 사상자보다 그 후 3개월간의 시위에서 벌어진 사상자가 훨씬 더 많을 지경이었다.
일이 이쯤 되자 제국정부에서도 몇몇 인사들을 중심으로 더이상 라인하르트 2세로는 사태 해결이 안 되겠다고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시위대가 공식적으로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라인하르트 2세로는 저 거세지는 시위대를 잠잠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들이 주목한 이는 라인하르트 2세의 두 자식 알렉산더와 세바스타인으로 이들의 평이 좋고 또한 황제의 아들이었으므로 이들에게 양위하고 황제는 상황으로 물러나는 식으로 일을 매듭지어 민중을 진정시켜보고자 한 것이었다. 다행히 알렉산더와 세바스타인 모두 이를 받아들였고 결국 9월 22일, 로엔그람 왕조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 사건이 벌어졌다.
이 쿠데타에는 그다지 많은 병력이 필요없었다. 제국의 상서들과 그들 뒤로 군부의 고관들이 주축이 되어 두 황자들을 앞세워 라인하르트 2세를 알현하여 간곡히 퇴위를 권유하였고 제국 민심에 고관 인사들조차도 자신에게서 통치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것을 안 라인하르트 2세는 결국 퇴위에 수락하였고 오전에 일어난 쿠데타는 정오가 되기 전에 끝났고 2시에 라인하르트 2세가 정식으로 퇴위 선언을, 동시에 알렉산더가 알렉산더 2세로 세바스타인이 세바스타인 2세로 즉위하는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서 7년간의 굴곡 많은 라인하르트 2세의 통치는 쓸쓸히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