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기독교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종교간에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해 서로가
확실하게 아는 일일 것이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되는 사실일지라도
불교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서로간에 알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에게 신 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불교인들은 교리적으로 <신(神)>의 존재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글은 토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불교인이 기독교와 접하면서
(특히 성경이나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을
그대로 말해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 글을 가능한대로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듣기 거북하고 또 충격을 줄 수 있는
표현이라 해도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인이 기독교의 여러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신의 창조문제
---------------
만약 불교인들에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불교인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는가 하지않는가...라는 것은 아예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문제 역시 문제로 제기될 수가 없다.
이와같은 입장에 서 있는 불교인들이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읽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나타날 리가 없다.
일종의 신화,또는 동화와 같은 것으로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계관이 판이하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주의 중심도 아닐 뿐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태양계 같은 것이 1000 개 모여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이 소천세계가 1000 개 모인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다시 이 중천세계가 1000 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그리고 이 대천세계 역시 이 우주에는 셀수없을만큼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우주는 어떤 에너지(業力)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가(成),
그런 상태로 유지되다가(住), 그리고 파괴되어(壞),
원자상태로 분해된다(空). 이와같은 성, 주, 괴, 공의 운동은
끝없는 시간에 걸쳐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 우주적인
흐름속에서 생(生)과 멸(滅)을 되풀이 하면서 존재하고
있을뿐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인들에게 구약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창조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불교인들은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을 읽으면서 신의
인간창조에 관한 설명에 심한 반발을 느끼게 된다.
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신의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신의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자비(無慈悲),
독선(獨善) 같은 것만을 볼 수 있게 된다.
신이란것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설령,신이란게 존재하고
인간을 창조했다치더라도 창조하면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저지른 그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신 자신은 물론이고,
인간들도 한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같은
아담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
나무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 먹었다
하더라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옳고 그름><선악>조차도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은 단 한번의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의 후손들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신 자신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덴동산 이후의 일들도 비슷하다.
신이 미리부터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만일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거나 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받게되는 인상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받들고있는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은 그렇지 못한것 같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자기의 창조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후에도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같다.
신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한 뒤 곧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들을 홍수로 모조리
쓸어 버리거나, 유황불로 태워 버리거나, 또는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혼란에 빠지게 한다.
구약에서는 신이 그의 피조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싸움을 하느라 고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 사랑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은, 앞뒤일도 알지못하는 무지함,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함,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편애, 자기일 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잘못을 저질를때는가차없이 벌을 주는 무자비함,
독재적이고 폭군적이고, 옹고집장이 노인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도,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그리도 황당하고 앞뒤가
맞지않고 잔인한 신을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로 받아들이는가...하는 점이다.
-------------------
구세주로서의 예수
-------------------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자가 보내었다는 구세주도 받아 들일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도 석가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신이 보낸 메시아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뒤 3일후에 부활 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예 관심조차 없다.
마찬가지로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 없어하기 까지 한다.
불교인들이 생각할때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떠받드는
예수조차도 마음속으로는 진심으로 받아들이는것
같지않다고 보고 있다.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가, 그리고 죽으면 삼일 후에 부활되어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하고,
또한 절망했을까.
이상의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때,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모습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처럼
보이지를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
기독교의 사랑
-------------------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본다.
인류의 위대한 종교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힌두교, 이슬람교등에서도 증오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보다 특별하게 뛰어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편협하고 왜소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그대로 자기와 가까운 <이웃에 대한>,
<이웃만의>사랑같이 보인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다.
독선,편애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에덴동산에서 신이 인간에게 했던 첫행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혹한<시험>이었다.
우리같은 보통인간이라해도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그와같은
치명적인 시험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사랑 그 자체>라고 하는 신이
그렇게 무자비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이 선악과 나무의 시험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서 우리는 신의 성격과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일에서도 우리는 신의 편애, 무자비를
볼수 있을 뿐, 거기에서 사랑은 볼 수가 없다.
그 뒤에 일어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서 어떻게 아브라함 가족만을 골라
그 자손들과만 계약을 맺고 그들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구약의 하나님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무서워 하고,
존경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조차도 항상 유치하고 무자비한 시험
(예를 들면 이삭을 제물로 요구하는 따위)을 내린다.
신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를 때만 약간씩 도와준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하면, <너와 네 식구들을 죽이겠다>,
또는 <그 도읍과 그 주민들을 송두리째 파멸하겠다.>
라고 무자비하게 위협한다. 위협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에게 가차없는 벌을 내렸다고 한다.
구약에서의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교육하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같은 모습의 신이 아니라,자신의
창조물들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공갈협박을
하고, 그들과의 싸움에 힘겨워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에 대한 편애는 볼수 있어도
인류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볼 수가 없다.
신이 인류구제를 위해 그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지상에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게 한 것을 기독교인들은
신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인들에게는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의 입장에서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신의 독선처럼 보인다.
에덴동산에서 했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시험처럼 보인다.
신이 인간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었다면 인간들에게 신의
독생자의 피를 손에 묻히게 하는 그런 못난시나리오는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그의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구상했던 것이 그와같은 피비린내나는 사건과
이상야릇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활>과 같은
방법이어야 했단 말인가.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푼 지극한 사랑의 행위였다는 말인가.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불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이와같은 신의 행위와 모습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신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행위와 그 가르침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느낌과 반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몇몇에 대한 사랑>, 또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라는, <받고 주는 사랑>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수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 뿐이었다.
예수가 모든 창조주의 대리자로서 전 인류를 구제하러
왔다고 한다면 어느 계층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가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반대했던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권력층의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다시말해, 베드로와 같은 착한 제자가 아니라
유다와 같은 악한 제자였어야 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번을 일곱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면서도,
그 자신의 반대자들에게는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
그러기는 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아흔아홉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예수는 자신의
'잃어버린 양' 유다에게는 어떻게 했는가.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만류하고 설득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저주하고, <네가 하려는 짓을 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사랑은, 인류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와같은 기독교의 사랑은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게 한 근본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세아 등에서 기독교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두 싸움이
있었고, 피를 흘렸거나 흘리게 했다.
그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와같은 철저한
<배타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대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이 왜소하고,
편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처럼 말해지고,
또한 그렇게 행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어이없어해 하는 것이다.
-------------------
예수의 기적과 부활
-------------------
<그때 석가모니께서는 물 위로 걸어 다니시는데
발이 물에 젖지 않으셨다. 카아샤파는 멀리서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수도자는 물위로 다니는구나'>(증일 15,2)
<난다는 곧 그것(한 덩어리의 떡)을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바쳤다. 그래도 떡은 남았다.
그때 세존께서는 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 떡을 가지고 여승들, 남자신도들,
여자신도들에게 주어라. '그런데 여전히 떡은 남았다. '
너는 이 떡을 가져다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래도 떡은 남았다. >(증일 20,28)
이것을 읽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는 이같은 기적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교주가 행한 기적만이 참된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의 기적들은 가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인들에게는 그 기적 이야기들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앙징스럽고 유치한 기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왜소하게,
또한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할 뿐이다.
예수의 부활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부활이야기를 하고 있는
종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모두 가짜이고
예수의 부활만이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하나의 희극처럼
보일 뿐이다.
------
결론
------
불교인들은, 기독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는 거부반응까지 가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 뿐이다.
그러면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넘을수 없는 벽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첫댓글 이글을 통해 불교인을 그릇된 사상과, 불교인을 사로잡고 있는 간교한 영의 실체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불쌍할뿐입니다.한영혼이라도 더구원하시기위하여 그토록 오래참으시건만 악한 사단에 매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