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서의 북방에 이는 후흐호트 지역을 출발하였고, 후자는 북경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을 출발하였다. 위청은 고비를 가로질러서 현재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
원수 4년이었던 BC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봄, 한나라는 에이스였던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모조리 참전했다. 근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기 시작했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하여 진격하기로 하였다. 반대로 위청은 정양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선우를 상대하는 맛있는 역할은 곽거병이 골라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선우의 군단을 상대하는것은 위청이 곽거병이 된다. 흉노 쪽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면 매우 피로에 지칠 것으로 판단, 군수물자를 전부 먼 북쪽에 두고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천천히 기다리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런 흉노 선우의 군대가 정작 곽거병도 아닌 위청의 군대에게 포착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고, 위청은 압도적인 병력의 숫자와 힘으로 흉노 선우의 좌우익을 둘러싸 완벽하게 격파를 해냈다.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될 수순이었으나 날이 저물 무렵 흉노 선우는 수백명의 기마대와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포로를 통해서 선우의 탈출을 알아챈 위청은 200여리를 추격하였으나 선우를 잡는데 실패한다.
본래대로라면 이 역할은 곽거병이 해야 할 일이니, 위청에게 역할이 돌아간것은 오히려 위청이 돋보이게 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게 일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사이 곽거병은……
우주를 뚫을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장장 1천여리를 행군한 곽거병은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가며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따르면,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무려 오르콘 강 상류
바이칼 호 부근까지 이른다.
환빠들의 이상을 현실로힘든 싸움이 끝나고, 곽거병의 밑에 있던 부하 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많은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가 않았다. 곽거병 또한 한번에 5,800호를 증봉받았다. 그런데 위청은 흉노 선우를 패배시켬음에도 불구, 절호의 기회에서 사로잡지 못했다는 점때문에 아무런 증보도 받지 못했고, 수하중에 단 한명도 후작을 받거나 한 인물이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이번 싸움에 동원한 말이 무려 14만 필이 되었는데, 일이 끝나고 돌와았을때는 3만필도 되지 못하였다. 그만큼 힘든 싸움이었는데 위청은 그 대가를 인정 받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대사마의 직위를 새로 두어 표기장군과 대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일컫었고, 둘의 녹봉이 똑같아 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곽거병과 위청의 입지가 대놓고 차이가 나게 되자, 야속한 사람들도 모두 바람처럼 움직여 버렸다. 위청의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 모두가 곽거병에게로 가버린 것이다. 위청의 주변에 계속 남아있던 사람은 임안(任安)이라는 사람 딱 한명이었다.
첫댓글 이 글의 결론 : 역시 예쁜 누이를 둬야 출세할 수 있다.
공주님은 자신이 부리던 하인이 꽤 마음에 들었었나보군요.
이광보단 삶이 나았죠
누가 한나라를속빈강정이라고했던가?
고조선에 곽거병 왔으면 정말 후덜덜했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