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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임종과 애제자 간재(艮齋)이덕홍(1541∼1596)
이덕홍의 울음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누구보다 스승의 몸과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던 이덕홍이었으므로 이덕홍의 갑작스러운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의 슬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제자들은 모두 농운정사에 모였다.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평소에 머물고 잠을 자던 집인 지숙료(止宿寮).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모인 것은 스승 퇴계의 운명에 대해 주역을 통해 점을 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은 이따금 서당에서 주역을 통해 점괘를 얻곤 하였다.
주역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韋編三絶)’ 정도로 주역을 탐독하였으며,‘내게 몇 년의 수명이 더해져 주역을 공부해 나가면 흉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소중히 여겼는데, 이는 공자가 주역을 점치는 책으로 보기보다는 우주원리를 꿰뚫는 철학과 수양의 책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퇴계도 젊은 시절 공자처럼 몸이 상할 만큼 주역에 심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은 이처럼 심오한 철학서이기도 하지만 엄연한 점서(占筮). 따라서 도산서당에서는 이따금 퇴계를 필두로 주역을 통해 점괘를 얻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덕홍은 주역에 밝아서 생전에 ‘주역질의(周易質疑)’란 역학 책을 저술하였던 문인.
그러므로 이덕홍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한데 모여 스승의 운명을 주역을 통해 점을 쳐보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 의식은 역학에 밝은 이덕홍이 집전하였다.
이덕홍은 산통(算筒)을 꺼내왔다. 산통은 점칠 때 쓰는 기구로서 그 안에 대나무로 만든 산가지(算本)를 넣어두는 통이었는데,
서당에 항상 비치하고 있었던 물건이었다.
이덕홍은 산통 속에서 서죽(筮竹)이라고 불리는 점치는 산가지를 꺼내었다.
산가지의 숫자는 50개가 정량. 그 중 한 개는 태극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여 제쳐놓고 49가지만 사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왜냐하면 유학에 있어 태극은 천지만물의 가장 근원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였으므로 제외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은 서죽을 꺼낸 후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이는 이덕홍의 행동을 지켜보는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주역을 통해 점을 칠 때에는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몸가짐이었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을 갖거나 부정한 일을 위해서 점을 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바른 계시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역은 천지신명의 바른 법칙을 본받아 그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계시를 얻는 것이므로 부정한 일을 위한 점은 주역의 원리를 반역하는 일이며 또한 같은 일로 두 번, 세 번 점을 치거나 주역의 결과를 의심하는 것은 상천(上天), 즉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로 금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은 서죽을 양손으로 나눈 후 왼손에 든 서죽에서 한 개를 뽑아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는 천수(天數)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른바 점을 칠 때 제일 먼저 시작하는 중요한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왼손에 들어있는 서죽을 네 개씩 네 개씩 차례로 덜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네개 미만의 서죽이 남자 다시 무명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것은 늑이라 불리는 두 번째 과정이었다.
이덕홍은 몇 차례씩 이런 작업을 되풀이하면서 괘를 얻고 있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초효(初爻)라 불리는 제일변(變)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한 효(爻)를 정하는데, 세 번의 절차를 밟고 무릇 18변에 해당되는 육효(六爻)를 얻어야만 비로소 점괘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덕홍은 그러한 작업을 순서에 따라서 차례차례 진행해 나갔다. 나오는 점괘마다 이를 종이 위에 적어 팔괘로 나누고, 다시 팔괘를 세분하여 대성괘(大成卦)로 나누어 점괘를 완성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덕홍은 마침내 스승의 점괘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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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주역에 나와 있는 64괘의 괘상(卦象) 중 ‘간하곤상(艮下坤上)’에 해당하는 이른바 겸괘(謙卦)였다.
‘간하곤상’이라 하면 땅인 간(艮) 밑에 산(坤)이 있는 괘상인데, 이에 대해 주역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었다. 이덕홍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제자들 앞에서 주역을 펼쳐 ‘간하곤상’의 괘사를 천천히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겸손하면 형통한다. 하늘의 도리는 높은 데서 그 작용이 아래로 내려와 땅 위의 만물을 건져 줌으로 해서 빛이 나고, 땅의 도리는 스스로 낮은 위치를 지킴으로 해서 그 작용이 위로 올라가 하늘의 하는 일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법칙은 보름달은 기울듯이, 찬(盈) 것은 덜고 차지 않은 것(謙)은 보탠다. 땅의 법칙은, 웅덩이에 물이 가득 차면 둑을 끊고 나와 낮은 데로 흐르듯이 찬 것은 변경하여 차지 않은 데로 흐른다. 귀신은 가득 차 있는 자에게는 화(禍)를 주고 겸손한 자에게는 복(福)을 준다. 사람의 도리는 교만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겸손하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는 빛이 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는 남이 업신여기지 못한다.”
주역에 나와 있는 64괘의 괘 중 퇴계에 해당하는 괘는 이른바 15번째의 지산겸(地山謙)괘였다.‘간하곤상’, 즉 ‘땅 밑에 산이 솟아 있다.’라는 괘상이 의미하듯 이 괘의 특성은 마땅히 산이라면 땅 위에 솟아 있어야 하는데, 땅 밑에 산이 우뚝 솟아있다는 뜻처럼 겸괘(謙卦)를 의미하는 것이다.
겸괘.
이는 문자 그대로 주역의 ‘겸손하면 형통한다.’라는 괘사처럼 겸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퇴계에게 가장 적합한 점괘였던 것이다.
퇴계의 운명을 점쳐보는 괘상으로 ‘겸괘(謙卦)’가 나왔다는 사실에 많은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너무나 정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덕홍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겸손의 도를 지키는 군자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유종의 미.
시종일관 겸손의 도를 지켜나간 군자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 결국 이 말은 결국 스승 퇴계가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점괘가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주역은 퇴계가 겸손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고 운명할 것임을 분명하게 점지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제자들은 모골이 송연하였다. 이덕홍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효사(爻辭) 중 대상(大象)을 풀이하여 읽어 내려갔다.
“높은 산이 낮은 땅 아래에 있다. 이것이 겸(謙)의 괘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많은 것을 덜어서 적은 것에 보탬으로써 사물의 균형을 살피고 시책을 공평하게 한다.”
‘지산겸’괘의 두 번째 초음(初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겸손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수양을 쌓으니, 참으로 군자로구나. 대하를 건너는 것과 같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수행하여도 길하리라.”
‘지산겸’괘의 이음(二陰)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명성이 이미 세상에 울리고 있건만 스스로 몸을 낮추고 겸손하다. 자신의 마음에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남에게 잘난 체해 보이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를 한결같이 가지면 길하리라.”
‘지산겸’괘의 효사 중 삼양(三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하를 위하여 헌신한 공로가 있건만 자랑하지 않고 겸손하니 진정 군자로구나. 만민이 심복한다. 유종의 미를 이루어 길하리라.”
‘지산겸’괘의 사음(四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니 모든 일이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 만사 순조롭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지산겸’괘의 효사 중 오음(五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귀한 분이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유화한 태도로 남에게 겸손하니 많은 사람들이 심복하여 주변에 모인다.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정벌(征伐)함이 좋다. 순조롭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지산겸’괘의 효사 중 마지막 부분인 상음(上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미 군주의 지위는 물려주고 난 위치에 있으나 아직 명성은 세상에 울리고 있다. 그러나 겸손하다. 군사를 동원하면 작은 읍국(邑國)을 정복하는 일쯤은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지산겸’ 괘의 총 해설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자가 되어서 교만 없기가 가난하여서 원망 없기보다도 어렵다.”
공자의 이 말은 예수가 말하였던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연상시키는데, 이렇듯 퇴계의 운명을 암시하는 ‘겸’괘는 퇴계야말로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에게 몸을 낮춰야 한다.’는 ‘존현하사(尊賢下士)’의 도를 완성한 ‘겸손의 군자’임을 드러내는 괘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에 실려 있는 64괘의 대성괘 중 퇴계의 운명을 암시하는 ‘지산겸’ 괘야말로 군자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자를 비롯한 정이천과 같은 송 대의 초기 유학자들이 이 ‘겸괘’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설을 가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먼저 이 괘에 대해 주자는 이렇게 풀이하였다.
“겸(謙)이란 가지고 있으면서 가진 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으로 그치고 밖으로 순한 것이 겸의 뜻이다. 산은 지극히 높고 땅은 지극히 낮은 것인데 이제 높은 것이 굴하여 그 낮은 것 아래에 그쳤으니, 겸의 상(象)이다. 점치는 자가 이러하면 형통하여 끝이 있으리라. 끝이 있다는 말은 먼저 굴했다 다시 펴진다는 뜻이다.”
그뿐인가.
정이천 역시 이 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겸은 형(亨)이 있는 도이다.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 아니 하니, 겸이라 이르는 것이다. 사람이 겸손으로 자처하면 어디에 간들 형통하지 않겠는가.‘군자는 유종하리라.(君子有終)’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즉 군자는 겸손에 뜻을 두고 이치에 통달하므로 천(天)을 즐기어 경쟁을 아니 하고, 안으로 충실하므로 퇴양(退讓)하여 자랑을 하지 아니하며, 겸손함을 편하게 지키어 종신토록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추면 남이 더욱 존경하고 스스로 낮추면 덕이 더욱 빛나게 드러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가 ‘끝(終)’을 가진다는 뜻인 것이다.”
정이천의 표현대로 퇴양하고 퇴양하여 스스로의 호를 퇴계로 지었던 이황.
주역의 팔괘는 고대중국의 복희(伏羲)라는 어진 임금이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을 보고 계시를 얻고, 다시 하늘의 천문과 지리를 살펴서 만물에 각자 마땅한 바를 관찰하여 만든 것으로 그렇다면 퇴계가 ‘군자유종’의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겸괘는 하늘이 점지한 천기가 아닐 것인가.
―돌아가신다. 스승께서는 군자유종의 미를 거두신다.
마침내 주역을 통해 하늘의 천기를 알아낸 제자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모두 숨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행여 병석에 누운 퇴계가 들을까 곡성은 터져 흐르지 아니하였으나 일순 도산서당은 침통한 슬픔으로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이 ‘간재문집’ 속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2월7일.
스승께서 이덕홍을 불러 서적을 맡으라고 지시하셨다.
퇴계선생의 병세가 너무 위독해서 제자들이 점을 쳤는데, 겸괘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이란 점사(占辭)를 얻고 모두 아연실색하였다. 스승 퇴계의 종언(終焉)이 다가왔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주역을 통해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천기를 점지 받았으므로 제자들은 누구나 스승 퇴계가 곧 종언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실제로 이튿날인 12월8일.
퇴계의 병은 한층 더 위독해졌다. 이날 아침 퇴계는 이덕홍과 조카 영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퇴계의 침상 곁에 앉자 퇴계는 간신히 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가리키려 하였다. 그러나 온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나간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조카 영이 퇴계의 얼굴에 바짝 귀를 들이대자 퇴계는 띄엄띄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매형에게…물을…주어라.”
퇴계의 임종을 기록하고 있는 수십 권의 책들은 퇴계의 이 말이 그가 생전에 남긴 최후의 유언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분에게 물을 주라.’는 말은 공식적인 퇴계의 마지막 유언인 것이다.
죽기 직전 자신의 머리맡을 지키던 매분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생전에 그토록 상사하던 매분이었으므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이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이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상생(相生)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는 심오한 최후설인 것이다.
이러한 참군자 최후설은 세기의 철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시대와 공간은 달라도 소크라테스와 퇴계는 궤변론이 팽배하던 어지러운 난세에 올바른 진리로 청년들을 일깨우던
세기적인 사상가.
‘아테네 청년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태연히 독약을 마신다.
이를 지켜보던 제자들이 모두 얼굴을 감싸고 통곡하기 시작하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웬 통곡 소리들인가. 이런 창피한 꼴을 보게 될까봐 아낙네들을 먼저 보냈거늘,‘사람은 마땅히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고 나는 들었네. 그러니 부디 조용히 하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뻣뻣해지며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온몸을 덮었던 천을 벗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그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이보게 크리톤.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잊지 말고 기억했다가 내 대신 갚아주시게나.”
진리의 철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스클레오피스는 그리스인들의 의신(醫神).
뱀이 기어오르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오늘날에도 병원이나 약국에서 뱀의 지팡이로 상징되고 있는 문장은 바로 아스클레오피스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이승에서의 삶은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나 죽음으로써 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영원의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니, 자신이 직접 가서 아스클레오피스의 신전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대신 친구인 크리톤에게 닭 한 마리의 제물을 바쳐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죽기 직전 ‘매분에게 물을 주라.’는 이퇴계의 유언과 상통하고 있다.
이퇴계는 사람이 낳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일생이 매화에게 물을 주는 일상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듯 죽음을 편안하고 조용하게 맞아들일 준비를 끝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임종의 순간에까지 물을 주라며 명관(命灌)하였던 퇴계의 유언은 다만 생명이 있는 모든 삼라만상을 사랑하는 퇴계의 철학적인 사유 때문이었을 뿐일까.
아마도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퇴계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던 그 매분. 퇴계가 말년에 극진히 사랑하여 ‘매형(梅兄)’이라고까지 의인화하여 부르면서 직접 열정에서 길어 올린 정화수를 주었던 매분. 잠시 한성에 두고 이별하였을 때 ‘잊혀지지 않는구나. 지난해 봄 서울에서 분매 두고 돌아오는 소매 신선바람에 스쳤더니’하고 노래하며, 오매불망 그리워하였던 그 매분.
심지어 죽기 닷새 전 침석에서 설사를 하자 매형에게 불결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니,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던 그 매분. 그 매분이야말로 2년 전 두향이가 보내주었던 바로 그 매분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퇴계는 비록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기원을 올리고 있을 두향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하기 위해서 그러한 유언을 남긴 것이 아니었을까.
그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퇴계의 고종기(考終記)를 남기고 있는 책들은 이 장면을 한결같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2월8일.
아침에 분매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初八日 命灌盆梅)”
그러나 퇴계의 임종을 다루고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오직 이덕홍만은 퇴계에게 마지막 유언이 따로 더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덕홍은 조카 영을 비롯한 친족들과 마지막까지 스승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이덕홍의 증언은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홍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간재문집’에는 다른 책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오시(午時:상오11시부터 하오1시까지의 시간)
스승께서는 조카 영을 불러 말씀하셨다.
‘내 머리 맡에서 바람이 불고 비 소리가 들린다. 너도 역시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吾頭上有風雨聲 汝亦聞否)’
이에 조카 영은 대답하였다.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이덕홍의 ‘간재문집’에만 기록되어 있는 퇴계의 마지막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퇴계가 숨을 거둔 그날은 하루종일 청명한 날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퇴계가 물었던 ‘내 머리맡에서 바람이 불고 비 소리가 들린다. 너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라는 말은 생사가 갈라지는 순간에 남긴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대적 예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퇴계가 숨을 거둔 지 10여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의 전 국토는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격변이 일어나는 것이다.
혈풍혈우(血風血雨).
피의 바람과 피의 비가 쏟아지는 대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퇴계의 이 말은 퇴계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조국에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였던 선지자의 묵시(默示)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덕홍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스승의 임종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하였다.
이덕홍의 예감은 정확하였다.
유시(酉時)가 가까워오자 퇴계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게도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도록 하였다. 유시는 12시 중에 10번째 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오 5시에서 7시의 시간. 이때 청명하던 날씨가 돌변하여 흰 구름이 집주위에 몰려들더니 갑자기 흰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상서로운 백설이었다. 어지러이 쏟아지는 눈발은 속세를 정화시키듯 순백의 세례로 온 산야를 흰빛으로 표백시켰다.
그때 퇴계는 좌우에 부탁하여 자신을 부축하여 일으키도록 몸짓하였다. 이덕홍과 조카 영이 계속 누워계시도록 만류하였으나 퇴계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부축하여 일어나 앉히자 퇴계는 방문을 열어주도록 손짓하였다. 몹시 추운 겨울날씨였으므로 조카 영은 멈칫거렸으나 스승의 임종을 직감한 이덕홍이 방문을 열도록 눈짓하였다. 방문을 열자 펄펄 내리는 눈발이 뒤덮인 도산서당의 뜰이 한눈에 드러났다.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은 퇴계는 물끄러미 그 뜰을 내려다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가 유시 초.
그러므로 퇴계가 숨을 거둔 것은 오후 5시에서 5시30분 사이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앉아있던 퇴계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덕홍이 다시 부축하려고 손을 내민 순간 이덕홍은 스승이 숨을 거둔 것을 깨달았다. 스승의 몸에서 아직 온기는 남아 있었으나 숨은 어느새 끊겨져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덕홍은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의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은 눈이 내리는 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덕홍의 입에서 부음을 알리는 기별이 전해지자 제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눈을 맞으며 통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편안한 죽음이었다.
평생 동안 갖은 질병과 병고에 시달리던 퇴계에게 있어서 마지막의 임종 순간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평화스러운 죽음이었던 것이다. 주역에 나와 있는 ‘겸사’의 점괘 그대로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최후였다.
퇴계의 죽음과 더불어 어느덧 한 치 정도 쌓이던 눈이 그치고 곧바로 구름이 걷혔다.
이에 대한 기록이 임종을 지킨 이덕홍의 ‘간재문집’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12월8일.
아침에 분매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유시 초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편안하게 서거하셨다. 이날 날씨가 맑았는데, 유시 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집주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가량 내렸다. 퇴계 선생이 서거하자 곧바로 구름이 걷히고 눈이 그쳤다.
(酉時 靑天忽白雲集 宅上雪下寸許 須臾先生命整臥席 扶起而坐逝 卽雲散雪霽)”
퇴계의 서거 소식은 뒤늦게 선조에게 전해진다. 퇴계가 죽은 지 3일후 선조는 뒤늦게 퇴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내의(內醫)에게 약을 가지고 역마를 타고 급히 가서 구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전의가 채 도착하기 전에 퇴계가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전해 듣자 12월18일 선조는 퇴계에게 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는 그에 맞추어 치제(致祭) 장례 등의 제반사를 조치토록 하였다.
이때 선조가 내린 시호는 다음과 같다.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물론 퇴계는 죽기 사흘 전 조카 영에게 절대로 ‘국장을 쓰지 마라. 해당 관청에서 규례에 따라 국장을 정하면 반듯이 유명이라고 말하여 상소하여 고사토록 하라.’라는 유계를 내렸으나 선조가 친히 내린 어명이었으므로 이를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조는 2일간 조회를 폐하게 한 뒤에 의정에 합당한 일 등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이에 필요한 각종 제물을 부의(賻儀)로 보내도록 친히 지시하였다.
선조는 직접 퇴계의 빈소를 찾아가 거애(擧哀)하고 싶어 하였으나 거리가 멀었으므로 대신 승지를 보내어 조제(弔祭)토록 하였다.
이때 율곡은 스승 퇴계의 슬픔을 애도하여 ‘퇴계 선생을 곡하다(哭退溪先生)’란 만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옥 정한 금처럼 순수한 정기타고 나시어
참된 근원은 관민(關:장재와 주희를 가리킴)에서 갈려나왔다.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입기를 바랐건만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
호랑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의 일 변했건만
물결 돌리고 길 여신 저서가 새롭구나.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서해 물가에서 눈물 마르고 창자 끊어집니다.
(良玉精金稟氣純 眞源分派自關 民希上下同流澤 迹作山林獨善身
虎逝龍亡人事變 瀾回路闢簡編新 南天渺渺幽明隔 淚盡腸西海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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