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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진 스크랩 유고 코토르 대성당 (코토르지방)
김의천 추천 0 조회 52 06.10.03 22: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코토르 대성당

 

코토르의 대성당은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졌다. 1667년 지진이 발생한 뒤

르네상스 양식의 탑 2기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성니콜라우스 성당의 탑

 

코토르 지역의 자연과 문화유적지 ( Natural and Culturo-Historical Region of Kotor )

1979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몬테니그로의 아드리아 연안에 위치한 천연 항구이다.  중세시대 석공술과 조상(彫像) 연구학교(조합)가 있었던 주요한 예술적, 상업적 중심지이다. 1979년 지진으로 피해를 당해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복구작업이 진행중이다. 코토르 만에 있는 낭만적인 페라스트 시의 작은 항은 평화로운 생활에 젖어 있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성니콜라우스 성당의 탑은 18세기에 건축되었다

 

코토르 시 방벽

 

코토르 만 남쪽, 가장 깊숙한 곳에는 이름과 같은 도시 코토르가 있다. 길이 4km, 두께 10m의 방벽은 그 옛날 이 해양 상업 도시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코토르 만

 

코토르 만은 육지로 움푹 들어간 협만이다. 이 지형이 천연의 요새를 형성했으며, 해상 교역의 중요 항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코토르 지방의 역사 건축물과 자연

 

아드리아 해 최초의 해도는 유명한 코토르의 항해사 학교에서 제작되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이 지방 선장들의 능력을 매우 신뢰해, 그들에게 사관학교 학생들의 교육을 맡겼다. 이 항구 도시는 코토르 만 안쪽에 있으며, 뒤쪽에는 로브첸 산이 우뚝 솟아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종주국이 변해도 이 도시는 몇 세기에 걸쳐 자치를 유지하고 번성하며 많은 건축 유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979년 대지진이 이 곳을 덮쳤다. 유네스코의 원조를 받아 중요한 건축물은 복원되었지만, 크로아티아와 가까운 이 곳은 1991년의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다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광의 중세

1918년 초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대전에서 패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코토르 항에 정박하고 있던 전함 성게오르기우스이 수병들은 무의미하게 계속되는 전쟁에 대한 불만을 터뜨려 1월 20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겨우 2주일 만에 끝나고, 반란 주모자들은 간단한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프리드리히 볼프는 이 비극을 감동적인 희곡으로 완성했다. 로마 시대에 아스클리비움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던 도시 코토르는 그 후 비잔틴, 헝가리, 세르비아의 지배하에 놓였다. 코토르 만과 그 근처 지역의 황금 시대는 14세기 초에 시작된다. 1326년에는 코토르에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조선소는 방비 시설이 매우 견고해 1420~1797년까지 이 곳을 지배했던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의 전초 기지로 삼을 정도였다. 코토르는 역사적으로 상상 터키나 해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침략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코토르에는 슬라브 국가 중에서 최초로 해군 사관학교가 창립되었고, 그 곳에서 최초의 아드리아 해도가 제작되었다. 그 명성은 러시아까지 알려져, 1698년경에는 표트르 대제가 사관학교 학생 17명을 이 학교로 보내 훈련을 받게 했다. 또 자신의 함대에도 코토르의 수병을 기용했다. 18세기에 보가 함대는 배 600척을 보유하고, 코토르의 상업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미술학교와 금은 세공사들이 이 도시의 명성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다. 1797~1918년까지 코토르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는 인근 지역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넘어갔다.

천재와 인재가 끼친 상흔

코토르 건축가들의 초기 작품에서는 로마 및 초기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2~13세기에는 이탈리아 남부 폴리아의 로마 건축에서 힌트를 얻은 양식이 탄생되었고, 이 양식은 발칸 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979년 봄, 이 지방 전체를 덮친 지진 때문에 코토르, 도브로타, 페라스트, 리산 등의 도시가 큰 피해를 입어, 중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던 대부분의 역사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그 해에 유네스코는 이 지역을 ‘위기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등록하고,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무보가 전 세계에 호소해 큰 피해를 입은 페라스트의 건축물 등을 재건했다. 그 중에는 바다와 마주보고 있는 입구와 테라스가 있는 바로크 양식의 부요비치家 저택도 포함되었다. 코토르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된 대성당은 1667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어 황금 제단과 풍부한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의 두 번째 지진으로 붕괴 위험이 있어서 몇 년 전부터 폐쇄되었다. 1979년에 일어났던 지진으로 파괴된 건물이 모두 복원되지는 못했다. 오늘날에도 폐허가 된 채 송악(두릅나무과의 상록 활엽수)으로 뒤덮여 있는 건물이 눈에 띄지만, 코토르 시 당국은 만 연안의 자연 환경과 도시의 역사적인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연 재해의 파괴력에 의한 피해보다 더 심각한 상처를 남긴 것은 1991~1992년 사이에 발생했던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이다. 이 내전으로 문화적인 건축물 700채 이상이 파괴되었는데, 여기에는 코토르의 도서관도 포함된다. 유적 보호 단체는 지금까지도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있다. 코토르 시는 서서히 대참사를 딛고 일어서고 있으나, 축제 때 전통 의상을 입은 보가 항해사의 자손들이 예전처럼 마음 놓고 시가 행진을 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출처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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