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당선작
백마라사 白馬羅沙 / 이설야
백마처럼 하얀 양복을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방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계속 풀려나왔다. 엄마는 손목에다 검정 실을 칭칭 감곤 했다.
발정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처음 터지던 곳간을 보았다.
가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정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그래도 그리운 화평동 집이었다.
은하카바레 / 이설야
은하카바레 뒷문에서 아버지가 나왔다
나는 여인숙 난간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아버지는 슬픔을 달래느라
카바레에다 밤을 억지로 구겨 넣었던 것
거미줄로 목을 감은 전봇대 불빛을
모으느라 눈이 캄캄해지는 밤
아버지는 불빛을 여기저기 붙이고 있었다
그 불빛에 찔려 오랫동안 아무것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백구두 소리가 부엌문을 열면
내 몸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려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해바라기 씨앗처럼 불어나는
새까만 음악 속으로 자꾸만 숨어들어갔다
그 속에선 슬픔을 북북 찢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면 깊은 연못이 나왔다
연못 속에는 나와 얼굴이 같은 소녀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탁, 탁, / 이설야
마을버스에서 내린 장님 소녀의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
멀리 섬에서 점자를 읽고 있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
무거운 책가방을 든 소녀가 휘청거리며 지나간다
오른손에 움켜진 지팡이가 갈라진 보도블록을
탁, 탁, 칠 때마다 땅 속 벌레들의 고막이 터진다
허공 어딘가 통점을 꾹, 꾹, 찌르며
집을 찾아가는 지팡이
헛발 딛는 소녀의 종아리가 되어준다
무수한 길들이
종아리 속에 뻗어있다
마태수난곡 / 이설야
새로 온 공장장은
강물이 흐르는 물빛 천을 자르기 시작했다
천 짜는 일에만 일생을 바쳐 온
일급미싱사들의 천을 내던지며
어디서 이런 천들을 가져왔냐며 몰아냈다
비싸게 수입한 싸구려 천으로
강물에 작은 물고기 대신 뱀상어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흰수마자와 얼룩새코미꾸리 지나가는 여울목을
상어 이빨로 막아 이상한 무늬를 새겼다
물빛이 고왔던 천은
이제 더 이상 꽃잎을 띄울 수 없게 되었다
죽은 물고기의 눈동자가 그려진 옷을 입은 그는
흑색 텔레비전에 나와 가끔 눈물도 훔쳤다
밤마다 물발톱피라미들이 보낸 두꺼운 편지를
불 속에 집어 던졌다
별불가사리가 하나 둘 몸을 일으켜도
물고기들의 떼죽음과 먹장구름이 퍼진 검정 천을
자꾸만 사들이는 그는
이상한 무늬를 즐기는 그는
그림자극 / 이설야
공장에서 돌아온 동생
퉁퉁 불은 손을 보여주었다
쫓아오던 그림자를 옷걸이에 걸어놓고
밤마다 축축한 벽지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나는 동생의 그림자를 껴입고 잠 속을 들락거렸다
그림자 속에는 동생의 인형들이 살고 있었다
일곱 개의 밤들을 하늘에 펼쳐놓고, 박음질하느라
밤에도 인형들은 눈을 감지 못했다
꿰매고 꿰매도 실밥이 터져 나오던
동생의 어린 노동으로
밑단이 뜯겨진 가계를 조금은 꿰맬 수 있었다
얼굴까지 퉁퉁 불은 월급날
동생의 축 늘어진 그림자를 인형들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동생의 그림자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인형들은 울고 웃다가
낡은 찬장 속으로 들어가 달그락거렸다
동생의 일곱 그림자가 빈 그릇 속으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이설야 시인
1968년 천 출생. 인하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인하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