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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방학, 친구의 아이 M은 그룹 임직원 자녀들을 위한 영어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양평까지 직접 데려다 줘야 했고 미리 신청해 두었던 또 다른 캠프와도 겹쳐서 어찌할까 고민도 했지만, M이 선뜻 가겠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부분이 차량까지 지원되었던 서울에서 온 아이들이어서 낯가림도 있는 M이 사투리 때문에 놀림이라도 받을까 싶어 친구는 같은 모둠 아이들에게 특별히 부탁까지 했단다. 그런데 한 아이가 유난스레 M에게 관심을 보이더란다. 그 아이는 유치원 때 부산에서 이사 온 친구가 있어서 사투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다며 M곁에 꼭 붙어 다녔다고 한다.
사건은 급격한 친화력을 보이며 친구를 안심시켰던 바로 그 아이에게서 비롯되었다. 캠프가 끝나고 M을 데리러 갔던 친구는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얼굴에 꽤 심각하게 긁힌 상처와 꼬집힌 자국이 있었는데 아무리 캐물어도 M은 그냥 넘어져서 그렇다며 자꾸 말을 돌리더란다. 함께 간 M 이모의 탐문조사 결과, 놀랍게도 그 상처는 첫날 대면에서 눈에 띄었던 바로 그 아이와의 싸움에서 생긴 것이었다. M이 통 말을 하지 않으려 했기에 친구는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그 아이를 찾아다녔지만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친구는 ‘최고의 반전’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그 아이가 그럴 줄 몰랐다”고 흥분했지만, 뭔가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나는 M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M은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이다. 솔직히 천편일률적인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에는 적응하기 힘든 아이이다. M과의 특별한 에피소드들은 언제 질펀하게 풀어놓을 기회가 있으리라. 역시나 M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상당히 꺼려했다. 그나마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M의 입을 여는 데 가까스로 성공할 수 있었다. M은 조심스레 그날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먼저 그 아이의 외모부터 시작해야겠다. 친구가 “딱 네가 예뻐할 타입”이라던 그 아이는 통통한 것을 조금 넘어선 다소 뚱뚱한 편이었고, ‘호빵맨’처럼 볼이 빵빵하고 발그스레했으며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을 굴리며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아이였다. 한마디로 아이들이 ‘돼지,’ ‘뚱땡이,’ ‘돈까스’ ‘허풍쟁이’라고 놀리기 좋은 캐릭터였다. 그 아이는 M에게 급격한 관심을 보이며 따라다닌 것처럼 같은 모둠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요즘 아이들이 ‘나대고’ 심지어 자신을 ‘귀찮게’ 하는 그 아이를 달가워했을 리 없다. 심지어 그 아이는 무섭다며 베개를 들고 M의 침대로 건너오기까지 했으니 ‘겁쟁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붙을 만도 했다. 자연스럽게 그 아이는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고, 그와 반대로 처음에는 낯가림이 있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곤 하는 M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아갔다.
싸움이 일어난 그날도 아이들은 서로 그 아이와 같은 방에서 자기 싫다고 불만을 내비치면서 자기네들끼리 모여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집단에 끼고 싶었던 그 아이가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눈치가 없어서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위장하고서 함께 어울리려 했지만 이미 한통속이 돼서 한 아이를 따돌리는 것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온갖 별명들을 불러대며 놀리기 시작했고, 그 집단에 속해 있던 M도 처음으로 소리 내어 “돼지”라고 외쳤다. 순간 그 아이는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예의 그 ‘나댐’이 없이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아이의 반응에 시들해진 아이들이 하나둘 잠을 청하려 했는데, 그들은 뜻밖에 그 아이의 분노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물론 예상했다시피 그 아이의 분노는 M에게로 향했다. 막 잠이 들려는 M위에 올라탄 그 아이는 사정없이 M의 얼굴을 강타했다. 소란에 놀란 아이들이 불을 켰을 때, 분을 참지 못한 그 아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어느 누가 봐도 M이 불리해 보이는 몸싸움이었다. M은 예민한데다 편식이 심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몸집이 작았다. 아이들은 그 아이를 떼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M이 분풀이를 할 수 있도록 은근슬쩍 그 아이의 팔다리를 잡아주었다. M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똑같이 그 아이 위에 올라타서 몇 대 패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아이들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아이는 또 다시 아이들의 잠을 다 깨워 놓았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머리빗을 든 그 아이는 “다 죽여 버릴 거야!”라는, 아이로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말을 내질렀다. 아이들은 그제야 조금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그 아이는 혼자이고 자신들은 모두 같은 편이라는 안도감으로 이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질 수가 있었으리라.
나는 M에게 “왜 하필 네가 선택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M은 곧바로 “자신이 가장 만만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즉 자신이 가장 약해보였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은 바로 시저가 죽어가면서 남겼다는 외마디 “부르투스, 너 마저도!”이다. 이 말은 지금도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심정’을 상징하는 말로 많이 인용되고 있지 않은가!
그 아이는 M과 친해지려고 특히 공을 많이 들였다. 서울 아이들에 비해 순박해 보이고 여려 보이기까지 하는 M이기에 자신이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마침 M의 엄마에게 친하게 잘 지내라는 부탁까지 받았고, 낯가림이 심한 M이 다른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더해져서 그 아이는 캠프기간 동안 M과 단짝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쉬운’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좀 더 빨리 친해지려고 부대끼면 부대낄수록 M이 슬슬 피하기 시작하자, 그 아이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고 급기야 M과 한 침대를 쓰려는 무리수까지 두게 되었다. 그 사이 다른 아이들과 친해지기 시작한 M은 모두가 싫어하는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자못 부담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M은 자신에게 맨 처음 관심을 보인 그 아이를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 같이 놀려대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처음으로’ 자신도 한마디 거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M의 그 한마디가 그 아이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고, 그동안 혼자 감내했던 따돌림의 고통까지 더해져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제2권에는 ‘또래에게 받는 압력(peer pressure)’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 혼자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훔친 그 과실에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훔치는 그 자체에 재미를 붙인 것입니다. 나는 혼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죄악의 군중심리’를 강조하고 있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 즉 선악과를 하와와 함께 따먹은 죄를 범했던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배를 훔친 것을 기억하며 죄의 사회성, 집단성, 연대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정은 위험한 적이 될 수 있으며, 검토하기 어려운 마음의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 ‘자, 가서 훔치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단지 철면피가 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합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절절한 고백은 M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M은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그 아이를 놀려댈 때에도 앞에서 언급했던 이유로 자신은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비록 그 아이 편에 서서 다른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나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캠프 마지막 날이었고, M에게는 그 집단에 ‘속해있다’는 것이 큰 뒷배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상대는 자신보다 힘이 많이 세지만 혼자이고, 자신은 집단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모종의 호기를 불러낸 것이다. 사실 상대적으로 약한 M이 그 아이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집단은 ‘보복의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았던가! 여기서 M이 엄마나 이모에게 극구 이 사건을 비밀로 하고 싶었던 이유도 드러난다. M은 자신이 집단의 힘을 빌려 ‘정당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중심리가 발동되어 ‘처음으로’ 그 아이를 놀리는 데 동참했으며,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똑같이 되돌려준 것이다.
‘또래 압력(peer pressure)’은 집단 규범에 순응하기 위해 누군가가 자신의 태도, 가치 내지는 행동을 바꾸려 할 때 친구 집단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의미한다. 영향을 받는 사회 집단은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었을 때 그 구성원 집단을 포함한다. 또래에게 받는 압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아이는 그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부담을 느끼는 압력은 친구들의 압력 형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대부분의 아이들이 각각의 자의와 상관없이 ‘고정된 집단 내’ 예컨대 학교, 캠프, 모둠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아이들은 친구들로부터의 압력을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성숙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실제 문제는 아주 심각해 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자기 친구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아이를 부정적으로 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런 압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야심적이고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려는 아이들 집단에 결부된 경우, 아이들은 그 집단으로부터 따돌림 받는 느낌을 피하려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압력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아이는 스스로 그 집단 내에서 ‘쿨(cool)’해 보이기 위해서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기도 한다. 결국 아이들은 자기 자신을 개선하려 할 때 어느 정도 친구 집단의 압력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소심한 아이가 응원단에 뽑혔을 때 자신의 어색한 행동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소 과잉된 행동으로 나서는 경우이다. 그 아이가 응원단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면, 이 일을 계기로 대중 앞에 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아이의 입장이 되어보자. 아마도 그 아이는 뚱뚱한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도 놀림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두려움으로 ‘영어캠프’에도 가지 않겠다고 부모와 실랑이를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 회사의 임직원 자녀들로만 구성된 캠프에서 새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기도 했을 것이다. 그 첫 만남에서 눈에 띈 것이 바로 M이었다. M과 단짝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깨져 버렸다. 게다가 자신을 피하는 것으로 싫다는 표현을 해오던 M이 대놓고 놀리자 배신감과 함께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아이는 상대가 집단의 보호를 받고 있고, 즉 자신을 제외한 아이들이 똘똘 뭉쳐있다는 것을 알기에 애써 분노를 억누르려 했지만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M을 공격했다. 이것은 자신보다 크고 강한 상대를 공격할 때 쓰이는 수법으로, M은 약하지만 그 뒤에 집단이 있기에 상대가 ‘취약해졌을 때’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다음에 인용되는 것은 유명한 진화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의 주장으로 M과 그 아이 둘 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만약 모욕 받은 남성이 그 도전에 적절히 응수하지 못하면, 그는 체면을 잃게 된다. 속된 말로, 그를 ‘깔보게’ 되는 것이다. …… 보복 없이 모욕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곧 도전자에게 ‘당신이 나를 지배할 수도 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 그것은 상대방이 용기나 신체적인 위용, 또는 자신을 뒷받침해 줄 강한 동맹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 평판에 대한 모욕은 사회 집단 내에 삽시간에 퍼진다. 한번 손상된 평판은 다시 회복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남성이 공공연한 모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폭력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이유이다. …… 다른 사람 앞에서 동성 경쟁자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살인 판타지를 유발하는 가장 흔한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우는 남성의 살인 판타지의 약 28퍼센트를 차지하였다. …… 이러한 살인 판타지들이 정교할 만큼 세세하고 선명하다는 사실은 위신이 손상된 사람이 경험하는 심리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손실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다(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 사이언스북스, 2006, 308-311).
집단에게 모욕적인 놀림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한 그 아이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인내의 한계와 스스로 내팽개친 자존심을 회복해야겠다는 오기가 합쳐져 자고 있던 M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한편 M은 다른 친구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구타당했다는 것에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힘으로는 안 되겠지만 한 대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집단의 도움으로 자신이 상대를 제압하게 되었을 때 주저 없이 몇 대 내려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욕망은 기본적으로 그 자체의 속성상 ‘결핍’에 토대하고 있다. 반면에 충동은 욕망과 달리 어떤 ‘고정(fixation)’을 필요로 하는, 즉 붙잡아 두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 아니다. 충동은 바로 그러한 붙잡아 두는 것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충동의 대상은 어떤 결핍이나 공백을 채우는 것으로서의 사물과 직접 관계없을 것이다. 오히려 욕망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운동(counter-movement)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충동은 삶과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사이클을 뛰어넘어(in-human) 지속되고 죽지 않는(undead) 강력한 욕구(urge)라 할 수 있다. 그러다 그 대상을 상실하는 바로 그 순간, 즉 “부르투스, 너 마저도!”라고 외치게 되는 순간 충동이 개입하게 된다. 여기서 충동의 대상은 ‘상실(loss)’ 바로 그 자체이다. 『시차적 관점』에서 지젝은 이러한 상실을 구멍(hole)이나 간극(gap)이라 부른다. 이 구멍 주위를 맹렬히 순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충동이다. 속된 표현으로 우리의 ‘뚜껑이 열리게 하는 어떤 메커니즘’이 곧 충동이 작동하는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은 문자 그대로 욕망에 대한 반대운동이며 불가능한 충족을 위해 애쓰거나 그것을 포기하도록 강요받거나 잔여물로서의 부분적인 대상에 고착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충동은 우리가 개입하고 있는 모든 지속성을 파괴하고 그곳에 철저한 불균형을 도입하려는 바로 그 충동이며 충동과 욕망의 차이는 욕망 안에서 이러한 상처, 즉 부분대상에 대한 이러한 고착화는 말하자면 “초월되고” 사물의 공백에 대한 대체물로 전환된다는 데 있다. 한편 충동은 그 대상이 사물에 대한 대리물이기 때문에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충동이 이른바 실패를 승리로 뒤바꾸기 때문에 그렇다. 충동 속에서 목표에 도달하려는 바로 그 실패와 이러한 실패의 반복, 즉 대상 주위를 끝없이 선회하는 것은 그 자체의 만족을 생성한다. 라캉이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충동의 진정한 목적은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를 끝없이 순회하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2009, 132).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M과 그 아이 사이에서 보이는 기본적인 역설은 서로가 잘 지내고자 하는 욕망의 차원이 어떤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그들의 본능과는 전혀 다른 충동의 터널이 열렸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이 인간의 차원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 동물보다 성찰적이라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결정짓는 중요한 동기가 있다. 지젝에 의하면, “‘인간화’의 0도는 동물 행동이 보다 심오하게 ‘매개’된 것, 즉 보다 높은 차원의 총체성의 종속계기로서 재각인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의 정신적인 잠재력을 함양하기 위해 먹고 자손을 낳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느끼게 되는 폐쇄적이고 자기추진적 원환에 포착될 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마티, 2009, 130f.).
그 아이가 어둠 속에서 머리빗을 들고 집단에 속한 아이들을 향해 “다 죽여 버릴 거야!”라며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에서 살인의 충동을 다각도로 조명했던 데이비드 버스의 말이 떠올랐다. “때로 살인이 분노, 질투, 시기와 같은 강렬한 감정들에 의해 유발되기는 하나, 그렇다고 감정이 분별력을 흐려 놓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핵심은 ‘격정은 다분히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부분적이나마 ‘되갚으려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 사이언스북스, 2006, 33). 이에 대해, 영화 <똥파리>에서 상훈의 다음 대사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니가 그렇게 싸움 잘해? 니가 그렇게 똑똑해? 아무리 싸움 잘하고 똑똑한 새끼도 우물쭈물하다가 뒈지는 거야. 난 우물쭈물한 새끼들 보면 아주 죽여 버리고 싶어. 생각나면, 나 안 죽으려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 병신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알았어?(양익준 <똥파리> 상훈의 대사 중에서)
그러나 상훈이 죽음을 맞는 것은 유일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그 순간이었다. 영재에게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닦달하던 상훈은 결국 ‘우물쭈물하다가’ 늘 자신의 폭력대상이었던 채무자에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고 현기증을 느끼는 순간, 폭력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갈 영재에게 치명타를 맞고 쓰러진다. 충동은 생과 사의 사이클을 뛰어넘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동물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철저히 기계적인 반복행위일지 모른다. 상훈은 그러한 충동을 붙잡아둠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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