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서일지 (2024.06.04~06.25)*
-9일차 : 6월 14일 금요일
욕망은 온전히, 살고자하는 사람의 몫
-이선영의 시집 《60조각의 비가》을 읽으며
1
이미지들, 내 입으론 안 불어지는
-이선영
나는 내 시의 팔레트에
내 삶을 덩어리째 던져 넣지만
그들은 그들 시의 피사체에
이미지만을 던져 넣는다
팔레트는 탁하게 번져 가고
내 삶의 튜브는 쭈글쭈글해졌지만
그들의 피사체는 아직 양파 껍질 속에 있고
이미지는 그들의 렌즈 안에서 입혀지기 위해 대기 중이다
그리고 그들 삶은 다른 곳에서 동시 개봉 중이다
그것은 무적의 신권 지폐처럼 빳빳하다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미지를 던져 넣고 이미지를 덧입히며
놀이처럼 뻗어 나가는 이미지의 리좀에
나는 이 비곗덩어리 육질의 삶을 덥석 들이밀었던 것이나,
이미지의 토끼적 증식에 한낱 거북이 발자국을 남긴 모양새가 되었던 것인데
이미지 대열에 편승하지 못한 낙오자가 되어서
삶을 삶으로가 아닌 삶을 이미지로, 이미지를 이미지로!
제발 삶은 삶대로 살고
시는 이미지만 물비늘처럼 반짝 건져 올려!
나는 쭈그려 앉은 저 계단참의 대걸레처럼
두 팔 가랑이 벌린 녹슨 가위처럼
줄 거 다 준 지 오래인데
책상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며
이미지의 버블껌을 불어 봐!
이미지의 휘파람을 날려 봐!
아, 내 입은 버블껌도 안 되고 휘파람도 안 되고
이미지놀이 그림자놀이 불가!
자, 그러니 내 이미지는 내 살을 엷게 회 떠서 한 점씩 날리시압!
*이선영 시집, 《60조각의 비가》에서
<斷想> 이 시를 읽다보니 중학교 시절 국어 수업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께서 “오늘 배울 부분, 책 읽을 사람?”하면 “저요! 저요!”하며 너나없이 모두 책을 읽겠다며 손을 들어올린다. 책을 전 학급생에게 들으란 듯 큰 소리로 읽고 나면 읽은 학생에게 선생님께서 항상 던지는 질문이 있다. “무슨 내용이냐?” 태반은 답을 못한다. 읽으면서, 더군다나 학급의 전 학생들 앞에서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추려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의 불호령은 어김없이 떨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이 작품 <이미지들, 내 입으론 안 불어지는> 또한 마찬가지다. 날 것처럼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만도 벅찬데, 고급의 철학적인 ‘이미지’가 다 웬 말인가. 글줄 깨나 읽고 철학적 사색을 하네, 시를 쓰네 하며 그것만이 삶의 정수인 듯 ‘이미지’를 내놓으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일상을 맨 땅에 헤딩하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시인 못지않게 치열하긴 마찬가지라.
소위 진보라는 이미지(?)하에 생의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며 잘난 체들 하지만 차라리 내 몸을 회 떠서 살신성인할테니! 징하기도 너무 징한 이 삶의 굿놀이의 끝판이자 막장같은 삶의 슬픔이여! 시 제목처럼 우리네 삶의 비가(悲歌)인 것이니.
2
생명의 본질은 욕망이다. 우주는 다른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는 한 지구를 제외하곤 그 어떤 욕망도 발견할 수 없다. 욕망을 수반하지 않는 기계적 운동만 반복하며 수많은 질서의 비밀을 안은 채 팽창할 뿐이다. 억겁의 시간과 손에 잡히지 않는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우주 공간 안에서 유일한 생명체로 인식되어지는 지구별은 그 자체로 고독이자 슬픔이다. 그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사유하는 그 인간이라는 종족의 유별한 고독은 지독한 슬픔이자 지독한 비가(悲歌)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