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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희말라야 라다크에 다녀오다.
라다크는 파키스탄과 중국을 접하고 있는 국경지역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이 일어나 전쟁을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가는 곳마다 대규모의 병영이 있다. 일반인보다 군인이 훨씬 많은 주가 라다크 주이다. 우리로 치면 군단규모의 병력이 되겠다. 오래전 라다크는 티벳트(토번국)의 일부였다가 천 년전에 독립했다. 지금도 종교적인 풍습이 티벳트와 같고 주민들은 얼굴색이 티벳트 인과 유사한 몽고로이드였다.
8월 5일
델리 공항에서 가까운 플라자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에 들어가는데 검색이 까다로웠다. 공항의 검색대 수준이었다. 짐을 엑스레이 투시기에 올려놓고는 금속탐지기로 몸을 조사한 뒤 호텔 로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도에서 가끔 발생하는 테러에 대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직원들이 메리골드 화환을 목에 걸어주어 기분이 풀렸다.
다음날 델리 공항에서 일찍 출발하여 레 공항에서 내렸다. 레는 라다크의 주도 이다. 라다크는 넓이가 남한 정도되지만 인구는 25만이고 주도 레는 이만오천의 작은 도시이다. 라다크는 델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반 정도 위에 있는 인도의 북서쪽 산악지방이다. 파키스탄과 중국(티벳트) 과 국경 접한 지역이고 희말라야 산자락이다. 레 공항에 내리니 날씨는 덥지는 않은데 고산증을 느꼈다. 약간 메스꼅고 숨쉬기가 거북했다. 레가 해발 3500미터의 고산 지역이다. 평지에 살아왔던 사람들이 고도 3000미터 이상에 오르면 고산증을 느낀다. 호텔에 짐을 내리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시내 관광을 나섰다. 물을 많이 마시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 것이 고산에 적응하기 위한 워밍업이다. 차를 타고 산중턱에 있는 콤파(사원)에 올랐다. 레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이 온통 고산으로 둘러쌓인 고원 도시이다. 레에 육로로 들어오려면 5000미터 이상의 재를 넘어야한다. 육로로 들어오는 것은 여름철인 6,7,8,9월 까지만 가능하다. 그 이외에는 눈이 쌓여 육로로는 들어올 수가 없다.
온통 사막의 풍경이다. 누런 바윗돌과 경사지에는 모래가 싸여있다. 강물이 흘러가는 좌우로 초목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사막의 기준이 연강우량 250미리인데, 라다크 지방의 강우량은 125미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도 아주 건조한 사막이다. 인도양에서 몰려오는 비구름이 아셈지방에서 희말라야 산맥에 부딪쳐 비를 내리는데 세계에서 최고로 강우량이 많은 지역이다. 아셈지방의 연간 강우량은 10,000미리에 이른다. 대부분이 비구름은 아셈지방에 머물고 극히 일부만 거대한 산맥을 넘어오기 때문에 라다크 지방은 아주 건조한 사막이다. 이들은 고산에서 흘러내리는 빙하 녹은 물 덕에 산다.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에서 발원한 강물이 인더스 강으로 흘러가는데 레의 주민들은 이 강물을 먹고 산다. 5,000미터 이상의 고산에서 빙하가 흘러내려 강물을 이루고 라다크인 들은 이 강가에서 밀과 보리를 심고 양과 야크를 기르며 살고 있다.
이 고립되고 폐쇄된 지역이 세상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사십여 년도 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그렸던 이상향인 샹그리라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지방이다. 사람들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고원지대이고, 주민들이 순박하고, 마을 단위로 공동체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곳이다.
사원과 레의 옛 왕조의 궁전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8월 6일
라다크 히말라얀 호텔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출발 준비 완료. 차로 이동을 하다. 인더스 강과 잔스카르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다.
좌측 윗부분에서 흘러내리는 강이 잔스카르 강이고, 우측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물이 인더스 강이다. 잔스카르 강이 본류인 인더스 강에 합류하는 두 물 머리인 셈이다. 인더스 강은 티벳의 성산 카일라스에서 발원해 흘러 내려온다. 우리여정은 잔스카르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은 골짜기마다 물을 모아서 이렇게 용트림을 하며 흘러가고 있다.
차로 갈 수 있는 마지막에서 내려 강을 건넜다. 몇 개월 전만해도 수동케이블 카를 타고 건넜지만 지금은 다리가 완공되어 쉽게 건널 수 있었다. 강건너 텐트가 우리나라 옛 모습으로 치면 나루터 주막집이다. 우리 가이드는 TEA TENT(차 마시는 텐트)라 불렀다. 티텐트에서 차 한 잔 씩 마시고 가져온 도시락을 먹은 후, 칠링(Chilling)에서 라다크 밸리 대 장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사막의 오후 땡볕에 가도가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이다. 곳곳에 불탑인 스투파가 있고 마니차가 있다. 우리 현지인 가이드 라왕은 마니차가 있는 오두막을 지날 때마다 마니차의 손잡이를 잡아서 한 바퀴씩을 돌리고 나왔다. 앞으로 무사한 여정을 기원했을 것이다. 두어 시간 오르니 고갯마루가 나왔다. 고갯마루에 오르면 룽다가 펄럭이고 있었다.
룽다는 티벳인들의 민속 신앙이다. 지금은 우리의 생활에서 사라졌지만 성황당의 돌무덤이나 같은 것이다. 오색깃발에 경전이 써있고 부처님 말씀이 바람따라 멀리 전파되기를 기원한다. 개인의 소망과 무사태평을 비는 마음이 룽다에 걸려있다.
저 아래 계곡에는 푸른 초목지대가 보였다. 초목이 우거진 가얀 마을에서 쉬다. 오후 네시 경 스키우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우리 짐을 날라주었던 포터들은 이미 캠프장에 도착하여 일인용 텐트를 쳐 놓았다. 미루나무와 갯버들이 그늘을 이루고 있는 강변언덕에 텐트촌이 만들어졌다.
우리 짐을 날라 주었던 말이 열여덟 필이었고, 현지인 스탭이 7명이었다. 가이드 2명, 마부 2명, 요리사와 보조 요리사 그리고 두명의 도우미2 명
갯버들의 꽃술이 어지럽게 바람에 날라 다니고 있었다. 식당과 주방 그리고 좀 구석진 곳에 간이 화장실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스키우 해발 3,380미터 우리가 묵었던 레보다 고도가 낮다. 텐트 안에 들어가 짐을 풀고 침낭을 피고 누워보면서 혼자만의 작은 공간에 파묻히는 아늑함을 느꼈다. 이십대에 캠핑을 몇 번 가보곤 이번이 처음인데 새삼스럽게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강물소리. 말들의 울음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8월 7일
밤새 비가 왔다. 비가 흔하지 않은 곳인데 이번 여행의 축복인가 아니면 불편함이 될 것인가. 아침 든든히 먹고 길을 나섰다. 오늘 여정은 18키로 걸어서 고도 500미터를 올려 3,800미터에 오른다. 어떤 여정이 전개될 것인지 긴장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일곱시에 출발하여 세 시간을 걸었다. 구름이 있어 날씨는 덥지 않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러 걷기에는 좋다. 고산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간 메스껍고 소변을 아주 자주 본다. 거의 십 분 간격으로. 오전 열한시쯤 가이드에게 다이나막스(고산병 치료제)를 달라하여 먹었다. 곳곳에 게스트 하우스가 있고, 새로 게스트하우스를 짓고 있었다. 버드나무 숲을 지나서 작은 고개를 넘어서니 티 텐트에 일행이 자리를 잡고 점심 먹을 차비를 하고 있었다. 점심 도시락은 샌드위치와 닭다리, 계란, 못생긴 사과나 바나나와 초코렛이 비닐팩에 들어 있고, 별도로 음료수가 하나 씩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티텐트 주위에 오지에서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풍경이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오후 내내 우의를 거의 입고 걸었다. 어제 비에 강물이 제법 불었다. 다리가 부셔져 신을 벗어들고 강을 건넜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고 발바닥이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수천년 전부터 중국과 인도를 오가던 실크로드의 대상들이 다녔던 길이었고, 당나라의 현장이나 산라의 고승 혜초가 인도에서 불법을 배워 당나라와 신라에 불법을 전파했던 구도의 길이기도 했다. 벼랑위로 오래된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벼랑을 깎아서 만든 잔도였다. 해로가 개척이 되면서 실크로드를 다녔던 대상들은 사라졌고, 이제는 여행객들만이 이 힘든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오늘 캠프를 나설 때 확인해보니 전선은 보이지 않았다. 전기와 통신이 되지 않은 지역을 걷고 있다. 2l세기의 문명과 단절된 외진 곳이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간다. 심신이 지쳐갈 무렵 고개를 넘으니 캠프장이 나온다. 우리가 묵을 캠프장으로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는데 앞으로 한참이나 더 가야된단다. 길고 지친 하루였다. 텐트에 도착하니 우리를 도와주는 현지인 스탭들이 먼저 도착하여 텐트를 쳐놓고, 수박을 잘라놓고, 손에 찻잔을 건네며 맞이하고 있다. 마카의 캠프장이었다.
8월8일
밤새 비가 뿌렸다. 현지 가이드에 일기분석에 의하면 6년 만에 맞는 드문 비라 했다. 어제 비옷을 입었지만 신발에 빗물이 들어가 걷기에 불편했다. 등산화에 화장지를 채워 넣어 물기를 빨아냈다. 신발에 비가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스패치를 차고 길을 나섰다. 마카에서 토춘체 까지 가는 길이다. 거리는 12키로 고도는 4,350까지 550미터를 올라간다. 어제보다는 여정이 여유가 있어 여덟시에 출발했다. 열 시 반에 옴롱의 툴마 휴게소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다.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티텐트 휴게소에는 음료수와 과자류를 팔고, 그들이 양털로 직접 짜 만든 모자, 장갑과 작은 수공예품을 판다.
옴롱의 툴마휴게소가 주민들이 사는 마지막 휴게소다. 그 위로는 목동들만이 가축을 거느리고 있다. 목동들이나 여기 휴게소의 주민들이나 여름철이 지나면 아래 본가로 내려간다. 그들이 여기에 머무는 기간은 고작 삼개월 반이나 사 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어제 이후로 비는 간간이 내렸다. 비옷을 입었다 벗었다 를 반복했다. 좌우로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6,000미터를 넘는 준봉들이다.
한카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까지 잔스카르 강을 따라왔고, 여기서 갈라져 우리는 지류를 따라 올라갔다. 오후 일정이 힘들었다. 높은 고개를 대여섯 개나 넘었다. 비스듬한 경사지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했다. 일행 중에 고산증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숨 쉴 수 있는 산소량이 적고, 기압이 낮아져 생기는 증상이지만, 사람마다 나타나는 증상은 다르다. 구역질이나 음식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고, 머리가 아프고, 배탈 설사를 하고, 밤에 잠을 못 자는 등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이런 것이 겹쳐 무기력증이 생기는 데, 한 발자국 옮기기가 힘들 정도로 무기력해진다. 나는 고산에 오면 나타나는 빈뇨증상이 있다. 거의 삼십 분 간격으로 요의를 느꼈다. 평소에도 과도한 긴장을 하게 되면 오는 빈뇨증상이 있는데 그 빈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 내가 고산에 와서 느꼈던 아주 불편한 변화였다. 이것도 고산증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저녁을 먹고 식당 텐트안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비가 내렸다. 엊그네 내렸던 비와 달랐다. 천둥 번개가 동반한 폭우였다. 비에 젖게 되면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아 비가 우선하기를 기다렸다. 거센 바람에 식당 텐트의 폴은 휘청거리고 텐트 안으로 물이 배어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사이 우리 대원 한 사람은 물줄기가 텐트를 덥쳐, 그 빗속에 텐트를 통째로 들어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폭우는 한 시간 가량 지나서 가늘어졌다. 캠핑장 아래로 흐르던 계곡물은 소리가 달라졌다. 그 사이 골짜기에서 모여든 물이 한물이 되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바윗돌에 부딪치며 흘러내려갔다. 거대한 대자연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폭우에도 잠자리가 펴진 텐트에는 비 한방울 스며들지 않았다. 텐트는 가벼우면서도 성능이 좋았다. 물소리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며 두려움 속에 잠자리에 들었다.
8월 9일 토춘체에서 니말링까지 7키로 이동 고도 4,730미터
이번 트레킹에서 처음으로 숙면을 취했다. 7 시간을 잤다. 몸이 가볍다. 출발 전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가이드는 절대로 무리한 자세를 강요하지 않았다. 고산병은 어디에서 올지 모르니 조심을 하라 했다. 일정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은 여기가 하산의 마지막 포인트라고 했고,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가면 하산이 어렵다고 했다. 일행 중에 중도 하산할 사람은 없어보였고,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어제의 폭우에 강을 건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들었다. 그 날 칠링에서 트레킹을 출발하기로 한 팀이 강물이 불어 뒤돌아섰다는 것을
여덟시에 출발 했다. 캠프 주위에는 목부들이 있었다. 저녁 때는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 넣었고, 당나귀가 밤새 울었다. 당나귀는 비가 오지 않을 때 텐트주위를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오르막길에 올라섰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후미를 따라 갔다. 물길을 저 아래로 멀리하고 산길을 올라섰다. 그 동안의 여정 중에서 가장 가파른 산길이었다. 한 시간여 걸었는데 300미터 이상 올랐다. 고갯마루에서 넉넉히 쉬고 다시 길을 나섰다.
출발 한지 몇 분 안 되었을 때였다. 몸에 무기력증이 밀려왔다. 고산증이 온 것이다. 고갯마루에 오를 때 갈증이 심했는데 포터에게 맡긴 물이 도착하지 않아 갈증을 억지로 이겨내고 고갯마루에 올랐는데 그 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발자국 띠기가 힘들었다. 제일 뒤에 처져 다리를 끌다시피 간신히 다음 휴식 장소까지 갔다. 열시 반이었는데 벌써 점심 도시락을 꺼내들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산자락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십여 분 누워 있다가 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만약 여기에 허기까지 겹친다면 그때는 절망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이제 하산할 기회도 놓쳐버렸고 아무도 나의 여정을 도울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익었지만 감자가 입에 맞았다. 옆 사람 감자까지 달라 해서 허기를 채우고 샌드위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도로 배낭에 넣었다. 다른 대원들은 벌써 출발하여 저기 고갯마루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대열의 후미가 보일락 말락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지인 보조 가이드 라왕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따라오고 있다. 든든한 사람이었다. 여성대원의 배낭과 본인의 배낭을 앞 뒤에 매고 따라오며 나를 돕고 있다. 삼분 걷고 오분 쉬고 언덕을 올랐다. 완만한 경사였지만 가도 가도 오르막길은 끝나지 않았다. 이미 대열의 후미는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라왕이 손짓을 마지막 언덕이라며 손짓을 했다. 간신히 고갯마루에 오르니 내리막길이었고, 고원에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한 쪽에 우리 텐트가 보였다. 안도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지만 그러면 내일은 또 400미터를 더 올라가야하는데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어떻게 되겠지’하는 낙관도 할 수 없었다. 매일 고산병예방약(다이나막스)를 먹고 몸을 다스리고 나면 고산병이 다시 도졌다. 내일 일정이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었다.
캠프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니 간식으로 라면이 준비되었다고 식당으로 오란다. 계란 풀어서 약간 퍼지게 라면을 끓였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다. 한 그릇을 먹고 더 달라 해서 먹었다. 국물까지 다 마셨다. 최근 십년이내에 가장 맛있게 먹은 라면이었다.
오후 시간이 넉넉했다. 여행사에서 준 고산적응 처방대로 물을 계속 마셨고, 캠프 주위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옆 캠프에 가보고, 목부들의 숙소에 들려 “줄레”하며 인사를 나눴고, 야크들 풀 뜯는 초원에도 다녀왔다.
8월 10일 니말링에서 콩마루라를 넘어 촉도까지: 5,150미터의 높은 고개를 넘다.
킹야체(6,400미터)의 만년설
여덟 시에 출발 했다. 날씨 쾌청하고 바람 상쾌하다. 킹야체는 구름에 덮혀있다. 어제 수없이 바라보았던 첫 번 째 고개를 넘었다. 한 시간 이십분 정도 걸렸다. 지금은 완만한 경사를 오르고 있다. 아직 까지 이상 징후가 없이 잘 견디어왔다. 지금 같이 자주 쉬고 호흡을 조절하며 간다면 무리 없이 콩마루라를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명이 뒤처져 마지막 고비에 힘겨워하고 있다. 등정 팀에서 마지막 고비를 돕기 위해 말을 한 필 준비했다. 힘겨운 사람들은 어깨에 매고 가는 배낭을 맡기도록 했다. 여인들만이 배낭을 맡겼다. 남자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배낭에 있었다. 호주에서 왔다던 여인이 눈치 빠르게 배낭을 한쪽에 밀어붙이고는 말에 올라탔다. 손을 흔들고 룰루랄라 올라가는 모습에 일행들 모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선두 그룹에서 마지막 경사를 올라가는 것이 멀리에서 보였다. 곧 이어 중간 그룹이 올라가고 있다. 하얀 자켓이 눈에 익다. 여인들 중에서 가장 젊다고 해서 막내라고 불리는 여인이다. 마지막 굽이를 돌아가고 있다. 나도 마지막 급경사에 올라섰다. 삼 분 걷고 오 분 쉬고 차근차근히 올라갔다. 경사가 완만한 곳에 도착하여 숨을 골랐다. 고갯마루에 오색의 룽다가 펄럭이고 있었다. 어제 보다는 훨씬 수월케 고갯마루에 올랐다. 매일 밤 두려움으로 그려왔던 라다크 밸리 트레킹의 고빗사위를 이렇게 넘게 되었다. 고갯마루 룽다 앞에서 묵도를 올렸다. 저 펄럭이는 깃발에 수많은 구도자들과, 대상들과 , 여행자들의 염원이 담겨있을 것이다.
산을 내려왔다. 고산의 모든 부담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내려갈수록 몸은 정상으로 돌아간다. 급경사를 내려왔다. 고도가 팔백여 미터 낮아졌다. 그 다음은 완만하게 계곡을 따라 갔다. 개울물을 수없이 건넜다. 물에 빠져 흠씬 젖기도 했다. 오후 세시쯤 촉도에 도착했다.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었다. 나흘 만에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일행과 작별을 했다, 우리는 별도로 판공초호수를 보고 가기로 예약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6시간을 달렸다. 120키로. 우리나라 도로 사정으로는 두 시간 잡으면 넉넉한 시간이었지만 여기 도로 사정은 아주 열악했다. 대부분이 비포장이고 1차선의 좁은 도로였고, 해발 5,370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했다. 밤 아홉시 넘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럭셔리 텐트에 들었다. 그 동안 숙영했던 텐트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더블 침대가 둘, 화장실 사워실이 있고, 이중으로 되어 있어 프라이버시도 보호되었다.
8월 11일 판공초호수
곤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새벽녘 고향이 꿈에 나타났다. 오십여 년 전의 고향 안터의 모습이었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계셨고, 동네의 어른들이 그 모습 그대로 였다. 지금은 환갑이 지나 버린 친구들의 어릴 적 모습도 나타났다. 어제 고산의 거친 골짜기에서 앞으로 닥쳐올 몇 십 분 후를 두렵게 기다렸는데 마음이 편안하니 고향이 떠오른 것이다. 행복하고 편안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호숫가로 갔다. 호수 물맛을 보니 조금 간간했다. 바닷물보다는 싱거웠다. 오래 전 희말라야는 해저였다. 대지각변동의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원지대가 된 것이다. 그 때 바닷물이 고여서 호수가 되었고, 오랜 세월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로 희석이 된 것이다. 앞으로 더 세월이 흐르면 이 싱거운 맛도 없어질 것이다. 판공초는 해발 4,400미터에 있고 물고기가 살지 않는 소금기 있는 호수이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을 판공초 호수에서 보내고 귀국했다.
라다크에서 최고급 가이드 라왕, 나이 28세, 집은 레에서 200키로 떨어진 먼곳에 있다. 관광철(6,7,8,9)4개월만 레에서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와 판공초 호수 까지 같이 했다. 겸손하고 솔선하는 좋은 청년이었다. 하루 가이드 팁이 10불이다. 배로 처주었는데 서운하지 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첫댓글 자랑스러운 친구 준태 시종 걱정을 하면서 기행문을 읽었다..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구나..
카톡에서 대충 읽었지만 한가로운 시간을 이용해 다시한번 큰 화면을 띠워놓고 사진도 감상하며 재미있게 여행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사고를 칠지 ....
사고 그만 처야제. 고산은 그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가더라도 3,000미터 이상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