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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주님생각
주님, 저에게 계시가 필요합니다.
2006. 1. 10.
전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천국에 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이름(계 2:17)을 지어주실 것인데 그 새 이름은 그 사람의 전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이름이 그 사람이잖아요. 하나님 나라에서 새 이름은 그냥 그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를 부르는 이름이 아니고 실제로 그 이름이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전체를 그대로 표현해주는 이름! 그 사람의 전체를 그대로 대변해주는 이름! 주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그렇습니다. 열국의 아비, 반석처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새 이름입니다.
그런데 새 이름은 영원히 비밀입니다. 새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이유(계 2:17下)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천국의 사람들은 다 겸손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아무도 자기 이름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천국에서는 우리가 서로 다 알게 되겠지만 주님과 우리가 제일 친밀하기 때문입니다. 새 이름은 주님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실 때 사용하시는 이름입니다. 마치 신방에는 신랑과 신부만 들어가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만 부르는 이름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그 어떤 사람과의 관계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고 은밀하고 절대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이름을 아는 것으로부터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름으로도 안다는 말은 지나가면서 피상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깊이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은 계시가 없으면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당신을 열어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고 선택해서 다른 사람과 다르게 내 자신을 네게 열어보였다." 특별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이름이 새 이름인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제가 천국 가서도 여전히 변승우로 알려지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절 보실 때는 변승우가 아닐 것입니다. 변승우라는 이름은 그냥 저를 다른 사람과 구분 지을 때 사용되는 이름이지 저를 완전히 표현하는 이름은 아닙니다. 저를 완전히 표현하는 이름을 제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를 부를 때는 "네가 나를 잘 알고 내가 너를 잘 안다. 네가 나를 깊이 아는 것 이상으로 내가 너를 더 깊이 안다. 네가 내게 관심이 있는 것 이상으로 내가 네게 관심이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가 너를 사랑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이 땅에서의 직분 또는 사람들의 평판도 이름이라 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이름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어떤 기름부음을 받았든지, 신유의 기름부음을 받았든지 예언의 기름부음을 받았든지 사도 혹은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았든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가서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이름은 추한 이름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받는 새 이름이 추한 이름이라면 우리는 지옥에 갈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다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주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주님과 시간 보내며 교제하면서 점점 아름답게 변하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기도는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깨어있는 것은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닮는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님이 보실 때는 그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름은 아름다운 이름이 될 것입니다. 그때 더 아름다운 이름을 받고 그때 더 아름다운 이름으로 주님께로부터 불려지는 것이 이 땅에서 어떤 기름부음을 받고, 어떤 능력을 받고, 어떻게 크게 알려지고 쓰임 받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깊이 닮게 되어 주님 앞에 갔을 때 최고로 아름다운 이름을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오른 편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받는 자가 앉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개인적인 이름으로 부를 때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받는 자, 가장 빛나고 맑고 정결하고 정감 있고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림을 받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서 아름다운 이름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예수님의 우편에 앉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그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은 모든 미의 근원이신 가장 아름다우신 주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또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가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주님의 우편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전 7:1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예수님은 짐승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는 날 온 인류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온 인류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여관도 하나 잡지 못하고 짐승의 분뇨 냄새가 나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출생하는 날은 그랬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칠천 년이라면 칠천 년을 다 합한 것보다 위대한 날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으로는 측량할 수 없고 영원이라는 개념으로나 측량할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날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헤롯은 왕궁에서 존귀하게 태어났으나 그가 죽을 때는 교만해져서 충이 먹어서 죽었습니다.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나아야 성공입니다. 꼭 태어난 날, 죽는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야 합니다. 다음 주가 이번 주보다 나아야 합니다. 다음 달이 이번 달보다 나아야 하고 내년이 올해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러면 낫다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경제를 생각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물질의 부요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은혜를 받아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날마다 새롭다는 말은 더 예수님을 닮는 것, 주님의 은혜가 와서 더 온유해지고 더 거룩해지고 더 겸손해지고 더 긍휼을 갖게 되고 더 사랑을 갖게 되고 더 희생하게 되고 고난 중에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배반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려고 했는데 그때 모세의 온유함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온유함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서 죽이시겠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해서 죽이시겠다는데, 그리고 "너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는데 모세는 그 앞에서 금식하면서 "차라리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 이름을 지워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초자연적인 온유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쳤다고 가나안에 못 들어갔는지 아십니까? 그 정도 온유함 속에 들어간 사람이 혈기를 낸 것은 다른 사람이 혈기를 낸 것과 죄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그의 흠보다는 그의 위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고 높게 평가했으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기대치를 그에게 가지고 있었으면 모세가 살인죄를 짓거나 간음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공금을 횡령한 것도 아닌데,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뿐인데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셨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치 히브리서 6장에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단계를 거친 사람이 그런 죄를 지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기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젖먹이가 잘못한 것하고 어른이 잘못한 것하고 같습니까? 젖먹이는 잘못해도 다 예쁜 것입니다. 때릴 것이 없습니다. 젖먹이가 똥 쌌다고 때리겠습니까? 아이들은 잘못을 해도 교도소에 안 갑니다. 그러나 같은 죄라도 어른이 지었으면 교도소에 갑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일 큰 심판을 받을 사람은 사도들이고 선지자들이고 목회자들입니다. 죄질이 다른 것입니다. "지면 위의 모든 사람들보다 그의 온유함이 승했다." 모세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정을 했으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고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과 친밀해질수록 우리의 짐은 커집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지켜야 할 계명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출생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더 나아야 하는데 죽는 날이 더 나으려면 날마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나아지는 것입니다. 태어난 날보다 죽는 날이 더 나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진짜 나쁜 사람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사람을 좋게 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충성했지만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거기다 사울은 귀신까지 들렸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짜 선택한 사람은 자기 자신인데 자기가 마땅히 앉아야 할 자리에 사울이 앉아 있고 사울에게 있던 기름부음은 다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종이라 하지만 실제로 성령은 떠나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 권위 아래 철저하게 복종하고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도 옷을 약간 베는 것만 해도 마음이 찔리는 그 겸손!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가장 겸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일 자로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겸손을 보고 그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겸손한 자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사회에서 가장 높아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겸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말씀을 갖든, 은사를 갖든, 심지어는 사랑이 많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못 됩니다. 겸손이 있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한 예언을 한 사람도 아니었고 하늘에서 불을 내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지도 않았고 죽은 사람을 살리지도 않았고 엄청난 표적이나 기사를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자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세례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 11:11, 눅 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큰 자는 주님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만주의 주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예언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눅 1:15) ‘사람들 앞에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광인처럼 볼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주님 앞에 큰 자가 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입니다. 왜? 주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자기를 비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 2:8) 주님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있는 상태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은 하나님이신 그분의 자아를 비워 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닮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비웠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서 취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입지도 않았고 좋은 음식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좋은 집에서 잠을 자지도 않았습니다. 결혼하지도 않았고 많은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장 과정에서부터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었습니다. 광야에 거하면서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을 먹고 당시 서민의 옷감으로도 쓰지 않는 약대 털옷을 걸쳐 입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좋은 사택을 제공한 것도 아니었고 사례비를 많이 제공한 것도 아니었고 좋은 자가용을 제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아무것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왔을 때 그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다 내어드렸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했을 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그 친구가 기뻐하는 것처럼 나는 그런 기쁨으로 충만하였도다."(요 3:30) 사람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님께 간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기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고도 금방 알아봤습니다. "제가 오히려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엘리야의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 꿰뚫어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온 것처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심령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심령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지만 이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이 있고 음란하고 시기하고 혈기를 부리고 싸우는 다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봤을 때 예수님은 점도 없고 흠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봤을 때 그는 독생자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성품을 보고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세례를 주는데 이분을 봤을 때 회개할 사람은 내 자신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분에게 회개하라고 세례를 줄 수 있겠는가?"
저는 세례 요한이 당시에 죄를 짓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전히 거룩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완전 하라.”(마 5:48)고 한 그 완전에 분명히 도달해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무슨 죄에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도 같은 겸손이 아닙니다. 사랑도 같은 사랑이 아니고 거룩도 같은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이 같은 것이라면 천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스랍 천사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면서 완전히 하나님의 거룩에 압도당해서 영원히 "거룩하다, 거룩하다"(사 6:3, 계 4:8)를 외치면서 찬양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룩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9) 우리가 사랑으로 충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미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도 온유에도 겸손에도 거룩에도 정직에도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무한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이것을 본 것입니다. 거기서 세례 요한이 압도를 당해서 "제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철저하게 비운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큰 자들의 특징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능력을 받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상급 받을 때 돈 열 냥 줄 것을 열한 냥 주는 식으로 상급이나 조금 왔다 갔다 하는 것일 뿐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들은 모세의 온유함에 나타나는 것처럼, 다윗의 겸손에 나타나는 것처럼, 세례 요한이 자기를 비우는 것에 나타나는 것처럼 도저히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그런 깊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진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큰 자인 것입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려면 그 중간 날들 속에 우리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결국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닮은 것이 상급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을 닮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한 것, 하늘에 보화를 쌓은 것은 상대적으로 하늘에서 별로 무게가 나가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느냐 하는 것이 천국에서 그 사람의 지위를 실제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샨 볼츠의 입신 간증을 보면 세계적으로 쓰임 받은 사람들은 뜰에 있고 성소에 있는데 주님을 깊이 사랑한 어떤 여인은 한 일도 없는데 지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네가 날 위해서 뭘 얼마나 했느냐?"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고 무엇을 얼마나 바친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천국 갔을 때 주님은 그 사람 자체를 보시는 것입니다. "야, 너 참 마음에 든다." 그 사람 속에 평생을 통해서 깨어지고 낮아지고 용해된 그 겸손이나 온유나 거룩이나 정결함이나 사랑이나 섬김이나 자기 부정을 보십니다. 사람은 서로 비슷해야 끌리지 않습니까? 성격이나 취향이나 사상이 같아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런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람은 다 죽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살기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멸망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기 위해서 살면 살고 살기 위해서 살면 죽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삽니다.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이 땅에서 큰 교회 세우고, 이 땅에서 은사와 능력을 받아서 큰 사역하기 위해서 삽니다. 사람들은 다 살기 위해서 사는데 이것 때문에 죽습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 죽는 날 잘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주님 앞에 서서 칭찬 받기 위해서, 인정 받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사람의 평판은 생각하면서 주님의 판단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잔치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초상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초상집에 가면 우리가 잊었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시체가 설교를 합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설교를 합니다. 화장터가, 무덤이 설교를 합니다. 예배당에 앉아있는 시간 이상으로 초상집은 거룩한 곳입니다. 예배 시간 이상으로 초상집에 있는 시간은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시간입니다. 초상집에 가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말씀의 골자는 이 세상, 현세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 누가 보이는 것을 원하겠느냐? 우리는 이 땅에서 살지만 땅의 것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유한한 시간을 영원에 투자해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을 영원에 투자해야 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에 투자해야 합니다. 유한한 시간을 영원에 투자하는 지혜로운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리의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 너무나 많은 것을 비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지혜 있는 자가 이 세상을 얻고 이 세상에서는 재주 있는 자가 세상을 얻고 목회자들까지도 교회가 부흥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얻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것이 우리 영 속에 들어오면 안 되는데, 주님을 위해서 완전히 비워져야 할 자리, 바로 주님의 지성소! 주님의 보좌! 주님만을 위한 밀실! 우리의 영 속에 세상 것이 들어올 때가 많습니다. 교만, 욕심, 이기심이 들어오고 돈, 명예, 성공이 들어오고 세상 것이 비집고 들어올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비우셨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기를 비우지 못했는지요. 얼마나 주님과 큰 차이가 나는지요.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 서로 건너갈 수 없는 것처럼, 마치 그처럼 주님과 우리는 차이가 나고 주님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지요.
아버지, 모세와 다윗과 세례 요한은 그 구렁을 가까이 건너갔지만 우리는 아직도 반대편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반대편에 있으면서 거기서 남보다 조금 더 겸손하고, 온유하고, 거룩하고 거기서 남보다 조금 더 사랑이 많다고 그것을 자기 의로 삼아서 자기가 진짜 겸손한 줄, 온유한 줄, 정결한 줄 알고 자기가 진짜 사랑이 많은 줄 알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빛을 비춰주옵소서. 우리의 얄팍한 겸손이나 우리의 얕은 온유, 거룩,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각 성품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알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깨닫지 못할 때 하나님의 충만한 것이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주 부분적인 것을 우리가 갖고 얻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볼 때 그는 예수님의 의로우신 것을, 거룩하신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흠 없고 점 없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의 속에서 정결함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본 것입니다. 그 자신도 정결하고 흠이 없었고 온전했습니다. 그러나 온전이라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거룩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처럼 세례 요한에게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그는 예수님 속에서 바로 스랍 천사가 본 그것을 본 것입니다. 스랍 천사가 거룩했지만 영원히 압도당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같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합당했고 의로웠고 거룩했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 수 있었지만 자신 속에 있는 거룩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를 비교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주님 속에 있는 대서양, 태평양 같은 거룩을 본 것입니다. 거기에 압도당해서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회개를 해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정결하게 되어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께 회개의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아야 할 자는 저입니다."하고 거절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우리의 비루함을 보게 하소서. 우리가 겸손이라고, 온유라고, 거룩이라고 부르는, 우리가 사랑과 희생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무화과 나뭇잎과 같은, 우리 자신의 더러워진 옷과 같은 우리 자신의 비루함을 보게 하소서. 우리 자신의 비루한 인격과 영성과 우리 자신의 비루하고 초라한 영적 상태를 볼 수 있게 하소서. 그래야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진짜 주님을 닮는 사람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다윗과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로 본질적인 면에서 근원적으로 주님을 닮게 되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말이 아닌 계시가 필요합니다. 개념이 아닌 계시가 필요합니다. 설명이 아닌 계시가 필요합니다. 설명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 계시는 빛입니다. 주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주님에 대한 계시와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가 필요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거룩과 사랑과 섬김과 고난과 순교에 대한 계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계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계시를 퍼부어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계시를 쏟아부어주옵소서. 주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