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눅 1장 28-38절
설교제목 : 주님의 여종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성직자들의 논쟁(기욤 드 마르실라)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대림절 네 번째 초가 밝혀졌습니다. 이제 기다림의 절정을 지나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세계와 우리 영혼 가운데 평화와 생명, 희망의 빛으로 오시기를 소망합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에 스테인드 글라스 화가로 알려진 기욤 드 마르실라(Guillaume de Marcillat, 1470–1529)는 1529년 자신이 사망하던 해에 이탈리아 아레초의 프란체스코 수녀원을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최근 베를린 국립미술관 창고에서 재별견되어 세심한 복원 끝에 새롭게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원죄없는 잉태)에 대한 성직자들의 논쟁(154x312)”입니다. 이 그림에는 교회 역사상 가장 저명한 8명의 사람들이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에 대해 토론하고 있습니다. 이 8명은 교부들은 왼쪽에서부터 베르나르드, 암브로시우스, 힐러리, 안셀름, 키릴,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키프리안입니다. 그림의 중앙에 있는 인물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하와(이브)입니다. 교부들은 하와를 온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브는 왼발로 밀라노의 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가 기대고 있는 큰 책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마르실라가 그린 그림의 중심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무염시태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지적인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교부들의 지적인 논쟁은 한치도 진리를 진실하게 만들이 못합니다. 한수엘리 에터 박사는 이 그림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머니 자연을 무시하지 말고 그녀를 보라. 그러면 그녀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한수엘리 에터 지음 김덕규 옮김, 융심리학과 동시성, 근간]
마르실라가 그림을 통하여 말하듯, 쓸데없는 논쟁은 멈추고, 어머니 자연을 주시하여 보라는 메시지는 탁상공론이나 이론은 내려놓고, 오늘 이 세계에 벌어지는 것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탄생은 교회의 교리나 합리적 이론으로 충분하게 해명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논리적 사고를 내려놓고 이 신비의 사건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물으며 그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진리에 다가서는 길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낯선 사건을 마주할 때, 해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 이 사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고 질문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원인을 찾으며 탓하기보다 목적의미를 물으며 진일보해가는 우리의 2022년의 마지막 여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달갑지 않은 방문
누가복음 1장은 제사장 가문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에게서 태어난 세례 요한의 출생 전 이야기와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하여 말합니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다른 고대사본에서는 ‘여인들 가운데서 너는 복이 있다. 주님께서...’1:28).” 그 말을 듣고 놀라며 두려워합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너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전할 때 우리는 이 천사의 고지가 낭만적이고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상상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천사의 수태고지는 달갑지 않은 두려운 낯선 소식입니다. 남자를 경험해보지 않은 처녀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임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죽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초대교부였던 오리게네스는 켈수스에게 보고된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문전박대를 당했고, 판드라라는 군인에게 아이를 낳아주었다는 내용을 보고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리아가 겪은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인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는 심리적으로 아주 중대한 의미를 우리에게 던집니다.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과정은 반드시 달갑지 않은 소식과 위험할 수 있는 일을 겪어야 하는 조건이 수반됩니다. 익숙한 방식이나 낡은 태도로는 거룩한 탄생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수태고지는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그건 불가능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외치게 하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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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하고 싶고, 밀어내고 싶고, 고개를 흔들게 만드는 사건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전초전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새로운 변환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달갑지 않은 낯선 소식과 사건은 새로운 탄생의 전조임을 인생 여정에서 잘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종하는 마리아
마리아는 천사가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은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5-37)”라는 메시지를 다시 전하자, 마리아는 순복합니다. 능동적으로 복종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종은 마리아와 하와 모두에게 일어나는 측면입니다. 뱀에 대한 하와(이브)의 복종과 천사에 대한 마리아의 복종은 유사한 사건의 다른 국면입니다. 뱀에 대한 하와의 복종은 개체 분화를 촉진하는 과정으로 몸과 본능적 특성을 발견하고 근원적 세계로부터 분리하여 정신적 발전으로 인도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전적으로 뱀의 설득력에 속은 것은 아닙니다. 하와 안에 있는 지혜에 대한 근원적 충동이 있었기 때문에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의식화가 일어나고 발달이 추동됩니다. 반면에 천사에 대한 마리아의 복종은 두 번째 어머니이자 하와인 마리아가 정신적이고 고양된 측면에 순복하는 것으로 자기에 의지에 기여하고 희생하는 도구로서 쓰임받는 자기실현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욕망과 의지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가는 내용입니다.
마리아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를 바랍니다(38).” 마리아는 달갑지 않은 낯선 수태고지를 수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압니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표현은 자유를 빼앗긴 굴종적 신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만 귀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고 실현해가는 자발적인 종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복종은 하나님의 도구와 사명에 이바지하게 합니다.
이로써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용기가 됩니다.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림으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가능케했습니다. 새로운 시간, 새로운 변환은 거저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있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낯선 사건과 달갑지 통보를 기꺼이 받아 안을 수 있는 품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 거룩한 탄생의 신비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룩한 그릇의 의미 / 동정성
이런 마리아는 하나님의 담아내는 신성한 용기입니다. 그 거룩한 그릇의 의미는 마리아의 동정성, 처녀성에 있습니다. 신성을 품게 된 마리아는 순결한 여인의 표상으로서 그리스도를 탄생시킵니다. 성서에서는 그 동정녀의 탄생은 이것이 과학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다루지 않습니다. 성서는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를 품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적 사실로서 아니라 영원한 진리로서 오늘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물음은 이 동정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입니다. 에드워드 에딘저는 이 심리적 동정성은 “개인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라고 해석합니다.[에드워드 에딘지 저, 그리스도인의 원형, p27-28]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는 새로운 변환을 위한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개인적인 욕망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함의 그릇이 되기 위해 꿈에서 목욕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그릇을 닦거나, 불이 나거 집에 전소되는 꿈을 꾸곤 합니다. 일종의 정화, 분리, 증류, 연소의 작업을 통하여 오염된 욕망과 낡고 구태의연한 것들을 쇄신하는 것입니다. 오염된 그릇 안에는 아무리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 담겨도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부대나 헌 부대에 새 술을 담으면 발효되면서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새로운 탄생이 깃들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리스도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비가였던 알겔루스 질레시우스는 자신의 시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상의 마리아 찬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가 내게 똑같은 인사말을 건네지 않는다면.”
복잡한 세상입니다. 유혹 많은 혼탁한 세상입니다. 끝없는 욕망과 갈증으로 허덕이는 세상입니다. 불온하고 불안한 세상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온갖 지저분한 찌기로 냄새나고 변질되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오염되지 않는 순수함으로 단장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순수함으로 새로운 탄생이 저와 여러분 안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