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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765년, 기성 쾌선 대사 – 염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念佛還鄕)
칠곡(漆谷) 송림사(松林寺) 기성당(箕城堂) 쾌선(快善) 선사 비문
(1693~1765)
『조선불교통사』
『상봉문보(霜峰門譜)』, (지관 편, 『한국 고승 비문 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비가 있는 곳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가산 송림사
연대 : 영조 48년(1772)
기성 쾌선 선사 비문 글과 머리말
이미李彌 지음, 윤동섬尹東暹 글
불교에서 공적空寂으로 무위無爲를 깨닫는 것이 으뜸(宗)이고, 자비로 보시하는 것이 교敎다. 공적空寂으로 마음을 관하면 백 가지가 모두 5근五根과 5진五塵에 속하지만, 자비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중생을 모두 깨달음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전의 범문자梵文字가 피안으로 건네주는 나룻배가 되므로 불가의 책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고 번잡하고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즉 글로 이끌도록 권하는 것(敎)이 공적空寂이라는 으뜸(宗)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릇한 것은 해동 산사에 간직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서녘의 옛 경전으로, 선을 높게 닦고 훌륭하게 해석하여 책을 지어도 붇다를 보살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기성箕城 대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제자 혜징慧澄이 스님의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과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 두 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그의 자취와 비석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내가 마다하지 않고 쓰게 된 것은 그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스님의 법호는 쾌선快善, 속성은 유柳, 아버지는 (유)시흥時興 동지同知(벼슬), 어머니는 황씨다. 칠곡부漆谷府 안에서 태어났으니 때는 숙종 계유년(1693)이다. 머리가 트이고 행위가 곧았으며, 얼굴은 검고 눈은 밝았다.
13살에 팔공산 송림사松林寺에 들어가 14살에 민시敏是 문하에서 머리를 깎았다. 16살에 서귀西歸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도덕산 대조大照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낙빈당 홍제弘濟 대사에게 배웠다. 『치문緇門』과 여러 경전을 읽으매 반드시 치밀하게 생각한 뒤 머리를 들었으며 깊이 숨겨진 뜻까지 알아낸 뒤에야 끝을 냈다. 또 붓글씨를 잘 썼는데, 필체가 탄탄하고 물 흐르듯 하여 여러 절의 표와 게는 스님이 쓴 것이 많다.
25살에 배움이 높아져 율암 낙빈律岩洛濱 스승이 마침내 인가를 내리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름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었다. 또 말재주가 걸림이 없고 목소리가 크고 맑았다. 친절하게 타이르고 가르치니 희롱하는 마음을 바꾸어 믿음을 가지고 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늘 선량한 자취에 걸리지 않고 온 세상을 두루 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발우가 다 달았다. 어느 날 동화사桐華寺에 머물며 대중에게 말했다.
”모든 인연은 고요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가장 뛰어난 교법(上乘)이니 어찌 아직도 구차스럽게 게를 설 해 여러분을 모두 떠나게 할 것인가, 나는 다시 강론하지 않겠다.“
계해년(1743) 초막을 짓고, 화엄경 80권을 보면서, 끝이 나면 다시 시작하기를 되풀이하였고, 밤에는 홀로 가부좌하고 말없이 선을 종지로 삼으니 한밤중이 되어서야 팔을 베고 선잠을 잤다. 입은 옷과 속옷 · 버선 색이 새까맣게 되어도 입으로 세상 이야기하지 않았고, 바람 부나 비가 오나, 큰물이 나나 가뭄이 들거나 모든 것 떠나 담담하고 소박함을 지키니 법성이 원융함이라. 사람들은 팔공산 정기를 기른다고 했다.
경신년(1760) 동지同知 30명이 돈 수백 량씩을 내서 은해사 위 골짜기에 정갈한 가람(精藍)을 지으려고 하자 스님이 말했다.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으니 각자 그런 마음을 삼고, 각자 그런 물질로 물질을 삼으면 되지 힘들여 공사하는 것 또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또 오는 것도 빈손이고 가는 것도 빈손이니 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두가 그렇다고 하고, 마침내 방장의 호의로 방장과 함께 기거하기로 하니 마음과 물질이 하나가 되었다. 모두 스님의 융화에 대한 가르침이다.
계미년(1763) 각자 스스로 갈고 닦은 뒤, 팔공산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그해 선본사 禪本寺 목암牧庵 장로 병문안을 하였다. 그 절은 이전에 머물던 곳이라 대중들이 모두 문하 출신이다.
열반경을 강설하며 아무렇지 않았는데 다음날 아픈 곳 없이 입적하였다. 나이 72세, 승랍 59였다. 대중은 마지막 남긴 말 대로 동쪽 봉우리 아래서 화장하였는데, 머리뼈가 수백 보 떨어진 바위 위로 튀어 나가 백옥처럼 빛나 산과 들이 눈이 부시게 환했다. 이에 동화사 상봉霜峰 대사 부도 아래 탑을 모셨다. 스님은 낙빈洛濱에게 배우고, 낙빈은 상봉霜峰에게 배워 전법 제자가 되었다.
옛날 갑오년(1744) 봄, 혜징慧澄이 도봉산장에 있는 나를 찾아와 화엄경 및 장을 강의해 주었는데 왕성한 도와 학문의 전수, 뛰어난 율律에 나는 늘 신기했고 즐거웠다. 26년 뒤 내가 경상도에 와 보니 혜징은 근심 걱정이 없고, 모습은 담담하고, 마음은 원만하고 고요하니 물어보지 않아도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나는 불가의 글을 좋아하지 않으나 스님과 숙세에 서로 교감이 있었고, 또 혜징이 그 스승의 가르침을 펴려는 것이 아름다워 글을 쓰게 되었다. 이후 스님의 법력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이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과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 두 권에 있으니, 비문의 글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釋抱于箕 傳授西鉢
사꺄무니(釋) 붇다가 기성대사 품어 서녘 발우를 전해 주니
透經悠律 志苦眼徹
경經 꿰뚫고 율律 오래 지켜 뜻이 커지고 안목이 환해지도다.
峰雲滿納 性一而寂
산봉우리 구름 납의에 가득하니 자성이 하나고 공적일 뿐이라.
念中無物 惟彌陀佛
생각속에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아미따불(阿彌陀佛)뿐이로다.
念佛還鄕 初招一曲
『염불환향곡』과 『보은문』 묶어서 한 곡 만드니
八萬同藏 慈悲利益
팔만대장경 같은 자비와 이익이다.
左海緇眾 都歸摠轄
우리나라(左海) 스님 모두 돌아와 함께 굴려
護眞度迷 五十九臘
진리 지키고 번뇌를 여의도록 59년 펴시도다.
卓彼公山 永鎮佛域
뛰어난 대사 오랫동안 붇다의 땅 팔공산에 머무시니
靈骨照世 幡字躍爍
신령한 (머리)뼈 세상을 비추고 기에 쓰인 글 크게 빛나도다.
幻迹雖空 普敎可繹
허깨비 자취는 공한 것이지만 가르침 널리 편 일 내 놓을 만하니
有欲濟筏 視此方石
(번뇌의 강을) 건널 뗏목을 바라는 분들 이 비석을 보길 바라노라.
숭정崇禎 기원후 세 번째 임진년(1772) 3월 세움
卍 보정의 꼬리말
기성당箕城堂의 쾌선快善 스님(1693~1765)의 비문을 보면 ”계해년(1743) 초막을 짓고, 화엄경 80권을 보면서, 다 읽고 나면 다시 시작하기를 되풀이하였고, 밤에는 홀로 가부좌하고 말없이 선을 종지로 삼으니 한밤중이 되어서야 팔을 베고 선잠을 잤다.”라고 하여 낮에는 화엄경, 밤에는 참선하여 교敎와 선禪을 함께 수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11년이나 앞선 1732년 간행된 『동화사 사적기桐華寺寺蹟記』 서문을 쓰면서 기성 쾌선 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내가) 답하길, ”내가 하는 일이라야 아침에 경전 (읽고) 저녁 아미따불 (염송하는 것)뿐으로, 글 쓰는 일은 본디 능하지 못합니다.”라고 사양하였으나 그 정성 그렇게 간절하니 어찌 이 일을 면할 수 있겠는가! (答曰, 余之所爲 不過朝貝葉而暮彌陀 書契之業固未能而謝之. 其懇甚矣 鳥可免乎)”라고 했다.
『동화사 사적기』에 따르면 40살쯤 되었을 때 이미 밤에는 ‘아미따불’ 염불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8년 뒤인 1743년 밤에는 참선에 집중하므로 해서 서산대사의 종지대로 선 · 교 · 염불을 함께 수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선 · 교 · 염불을 함께 수행하였지만, 기성 쾌선 스님은 염불의 선禪 · 교敎를 모두 포용한다고 하였다. 그러한 기성 쾌선 스님의 사상은 마지막 제자 혜징이 비문을 부탁할 때 가지고 간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과 청택법보은문請擇法報恩文 두 권에 있다.”라고 했고 ”생각 속에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아미따불阿彌陀佛뿐이로다. 『염불환향곡』 과 『보은문』 묶어서 한 곡을 만드니 팔만대장경 같은 자비와 이익이다.”라고 했다.
스님의 정토사상에 대해서는 이미 몇 편의 논문이 나왔으니, 스님이 지은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을 통해 스님이 극락 상품에 갔음을 밝히려고 한다.
스님의 염불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자(還鄕)’는 것이다.
『염불환향곡』은 ① 자기 집 있는 고향에 있다(家鄕) → ② 고향을 잃다(失鄕) → ③ 길을 잃다(失路) → ④ 고향을 묻다(問鄕) → ⑤ 고향을 향해 가다(趣鄕) → ⑥ 고향으로 돌아가다(還鄕) 같은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집에 있던 사람이 무명無明 때문에 고향을 잃은 사람(失鄕)이 고향 가는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가(失路) 문득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여 고향 가는 길을 묻고(問鄕) 고향을 향해 나아가(趣鄕) 마침내 고향에 돌아간다(還鄕)는 서사적 노래 가사다.
여기서 고향이란 무명을 깨고 본디 모습을 찾는 깨달음 얻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소를 찾는 10단계를 그린 심우도尋牛圖와 비슷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간다’라는 5단계가 훨씬 중생의 마음에 와닿는다.
기성당 쾌선 스님은 염불문의 뛰어남을 이렇게 노래한다.
八萬法門阿彌陀佛 當機用之阿彌陀佛
팔만법문 아미따불 근기 따라 쓰니 아미따불
門門各別阿彌陀佛 不相通入아미타불
법문마다 각각 달라 아미따불 서로 통하지 않지만 아미따불
唯此念佛阿彌陀佛 可通入門阿彌陀佛
오직 이 염불만 아미따불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아미따불
至聖至惡阿彌陀佛 皆同往生阿彌陀佛
성인에서 악인까지 아미따불 모두 함께 가서 나니 아미따불
諸法比如阿彌陀佛 諸穀之器阿彌陀佛
여러 법 견주면 아미따불 여러 곡물 담는 그릇이지만 아미따불
念佛比如阿彌陀佛 都倉之庫阿彌陀佛
염불 견주면 아미따불 모든 것 넣는 창고라네 아미따불
근기가 뛰어난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 선문禪門이나 많은 학식이 필요한 교문敎門보다 누구나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염불문念佛門을 통해 극락 가서 태어나는 것이 으뜸이라는 믿음이 진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조사들이 염불법문은 방편설이므로 본심을 깨치는 길이 아니라고 외면하였지만, 기성 쾌선 스님은 염불이 조사의 법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조사들의 자세를 꾸짖었다.
諸祖非却阿彌陀佛 念佛法門阿彌陀佛
조사들 아니라고 아미따불 물리치는 염불법문 아미따불
意在先須阿彌陀佛 悟木心源阿彌陀佛
뜻은 모름지기 아미따불 마음 뿌리 깨달음이네 아미따불
悟則萬法阿彌陀佛 卽是自心阿彌陀佛
깨달으면 만법이 아미따불 곧 스스로 마음이니 아미따불
念佛豈是阿彌陀佛 心外之法阿彌陀佛
염불이 어찌 아미따불 마음 밖의 법이겠는가 아미따불
此時方見阿彌陀佛 祖師赤心阿彌陀佛
이제 보인다 아미따불 조사들 참된 마음 아미따불
祖師何是阿彌陀佛 異佛之者阿彌陀佛
조사들 어찌 아미따불 붇다와 다르겠는가 아미따불
彌陀法門阿彌陀佛 等虛空界阿彌陀佛
아미타불 법문 아미따불 허공계와 같아 아미따불
覔則飛過阿彌陀佛 萬里靑山阿彌陀佛
찾으려 날아가길 아미따불 만리 청산 아미따불
但可奉持阿彌陀佛 豈得思量阿彌陀佛
받들어 지낼 뿐 아미따불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 아미따불.
기성 쾌선 스님은 ‘우리가 왜 염불하는지?’ ‘극락이란 어떤 곳인지?’ ‘우리는 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를 아주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念佛何爲阿彌陀佛 要生極樂阿彌陀佛
염불 왜 하는가 아미따불,
극락 가서 나기 위해 아미따불.
往生何爲阿彌陀佛 樂見彼佛阿彌陀佛
왜 극락 가서 나려는가 아미따불,
저 아미따불 뵙기 위해 아미따불.
見佛何爲阿彌陀佛 得聞正法阿彌陀佛
붇다 왜 뵈려는가 아미따불,
바른 법 듣기 위해 아미따불.
聞法何爲阿彌陀佛 頓悟本心阿彌陀佛
바른법 왜 듣는가 아미따불,
본디 마음 문득 깨닫기 위해 아미따불.
悟心何爲阿彌陀佛 發菩提心阿彌陀佛
마음을 왜 깨달으려 하는가 아미따불,
깨닫겠다는 마음 내기 위해 아미따불.
發心何爲阿彌陀佛 入正定趣阿彌陀佛
마음은 왜 내려 하는가 아미따불,
정정취에 들어가기 위해 아미따불.
入正何爲阿彌陀佛 稱眞修行阿彌陀佛
정정취는 왜 들어가는가 아미따불,
진리에 맞는 수행을 위해 아미따불.
眞修何爲阿彌陀佛 十地行滿阿彌陀佛
진리 수행 왜 하는가 아미따불,
십지 행 다하기 위해 아미따불.
地滿何爲阿彌陀佛 入普賢門阿彌陀佛
십지 행 왜 다하는가 아미따불,
보현문 들어가기 위해 아미따불.
入門何爲阿彌陀佛 成佛菩提阿彌陀佛
보현문 왜 들어가는가 아미따불,
붇다 깨달음 이루기 위해 아미따불.
成佛何爲阿彌陀佛 廣度衆生阿彌陀佛
붇다는 왜 되려하는가 아미따불,
중생 널리 구하기 위해 아미따불.
度生何爲阿彌陀佛 報諸佛恩阿彌陀佛
중생 구제 왜 하는가 아미따불,
붇다 은혜 보답 위해 아미따불.
화엄문과 선문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 좀 번다해지기는 했지만, 정토 법문을 짧은 글로 이처럼 확연하게 노래하는 수행자는 본 적이 없어 감탄했다. 이 노래를 더 간단히 간추리면 우리가 왜 염불을 하는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왜 염불하는가? 극락 가서 나기 위해,
왜 극락 가서 나려는가? 아미따 붇다 뵙기 위해.
왜 붇다 뵈려는가? 바른 법 듣기 위해.
왜 바른 법 듣는가? 깨달아 붇다 되기 위해.
왜 붇다 되려는가? 중생 널리 구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자’를 넘어서 그다음 중생을 구하는 것까지 완벽한 가사를 마친 것이다. 이처럼 완벽한 정토 법문에 문구마다 ‘아미따불’을 붙여 다 노래하고 나면 이미 그 구절 수만큼 염불 공덕을 자동으로 쌓게 한 것도 놀라운 발상이다.
기성 쾌선 스님은 이처럼 스스로 책을 써서 중생들에게 극락 가서 나기를 권하면서, 세조가 번역한 아미따경에 스스로 서문을 써서 발행하고, 같은 서산대사 문중인 명연明衍 스님이 지은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을 펴내 대중들에게 염불 법문을 보급했으니, 글쓴이가 스님을 이 『극락 가는 사람들』에 모시는 것은 하릴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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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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