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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3일, 주현 후 제6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예배의 부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2년 2월 13일, 주현 후 제6주 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주현 후 제6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경배찬송(일어서서):
찬송가 25장 (면류관 벗어서)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일어서서):
시편1:1~6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 대표기도: 동방정교회, <사랑을 위한 콘타키온 찬송가>
오 그리스도여,
우리의 마음이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불붙게 하소서.
그 불길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온 마음을 다해,
온 뜻을 다해,
온 영혼을 다해,
온 힘을 다해.
또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통해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 누가복음 6:17~26 (성경)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특별찬양: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을 찬송합니다.
*. 말씀선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주현 후 제6주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20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는 말씀과 24절,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부요한 자는 화가 있어 이미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종류의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곧 배고픈 사람, 우는 사람, (인자, 곧 ‘참 사람’에 대한 생각이나 의식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는 거짓선지자는 부요한 사람이 됩니다. 말씀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본문 말씀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먼저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편향적이지 않습니다. 자녀 중에 한 자녀가 다른 자녀보다 조금 모자라거나 혹은 뛰어나다고 해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다를 수 없습니다.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죠. 모든 자녀에게 쏟는 부모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해와 비를 내리심 같이 말입니다(ref. 마태복음 5:45)
다만, 사랑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축구공을 선물하는 것이 좋은 사랑의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 반대로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인형을 선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에게 맞는 사랑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부모야 한결 같은 사랑의 마음이겠지만, 사랑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소유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는 화가 있으니 받을 위로를 이미 다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시고, 부요한 자는 미워하시는 건가요? 성자하나님께서 그러실 리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방법과 부요한 자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천사나 심지어 사단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사랑 그 자체이시니 말입니다(ref. 요한1서 4:16).
다만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거나, 혹은 부모가 차별하는듯 여겨지는 것은 자녀가 가질 수 있는 한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만 사랑한다고 편드는 하나님을 때로 생각하는데, 우리의 영을 깊~게 해서, 모든 만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을 느끼고 만나야 할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알아챈 철 든 자녀처럼 말입니다.
3. 가난함과 부함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세 종류의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가난함과 부함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가난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뜻이고 부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남들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정작 본인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는 가난한 것일까요, 부한 것일까요? 혹은 그 반대로 남들은 부족하다고 보는데 본인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그는 부한 것일까요, 가난한 것일까요? 아마 (엄청나게 부족하거나 혹은 엄청나게 넘쳐나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본인의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면 가난한 것이고, 자신이 충분하다 여기면 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하다, 부하다’ 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난하십니까, 부하십니까?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가난이라고 하면,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에 재물의 많고 적음이 곧 부와 가난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삶에서 재물로 얻을 수 없는 부분도 상당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부분뿐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면을 포함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물질이 충분해도, 부모 형제 없는 고아라면, 정신이나 몸이 아픈 환자라면, 죄를 짓고 감옥에 가 있는 죄수라면, 이런저런 이유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왕따라면 등등의 사람들은 (비록 재물이 많다 해도) 특정한 면에서는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 곧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 오늘 본문 말씀으로 보면 재물로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는 배고픈 자와 배부른 자이고, 재물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는 우는 자와 웃는 자, (인자로 인해) 박해를 받는 자, 칭찬을 받는 자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가난한 경우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부분에서 부한 사람 역시 없습니다. 재력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가족이 화목한 사람이 있고, 가족이 화목 하지만 몸이 아픈 사람이 있고, 몸은 아프지만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있고 등등 사람은 누구나 한 편으로 부족하여 가난하고 다른 한 편으로 충분하여 부합니다. 그러니 무조건 가난하다, 부하다 통틀어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난한 것은 무엇이고, 부한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보통의 경우) 재물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재물이 없고 그렇지 않은가요? 사람은 그의 처지에 따라 재물을 혹 시간을 더 원할 것이지만 우리 삶에는 어쨌든 가난함과 부함이 함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오른 손이 말합니다. “아~, 왜 맨날 나만 쓰는 거야, 피곤하게. 밥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싸울 때도, x싸고 뒤처리할 때도 나만 쓰네. 저 왼손은 곱상하게 생겨가지고 금반지 끼고 금시계 차고 호의 호식하니, 내(오른 손)는 가난하고 너는(왼손)은 부자라 좋겠네~”라고 불평하면 되겠습니까?]
4. 세 지평
사람 삶은 세 가지 지평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지평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인(天地人)이고, 지정의(知情意)이고, 신기정(神氣精)입니다.] 각 지평에 따라 부족하여 가난함과 충분하여 부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 지평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지평에 따른 이야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 이야기를 상기시켜 드립니다.
[성자의 지평, 곧 땅(지, 地)의 지평에서] 첫째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 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가난하지만 착했던 흥부는 다친 제비의 다리를 싸매 주고 후에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틔워 박을 타니 금은 보화가 나와 부자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부자이기는 하지만 마음이 고약한 놀부는 (흥부의 이야기를 듣고) 제비 다리를 일부러 다치게 하고 후에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틔워 박을 타니 도깨비가 나와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자의 지평 곧, 삼재(三才)의 지(地), 곧 재물의 적고 많음에 따른 가난함과 부함이 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성령의 지평, 곧 사람(인, 人)의 지평에서] 둘째는 콩쥐와 팥쥐 이야기입니다. 콩쥐는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와 새어머니의 딸 팥쥐와 함께 살게 됩니다. 새어머니와 팥쥐는 콩쥐를 못살게 굴고 괴롭힙니다. 그 때마다 (밭을 갈 때는) 황소, (물을 길을 때는) 두꺼비, (벼를 찧을 때는) 참새 등이 나타나 콩쥐를 도와주고 위기를 넘깁니다. 마침내 (…여차저차…)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온 원님을 맞아 원님의 아내가 되어 인생 역전을 하는 (우리나라 전래동화 판 신데렐라)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지평, 곧 삼재(三才)의 인(人), 곧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혹은 사랑을 받거나 그 가난함과 부함이 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성부의 지평 곧 하늘(천, 天)의 지평에서] 마지막은 홍길동 이야기입니다. 신분제도가 심한 조선 시대에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며 ‘참-사람’의 삶을 살지 못하던 홍길동이 (신분제도를 견디지 못하고 ‘참-사람’의 삶을 살고자) 도둑의 무리를 접수하여 활빈당을 세우고 부패한 관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의적 활동을 합니다. 그의 아버지와 형을 인질로 삼는 바람에 일부러 잡혀 주기도 하지만 도술로 빠져나가고, 후에는 지상 낙원의 (신분 차별 없는) 율도국을 세워 왕이 되어 통치하다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전승이 조금씩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만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성부의 지평, 곧 삼재(三才)의 천(天), 곧 ‘참-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신분제도의 피해자와 그에 편승하여 호의호식하는 (악)법에 따른 가난함과 부함이 이야기에 담겨있습니다.]
세 이야기를 삼재(三才)로 풀면,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땅의 지평, 콩쥐와 팥쥐 이야기는 사람의 지평, 홍길동이야기는 하늘의 지평에서 전개된 이야기입니다. 물질의 가난함과 부함, 사람-다움의 가난함과 부함, 그리고 하늘(의식)의 가난함과 부함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21~23절까지의 말씀은 위의 세 지평에서 가난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21절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물질에 주린 자는 흥부이고, (새어머니와 팥쥐로부터 미움을 받고) 우는 자는 콩쥐입니다. 땅(물질)과 사람에게서 오는 가난입니다. 22~23입니다. “인자(人子, 참사람)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인자(참-사람)로 인해 박해를 받는 자는 (신분제도에 고초를 겪는) 홍길동입니다. 하늘(생각, 의식)로부터 오는 가난입니다.
반대로 부한 자의 지평에 서 있는 자의 모습도 세 가지로 그려집니다. 25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배부른 자는 (음식이 많은) 놀부이고, 웃는 자는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팥쥐입니다. 26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거짓 선지자들은 조선시대 불평등한 신분제도에 붙어 호의호식하며 ‘참-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홍길동을 박해하는 관리들입니다. 배부른 자, 웃는 자, 거짓으로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자는 결국에는 주릴 것이고, 애통하며 울을 것이고, 화가 있을 것입니다.
5. 마음이 가난한 자의 복
부요한 자의 화는 그저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이지만 가난한 자의 복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벌(罰)은 작은 것 같은데 복(福)은 엄청 크네요.
우리 삶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에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도상에서 이런 저런 것들의 많고 적음에 따른 부함과 가난함에 그저 마음이 요동할 뿐입니다. 물질, 사람, 하나님(의식)이라는 세 가지 지평에서 말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 사람에게 인정받는 정도의 많고 적음(명예라고 하나요?), 하나님(의식) 깨달음의 많고 적음의 차이에서 우리의 마음이 요동하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로, 누가가 ‘가난한 자’라고 표현한 구절을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해석하여 표현합니다. [*. 킬케골도 같은 의미에서 비슷한 표현을 합니다. 병(病)이 병이 아니고 마음을 놓친 것이, 곧 절망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마태가 보기에는, 재물이 부족하든, 건강이 부족하든, 인간 관계가 부족하든 등등 무엇 무엇이 부족한 것(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원인이 되어 마음(심령)이 병든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은 다양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거지 나사로뿐 아니라, 부자라서 혹은 이방인이어서 멸시 당했던 세리 삭개오나 로마 백부장, 깨달음이 없어 영생을 물었던 니고데모, 창녀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각종 질병과 장애로 삶이 고달팠던 사람들, 맹인, 앉은뱅이, 나환자, 등등 다양했습니다. 마태가 보기에 이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 마음을 놓친 병든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만나 마음이 회복된, 곧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로 변화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누가는 그저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왜 마태는 복 있는 사람은 심령이 부한 자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까요? 부족해서 가난한 것 보다는 충분해서 부한 것이 훨씬 좋을 텐데 말입니다.
세상 삶과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일치가 되면 참 좋은데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향상 반비례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에서 섬기는 사람이 그곳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사람이 됩니다. (마태복음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세상에서 종이 되면 그곳 하나님 나라에서는 으뜸이 됩니다. (마태복음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 그곳 하나님 나라에서는 능력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세상에서 욕된 것, 약한 것이 그곳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광스러운 것이고 강한 것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섬기는 사람, 종, 미련한 사람, 욕먹는 사람, 약한 사람 등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모자라 가난한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들이 섬김을 받는 사람이요, 큰 사람이요, 능력 있는 사람이요, 영광스러운 사람이요, 강한 사람으로 부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세상에 가 있다면 부요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다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이 가난한 것이 좋습니다. 비어있는 만큼 저곳 하나님 나라의 그것이 더 많이 채워질 테니까요. 사실 마태가 언급한 심령은 마음이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심령의 원어는 프뉴마(pneuma, 영(靈)-spirit)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CEV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CEV, <Matthew, 5:3, “God blesses those people who depend only on him. They belong to the kingdom of heaven!”) 부요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마음이 부요 하려면 이 세상에서는 가난해야 합니다. 많이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서유기>에 보면 현장 법사의 세 제자가 나옵니다.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입니다. 땅(물질)의 지평에서 저팔계는 놀부입니다. 그저 자기 먹을 것 밖에 모르죠. 그래서 돼지로 묘사됩니다. 사람의 지평에서 손오공은 팥쥐와 팥쥐의 어머니입니다. 남을 때려잡지 못해서 안달이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싸움 밖에 잘하는 것이 없는 원숭이로 묘사됩니다. 하늘의 지평에서 사오정은 신분제도를 ‘참-사람’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부귀 권세를 누리는 관리들(지식인들)입니다.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죠. 그래서 사오정은 어떤 동물인지조차 알 수 없는 동물로 그려집니다. 무지(無知)입니다. 물질로, 싸움으로, 무지로 그들은 세상에서 아주 부자입니다. 끝없이 먹어 대고(地), 싸움을 기가 막히게 잘해 사람들 때려 죽이는데 앞장서고(人), 뭔 말인지도 모르면서 끝없이 뱉어 냅니다(天). 세상에서 아주 부자입니다. 그들의 심령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합니다. [*. <서유기>의 세 제자는 불법을 만나 깨우쳐 (심령이 가난한 자로) 탐진치(貪嗔痴)를 내려 놓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세 이야기의 결론이 이렇게 끝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놀부는 개과천선(改過遷善)하여 흥부와 재산을 함께하고 그래서 서로 착한 마음으로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팥쥐와 팥쥐 어머니도 개과천선하여 콩쥐를 못살게 군 것을 회개하고 착한 마음으로 콩쥐와 함께 오손도손 서로 사랑하고 보듬어주면서 잘 살았다는 이야기, 홍길동의 율도국이 이상 국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그 빛을 발하여 신분으로 인한 차별 없는 세상, ‘참-사람’의 삶이 열린 세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말입니다.
6. 나가는 말
(저팔계같은) 놀부와 (손오공같은) 팥쥐와 팥쥐 어머니, 그리고 (사오정같은) 관원들이 모두 과거의 탐진치(貪嗔痴)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바뀌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듯이, 우리도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그 심령(pneuma)을 가난하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복이 오늘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다 만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법들입니다.
의(義), 정(情), 성(聖), 세 가지의 지평, 물질에 대하여는 옳음을(의, 義), 사람을 대하여는 정다운 마음을(정, 情), 하나님(의식)을 대하여는 거룩한 경건함(성, 聖)을 염두에 두시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이 세상에서는 가난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욱 부요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온전히 세워가며 누려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송:
찬송가 427장 (맘 가난한 사람)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봉헌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봉헌합니다. (찬송가)
*. 봉헌기도(일어서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대면예배로 드릴 경우,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혹은 신협 131-019-734759 (주안대신교회)로 송금합니다.]
*. 교회소식:
*. 찬송(일어서서):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축도 혹은 주기도문(일어서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