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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 맥스 루케이도
*딱 하루만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24시간 동안 예수님이 당신 침대에서 일어나 당신 신발을 신고 걸으며 당신 집에서 살고 당신 스케줄을 대신 맡는다면? 당신의 상사가 그분의 상사요 당신의 어머니가 그분의 어머니요 당신의 고통이 그분의 고통이 된다면?
딱 한 가지만 빼고 당신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당신의 건강도 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스케줄도 바뀌지 않는다. 당신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다. 딱 한가지만 바뀐다.
밤낮 하루 예수님이 그분의 마음으로 당신의 삶을 산다면? 당신의 마음은 하루 휴가를 떠나고 당신의 삶은 예수님의 마음에 따른다. 그분의 우선순위가 당신의 활동을 지배한다. 그분의 열정이 당신의 결정을 좌우한다. 그분의 사랑이 당신의 행동을 지시한다.
당신은 어떤 모습이 될까? 사람들이 변화를 눈치챌까? 당신의 가족들한테 뭔가 새로운 모습이 눈에 띌까? 당신의 직장동료들은 차이를 감지할까?
불우한 사람들은 어떨까? 당신은 그들을 똑같이 대할까?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에게서 더 많은 기쁨을 보게 될까? 당신의 적들은 어떨까? 당신의 마음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더 많은 자비를 얻게 될까?그리고 당신은? 기분이 어떨까? 스트레스 수준은 어떻게 달라질까? 감정변화는? 성질은? 잡은 더 잘 자게 될까? 석양을 보는 눈이 달라질까? 죽음이 달라 보일까? 세금이 달라 보일까? 필요한 진통제나 진정제의 양이 줄어들 수도 있을까? 교통체증에 대한 반응은 어떨까? (이거야말로 신경 건드리는 문제로군.) 전에 무섭던 것이 여전히 무서울까? 그보다도, 전에 하던 일을 여전히 하고 있을까?
다음 24시간 동안 하려고 계획했던 일을 여전히 하게 될까? 잠시 멈추고 당신의 스케줄을 생각해 보라. 의무, 계약, 외출, 약속을 따져 보라. 예수님이 내 마음을 넘겨받으면 달라질 것이 있을까?
조금만 더 계속해 보자. 당신의 삶을 주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명히 잡힐 때까지 상상의 렌즈를 조정하라. 그리고는 셔터를 눌러 그 이미지를 찍어 두라. 거기 보이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기" (빌 2:5) 원하신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새롭게 변화된 마음이다. 당신이 차라면 하나님은 엔진을 관할하려 하실 것이다. 당신이 컴퓨터라면 하나님은 소프트웨어와 하드 드라이브를 주관하실 것이다. 당신이 비행기라면 하나님은 조종석에 앉으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3-24).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하신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한두 문장에 담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믿음이 커지면 하나님의 사랑도 더 커질 줄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묵상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사랑도 더 깊어질 줄 생각한다면 그 또한 오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사랑과 혼동하지 말라. 잘할 때는 후해졌다 실수하면 줄어드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이다. 영원히 우리가 그분을 상대하지 않아도. 무시해도, 퇴짜를 놓아도 멸시해도, 불순종해도. 그분은 변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악이 그분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선이 그분의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매하다고 잃는 것도 아니요 믿음으로 얻어 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다고 덜 사랑하시고 성공한다고 더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마음은 순결했다. 무리의 흠모를 받으셨지만 그분은 검소한 삶으로 족하셨다. 여자들의 공궤를 받았으나(눅 8:1-3) 불순한 생각으로 욕 들으신 일이 없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능욕당하셨건만 그들이 자비를 빌기도전 이미 용서를 베푸셨다. 예수님과 3년 반을 함께 다닌 베드로는 그분을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벧전 1:19)으로 묘사했다. 같은 기간을 예수님과 함께 보낸 요한도 "그에게는 죄가 없다" (요일 3:5)고 결론지었다.
예수님의 마음은 평안했다. 제자들은 무리를 먹일 일에 안달했으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제자들은 폭풍중 겁에 질려 소리쳤으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그 속에서도 주무셨다. 베드로는 검을 뽑아 병사들에게 맞섰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손을 들어 치유해 주셨다. 그분의 마음은 늘 평안했다. 제자들에게 버림받자 예수님이 시무룩해져 집으로 가셨던가? 베드로가 부인하자 노발대발하셨던가? 병사들이 얼굴에 침을 뱉자도로 그들의 얼굴에 불을 뿜어내셨던가? 천만부당한 일이다. 그분은 침착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용서하셨다.
절대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으셨다.
그분은 또한 위로부터 주어진 소명 외에 어떤 다른 것에도 이끌려 다니지 않으셨다. 그분의 마음은 목표가 분명했다. 대부분의 인생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성취도 없다. 예수님은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이 사명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고 사셨기에 그분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 (요2:4)고 말할 때와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말할 때를 분명히 아셨다. 그러나 즐거운 마음을 잃을 만큼 목표에 찌들어 사시지는 않았다.
*바닥에는 대야와 바가지가 놓여 있다. 제자들 중 아무나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얼마 후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신다. 종의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고 대야를 들고가 한 제자 앞에 무릎을 꿇으신다. 샌들 끈을 풀고 발을 살짝 들어 대야에 담은 뒤 물을 붓고 씻기 시작하신다. 때묻은 발을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대로 씻겨 나가신다.
예수님 당시 발을 씻기는 것은 그냥 종이 아니라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모든 집단에는 서열이 있었고 집안의 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건과 대야를 들고 꿇어앉는 일은 서열이 제일 낮은 종의 몫이었다.
이 경우는 수건과 대야를 드신 분이 우주의 왕이다. 별들을 빚으신 그 손이 지금 때를 씻어 내고 있다. 산들을 만드신 손가락이 지금 발가락을 문지르고 있다. 어느 날 온 열방이 그 앞에 무릎 꿇을 그분이 지금 제자들 앞에 무릎꿇고 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그분의 관심은 단 한가지다. 자기가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이 알기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때만 씻기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심을 벗겨 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손이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다. 24시간이 못되어 그 손은 못박혀 생명을 잃을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주목을 요구하실 만한 시점이 있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때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씻기고 있는 이 발들의 미래를 분명 알고 계셨다. 이 스물네 개의 발은 이튿날 주님을 따라가 주님 편에 서는 데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번쩍이는 검 앞에 숨을 곳을 찾아 줄행랑칠 발들이다. 그중 한 사람의 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유다의 발은 거기까지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버릴 것이다.
나는 "예수께서 유다의 발만 빼고 모든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고 번역된 성경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을 배반할 자의 발을 들어 대야에 담아 말없이 씻기신 예수님, 얼마나 진한 사랑의 순간인가! 몇 시간 후 유다의 발 - 자기가 배반할 분이 사랑으로 씻어 주신 - 은 가야바의 법정에 서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을 보라! 그분은 잠시 후 이 사람들이 할 일을 알고 있다. 평생에 가장 비열한 짓을 행할 것을 알고 있다. 아침이면 이들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때 발이 눈에 들어오리라. 예수님은 바로 그때 그들이 기억하고 깨닫기 원하셨다. 예수님이 무릎 꿇고 그 발을 씻어 주셨던 것을. 그 발이 아직도 깨끗하다는 것을.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요 13:7).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은 제자들이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하셨다. 구하기도 전에 자비를 베푸셨다.
*당신은 딴 사람을 보고있거나 적어도 딴 사람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의 비밀은 예수를 바라보는 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당신의 시선을 당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에게서 떼어 당신을 구원하신 분에게 두라.
요한의 약속을 보라.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지리와 연대만 빼고는 우리의 사연도 제자들의 사연과 똑같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없었고 그날 밤 살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해주신 일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해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깨끗게 하셨다.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 주셨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씻어 주고 계신다. 요한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씻겨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제나 씻겨짐을 받고 있다. 씻겨짐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실상이다. 성도의 영혼에 흙먼지가 묻는다. 씻겨진다.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 오물이 떨어진다. 씻겨진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들의 발을 씻고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을 씻어 주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백성을 깨끗게 하신다.
예수님은 꿇어앉아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행위들을 들여다보신다. 그러나 놀라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만 좋다면 내가 씻어 주마." 그리고 그 은혜의 대야에서 자비를 한 움큼 떠올려 우리 죄를 씻으신다.
당신과 나도 똑같이 할 수 있다.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분이 용서하는 마음을 지니셨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우리도 그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4-15).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신다. 첫째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려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단순하다. 예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보다 그리스도의 자비가 선행된 것처럼 우리의 자비도 다른 사람의 잘못보다 선행돼야 한다. 그리스도 주변에 있던 사람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한 사람은 없다. 우리 주변 사람들도 우리의 사랑에 의심이 없어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꿇어앉으신 것처럼 우리도 꿇어앉아, 꼼짝없이 매인 사람들의 더러운 부분을 만져 주고 사랑 없는 그들을 사랑으로 씻어 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하지만, 나는 잘못이 없어. 속인 건 내가 아니야. 거짓말한 건 내가 아니야. 잘못한 쪽은 내가 아니란 말이야." 당신은 말할 것이다. 과연 당신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잘못이 없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이들 중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씻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그 런데 그분이 발을 씻기셨다. 마땅히 섬김받아야 할 분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섬기셨다. 예수님의 모본의 진수는, 화해의 가교를 잇는 짐이 약자의 몫이 아니라 강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잘못 없는 사람이 손 내미는 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옳은 쪽에서 먼저 나서 잘못된 쪽의 발을 씻기면 십중팔구는 양쪽 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피차 발을 씻기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 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에서 베푸는 긍휼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이 구절을 너무 빨리 읽지 말라. 깜짝 놀랄 각오를 하고 다시 한번 읽으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누가능동적이고 누가 수동적인지 잘 보라. 즐거이 부르는 쪽은 누구고 잠잠히 받는 쪽은 누구인가? 사랑하는 이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쪽은 누구이고 그 기쁨의 대상이 되는 쪽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노래하는 쪽은 우리이고 하나님은 노래의 대상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럴 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분명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잠잠히 있어 그분께 우리를 인하여 노래하실(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기회를 드리기 원하신다.
당신의 어색해하는 모습이 보인다. 당신은 그런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인가? 유다도 그런 자격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발을 씻겨 주셨다. 베드로도 그런 자격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아침을 차려 주셨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그런 자격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식탁에 함께 앉아 주셨다.
게다가 우리가 누구길래 스스로 자격 유무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분이 우리를 소유하고 사랑하실 수 있도록 충분히 그분 곁에 잠잠히 있는 것뿐이다.
*성경의 그림을 마지막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떤가? 성경은 여러 차례 우리를 하나님의 양떼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목자가 결코 양떼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목축에 대해 해박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저만치 양떼가 내려오고 있다면 분명 근처에 목자가 있다는 뜻이다. 저만치 그리스도인이 있다 해도 상황은 똑같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결코 양의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시 23:4).
하나님은 포도나무가 가지에 가까운 만큼이나 당신과 가까우시고, 성전에 임재하시는 것처럼 당신 안에 임재하시며, 남편이 아내와 친밀한 것같이 당신과 친밀하시고, 목자가 양에게 헌신하듯 당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가까우셨던 만큼 당신과도 가까워지기 원하신다. 글자 그대로 당신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고 당신은 그저 통역만 하면 될 정도로 가까워지기 원하신다. 헤드폰 끼듯 쉽게 그분 음성이 잡힐 만큼 가까워지기 원하신다. 남들이 폭풍 앞에 걱정할 때도 당신은 그 음성을 듣고 웃음 지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기 원하신다.
모든 관계 중 가장 친밀한 이 관계를 다윗 왕은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감찰하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1-6).
*아침에 잠에서 깰 때 하나님을 생각하라. 하루를 맞이하기 전 먼저 하나님을 맞이하라. 침대에서 나오기 전 그분의 임재에 들어가라. 내 친구 하나는 침대에서 나오자마자 무릎 꿇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 나는 그 정도는 못 된다. 머리가 아직 베개에 있고 눈도 아직 뜨지 않은 채로 나는 하루의 첫 순간을 하나님께 드린다. 기도는 길지 않으며 전혀 두서도 없다. 그날의 수면시간에 따라 아예 말귀가 안 맞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이런 정도다. "간밤에 잘 자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께 속한 자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는 순간... 하루에 대한 당신의 [모든] 소원과 희망이 야생 동물마냥 당신을 엄습해 온다. 아침마다 첫째로 할 일은 그 모든 잡념을 밀쳐 내고 다른 목소리를 들으며 다른 시각을 입는 일이다. 다른 삶,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고요한 삶이 내 안에 찾아들게 하는 일이다."
시편기자는 하루를 이렇게 시작했다.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3). 거기서 두번째 단서가 나온다.
말없이 바라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하라. 하나님과 침묵의 시간을 보내라. …
한번은 댄 래더(Dan Rather)가 테레사 수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답했다. "듣지요."
의외의 대답에 놀란 래더가 다시 물었다. "그럼,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테레사 수녀가 미소로 답했다. "그분도 들으신답니다.""
수시로 짤막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라. 고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짤막한 외마디 기도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속으로 조그맣게 할 수 있는 기도다. 로바크는 하나님께 여쭙는 방식으로 그분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추구했다. 2-3분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주님, 제가 지금 주님 뜻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 제가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습니까?“
*매 순간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그 마음을 상상해 보라. 인생을 마감할 무렵 당신은 신호등 앞에서 6개월, 광고우편물 뜯는 데 8개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1년 반(내 경우는 두 배), 줄 서서 기다리는데 자그마치 5년을 보내게 된다? 그 모든 순간들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겠는가? 수시로 짤막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면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으로 바뀐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이 시간도 다스려 주옵소서." "예수님, 주님은 나의 쉴 곳이 되십니다." 이런 짤막한 말에 출퇴근시간이 순례의 길로 바뀐다. 굳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거나 부엌에서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다.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기도하라. 부엌이 교회당이 되게 하고 교실이 기도실이 되게 하라. 수시로 짤막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라.
끝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 하나님을 생각하라. 하루 일을 마치면서 당신의 마음을 그분께 내려놓으라. 하루의 마감도 시작과 같이 기도로 하라. 좋았던 부분에 대해 감사드리라. 힘들었던 부분은 질문을 드려도 좋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라. 힘을 구하라. 눈을 감는 순간 이 약속을 굳게 붙들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기도하다 잠들어도 걱정할 것 없다. 아버지의 품보다 더 깜빡 잠들기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의 얼굴을 보게 하심은 우리의 얼굴을 변화시키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우리의 벗은 얼굴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변화는 쉽지 않다. 러쉬모어 산(미국의 네 대통령 얼굴을 자연암석에 조각한 산-옮긴이)의 조각가가 헤쳐 나가야 했던 도전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작은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그 작업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다. 자녀들의 얼굴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그분께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그분의 손가락이 닿을 때 걱정의 주름살은 사라진다. 수치와 회의로 어둡던 안색은 은혜와 믿음의 초상이 된다. 그분은 굳어진 턱을 풀어 주시고 주름진 이마를 쓸어 주신다. 그분의 손길은 눈 밑에 쌓인 피로를 제하시며 절망의 눈물을 평화의 눈물로 돌려놓으실 수 있다.
어떻게?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예배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다른 방법을 기대하곤 한다. 40일 금식이나 레위기 암송 같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단순하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우리의 얼굴을 바꾸신다.
정확히 예배란 무엇인가? 나는 다윗 왕의 정의가 마음에 든다. "다같이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자" (시 34:3, 현대인의 성경).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 조종석 안으로 들어가 그분이 앉으시는 자리와 일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물론 그분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시각이 달라질 뿐이다. 가까이 갈수록 그분은 커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닌가?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 우리는 문제도 크고 걱정도 크고 의문도 크지 않던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크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예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
분명히 말한다. 이 변화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목표는 스스로 얼굴이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쳤다. 아래는 "예수께서 변형되사"라고 하셨지 "예수께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라고 하지 않았다. 모세는 자기 얼굴이 빛나는 것조차 몰랐다(출 34:29). 우리의 목표는 얼어붙은 가짜 표정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자원하는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해 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그러면 그분이 하신다. 그분이 눈물을 닦아 내신다. 그분이 땀을 훔쳐 주신다. 그분이 우리의 찡그린 이마를 펴주신다. 그분이 우리의 뺨을 만져 주신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의 얼굴을 변화시켜 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의 얼굴만 바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우리를 보는 사람들까지 변화시켜 주신다.
*자신의 미래의 지평을 내다보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많은 과녁이 보였을 것이다. 수많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중 어느 것이라도 따를 수 있었다. 그분은 정치적 혁명가가 될 수도 있었다. 민족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교사가 되어 지성을 깨우거나 의사가 되어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분은 구주가 되어 영혼을 구하는 길을 택하셨다.
조금이라도 그분 곁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꼭 듣는 말이 있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그리스도의 마음은 철저히 한 가지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사렛의 목공소를 떠나시던 날 그분께는 한 가지 궁극의 목표가 있었으니 곧 갈보리 십자가였다. 어찌나 초점이 명확했던지 마지막 말씀이 이러했을 정도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하실 수 있을까? 먹여야 할 배고픈 자들, 고쳐야 할 병자들, 가르쳐야 할 무지한 자들. 사랑해야 할 버려진 자들이 아직도 많은데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하실 수 있을까? 간단하다. 그분은 정해진 일을 끝마치신 것이다. 사명은 완수되었다. 화가는 붓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조각가는 망치를 내려놓을 수 있었고 작가는 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작업이 끝난 것이다.
당신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부름받은 일을 다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필요를 다 채울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요구에 다 응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애써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결국 기름이 떨어진다. 당신의 능력을 바로 평가하라. 그리고 그 선을 벗어나지 말라. 끝으로 필요한 질문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여기까지 읽으면서 당신 마음에 불안이 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직업을 바꿔야 한단 말인가?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몰라. 맥스는 지금 나더러 신학교에 가라는것 같은데 … 아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여기서도 예수님이 이상적인 모본이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다는 단서가 맨 처음 나오는 곳은 어디인가?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수는 열두살이다. 예수의 부모는 나사렛 귀향길에 오른 지 사흘이 지나서야 아들이 없음을 알게 된다. 찾고 보니 예수는 성전에서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묻는 부모에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
어린 예수는 벌써 하나님의 소명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다음에 한 일은 무엇인가? 사도를 모으고 설교하고 기적을 베푸는 일? 아니다. 예수는 고항의 자기 사람들에게 내려가 가업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할 일이다. 초점 있는 삶을 살고 싶은가? 예수님이 하신대로 하라.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사랑하며 본업에 충실하라. 하지만 맥스. 나는 선교사가 되고 싶소. 당신의 첫번째 선교지는 지붕 밑이다. 복도건너 가족들조차 당신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 그들이 당신을 믿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가?
하지만 맥스, 나는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소. 좋다. 그 큰일을 직장에서 하라. 훌륭한 직원이 되라. 바른 태도로 정시에 출근하라.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말라. 오직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3).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놀라운 평가 중 하나는 이것이다. "그는 범죄하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 53:9,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철저히 정직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정확했고 그분의 문장은 모두 사실이었다. 시험 부정행위 없었다. 회사장부 조작, 없었다. 예수님은 진실을 부풀린 일이 한번도 없었다. 진실을 가린 일이 한번도 없었다. 진실을 외면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진실을 그대로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분의 입에서는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다스린다면 우리 입에서도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분의 계획은 우리를 아들의 형상대로 빚으시는 것이다(롬 8:28). 그분은 우리의 부정직을 줄이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깨끗이 없애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부정직에 냉정하시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시 101:7).
우리 주님의 정직 윤리는 엄격하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주제는 하나이니, 곧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시고 속이는 것을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9-10 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 성적인 죄를 짓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매춘하는 자, 술 취하는 자, 남의 것을 강탈하는 자 등 온갖 초라한 모습과 함께-바로 거기-남에 대해 거짓말하는 자가 나온다.
너무 엄해 놀랐을지도 모른다. 나의 악의 없는 거짓말과 아침의 말이 간음과 가중 폭행 못지 않게 하늘의 분노를 일으킨다는 말인가? 그렇다. 하나님은 세금 축소 조작을 우상 앞에 무릎 꿇는 것과 똑같이 보신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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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거짓된 혀와(잠6:16-17).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시 5:6).
*부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에 절대 어긋나는 것이다. 히브리서 6:18에 의하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안하시거나 안하기로 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줄 모른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개가 나는 것과 같고 새가 짖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디도서에도 히브리서 말씀이 똑같이 나온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딛 1:2).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을 말씀하신다. 한번 언약하면 반드시 지키신다. 그분의 진술은 모두 진심이다. 그분이 선포하시는 진리는 믿을 수 있다. 그분의 말씀은 사실이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반대로 사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 (요8:44)다. 알다시피 거짓이야말로 마귀의 가방에서 나온 최초의 무기였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은 하와를 낙심케 한 것도 아니요 성적으로 유혹한 것도 아니요 쥐도 새도 모르게 덮친 것도 아니다.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너한테 저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던? 넌 죽지 않아 (창3:1-4 참조).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하와는 속아 열매를 땄다. 창세기를 보면 불과 몇 문단도 못 가서 남편과 아들이 그 선례를 따르고, 에덴의 정직은 먼 옛날의 추억이 되고 만다.
지금도 그렇다.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의 말이 맞다. "진실만큼 강한 것도 없지만 진실만큼 낯선 것도 없다.“
*거짓의 치료책은 단순하다. 책임에 직면하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속이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음지를 걷는 이들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우리의 거짓의 결과도 그렇다. 우리 중에는 결혼과 양심, 나아가 믿음마저 묻어 버린 이들이 있다. 모두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 진실을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며 딜레마에 빠져 있는가? 그 순간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거짓을 축복하실까? 거짓을 미워하시는 그분이 거짓을 바탕으로 한 전략을 축복하실까? 진실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남을 속여야 하는 사업을 축복하실까? 하나님이 타인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직업을 귀히 보실까? 하나님이 속이는 자를 도와주러 오실까? 하나님이 나의 부정직을 축복해 주실까?
나도 그러시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당신의 마음을 점검하라. 냉정하게 자문해 보라.
나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온전히 정직하게 대하고 있는가? 나의 관계에는 정직이 선명히 드러나는가? 업무실적이나 학교성적은 어떤가? 나는 거래에 정직한가? 나는 믿을 수 있는 학생인가? 정직한 납세자인가? 직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인가?
당신은 진실을 말하는가...항상?
그렇지 않다면 오늘부터 시작하라. 내일까지 기다리지 말라. 오늘의 잔물결이 내일의 파도가 되고 내년의 홍수가 된다. 오늘 시작하라. 예수님처럼 되라. 진실을 말하고 진실대로 말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배반자는 유다만이 아니었다. 마태의 솔직한 고백은 높이 살만하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26:56).
“다”라는 이 짧은 한마디 안에 엄청난 고통이 응어리져 있다. “이에 제자들이 … 다. 도망하니라." 요한도 갔다. 마태도 갔다. 시몬도 갔다. 도마도 갔다. 다 갔다. 이 단어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5).
다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다 도망갔다. 외부에서 들여다볼 때 우리 눈에 보이는거라고는 온통 배반뿐이다. 제자들은 그분을 버렸다.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했다. 하나님도 그분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한 사람에게 그렇게 중한 쓰레기가 쏟아 부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게으름뱅이 아빠들과 간교한 아내들과 탕자 아이들과 부정직한 직원들의 모든 불충 행위를 한 더미로 쌓아 올리라. 예수께서 그날 밤 직면하셔야 했던 것이 조금은 느껴질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예수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하늘은 응답이 없고 사람들은 도움이 없고 친구들은 충절이 없다.
쓰레기더미에 목까지 잠겨 있는 예수. 나라면 그 장면을 그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기자들도 그 장면을 그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목격자도 그 장면을 그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다. 그분은 전혀 다른 것을 보셨다. 쓰레기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악 속에서 선을, 고통 속에서 뜻을,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셨다.
*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희망에 찬 마음을 품기 원하신다. 예수님처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이렇다.
그분은 악 속에서 선을 찾으셨다. 유다보다 나쁜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유다를 착한 사람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선의의 방법이 뜻밖의 결과를 낳았을 뿐이라는 식이다.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성경은 말한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 12:6), 유다는 도둑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며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친구보다는 돈을 갖기로 하고 예수를 은 30에 팔았다. 미안하지만 어떤 사람이든 그 목숨의 가치
는 은 30은 넘는다. 유다는 악당이요 사기꾼이요 건달이었다. 누군들 그를 다르게 볼 수 있으랴?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다르게 보셨다. 코앞에 마주선 배반자의 얼굴을 보며 그분은 말씀하셨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예수님이 유다 안에서 친구라 부를 만한 어떤 가치를 보셨는지 나로서는 상상이 안간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께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 순간 예수님은 이 악인 안에서 뭔가 선을 보셨다.
우리도 똑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역시 예수께서 모본을 보이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유다 탓으로 돌리지 않으셨다. 그날 밤 그분은 또 하나의 존재를 보셨다. "이제는 어두움의 권세로다"(눅22:53). 유다에게 죄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나 유다 혼자 하는 일만도 아니었다. 당신의 적도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우리를 배반하는 이들은 타락한 세상의 피해자다. 모든 것을 그들 탓으로만 돌릴 필요는 없다. 예수님은 유다의 얼굴에서도 그를 친구라 부를 만한 선을 찾으셨다. 우리도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할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해주신다. 그분은 최고의 파티에 대해 알고 계신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장 중 하나인 누가복음 15장에서 그분은 세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셋 다 뭔가를 잃었다 다시 찾은 이야기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파티로 끝난다.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목자는 잃었다 다시 찾은 양을 위해 파티를 벌인다. 여자는 잃었다 다시 찾은 동전 때문에 파티를 벌인다. 아버지는 잃었다 다시 찾은 아들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인다.
세 개의 비유가 전부 파티로 끝난다. 세 이야기에 똑같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즐거워한다는 단어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눅 15:5-6), 동전을 찾은 여자는 이웃들을 불러 말한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9절). 탕자의 아버지는 못마땅해하는 맏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32절).
요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이 가장 즐거우실 때는 잃은 영혼을 찾으셨을 때이다. 구원의 순간에 견줄 수 있는 순간은 그분께 아무것도 없다. 내 딸의 기쁨은 내가 옷을 입고 차에 타 파티장소로 갈 때 시작되었다. 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 자녀가 의의 옷을 입기로 결단하고 본향을 향한 여정에 처음 오를 때 하늘은 음료를 따르고 장식리본을 매달고 색종이 조각을 흩뿌린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0절).
1세기 전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천국에는 그리스도의 장엄미사가 드려지는 크리스마스 날들이 있다. 이날들에 그리스도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은 구유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깨어진 한 심령 속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이 날들은 목자가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요 교회가 집을 쓸어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날이다. 회개한 한 죄인을 인해 친구들과 이웃들이 다 한데 모여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기뻐하는 날이다!
*예수님과 그 사자(使者)들은 회개하는 한 죄인을 두고 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뭔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물론이다. 천국에 뭐가 있는지 그들은 알고 있다.
이미 식탁을 보았고 음악을 들었다. 당신이 도착하는 날 당신의 얼굴 볼 일이 그들은 그렇게 기다려질 수가 없다. 당신이 어서 보고 싶어 그들은 견딜 수가 없다.
당신이 도착하여 파티장소에 들어서면 뭔가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마지막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처럼 될 것이다. 요한일서 3:2을 깊이 들이마셔 보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천국의 모든 축복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축복의 하나는 바로 당신이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 그분의 예술작품이 될 것이다. 천사들이 흠모할 것이다. 하나님의 작품은 완성될 것이다. 마침내 당신은 그분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광채나는 얼굴로 예배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어 하나까지 다 듣게 될 것이다.
신의 마음은 순결할 것이요. 당신의 말은 보석 같을 것이요, 당신의 생각은 보화 같을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처럼 될 것이다. 마침내 당신은 그분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라. 그것이 당신의 마음이 될 것이다. 죄없는 마음. 두려움 없는 마음. 기쁨과 감격의 마음. 지칠 줄 모르는 예배의 마음, 흠 없는 분별의 마음. 마르지 않는 깨끗한 계곡의 물처럼 당신의 마음도 그렇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처럼 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예수님처럼 될 것이다. "천국은 완전케 된 사람들을 위한 완전한 장소다. 천국은 하나님의 변화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드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논쟁이 그칠 것이다. 질투가 없기 때문이다. 의심이 일지 않을 것이다. 비밀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죄가 사라진다. 모든 불안이 잊혀진다. 모든 두려움이 자취를 감춘다. 순전한 알곡만 있고 가라지는 없다. 순금만 있고 합금은 없다. 순수한 사랑만 있고 욕심은 없다. 순전한 소망만 있고 두려움은 없다. 그러니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천사들이 기뻐할 만도 하다.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 머잖아 하나님의 화랑을 빛내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천국에 무엇이 있는지 그들은 알고 있다.
축하의 이유는 그 외에도 또 있다. 홍분의 일부는 우리의 도착에서 비롯되지만, 또 다른 일부는 우리의 구속()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도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지옥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똑같이 기뻐하신다.
*지옥의 참혹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잠시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라. 여기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 생각에 사람들은 지금도 이미 살벌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임재 없는 우리를 생각해 보라. 당신 생각에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잔인할 수 있겠지만, 성령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 당신 생각에 지금도 외로움과 절망과 죄책감이 있겠지만, 예수님의 손길 없는 삶을 생각해 보라. 용서도 없다. 희망도 없다. 자비의 행위도 없다. 사랑의 말도 없다.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음식도 없다. 주를 찬양하여 부르는 노래도 없다. 주의 영광을 위한 행위도 없다. 만일 하나님이 그분의 천사들, 그분의 은혜, 영원에 대한 약속, 그분의 종들을 취하여 가신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지옥이다. 당신을 위로해 줄 사람도 없고 당신을 달래 줄 음악도 없다. 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가객들이 희망을 음유하지 않는 세상. 사랑도 희망도 막차를 타고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 배는 떠났다.
지옥 나라 노래는 후회와 타령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옥에서 들리는 소리는 "슬피 울며 이를 감"(마22:13) 밖에 없다. 지옥에는 비참한 탄식이 끊이지 않는다. 놓쳐 버린 기회를 뒤늦게야 깨닫는 것이다. 기회를 한번만 더 얻을 수 있다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그 기회는 끝났다(히 9:27).
* 어머니와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벌거벗은 몸이 되셨다. 동료 인간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무거워 휘청거릴 때까지 강제로 십자가를 져야 했다. 자신의 교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당시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그분을 조롱하며 욕했다. 예루살렘 도성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죄인의 죽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부모들은 멀리서 그를 가리키며 아이들에게 말했으리라. "나쁜 사람들은 저렇게 되는 거야."
그러나 인간들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아버지 앞에서 느끼신 부끄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혼자의 부끄러움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다. 온 인류의 부끄러움을 한꺼번에 지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예수님을 덮어씌웠다. 한번도 사기 친 일이 없음에도 그분은 사기꾼으로 정죄되었다. 훔친 일이 없음에도 하늘은 그분을 도둑으로 간주했다. 단 한번 거짓말을 안 했음에도 그분은 거짓말쟁이로 통했다. 욕정을 따른 일이 없음에도 간부(夫)의 수치를 덮어쓰셨다. 언제나 믿으셨음에도 이단자의 치욕을 견디셨다.
한 가지 절박한 물음이 생긴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분은 이런 수욕을 견디셨단 말인가? 무슨 힘으로 예수님은 온 세계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답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도 예수님처럼 시험을 받는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비난을 당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끄러움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포기하고 만다. 기진하여 주저 앉는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계속 달릴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예수님 같은 인내를 품을 수 있을까?
예수님이 초점을 두신 데, 즉 "그 앞에 있는 즐거움" (히 12:2)에 우리도 초점을 두면 된다.
*동방박사들도 똑같은 열망이 있었다. 시므온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보기원했다. 목자들처럼 그들도 밤하늘에서 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별이 웅장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요 역사적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불타는 행성의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그러나 박사들은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았다. 베들레헴 상공의 별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의 별이신 그분을 보아야 했다. 그들이 보러 온 것은 바로 그분이었다.
그들은 뜻을 이루었다. 모두 뜻을 이루었다. 이들의 부지런함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뜻을 저버리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보이기 원하셨다! 목장에서 왔든 왕궁에서 왔든, 성전에 살았든 양 중에 살았든 예물이 황금이었든 꾸밈없는 놀람의 표정이었든... 그들은 다 환영받았다. 아기 예수를 보기 원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한 사람을 하나라도 찾아보라. 아무도 없다.
그분을 찾지 않은 사람들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헤롯 왕처럼 낮은 차원의 것에 만족한 이들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분을 보기보다는 그분에 대해 읽는 것을 더 좋아했던 이들. 그분을 찾지 않는 사람들과 그분을 찾은 사람들의 비율은 수천 대 일이다. 그러나 그분을 찾은 사람들과 그분을 만난 사람들의 비율은 1:1이다. 찾은 사람은 누구나 만났다.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 (히 11:6)시라는 약속이 기록되기 이미 오래 전부터 입증된 셈이다.
*천사들로 만족하지 말라. 하늘의 별들로 족하지 말라. 목자들이 그러했듯 그분을 구하라. 시므온이 그러했듯 그분을 바라라. 박사들이 그러했듯 그분을 경배하라. 요한과 안드레가 그러했듯 그분의 주소를 물으라. 마태가 그러했듯 그분을 집으로 모시라. 삭개오를 본받아 어떤 모험을 감행하고라도 예수를 보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신다. 교리나 종교나 체제나 신조를 찾는 자들이 아니다. 이런 낮은 차원의 열망에 안주하는 이들이 많으나 상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면 족하지 않는 자들의 몫이다. 그 상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찾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마음, 바로 그것이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죄책감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책감도 떨쳐 주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나쁜 습관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쁜 습관도 없애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도 두려움이 없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긍휼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도전에 용감히 맞서셨다. 하나님은 당신도 그와 같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