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권 영사야, 아가리 닥티라우야
요즈음 외국에서 보내 온 글을 읽고 나에게는 전기가 오는 듯 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짜릿하기만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당신은 그렇다면 여지까지 뭘 했어?” 하는 내용 같았다.
물론 본인이야 그렇게 물을 생각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분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금의한양 하는 지도층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더 더욱 나에게는 뭔가 찡하고 울렸다.
40여 년 전, 내가 1등 서기관으로서 대사님한테 나의 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편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자유스럽게 사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똑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그 동안 당신 자신이 이야기하듯 독일을 포함 4-5개의 공관장을 하면서, 정말 “국민들이 편하게 살수 있도록,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했느냐?”를 되물었다. 물론 없었다. 그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현재 아산에 현대외교전시관을 개설하려고 지방선거결과를 기다렸다고 이야기도 해 보았다. 그러나 전시관은 국민들 간에 불필요한 대치를 너무 오래 가게하고 또한 간격을 벌려놓는다는 비난도 있다. 특히 좌경쪽에서 말이다.그렇다고 “맏대놓고 욕을 할 만한 힘도 없었다”고 변명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처절하였고 비참하였다. 한 시대를 살고 나서 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또 생각해 봤다. 그 동안 나는 미국에도 있었고 북구국가에도 있었으며 독일에도 있었다. 물론 통일되기 이전과 그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 이승복이든 이수경이든 천안 함이든 무엇이든 좋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극은 6,25였다.
이것만 없다면 지금 같은 비극은 없다. 생각해보니 말이다. 자본주의도 좋고 사회주의도 좋고 공산주의도 좋고, 망국적인 민족주의도 좋다. 그 속에서는 그래도 식민지배속에 이래래 저래라 하는 명령은 겪지 않으리라! 그래도 우리는 60연대 이후 조상대대로 내려온 배고 품만은 면하자고 박 대통령 밑에서 똘똘 뭉쳤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지도력에 감탄하고, 그를 지금도 흠모한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이룩한 경제적 호황 사이에서 자유민주주의란 미명하에 어느 사이에 사회주의가 싹트고, 공산 주의가 서울에 자생하였다.
제국주의 외교가 가버리니까 민족주의가 움텄다. 그러나 소위 좌파 인사들은 자기들 이야기대로,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며, 떳떳이 이 땅에서 살 권리가 있다. 그것을 확고히 해 놓자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일이다. 제발 평화만큼은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어야 할 몫이다. 정말이지 예전과 같이 6.25 전후의 인공세력이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은 북쪽세력에 너무 많이 속았고, 너무 많이 당해왔다. 옛날 같지가 않다. 특히나 6.25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유혈이 낭자해지는 일은 과거 한번으로 충분하다.
배고 품을 참으며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우리 선배들과 같이 우린 평화를 이룩하도록 기대해 본다. 참으로 우리 국민들은 너무 많은 괴로움을 당해 왔다. 우리들의 유혈은 주변국만을 기쁘게 한다.
이제 나이 환갑, 진갑을 넘기고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다. “부디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제2의 한국전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이 땅에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라고 나는 지금도 빌고 있다.
과거 독일 있을 때를 생각해 본다. 독일통일을 이끌어 내고 당시 연방총리를 역임한 Helmut Kohl 박사의 출신 주로서 가장 동남부에 위치한 Trier 시란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과거 로마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유적들이 많은 도시로서 그 중에서도 4세기 후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만든 대 욕 장과 1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원형극장 (Amphitheater), 그리고 로마시대의 북문으로 2세기 후반에 건립된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 검은 문이란 뜻)와 박물관에 진열된 “황제의 눈물 병” 등은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도시이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나라 문을 꽁꽁 닿아놓는 바람에 산업혁명의 이점을 몰랐다. 모든 것을 간접적으로만 배웠다.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갈등을 몰고 왔던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생가(Museum Karl Marx Haus)가 있는 작은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도 분단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희비의 쌍곡선이 마주치는 곳이기도 하다.
금세기 초에 생가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에는 그의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편지 중에는 나의 시선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고 마르크스가 “가장 가기 싫어한 곳” 중의 하나였다. 사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치과 병원」”이었다. 이런 마르크스의 친필서한 내용이 눈에 띄어, 특히나 치과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사람은 다 똑 같은 모양”이라고 씩 웃은 적이 있다.
생각 해 보라. 한국전만 없었으면 이산가족이 그렇게 많았으며, 남북한의 원한이 그렇게 크겠는가? 그런데 이 Trier에 있는 대학에는 동 아시아 문제에 관심이 큰 정치학자 Hanns Maull이라는 교수가 있다. 그런데 이 분의 성함이 미안하지만 "동물의 주둥이"라는 뜻이다. 하긴 "주둥이"라는 이름이 치과하고 무슨 연분이 있을까?
국제 정치학계의 거목으로 커가는 이 교수는 한국이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고, 세상 분할의 원초를 담당한 "칼 마르크스"가 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이 글방에 여러차례 소개한 이성가 대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것 보라~우야. 김일성이 그 미친 에미나이 새끼 때문에 우리나라엔 공산두의나 사회두의의 탸이가 없고, 우리 눈엔 모두 빨갱이 공산두의다 같다고나 할까! 야, 권 영사야. 주둥이 닥티라우야.”
제발 다음 세대 여러분의 몫은 평화입니다. 나는 빌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