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식민사관》
6장 식민사관 해체의 길
2. 일제 강점 찬양 처벌법이 필요하다(1)
프랑스는 불과 4년 동안 나치의 지배를 받았다. 1940년 레노 수상 아래서 육군 차관이던 샤골 드골(1890~1970)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런던으로 망명해서 지로(Henri Honore Giraud) 장군과 1943년 '국민해방 프랑스위원회'를 만들어 수반이 되었다. 1944년 5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고 같은 해 8월 드골은 파리에 입성해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했다. 드골은 1947년 프랑스의 우익 정당인 프랑스국민연합(RRF) 총재를 역임할 정도로 강한 우익 성향을 갖고 있었으나 1944년 파리 입성 직후부터 나치 협력 혐의자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숙청했다. 불과 4년의 나치 지배 동안 처벌당한 프랑스인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대숙청을 연구한 로베르 아롱(Robert Arin: 1898~1975)은 1944년~1945년 나치 협력 혐의로 처벌된 사람이 50만 명, 구속된 사람은 15만 명, 처형된 사람은 3만~4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반면 드골 회의록이나 미국의 역사학자 피터 노빅(Peter Novick, 1934~2012) 등은 1만 명 정도 처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 한 명의 매국적賣國賊도 처형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1만 명이라도 믿기 힘든 숫자지만 이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제 강점 만 9년 후에 발생한 3.1운동 때 우리가 해방되었다면 상당수의 매국노들을 처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 지배는 3ㆍ1운동 이후로도 26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평범한 인간에게 도합 만 35년 동안 지조를 지키며 살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해방 공간에서 여러 정당들이 내건 친일파 청산 방안은 프랑스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온건하기 짝이 없다.
여운형이 당수黨首였던 조선인민당이 해방 직후 내건 친일파 청산 방안은 '① 만 20세 이상 남녀의 피선거권 확립, 단 민족반역자 제외 ② 조선 내 일본 재산 및 민족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로 한다'는 것이었다. 민족 반역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고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로 하자는 정도였다.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백남운이 당수였던 조선신민당은 '① 친일분자, 파쇼분자 및 전쟁범죄자 등 일체 반동 세력을 철저히 소멸할 것, ② 일본 제국주의자 및 친일분자에게 몰수한 대기업을 국영으로 하여 국민 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는 2가지 정도의 방안을 갖고 있었다. 조선신민당이 내건 "일체 반동 세력을 철저히 소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파 정당이었던 조선인민당과 조선신민당도 친일파 처벌을 광범위하게 진행하기보다는 친일파들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처럼 보인다.
의열단장이었던 김원봉이 주도하던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좌파 정당이었는데, '① 일본 제국주의 잔존 세력과 친일파, 반동 분자의 철저히 숙청 ② 일본 제국주의자, 매국적과 부일 반도叛徒의 일체의 공ㆍ사재를 몰수하여 기업을 국영으로 하고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할 것'이란 방안을 갖고 있었다. 이 역시 친일파 숙청과 친일파 재산의 국유화 및 토지의 농민 분배라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김구 등이 주도하던 한국독립당은 '매국적과 독립 운동을 방해한 자를 징치하며,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영 사업으로 충용하고 토지는 국유로 할 것'이란 방안을 갖고 있었다. 그 방향은 모두 친일파 청산과 친일 재산의 국유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 2가지 방향 중에 실현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친일파들은 청산되는 대신 권력을 잡았고, 재산은 온존되었다. 이는 한국 사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국 사회 곳곳의 부조리를 캐보면 그 뿌리는 이 문제에 맞닿아 있다. 이제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바른 방향을 설정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제 강점 찬양 처벌법', 또는 '일제 식민 지배 옹호 행위자 처벌법' 등을 제정하는 일이다. 프랑스가 나치처벌법의 전신인 인종차별금지법, 즉 게소법(Loi Gayssot)'을 제정한 것은 1881년 7월 29일이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언론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면서도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처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제정된 법인데, 지금까지 13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수정과 보안을 거쳤는데, 1990년 7월에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프랑스는 언론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지만 인종, 민족, 종교 차별 등의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다. 인종 차별 범죄를 찬양 고무하는 경우에는 5년 징역에 4만 5천 유로(한화 약 6,2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며, 말과 글과 그림, 영상 매체를 통해 차별 행위를 할 경우 1년 징역에 4만 5천 유로의 벌금을 함께 부과할 수 있다. 또한 나치,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군주의 일본 등 3개 추축국의 승리를 위해 활동하며 반인도적 범죄에 준하는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해 최고 무기징역까지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프랑스는 1964년에 반인도적 범죄는 공소시효 자체를 소멸시켜 버렸다. 극우파는 언론자유 침해를 명문으로 항의했지만 유엔 인권위원회는 1966년 12월에 '시민과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에서 프랑스의 이 법이 '언론의 자유'조항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나치 찬양을 처벌하는 법은 '언론의 자유'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범죄를 옹호한 역사학자 오토 레머에게 독일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자 유엔인권재판소에 제소했다. 유엔인권재판소는 1995년 오토 레머에 대한 실형 선고가 인권과 근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적합하다고 판결했다. 즉 나치 전범은 물론 나치 협력자, 그리고 나치 범죄를 부정하는 수정주의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인권과 언론자유 보호에 적합하다고 판정한 것이다.
#우리안의식민사관 #조선총독부사관 #친일파 #박은식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김승학 #한국독립사 #이덕일
첫댓글 ㅉㅉ....
이덕일 이 작자, 참 뜬금없네.
본분인 제대로된 식민사관.동북공정 반박논문 연구.발표에 전념해도 시간과 머리가 모자랄 판에 뭔 뚱딴지 같이 정치질인가?
이곳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포럼'이라는 카페입니다. 카페의 설립 목적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님이 걸어오신 길과 식민사학 타파에 공감하는 사람이나 관심이 있는 분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카페를 나가시면 됩니다.
비판적인 의견은 항상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비판은 긍적적인 비판이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이덕일 소장님만큼 일관되게 그리고 선명하게 식민사관을 바로잡으려고 온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나요? 또한 이 길을 먼저 걸었던 리지린, 윤내현 교수를 존경하지는 못할망정...
몰지각합니다. 카페를 나가세요
신선생님~ 카페지기입니다.
여기 회원으로 등업하신지 얼마되지도 않으신데 ,,, 이렇게 회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으시고 계시네요.
저도 이러시면 안된다고 3번 정도 글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계속 반복되고 있네요 ,,,
앞으로, 회원들로 부터의 다시 주의 이상의 요청이 있으면,
통보없이 준회원으로 강등하겠습니다.,
@팔도유람(신종근)
몰지각하고 카페를 나가라고요?
너무 무례하군요.
님은 내 글을 읽어는 보았습니까?
내 글에 대해 학문적인 댓글 한줄이라도 달아 보았습니까?
이덕일이 식민사관자를 비난만 했지 언제 역사학도로서의 본분인 정확한 역사 지식을 전달했다고 그럽니까?
이덕일 주장하는 한 시기의 낙랑군 위치가 <진서/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 주석의 진장성 동단입니까?
님이 제대로 답하면 몰지각하다고 자인하고 천명하며 이 카페를 나가겠습니다.
@신석재 <우리 안의 식민사관>을 읽어 보셨습니까? 이 책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책인지 알고 있습니까? 이 책이 왜 몇 년만에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말과 글이란, 바로 자기자신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작자', '멍청하고 덜 떨어진 리지린이 윤내현.이덕일 등을 베려놨는지 리지린과 같이 윤내현.이덕일 등이 워낙 멍청한 것인지'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수준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 입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사람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이 뭔지 아십니까? '내가 아는 지식만 옳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 주장은 그르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부분적인 역사지식이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판세를 봐야죠. 모든 힘을 합쳐서 식민사학을 바로잡는데 총력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부분적으로 나와 견해가 달라도 큰 틀의 연대를 하면서 힘을 보태야죠. 적어도 식민사학 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끼리는 동지라는, 도반이라는 의식을 가져야합니다.
비난이 아닌 긍적적인 비판을 하셔야죠
@팔도유람(신종근)
님은 내가 이덕일이가 어떤 자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마도 내가 님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전부터 이덕일의 저술들을 읽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안의 식민사관>도 읽었고 그 외에도 이덕일처럼 식민사관.동북공정의 실체도 모르는 자들의 수박 겉핥기 식의 식민사관자들 비난으로 가득찬 내용의 서적들을 지겹게 읽었으니 님만 읽은 것 같은 자신.우월감 등은 접어두세요.
그리고, 님이 자신있게 나를 비난하는 명분으로 쉽게 빠지는 함정 운운하며 그것을 부분적인 역사지식이라 했고 판세를 보라했군요. 그러면 그 판세에서 악악거리며 한국 식민사학계를 비난만하면 일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그래요?
님에게 묻습니다.
윤내현.이덕일의 낙랑군 비정이 식민사관자 공석구에게는 어떻게 보일까요?
아마도 공석구는 중국 정사 지리지 기록을 읽고 해석할 능력도 없는 한심한 놈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일까요?
진장성이 소기 또는 동단인 지점은 한 시기 요서군 임유현이였지 낙랑군 지역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 위치의 낙랑군을 유지하기 어려워 관인.명패 등을 챙겨 도망친 곳입니다.
이러한 교치 상황을 공석구가 대한반도 평양에
@신석재
설치되었던 낙랑군이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공석구는 교치만큼은 정확하게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면 낙랑군이 대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었다는 공석구 같이 식민사관에 푹 젖은 놈들을 어떻게 하면 찍소리 못하게 설복시킬 수 있을까요? 지금의 이덕일처럼 마냥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홍보하는 식민사관자들이라고 비난만 하면 과연 공석구가 반성할까요?
대체 공석구를 어떻게 설복.반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또 공석구 등 한국내 식민사관 추종자들만 반성시키면 되는 문제일까요?
동북공정을 끝마친 중국은 한국사학계가 대처할 필요도 없나요?
내 답변은 이렇습니다.
리지린.윤내현의 고조선사 해설은 실패작입니다. 즉 식민사관.동북공정에 대처할 수가 없는 졸작이며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이 구석에서 비웃을 수 밖에 없는 함량 미달 소설책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리지린.윤내현이 붙들었어야 할 유일한 단서는 신채호.계연수의 역사지리관입니다.
즉 요하.패수가 모두 지금의 란하로 흘러드는 물길이였고 낙랑군 역시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 지점에서 서남쪽 지점으로 교치된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중국 25 개 정사 지리지와 송.명.청 시기
@신석재
간행된 고지도를 근거로 충분하게 밝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능지수 100 이상이면 누구나 다.
그런데 역사 연구만 30~50 여 년씩이나 한 자들이 식민사관자 공석구도 지적하는 낙랑군 교치를 헛발질 하다니요?
중국.일본은 그렇다치고 한국 강단사학계도 자신들을 비난하는 리지린.윤내현.이덕일 등을 비웃습니다.
판세요?
한국 판세는 이런 판세입니다.
이런 판세에 낙랑군 교치를 모르쇠하고 일본놈들과 이병도 조무래기나 비난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덕일은 식민.반도사관을 비난할 시간은 있어도 요하문명 유물.유적지가 왕검조선과 단군부여의 문화.문명이며 흥망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학문적 욕심이나 실력은 없는가 보지요?
@신석재 참 답답합니다. 저의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카페지기님이 회원들의 비판이라 하였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내 글에 대해 신뢰할 만한 근거 사료를 제시하고 논리.상식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즉 비판이 그냥 단순한 비난입니다. 역사 진실 찾기보다는 이덕일 숭배가 우선이라는 것인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에 글을 올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리지린.윤내현.이덕일 등의 식민사관.동북공정 척결 의지나 그들의 언사를 비난하고 폄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식민사관을 척결한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변조.이동 조작한 지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결국엔 강단사학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진장성 동단 지점이며 갈석산이 있는 곳이 어떻게 한 시기의 낙랑군 위치라는 것입니까?
윤내현.이덕일 두 사람의 주장 핵심이 저것 아닙니까?
식민사관자 공석구도 정확하게 알고 지적하는 것을 왜 모르쇠하며 고집합니까?
그들의 이제까지 연구 성과라는 것이 신채호.계연수를 뛰어넘기는 커녕 보완 조차도 버거운 정도인데 태산같이 쌓인 연구 대상은 제쳐두고 엉뚱한 방향에 신경 쓰는 것이 한심하고 답답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