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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十三 章 현빙지기
이때서야 그는 자기가 본 것이 귀신이 아니라 무림의 절정고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온지……』
전옥린은 그 말을 가로챘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소. 당신이 알아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오. 도망칠 생각은 아예 버리고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하시오. 우선 묻겠소. 당신 이름은 뭐라고 하오?』
흑의 장정은 순순히 대답했다.
『저는 팽택호라 합니다. 별호는 파산호라 하지요.』
전옥린은 빙그레 웃었다.
『아, 천서오호의 막내였군. 실례했소.』
팽택호는 눈을 빛냈다. 천서오호의 명성이 대단해서 이미 상대방이 알고 있으니 만약에 여기서 자기의 뒷배경을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상대가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놓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간이 커져서 목소리도 우렁우렁하게 냈다.
『친구, 당신이 불초의 명호를 들어보았다면 자연히 우리 가사이신 상문신(喪門神) 구봉(勾峯)이라는 분의 함자를 들어보셨겠구려?』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분의 대명을 들어본 적이 있소. 하지만 근 십여 년 동안 그가 강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어디로 갔소?』
팽택호는 으쓱해서 불쑥 대답했다.
『그 어르신은 바로 무정산에 은거하고 계시지요.』
순간 그는 자기가 말을 잘못 뱉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옥린의 안색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그는 마음을 놓았다.
전옥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무정산은 어디에 있소? 나는 어째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까?』
팽택호는 우쭐해졌다.
『물론 당신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오. 그곳에는 천하의 모든 고수들이 은거하고 있다오. 예를 든다면 괴면원왕(怪面猿王) 위만리(魏萬理), 유곡신마 다삼공과 같은 당년의 절정고수들이 모두 무정산에 있으며 우리 사부의 친구란 말이오.』
전옥린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아! 그토록 많은 고인들이 모두 무정산에 은거하고 있다니 그곳은 대단히 은밀하고 풍경이 훌륭한 곳이겠구려? 그곳이 어디인지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는걸.』
팽택호는 교활하게 웃었다.
『친구, 당신의 무공이 대단하니 아마도 강호에서 명성을 떨친 고수인 것 같소. 그런데 당신은……』
전옥린은 그 말을 가로챘다.
『나는 당신에게 내 이름을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이미 말한 바 있소.』
팽택호는 기가 나서 자기 가슴을 탕 쳤다.
『친구, 당신이 커다란 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구려. 그래서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인데, 그렇게 겁낼 필요 없소. 나는 당신 편이지 적이 아니라오.』
전옥린은 그가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팽택호, 당신의 그 말은 무슨 뜻이오?』
팽택호는 곁에 있는 철표의 시체를 손가락질했다.
『이 사람을 나는 알고 있소. 그는 개방의 집법 장로이며 사람들은 그를 벽력신개라고 부르지요. 친구, 당신은 이 사람을 잘못 죽였으니 이제 개방과 원한을 맺게 된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소.』
전옥린은 그제사야 팽택호가 어째서 자기를 사도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그 거지떼들과 원한을 맺게 되면 또 어떻다는 말이오? 나는 개의치 않소.』
팽택호는 넌즈시 말했다.
『친구,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오. 개방은 사람이 워낙 많고 세력이 크다오. 당신의 무공이 비록 고강하고 부인 역시 내 평생 보기 드문 고수라고 여겨지지만 역시 사람 수가 둘이니 만약 개방에서 원한을 갚으려고 벌떼같이 달려든다면 어찌 하겠소? 천하가 넓다 하더라도 당신네들이 몸을 숨길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는 설희의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도 온 머리카락이 하얀 것을 보고, 그녀가 일종의 괴기한 무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무릇 사문의 신공을 어떤 경지에까지 연성하게 된다면 그것이 몸속에서 일으키는 위력은 너무나 강대한 나머지 종종 사람의 신체에 특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법이라고 했다.
예를 든다면 사도의 십대신공 가운데 하나인 고목공(枯木功)을 절정의 상태에까지 연성하게 되면 사람의 키가 작아지면서 아주 뚱뚱해진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일단 운기행공하게 되었을 때는 전신의 근육이 움푹움푹 꺼지면서 살결은 고흑색(枯黑色)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강시공은 연마하면 할수록 사람이 비쩍 마르게 되는데 최후의 경지까지 연성하게 되었을 때는 마치 한 구의 살아있는 강시처럼 되어서 무릎마저도 구부리지 못하고 그저 껑충껑충 뛰어서 다니게 되는 것이라 했다.
팽택호는 한낱 무림의 삼류 인물이고 명성도 무공도 보잘 것이 없었지만 사부 상문신 구봉으로부터 많은 사도 무공의 특징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설희가 나이가 젊은데도 머리카락이 하얀 것을 보았을 때 대뜸 그녀가 사도의 어떤 신공을 연마한 까닭이라고 믿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한 차례 손을 쳐드는 사이에 그토록 무서운 한기가 사람에게 엄습해올 리가 없다고 판단을 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손을 쓰자마자 사람을 죽이려고 들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녀의 행동은 사도의 인물들이 하는 짓과 더욱 비슷했기 때문에 팽택호가 그와같이 오해를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 정체불명의 부부가 무림에 모습을 나타난지 얼마되지 않는 사도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창으로 온 것은 어쩌면 양심신공비급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자기 나름대로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교활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의 재간은 대단하지 않지만 우리 사부님과 그분의 몇 명 친구분들은 모두 다 강호의 절정고수들이지요. 그들은 모두 다 무정산 산주의 관할하에 들어 있소이다. 당신은 그러니까 무정산의 세력이 얼마나 크고 대단하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따라서 친구, 당신이 우리 무정산에 투신하게 된다면 개방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내 장담할 수 있소이다.』
설희가 갑자기 싸늘히 코웃음쳤다.
『당신은 지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가요?』
전옥린은 혹시나 설희가 일을 그르치게 될까봐 재빨리 끼어들었다.
『설희, 당신은 가만히 좀 있어요. 우리는 이분 친구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도록 합시다.』
설희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가 또 언제부터 당신의 친구가 되었지요?』
전옥린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설희, 내 당신보고 가만히 좀 있으라고 했소. 당신은 못 들었소?』
설희는 매섭게 팽택호를 한번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고 다시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팽택호는 전옥린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더욱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무림 정파의 여협이 그와같이 이상야릇한 이름으로 불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희'라는 말을 '혈계'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그녀를 혈계(血鷄)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그녀의 별명인지 이름인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이름자가 여간 듣기 거북하지 않구나. 이토록 꽃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그같이 으스스한 이름으로 부르니 이상하구나. 어쩌면 그녀는 혈계공(血鷄功)인가 하는 무공을 연마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가 이와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옥린이 입을 열었다.
『팽씨 친구, 당신이 말하는 무정산을 한번 가보고 싶은데 대체 그 산이 어디에 있는 것이오?』
팽택호가 대답했다.
『무정산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모른다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우리의 총순사를 만나게 주선해 줄 수가 있소. 그 어르신께서 오늘 마침 이곳에 계시니 당신은 운이 좋은 셈이오.』
전옥린은 계속해서 물었다.
『팽씨 친구, 소문에 들으니까 무창에 최근 양심신공비급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이오?』
팽택호는 그가 양심신공비급을 들먹이는 소리를 듣게 되자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강호에 처음 나선 이 사도의 고수들은 바로 양심신공비급 때문에 무창으로 온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득의에 찬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친구, 나는 당신네들이 그 비급 때문에 무창으로 온 것인 줄 이미 알고 있었소. 하지만 내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양심신공비급은 이미 우리 본산의 산주께서 손에 넣었다오.』
전옥린은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 비급이 이미 무정산 산주의 손으로 들어갔단 말이오?』
팽택호는 자신있게 말했다.
『친구, 너무 낙담할 것 없소. 만약에 당신이 무정산에 투신하기만 한다면 곧바로 양심신공비급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전옥린은 넌즈시 물었다.
『당신네들의 노산주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소문에 들으니까 이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양심신공비급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고 들었는데 그 혼자서 독차지한 것을 보니 그의 무공이 대단하겠구려?』
팽택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노산주의 무공은 천하무적이라오.』
그는 득의에 찬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당금 각파의 장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바로 그 옛날 천하제일인 이라는 칭호를 듣던 신타 을휴마저도 우리 노산주에게 격패를 당해서 지금은 일신의 무공이 모조리 상실되었다오.』
『신타 을휴는 소문에 들으니까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가 갑자기 무창에 나타났다는 말이오?』
팽택호는 대답했다.
『그 역시 양심신공비급 때문에 온 것이 아니겠소? 그리고 당신은 금응대협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있소? 그 역시 우리 노산주의 일초에 사로잡혀서 지금쯤은 이미 무정산으로 압송되었을 것이오.』
여기서 설희가 후딱 몸을 돌렸다.
『당신은 또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전옥린은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설희, 그대는 제발 불쑥 끼어들지 말아요.』
설희는 뾰로퉁해져서 쫑알거렸다.
『오빠, 그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어요? 당신이……』
전옥린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설희, 그대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오?』
그는 설희가 더 입을 놀려서, 팽택호가 자기가 바로 전옥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재빨리 눈짓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설희, 나는 팽씨 친구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소. 그대는 절대로 끼어들지 마시오. 잘 알아들었소?』
설희는 분연히 말했다.
『노산주의 무공이 천하무적이라니, 나는 꼭 그와 한번 겨루어보아야겠어요.』
전옥린은 안색을 굳혔다.
『설희, 나는 그대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지만 나 역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다오. 그대는 내 말을 듣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더 입을 열지 말고 나에게 맡겨두시오. 알겠소?』
설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지붕위에 걸터앉아서 두 손으로 무릎을 얼싸안고 아래턱을 무릎위에 얹고서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옥린도 그녀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한번도 이와같이 핀잔을 들은 적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성질로 볼 때 그녀가 정말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토록 고분고분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졌다.
팽택호는 그가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자 긴장이 되어서 탐색하듯이 입을 열었다.
『친구, 부인께서 몹시……』
『아무것도 아니오. 그녀의 성질이 언제나 저 모양이니 팽씨친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리고 팽씨 친구, 내 당돌하지만 한 가지 묻는 것을 용서하시오. 무정산 산주는 도대체 누구요?』
팽택호는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소제는 모르는 일이지요.』
전옥린은 냉랭히 웃었다.
『팽씨 친구, 당신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좀 섭섭하지 않겠소?』
팽택호는 혹시나 그가 성을 낼까봐 재빨리 변명을 했다.
『소제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오. 왜냐하면 산주가 누구인지 우리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소. 더군다나 소제의 직위가 너무나 낮은데 어떻게 감히 산주를 뵈올 기회가 있겠소?』
전옥린은 그를 몰아붙였다.
『당신의 그같은 말은 아마 세살박이 어린아이를 속이기에도 부족할 것 같소. 방금도 당신은 당신네들 산주의 무공이 절세무적이라고 했소. 그러면 그는 자연히 무림의 유명한 인물이 아니겠소?』
팽택호는 그 말을 부인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요. 예를 든다면 당신의 무공 역시 소제가 볼 때 평생에 보기 드문 고수이지만 나는 한번도 당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를 않소?』
전옥린은 웃었다.
『그야 당연한 노릇이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당신은 나의 이름을 모르고 있으니까 말이오.』
팽택호는 어리둥절해졌다.
『아, 그렇구려. 형씨, 당신의 성은 무엇이오?』
전옥린은 말꼬리를 돌렸다.
『내가 말을 하더라도 당신은 모를 것이오. 예를 들어, 당신은 예전에 설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팽택호는 고개를 돌려 설희를 한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지요.』
전옥린은 득의해서 말했다.
『그녀의 놀라운 무공을 당신은 친히 목격했을 거요. 그런데 당신은 그녀가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소?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녀는 한번도 강호에 떠돌아다닌 적이 없기 때문이오.』
팽택호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렇지요. 우리 노산주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문데, 그분 역시 무림에 떠돌아다닌 적이 퍽이나 적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소. 바로 부인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전옥린은 그 말을 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문제가 전혀 다르다오. 설희가 만약 강호에서 활약하게 된다면 삼개월을 넘기지 않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 틀림없소. 하지만 당신네 산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예전에 다른 이름으로 강호에서 활약하던 사람으로서 명성과 무공이 대단히 높았으리라고 추측되오. 팽씨 친구, 당신도 생각해 보시오. 그가 만약에 높은 무공과 명성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그토록 많은 무림의 고수들을 통솔하고 거느릴 수가 있겠소?』
팽택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소. 형씨의 말에 일리가 있구려. 예전에 어째서 나는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전옥린 역시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우연히 그 점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잘 알려진 절정고수 중에 무정산주가 될만한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잠깐 사이에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천하의 절정 고수들을 모조리 떠올렸으나 그럴듯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팽택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그 말이 전혀 잘못된 것도 아닌 모양이구먼……』
전옥린이 불쑥 물었다.
『누구의 말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오?』
팽택호는 자신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몇 명의 형제들이 좀 전에 노산주가 누구인지 이야기해본 적이 있지요. 그때 둘째형이 우리 노산주가 바로 검신 남삼객이라고 했거든요.』
전옥린의 온몸이 흠칫했다.
『그럴리가 있겠소? 남삼객은 오랫동안 무림에 독보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정파의 대협사인데 그가 어찌 무정산주로 이중 신분을 행사할 수 있겠소?』
팽택호도 맞장구를 쳤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둘째형 말로는 네째형이 하는 말을 확실하게 들었다고 했소.』
전옥린은 다시 추궁했다.
『당신의 네째형은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오?』
팽택호는 자신이 없다는 듯이 더듬거렸다.
『우리 네째형은 금모호 제갈금이라고 하는데, 그 역시 개방에서 들은 말이라고 하는 것 같았소. 나는 본래 그에게 다잡아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매우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그는 말을 멈추고 전옥린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형씨는 검신 남삼객을 알고 있는 것 같구려?』
전옥린은 마음이 착잡해지고 어지러워졌다. 그의 뇌리에는 다시 자기가 팔괘산에서 유곡신마 다삼공을 공격하고 있었을 때 무정산주의 암산을 받은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그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새겨보았다.
'만약에 내가 그 순간 암산을 당한 것이라면 무정산주의 무공이 너무나 고강해서 내가 상상하던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형님은 바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는데 어째서 알아차리지를 못했을까? 그는 숲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땅히 무정산주를 보았어야 할 것이고 곧 나를 구했어야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남삼객 본인이 무정산주라면 이 모든 의문점은 해결이 된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의 그와같은 추리를 부인했다.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적형님이 무림에서의 명성과 위치는 수십 년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이다. 그는 이미 천하 사람이 누구나 흠모하고 떠받들어 모시는 검신인데 어찌하여 무정산주 노릇을 하면서까지 무림을 한 손에 장악하고 거느리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천하 백도의 고수들과 스스로 적이 되겠는가?'
그는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았지만 여전히 무정산주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남삼객 적군의 명성이나 위치가 너무나 확고한 것이었고 거기다가 무정산주가 또 너무나 신비로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남삼객이 바로 뭇 마두들을 통솔하고 거느리면서 강호에 살겁을 일으키려는 무정산주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옥린은 임가화원으로 가서 똑똑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일이 철표의 입에서 전해진 것이라면 개방의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팽씨 친구, 당신은 방금 무슨 말을 했소?』
팽택호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친구,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나는 당신이 남삼객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소.』
전옥린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 말을 받아 물었다.
『당신은 왜 내가 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팽택호는 뭔가 일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꾸 그를 떠보는 듯한 말투하며 두 사람의 기이하도록 높은 무공에 생각이 미치자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탐색하듯이 물었다.
『두 분은 혹시 본산에서 나오신 선배 고수가 아니신가요? 만약에 그렇다면 아무쪼록 제자가 쓸모없이 말을 많이 한 점에 대해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옥린은 하마터면 소리내어 웃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고 음성을 묵직하게 가다듬었다.
『팽택호, 당신은 무엇 때문에 본산의 기밀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마구 지껄여 대었소? 그러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했소?』
팽택호는 이제 그가 무정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꼼짝없이 믿게 되었고 그들의 무공으로 미루어 볼 때 틀림없이 어느 당의 당주정도의 위치는 충분히 차지하고 있을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크게 놀라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제자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원래 본산을 위해 인재를 끌어들일 욕심으로 그만 입을 열었으니 그 점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옥린은 그가 이같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한편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는 팽택호를 만나고 나서 무정산의 바깥 테두리 조직과 각처 분타의 사람들이 모두 다 이삼류의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하부조직을 이루고 있다면 큰일은 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그들은 어쩌면 무정산의 근본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옥린은 무정산의 진정한 실력이 완전히 그들이 말하는 본산의 본부 조직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었다.
만약에 무정산의 위치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강호 정도의 정예고수들을 연합해서 일거에 쳐들어가서 일전에 무정산의 세력을 깡그리 제거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들 분타의 졸개들은 무정산의 위치도 모른다. 오로지 그들의 핵심인물을 잡아야 무정산이 어느 곳에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겠구나.'
팽택호는 그의 안색이 침중한 것을 보고 더욱더 불안해져서 슬쩍 물었다.
『실례지만 선배님은 총타의 어느 당에 소속되어 계시온지요?』
전옥린은 무거운 얼굴을 하고 그 말을 무시했다.
『당신은 본산의 규칙 몇 조를 범했는지 알고 있소?』
팽택호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가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전옥린은 다그쳤다.
『말하시오. 당신은 규칙 몇 조를 어겼소?』
팽택호는 전전긍긍하며 말했다.
『제자는 제5조의 규칙을 범했소이다. 본산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전옥린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본산의 비밀을 누설하면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오?』
팽택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능지처참을 당할 죄를 지은 것이지요.』
전옥린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정산의 비밀이 오랫동안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로구나. 그들의 규칙이 이토록 엄준하니 신안 우정산이 나에게 말할 때도 그토록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었구나.'
능지처참이라는 형벌은 사람의 몸에서 살 한조각 한조각을 죽을 때까지 발라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형의 집행에는 요령이 있어야 하는데 만약 사람의 중요한 부위에 칼질을 하게 된다면 빨리 죽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형을 받는 사람이 온갖 고통을 당하게 하려고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부위부터 칼을 쓴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도법에 뛰어난 망나니는 한 사람의 몸에 있는 살을 천여조각이나 발라내고도 죄수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팽택호가 능지처참을 받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전신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애걸했다.
『제자는 본산을 위해서 뛰어난 인재를 포섭하고 싶은 욕심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다만 제자의 죄가 있다면 본산에서 내려오신 어르신을 몰라볼 정도로 제자의 눈이 밝지 못하다는 점이지요……』
전옥린은 넌즈시 물었다.
『팽택호, 내가 당신에게 살 기회를 한번 열어 주도록 할까?』
팽택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큰절이라도 올릴 것처럼 달라붙었다.
『고맙습니다. 제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전옥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말을 들으니까 성총순사가 이미 분타로 갔다는데 그러한가?』
팽택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어르신께서 어제 아침에 분타에 도착하셨지요.』
전옥린은 찬찬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번에 총순사와 마찬가지로 개방을 상대하기 위한 임무를 띄고 특별히 산을 내려왔다네. 왜냐하면 개방의 천지이로가 금응협객 전옥린의 어린 아들과 신타 을휴를 보호하고 있단 말일세. 노산주께서는 팔괘산에서 그 아이를 보셨는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셨기 때문에 먼저 성총순사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고 그런 연후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다시 우리들을 급히 보낸 것이라네.』
그는 아무렇게나 없는 소리를 했지만 팽택호는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는데 되려 설희가 아리송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오빠, 당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도무지……』
전옥린은 재빨리 눈짓을 했다.
『설희, 이 일을 그에게 알려줘도 상관이 없소. 그는 순진한 사람이란 말이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공을 세워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라오.』
팽택호는 죽음의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사람처럼 공손히 말했다.
『선배님의 커다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자가 이 은혜에 보답할 수만 있다면 분골쇄신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건 기꺼이 시행하겠습니다.』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는 이제부터 우리를 데리고 임가화원으로 가세. 우리가 한 걸음 먼저 전옥린의 아들을 잡아온다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셈이고 그렇게 되면 자네가 총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하겠네.』
그런데 그의 이 몇마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희가 소리쳤다.
『오빠, 당신은 오늘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은 나에게 당신이 바로 전옥린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전옥린은 그녀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팽택호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당신이 전옥린……』
그는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뛰어 일어나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분타를 향해 도망쳤다.
전옥린은 발을 한번 구르고 몸을 날려 뒤쫓아 갔다.
전옥린의 몸이 지붕에서 막 솟구치게 되었을 때 설희는 어느덧 한 조각의 가벼운 구름처럼 가뿐하게 허공으로 솟아올랐는데 그 순간 밤하늘에 엷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옷자락이 한번 펄럭이는 가운데 하얀 손이 춤을 추듯이 쳐들리자 팽택호는 처참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의 몸뚱이는 땅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뻣뻣한 얼음덩어리가 되어 거리 한복판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와싹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설희는 한번 손을 들어 팽택호를 죽였으나 몸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파도를 타는 선녀 같았으며 하얀 나삼에서는 한 조각의 엷은 형광(螢光)이 뻗쳐났다. 그녀는 허공을 선회하며 몸을 되돌려 돌아왔다. 그녀는 전옥린의 곁으로 사뿐 내려서며 물었다.
『오빠, 당신의 말들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째서 그렇게……』
전옥린은 씁쓸히 웃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그것으로 되었소. 어찌되었든 그들은 사람이 많을 테니까 아무나 한 사람을 찾아내어서 길을 안내하도록 시키면 될 것이오.』
설희는 아직도 전옥린의 말속에 숨겨져 있는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미처 다시 묻기도 전에 노최기약행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 그림자가 달려나왔다.
그 사람들은 팽택호의 비명소리를 듣고서 달려나온 모양이었는데 모두 흑색의 경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임가화원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옥린은 검은 수건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설희, 그대는 이곳에서 이 시체를 지키고 있도록 하오.』
설희는 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요?』
전옥린이 본래 그렇게 말한 뜻은 설희가 손을 쓰게 되면 단숨에 그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길을 안내할 사람도 남아나지 못하게 될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가 바라보니 십여 명의 장정들은 팽택호가 뻣뻣하게 거리 한복판에 부서져서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주위에 몰려들어 의논이 분분했다.
그 사람들의 몸짓으로 미루어 볼 때 그냥 약방의 사환이나 거리의 건달들 같았고 그들 중 겨우 한 사람만이 팽택호와 비슷한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 같았다.
전옥린은 설희를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설희, 저것 좀 봐요. 저 사람들이 어떤 인물들이오? 당신이 손을 쓸만한 가치가 있겠소?』
설희는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방긋이 웃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군요. 저들을 죽인다고 해서 오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렇지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줄곧 그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저런 무명소졸들만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저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모백을 잡으러 가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줄곧 성총순사가 나서지 않는 데 대해서 의혹을 가지고 있었는데 설희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더욱 기분이 좋아져서 쫑알거렸다.
『우리 사부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강호에 나서게 되면 좀처럼 적수를 만나기 힘들 것이라구요. 그러나 오빠, 나의 무공이 비록 높고 세다 하더라도 오빠를 당할 수는 없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그러다가 그녀는 전옥린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약간 뾰루퉁해졌다.
『오빠, 당신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는군요?』
전옥린은 이때 그 사내들이 팽택호의 시체를 떠메고 노최기약행으로 돌아가고, 다섯 사람만 문 입구에 남아서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성총순사라는 사람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되는대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나는 다 듣고 있소.』
설희는 뾰루퉁해져서 빽 소리를 질렀다.
『오빠, 당신은 근본적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설희의 말을 들었는지 노최기약행을 지키고 있던 다섯 사람들 가운데 세 사람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설희, 쓸데없이 말을 크게 하지 말아요. 그들이 오고 있소.』
설희는 아미를 살짝 찌푸리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감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전옥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설희, 그대는 어째서 또 말을 듣지 않는 것이오?』
설희는 뾰죽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나도 물론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아야지요.』
전옥린이 말했다.
『꼼짝 말고 여기 좀 있어요. 나는 먼저 저 세 사람을 상대해야겠소.』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설희는 어느덧 사뿐하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전옥린은 급히 뒤를 쫓았다.
세 명의 사내들은 평소 체구가 우람한 점과 여기저기서 주워 배운 몇 수의 무공을 믿고 종종 도박장이나 청루에서 행패를 부리며 으스대던 왈패들이었다.
그들은 맞은편 지붕 위에서 나는 여자의 말소리를 듣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달려와 본 것이다. 그들이 거리 한복판에 이르게 되었을 때 눈앞이 번쩍하며 선녀와 같은 얼굴에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드리운 소녀가 불쑥 앞길을 막아섰다.
설희의 경신법은 이인(異人)으로부터 진전을 이어받은 데다가, 어릴 적부터 빙곡에 살면서 얼음벼랑을 수시로 미끄러져 다니며 연마했기 때문에, 경신법에 있어서는 더더욱 특출한 바가 있었다.
그녀가 몸을 날려 거리 한복판에 내려서자 그 세 명의 사내들은 그녀가 어디서부터 모습을 드러내었는지 알 수 없었고 땅에서 불쑥 솟아난 것 같기만 했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다 깜짝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딱 벌린 채 설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운데 선 사내가 먼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호선(狐仙)이다! 여우귀신이야!』
그는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다른 두 명의 대한들도 역시 비명소리를 지르며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려고 했다.
설희는 그렇지 않아도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울화를 쏟을 데가 없던 참인데 어찌 그들이 도망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겠는가?
그녀는 뺨에 살짝 볼우물이 파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한차례 팔랑 흔들었다. 그 순간 그 세 명의 사내들은 세찬 기류에 얻어맞은 듯이 주춤했다가 땅바닥에 엎어졌고 겨우 한번씩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으나 곧 잠잠해지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옥린도 몸놀림이 상당히 빠른 편이었으나 그가 설희의 앞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직후였다.
그는 그 세 명의 사내들이 뻣뻣하게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노기가 끓어올랐다.
『설희!』
그는 막 입을 열고 한바탕 꾸짖으려 했을 때에야 설희의 현빙공이 방금 발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접근하자마자 한가닥의 살벌하고 매서운 한기가 전신을 뒤덮어 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이 특이한 한기에 항거하기 어려워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두 걸음 물러섰으며 재빨리 단전의 진화(眞火)를 끌어올려서 전신을 보호했다.
설희의 얼굴빛은 서리가 낀 듯이 하얗고 창백하게 변해 있었는데 금세 원래의 곱고 윤기나는, 발그레한 얼굴빛을 회복했다. 그녀는 전옥린의 그같은 모습을 보고 손을 뻗으며 물었다.
『오빠! 괜찮으셔요?』
전옥린은 대뜸 그녀의 맥문을 움켜잡고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설희, 내 다시 한번 경고하겠소. 그대가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차라리 맹세를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와 동귀어진(同歸於盡)하게 될지도 모르오.』
설희는 이틀 동안 전옥린과 함께 행동한 이래 한번도 이같이 그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의아한 듯이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오빠,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전옥린은 그 말을 다 듣지 않았다.
『설희, 그대는 그대의 무공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래 도처에서 사람을 마구 죽여도 되겠소? 그전에는 그대 자신도 그것이 잘못인 줄을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까 내 더 이상 탓하지 않겠소만 앞으로 나와 함께 행동하는 한 그런 짓은 허용할 수 없소. 그리고 그대도 생각해 보시오. 그대가 일단 손을 쓰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았소? 당신은 이에 대해 마음이 괴롭지도 않으시오?』
설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산속에서 살 때 미미라고 이름 붙인 다람쥐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미미가 까닭없이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는 얼마나 괴로워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