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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대와 중동부 전선 이야기(7, 전용운 일병 이야기 계속)
'52년 10월 막바지에 그토록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동료는 대부분 숨져갔다.
특히 지형능선 바로 눈앞의 난초고지에서는 결국 피탈 되었지만 모두가 전우들 모두가 숨졌다.
575고지도 결국은 적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그래도 살아서 10월말에 양주로 이동하여 조금의 휴식이 주어졌다.
"굶은 식사는 얼마나 되시는지요?"
"그런 말도 못해요. 노무자들이 들고 오다가 도중에 기습을 받아서 전초까지 도달하지 못해"
"지금 되돌아 보시면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어디가 더 치열했다고 생각 되시는지요?"
"수도고지는 주로 26연대와 1연대가 싸웠고 우린 주로 지형능선 일대에서 싸웠어요."
"그래도 생각나는 것은 '53년 7월 중공군 마지막 공세에서이청동에 있다가 우리 기갑연대장이 전사하고 혼자 탈출하여 남으로 내려서 미군부대에 구츨되어 살아난 것이 가장 추억에 남고 고성 월비산-351고지전투에서 함께했던 대부분의 전우가 1차로 다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곁은 떠난 것이 기억에 남아요."
"저도 351고지에서 살아난 기갑연대 출신 참전용사님의 기막힌 사연을 들었습니다. 도중에 부상으로 의병전역 했습니다."
차재복 용사님(91세), 이제 고인이 되셨을 겁니다.
용사님은 '48년 11월에 온양에 있던 제 13연대로 입대하였습니다.
마을 이장이 시국 강연이 있다하여 광주중학교로 모이라고 해서 나갔는데 모병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짜기 명지바지 입고 있는 한명을 후려갈겨 놓고 그래서 모두가 덜덜 떨었다.
입대를 강요한 겁니다. 군용차 타고 시흥에서 온양으로 내려가 석달 기초훈련 받고 서울 서빙고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마부대가 주둔했던 장소에 갔다.
"이때 제 9연대가 제주도에서 4.3사건을 진압하고 3일전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남산 밑 삼각지로 이동했다."
우리 13연대 1대대가 옹진으로 들어갔는데 가끔 북한군과 총격전을 하곤 했다.
그리고 '59.5월에 수색으로 이동해 1사단이 되어 고랑포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전쟁 하루전 날 '50.6.24일에 집에 일하러 갈사람 나오라해서 휴가를 나갔어요."
수색으로 갔는데 이미 전선이 무너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용산으로 삼각지에서 서빙고로 우왕좌왕 하면서 갔더니 배를 4명이 타고 역삼동지역으로 건너가 아무 집이나 들어가 밥을 얻어 먹었다.
힘쎈 사람을 따라 걸어서 수원에서 대전 대구로 내려가 다시 군에 합류했는데 그림그리는 사람 나오라해서 손들고 나갔더니 육군본부 보도과에 가서 국군 모집 포스터를 그렸다.
그런데 갑짜기 중공군이 내려오고 있다면서 모든 군인을 전방으로 배치하라 해서 이때 수도사단 기갑연대에 편입되어 포항에서 배를 이용하여 동해안 삼척으로 들어가 묵호 강릉지구에 이어 설악산에서 승리하여 6월에 향로봉으로 올라갔다.
"나는 죽는게 아니고 잠들 뿐이다."
산머리곡산에서 우리 기갑연대가 엄청 큰 피해를 입었어요. 그러면서 다시 10월에 351고지-월비산으로 공격하여 탈취하는데 여기서 부상으로 그만 의병전역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나는 참 보고 싶고 눈물나는 동기는 나와 그림동기인데 "동료 엄주환"이 배에 파편을 맞고 쓰러져 있는데 제가 직접 달려가 품안에 안았는데 숨져갔어요."
그러면서 본인의 총을 주고 철모를 주며 눈을 감는데 "나는 죽는게 아니라 잠들 뿐이다"라고 전해달라 했단다.
"충성, 용사님 저도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저희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때 용사님도 어깨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확인해 보니 좌측 손을 펼 수 없었다."
위생병이 후송 하는데 그만 박격포탄이 떨어져 몸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버려 뭐 어떻게 뼈 한조각도 모셔셔 가매장할 수도 없었다.
속초 야전병원으로 후성 되었다 부산 31육군 병원으로 내려가 결국 의병전역하게 되었다.
"어르신, 같은 수도사단 기갑연대 출신의 경험담 입니다. 감회가 새롭지 않습니까."
전용운 용사님도 월비산-351고지에서 그리고 수도고지에서 난초고지에서 전투를 했고 살았다.
그러다 52.10월 말부터 양주에서 조금 휴식을 취하고 교육훈련과 부대정비를 한다음' 52년 12월에 미 제 9군단 우익으로 들어와 국군 6사단 좌측에서 방어임무를 하였다.
'53년 동계와 춘계에 큰 전투없이 지내다 5월에 직목동 470고지(샛별고지)와 회고개에서 전투가 벌어져 승리하는데 이때는 예비인 기갑연대에 있었다.
전선은 휴전바람으로 다시 또 뒤숭숭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6.10 반공포로석방"에의해 6월 군사작전의 결과가 무색해지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선전효과가 퇴색 됨에 따라 한국정부에서 휴전협정을 준수하도록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한편, 휴전을 앞두고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기도에서 이미 6.19일 모택동이 한국군에 새로운 공세를 펴야 한다는 지령을 하달 하였다.
그들은 이번 7월공세에 금성돌출부에 배치된 국군 4개 사단(수도사단.제6.제8.제3사단)을 섬멸하기로 목표를 결정 하였다. 그 결정적 이유는 이미 전투를 하여 지형을 잘 알고 전선이 돌출 되어 있으며 특히 화천 수력 발전서를 되찾으려는 전략적 기도가 깔려 있었다.
그들은 동서 양 집단이 견부에ㅓ 돌파공격을 한다음 중앙집단과 협조하여 중앙의 아군을 포위 섬
멸한다는 것이었다.
공산군은 금성돌출부에 대한 공격에 앞서 6월 24일부터 이 지역에 대한 탐색공격과 다른 지역에서 조공과 양공을 실시 하였다.
중공군은 '53.6.24~25일에 돌출부 좌단 국군 제 9사단의 김화 서북 북진능선과 저격능선에 대한 재 공격을 실시 하고 다음 날에는 우단 국군 제 3사단의 용호동 관망산(529고지)을 공격하였다 .
국군 제 3사단은 현리 전투후 특별히 전투에 참가하지 않다가 '51.10.19일에 가칠봉 지역의 국군 제 5사단 지역을 인수하여 가칠봉 전투를 하다 11월13일에 양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려늘 실시한 후에 '52.1.11일에 제 9군단 지역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 6사단의 금성천 동안지역을 인수받아 748 피의고지 572독수리고지 필승,택사스 오봉능선에서 전초진지 쟁탈전을 실시한다.
'53.4.13일에 이번에는 국군 제 5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화천 상리로 이동하고 6월3일 동송으로 이동하여 6월 10일 22연대가 국군 제 5사단에 배속 운용되다 6월 15일 복귀하면서 금성천 등대리 일대로 진입하여 제5사와 8사의 작전지역 일부를 인수 받은 상태였다.
관망산은 북한강과 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북안에 위치하는 산으로 이곳 여문리 등대리일대는 피탈시 바로 백암산으로 직행하여 아군을 포위할 수 있는 주요 목으로 중공군은 이곳을 03:00경 공격 하였다. 이곳은 51년 8월에 국군 제 6사단이 금성천을 도하 하여 공격할 시도 많은 격전을 하였다.
국군제 3사단 23연대 참전용사인 조규남용사님(86세)은 이곳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중공군은 어떻게 기습을 가해 오는지요?"
"그놈들은 꼭 이른 새벽이나 자정이 조금 지난 아주 취약한 시간대에 꼭 공격을 합니다."
"피리불고 나팔불고 고지정상에는 박격포탄을 퍼붓고 이미 철조망 지대를 통과하였어요"
"아니 2중3중으로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매설 했는데 어떻게 침투를 당하는지요?"
"그게 참 이상합니다. 구신도 아닌데 어떻게 뚫고 들어 오는지... ."
물론 답은 다 있다. 계속 되는 전투에 아무리 졸지 말라해도 결국 졸아서 대부분 침투를 허용한다고 한다. 졸음 앞에는 항우장사도 어쩔수 없다고 한다.
그날도 꼭 6.25전쟁때처럼 비가 퍼붓고 있는데 얼마나 포를 쏘아대는지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이곳이 뚫리면 도하에 지름길이 된다. 그러니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진내사격까지 용청하며 버티어 봤지만 새벽에 결국 피탈 된다.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아 비행기나 아군 포사격에 많은 지장을 가져왔다.
"바로 역습을 하라, 오버"
"네, 알았습니다. 오버"
"22연대 병력을 투입했다"
"23연대 병력을 투입했다"
"왔다갔다 그렇게 7번을 죽으라고 달라 붙었다."
중공군놈들은 아예 총도 없이 방방이 수류탄들고 자폭으로 맞섰다.
절대 고지를 확보하려 목숨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우린 이길 수가 없었다.
"용사님 전사자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방법이 없어요. 파인 포탄 구덩이나 교통호등에 밀어넣고 주위의 낙엽등으로 임시 방편 덮을 수 밖에 없어요. 노무자들이 일부는 꺼냈지만 진지상에 포탄이 떨어져 시체가 박살이 나 버렸는데 뭘 어떻게 운반하겠소... ."
국군 제 3사단 피해는 1,776명의 손실이고 중공군은 2,962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 되었다.
지금 금성천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도 말없이 흐르고만 있다.
'53.6.26일에는 중공군 189사단의 1개 연대가 북한강 동안에 제 5사단 36연대 진지를 공격하고 다른 1개연대로 그 인접 미 제 10군단 죄익 국군 제 7사단의 8연대 938고지를 공격 하였다.
다시 또 36연대는 적의 기습과 이해전술에 말려 1.3km를 후퇴해야만 했다.
하지만 7사단의 938고지에서는 대대장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피탈과 탈환을 몇번씩 반복 하면서 결국 중공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 유명한 "선우고지 전투"다
'53.6.26일, 21:45부터 집중 포화가 떨어진다.
곧 이어 탄막사격이 시작되고 언제 기어 들어왔는지 쥐새끼같은 중공군이 바로 토차카 문앞에 나타나고 나팔소리에 사방에서 다발총 소리로 공황이 발생한다.
전방 중대 전초들이 겁에 질려 밀려 내려온다.
"물러서지 말라, 현 전선을 고수하라" 대대장 선우소령의 육성이 울려 퍼진다.
"전방중대, 전방 중대 나와라 오버~!" 들리지 않는 메아리였다.
"연대 나와라 오버" 하지만 연대장은 전쟁피로로 불면증에 시달려 후방 지휘소로 가고 없다.
이미 적이 유선을 절단하고 계속 되는 포사격으로 통신병이 유선을 보선할 수도 없다.
"쫑알쫑알, 벌써 대대 지휘소에 중공군이 들어왔다. 총을 갈겼다."
"터지는 수류탄, 그렇게 대대장과 아군, 적군은 함께 죽어갔다~!"
"야, 3연대 집어 넣어~1"
"야, 그러면 8연대 집어 넣어~!"
"와~, 드디어 탈환이다. 만세-만세-만세~"
그러나 적의 인해전술, 그리고 무자비하게 퍼붓는 포격에 물러나야 했다.
사단장 김용배 소장은 기필코 진지를 탈환하고자 어떠한 희생도 불사할 각오였지만 그 당시 군단장(화이트 중장)이 7월1일부로 말렸다.
이 전투에서 국군 7사단의 손실은 1,347명(사상자+실종)이고 적의 손실은 1,323명으로 추산
그 숫자를 한번 비교해 보시라.
그 얼마나 비참한 전투 였으며 장렬한 죽음인지... .
후일 이 고지를 전사한 대대장의 감투정신을 기려 "선우고지"라 칭하였다.
3연대 김봉환 참전용사님(90세)은 휴전막바지에 938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죽어도 죽어도 밀려 오는 중공군은 끝이 없다.
역습을 하고 역습을 하고 얼마나 죽어나가는지 노무자들도 참여해야 했다고 한다.
한 5일에 1,400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당했으니 하루에 도대체 몇 명 꼴인지 눈물이 난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한다.
양공으로 서부전선에서도 미 제 1군단 지역의 역곡천 일원의 전초진지에 대해 공격을 중공군이 가해 왔다. 이곳은 '51년 10월에 코맨도 작전과 '52년 6월 카운터 작전시 격전 끝에 확보한 이래 여러차례 쟁탈전이 벌어졌던 고지군들이다.
중공군은 6월 25일~29일에 국군 제 1사단 전초 250고지(퀸고지)-199고지(박고지)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7월 6일에는 미 제 7사단의 포크찹고지(234고지)를 공격하고 같은 날에 국군 제 2사단의 화살머리 고지를 공격 하였다.
국군 제 1사단은 전쟁 기간중 북진 작전시부터 계속해서 미 제 1군단에 배속 되어 서부전선에서 전투 하였으며 이 기간중 유일하게 '52. 7.13~8.4까지 남원과 밀양 등지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하고 '52.8.12에 경기 연천으로 이동 하여 부대 정비후 10.1일 부터 연천 서북방 이진강 S형 굴곡부를 미 제 3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아 그 유명한 노리-베티고지등에서 휴전시까지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중공군은 '53.6.25일 22:00시에 전 전선에 전초기지들을 강타하기 시작 했다.
퀸고지 박고지, 1고지 ,3고지, 마이크고지, 노리고지에 포격을 집중한 후 공격을 가해 왔다.
이때 사단은 적의 전 정면 공격에 직면하여 국군 해병 연대(-)까지 배속을 받아 혈전을 계속 하던중 휴전이 임작한 시점에서 비무장 지대가 될 이들 전초를 놓고 더이상 피를 흘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미 제 1군단장 (클라크 소장)의 지시로 주 저항선에서 적과 대치 하게 된다.
퀸-박고지 전투가 소강 상태로 들어간지 일주 후 7월 6일에 중공군이 우익인 미 제 7사단이 방어 중인 포크찹고지(234)를 공격해 왔다.
이 고지는 역곡천 지류의 바로 북쪽 하사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지난 3월 적에게 피탈된 불모고지(275)와 더불어 서부전선의 격전지 였다.
그러나 이미 휴전에 목적을 두고 있는 미군으로서는 몇번의 역습에도 중공군이 목숨으로 물러나지 않으니 더이상의 인명피해를 강요당하며 싸울 필요없다고 철수해 버린다.
포크찹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인 7월 6일에 국군 2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화살머리고지에도 중공군의 공격이 가해졌다. 이고지는 '51년 코맨도 작전시 탈취한 고지로서 백마고지(395)와 함께 역곡천 북안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화살머리란 그 지형세가 역곡천 물이 돌아가는 모양이 화살모양으로 흐르고 있어 붙여졌다.
제2사단은 '52.10.14~11.24까지 저격능선 전투(국군 제 9사의 30연대가 배속 되어 참가. 백마고지의 국군 9사단이 '52.10.6~10.15까지 전투후 미 제 3사단에게 인계후 사창리에서 정비후에 국군 2사단 진지 인수))후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후 지난 '52.12. 29일에 저격능선에서 이곳 미 제 3사단으로 부터 인수 받았다.
지난 '53.6.29~30에도 중공군이 2개 전초진지를 공격한바 있는데 이들을 격퇴하였으며 401명의 손실을 입고 물러간 중공군 73사단이 재차 공격해 온 것이다.
7월11일까지 계속된 공방전에서 아군은 500여명의 손실을 적은 750여명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 되었다.
당시 제 2사 17연대 소속인 장홍윤 용사님(89세)은 '52년 말에 입대하여 제주도에서 훈련 받았다.
흔련시 얼마나 바람이 거칠고 먼지가 나는지 눈 앞을 볼수가 없는 날이 많았다.
"그당시 훈련소에 무슨 시설물이 없었나요?"
"무슨 시설물, 천막 몇개 처놓고 오직 걷고 뛰고 겨울인데 그렇게 먼지 바람이 불어 호흡기 환자가 많았어요. 그러다 병들어 많은 인원이 산방산 밑인지 어디에서 화장에서 뼈 몇개 추수려 본가 봉송 한다고 소문이 자자 했어"
"혹시 말단 소총병으로 참가 했나요?"
" 그럼 소총병으로 화살머리 고지 맨 앞에 전초에 가서 토치카에 1달씩 신발싣고 있었어요"
"낮에는 그저 토치카 속에서 자는게 한때는 일과야"
"이놈의 토치카에 들어 있다가 총도 제대로 못쏘고 기습 받았는데 나만 살고 다 죽었어"
"아니 왜 토치카가 안전할건데... ."
"모르는 소리 말아요. 입구가 막히면 오도가도 못해. 말도 제대로 들리지도 안해. 워낙 밖에 포탄 괴음이 커서, 많은 인원이 매몰되어 죽기도 해"
"그러니 유해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알 수가 없지. 아마 교통호나 당시 토치카 속에 있다고 봐야지"
"더 기막힌 것은 중공군이 아주 어린병사가 많아요. 자고 나가보면 배가 고파서 우리 쓰레기장에 모여 들어 뭘 찾아 먹어요. 피묻은 것도 먹는 것이면 먹는 다니까"
"그러니 소문에 죽은 전우를 먹는 다는 이야기도 돌았어요"
"너무 굶어서 생과사의 전투가 문제가 아니라 배골아서 죽을 판이니 그저 손들고 밥좀 달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다보니 우리가 전쟁초기 후퇴 작전시 안강 기계까지 수도사단이 밀려 내려갔을 때에도 기계 어래산 골짜기에 우리 취사반이 운용되는데 북한 학도의용군이 새벽에 밥좀 달라고 찾아왔다는 참전용사의 증언을 들은적 있는데 설마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는데 휴전 막바지에도 아무리 "총알이 빗발쳐도 잠 못자고 배 고프면 못한다"는 말이 실감났다.
"하기야 우리도 전우가 죽으면 주먹밥이 늘어나니까... . 설마 하지만 몇끼 굶어봐야 알아요!"
권영효(94세, 본나이 89세)참전용사님은 미 제 3사 7연대 3대대 군속으로 따라 다녔다.
고향이 철원 동송 관우리인데 1.4후퇴때 붙잡혀 군속이 되었다고 한다.
'52년 겨울에 미군이 백마고지 일대에 갔는데 7연대가 포위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화살머리 고지에는 미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가 더 죽었다 한다.
"아예 고지 전체가 백마고지나 화살머리고지가 토치카로 되었다고 보면 돼요."
"전차도 올라와 있었는데 전차가 적진에 사격하면 정말 장관이지, 불빛이"
"연천 감악산에서도 미군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감악산에서 죽는 것 직접 목격 했습니까?"
"무슨 말이야, 내가 직접 따라 다녔는데 탄통들고. 우리 노무자들도 많이 희생 되었어요"
본인 집이 동송 관우리라 나보다도 지형은 더 잘 아셨다.
금화 오성산에서도 전투를 했다고 한다.
휴전시 되면서 오성산에서 나왔다는 노병의 얼굴에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살아있는 전우가 공황이 발생하여 자해를 해도 말 못해요"
"노동당사 야산에 방공호가 있고 그속에 민간인들이 많이 죽어 있어요"
전 31사단장을 한 정웅 예비역 소장과 전화로 연락이 되었다.
"화살머리고지에서 소대장 시절에 유해를 발굴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수색정찰을 나가다 보면 경계작전을 하는데 장골이 당당히 큰 유골이 발견되고 그 당시 인식표도 있었던 갔은데 그 인근에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주었어요."
"혹시 현장에 가시면 확인이 가능하시겠습니까?"
"그럼. 내가 직접 했으니 찾을 수 있다고 봐요. 한 번 같이 탐사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엉뚱한 나 개인의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난 백마고지도 실제 참전용사님과 탐사를 했다. T-본고지 앞의 에리고지는 바로 눈앞에 지나는 휴전선을 보며 당시 전초기지에 토치카 구축 실태와 3중의 철조망도 확인해 보았고 그 수많은 박격포며 탄통들을 눈으로 보고 그로 인해 숨져간 용사님들의 명복을 현장에서 빌었다.
"유법사님이 들어가 유해를 거둬 처리했다."
그래도 중대장으로 있던 그 시절이 아닌 지난 90년도 후미에 벙커공사인지 진지 공사인지 많은 유해가 나왔다. 신고가 접수되니 사실 유엔사측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곳은 프랑스군대도 들어와 전투 한 곳이다.
하지만 유엔사 팀들이 들어와 확인결과 동양인으로 판명되어 국군에게 처리가 위임 되었고 이에 따라 유법사가 들어가 이장관을 이용하여 유해수습을 도와 주었다고한다.
"사실 비무장지대 지피는 모두 전쟁터였다. 그곳에 벙커가 들어섰는데... ."
155마일 전선에 어마나 많은 숫자의 GP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0개소는 될 것이다. 그런데 그곳이 모두 치열한 전쟁터였다면 이곳을 다 파헤쳐 유해의 한조각이라도 거둬들여 주어야한다. 요즈음 진행되는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라보는 나는 쓸쓸하기만 하다.
아직 70년 밖에 안되었다.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며 일과성 홍보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사실 북한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는 이번('18년 10월 1일)이 처음 국내로 송환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유해는 북한이 미군유해 송환시 함께 미 하와이로 가서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
이미 4~5년전에 20여 구를 송환해와 이중 신원 확인이 된 유해도 있다. 하늘이 아는 사실인데 발표시마다 '최초 최초'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건 너무 비겁하다.
"언론에 여론은 쉽게 속는 법이다. 때론 여론이 옳바른 언론을 일의켜 세우기도 한다."
155마일 휴전선 안의 웬만한 격전지는 들어가 확인해 본 나다.
하지만 근간의 남북군사실무합의서에 비무장지대 유해발굴을 먼저 화살머리고지 지역으로 하고 그에따른 진입로 작업을 먼저 하고 지뢰제거를 일정구간 하며 2019년에 상징적으로 유해발굴의 첫삽을 들게 된다고 호들갑떠는 모습을 보고 있다.
동수의 GP를 시범적으로 몇개 철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며 현재고 미래다. 아니 휴전 막바지에 왜 금성돌출부에 그토록 공산군의 압력이 집중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국군이 전사했고 부상 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다.
분명한 답은 하늘에 있는 염라대왕이 알겠지만 일반적인 추론은 철원평야를 화천 발전소를 확보하고 '53.6.18일에 단행된 반공포로 석방에 따른 그 숫자, 2만여명을 사살해서 체면을 세우라는 모택동의 지시요 김일성의 야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 의 연천 북방과 정연리역 근교를 개방 한다면 물론 대비야 하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통로 아니 저항선을 개방하는 격이라면 과언일까!
너구나 누가 지역을 선정했는지 모르지만 하필 우리의 주 피해지역이 아닌 곳을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군을 발굴하려 하는 것인가~!
발표내용처럼 화살머리고지야 국군은 200여 명의 전사자다. 하지만 기본 상식이 있다면 북한강 금성천일대 양안의 관망산529고지, 949고지, 황병동, 선우고지 그리고 임진강 서안의 노리-베티고지 남강 인북천을 끼고 동부전선의 812고지와 1211가칠봉고지와 월비산-351고지는 순수 국군과 중공군 아니면 북한군이다.
서부전선 좌측의 지금 판문점 앞의 혼비고지일대에 우리 해병대 전사자와 미군이 있을진데 하필 철원지역인가. 이건 국토의 중앙이고 궁예의 태봉국 수도라는 역사적 의미는 좀 어색한 변명이다. 좀더 말하면 북한군의 명확한 의도가 반영 되었다고 본다. 아니면 모른 척하고 우리가 제안을 하니 얼싸좋다고 스스로 개방해 주는데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그럴바에야 아니 중부전선의 지금 오성산 밑의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일대를 발굴지역으로 한다면 우리 계웅산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국군 2사/9사, 그리고 미7사/ 2사/3사등 특히 이곳은 과거 남침용 땅굴이 있느니 없느니 요란했던 곳인데 이런 곳을 하면 쌍방간의 빗장을 여는 격인데 화살머리나 백마고지는 우리의 빗장이 80%수준이다면 의심의 여지가 들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