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 사세요. 쓰레기 사세요!
서울로 학교를 진학하였다. 큰 형이 공산당에 살해된 지 5년 뒤인 58년이었다. 나는 갑자기 막내아들이 큰 아들이 되었다. 시골에서 당시에 기대하였던 큰 아들이 돌아 가신지라 막내인 나에 대한 집안에서의 기대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서울로 보내졌다.
서울에 와서는, 당숙의 자취 집에 짐을 임시 풀었다. 그리고는 58년3월초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내가 입학한 성동구 신당동에 소재한 광희중학교로 향하였다. 어머니가 보인 호기심이란 대단하였다. 당시 서울 출신이 아니면 시골에서 올라 온, 학생 중에서 한 반 60명 밖에 뽑질 않던 시절이다. 그러나 나는 용하게도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큰 아들은 학살되었고, 막내가 용하게 들어간 학교이니 어머니가 한번 가 보겠다는 것은 이해할 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울역으로 나와, 청량리로 가던 버스를 바꿔 탄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시던 어머니가 창신동 버스정류장에서 진흙 바닥에 넘어 진 것이다. 입고 계시던 하얀색 치마, 저고리가 진흙 바닥에 내 팽겨 쳐졌으니 더러워 진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망신스럽기도 하였지만, 이미 일어 난 일을 어찌하랴!
그런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로 향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대단하였다. 내 기억에는 그렇다. 치마, 저고리가 더러워진 것을 보고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서로 도우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아주머니 한 분의 집에 우리는 얼마 후에 셋방을 들었다. 학교 근처로서 고마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머니는 시골에 혼자 계신 아버지와는 달리 나와 함께 서울에서 생활을 하였다. 물론 나는 좋았지만!
참고로 내가 광희중학교를 택한 것도 순전히 당숙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그랬다. 누구 의지거리가 있어야 했다. 당숙 친구 분 중에 유난히 키가 크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이 학교의 물리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때문에 나를 이 학교에 보내게 된 것이다. 성동공고 맞은 편에 위치하여, 남들이 보면 한 학교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이 학교는 사실은 고등학교가 없고 중학교만 있는 학교로서, 지금은 행당동 전철역 앞에 독립교사를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생활기반이 중학교가 있던 중앙시장 근처인 상왕십리 근처로 옮겨 졌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사를 갔다. 어머니가 도움을 받았던 그 집에는 멀리 외지에 나가있던 아들이 들어옴으로 해서 세를 살수 없었고, 그래서 이사를 간 집이 영미다리 근처의 바로 옆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집의 아주머니는 후처였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고약하였다. 전처에서 생긴 10살 정도 되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학교도 안 보내고, 두드려 패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첫날 밤을 자는데 잘 수가 없었다. 이 딸의 울음소리와 방안에서 빈대가 극성을 이루었다. 이때는 왜 그랬는지 이런 일이 많았다.
이몽룡이 남원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려고 말죽거리 근처의 주막에 왔다가, 밤새도록 빈대에 뜯기고 주막 주인이 다음날 아침에 인사 하기를 “잘 주무셨느냐고 하자” “밤에 자다 보니 이 집 벽에는 문상객 곤충들이 많이 나오더라!”고 한 이야기가 실감이 갔다. 왜 그리도 그때는 빈대와 벼룩, 이들이 많았는지! 전쟁 이후라 그랬는지는 모른다.
하얀 DDT 가루가 꽤나 소비될 때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어머니를 졸라, 바로 금호동으로 이사를 갔던 생각이 난다. 상왕십리 근처에서는 학교 이외에 얼씬 거리지도 말자는 취지였다. 김OO이라는 중학동기의 도움을 받아서 이사를 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우리 어머니는 미녀이었다. 더구나 외갓집 집안이 좋았고 유복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양반집안에서는 정식으로 학교교육이라는 것을 금기 시하였으나, 독학 때문에 한자나 한글(당시는 언문이라고 하였다)을 모르는 글자가 없었다. 이런 분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금호동에 살 때이다. 산꼭대기 집에 살면서 새벽에 눈을 뜨고 어머니를 찾았지만, 어머니는 어느새 뚝섬에 가서 시금치나 배추쓰레기를 주어다가 삶아서, 금호동 시장에 내어놓고 파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는 내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바, 그날 얼마를 벌었느니 하면서, 별의 별 우스개 소리를 다 하시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 해보면 그저 눈물만 흐르는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막내 누이와 교체하였다. 참고로 하도 많이 이사를 다닌 것 같아 한번은 내가 장가들고 유심히 세어보니 총26회나 서울에 와서 이사를 다녔었다. 외교관이 되어 외국으로 이사를 다닌 것 말고도 말이다. 생각해 보니 천문학적 숫자이었고, 평생을 이사만 다닌 것 같았다. “하기야 인생이란 이사를 다니다가 끝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방학이 되어 시골 집에라도 갈라고 치면 5-6km 떨어진 신창 역에서부터 걸어가든지 온양에서 버스를 타고 지금 순천향 대학이 있는 곳인 신창 읍내에서 산을 넘어 걸어 가야 했다. 지금은 전철화 사업 때문에 기차 길 자체도 순천향 대학 쪽으로 옮겨갔고 역사자체도 없어졌지만, 이곳에서부터 걸어가야만 후에 간이역이 되었던 학성 역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할머니께서는 하나 밖에 없던 손자를 보고 싶다고 말은 못하셨지만, 기차가 담 뒤로 지나갈 때면 으레 신창 역 쪽을 처다 보셨다고 한다. 손자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에 입학 하기 전에 기어코 또 하나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른 게 아니고 약주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입학금 마련을 위해 온양에 나가 소를 팔고 돌아오시던 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신창읍내까지 와서, 학성 산을 넘어 오시다가, 졸음이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쉬신다는 것이 그대로 잠이 들었고, 저녁 때가 다 되어 깨어 나셨다. 급하신 김에 산을 내려온 다는 것이 베가 삼아 빈, 아들의 입학등록금 전체를 산에 두고 오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문제가 생겼고 이 뒤로는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는 것을 평생, 본적이 없다. 돈은 한참 야단을 친 끝에 신창읍내에 학교를 다니던 옆 동네 죽산 리 1구 친구들한테 발견되어, 그날 저녁과 그 다음 날, 돌려받았던 생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도 그 때 시골친구들을 만나면 자기들 때문에 내가 못 가려던 중학교를 갔다고 놀려대곤 한다. 그렇게 다녔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시집와서 한 얘기가 내가 “왜 아버지의 반 푼이라도 안 닮았느냐?”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우리나라 남편들이 앞으로 귀에 담을 이야기이다.
조상께서 내어 주셨다고 턱수염도 안 깎으시고 두루마기에 5-60년대 시골사람들이 많이 쓰시던 “마카오” 모자를 쓰셨지만, 그 만큼 우리 아버지는 사람 좋은 분이었다.
<권영민/현 순천향 대학 초빙교수/전 주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대사, 애틀랜타 총영사 역임/저서: 자네 출세했네, 권대사, 자네 큰 실수했네, 베를린 맑은 하늘에 그림을 그리자 등/서울대 독문과 졸/ 아산 産>
첫댓글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리는 기차를 바라보시던
저에게도
우체부를 기다리시고
할머니가 계셨었지요.
그 할머니는 컴 초딩님을 확실히 줗아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콧등이 시큰해옵니다.
그렇겠지요. 저도 가끔은 할머니 생각하고 콧등이 시려올 때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