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 (下)
다산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춘천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양수리가 나오고 거기서 북쪽으로 나 있는 강이 북한강인데, 용진강(龍津江)이라고도 부른다. 한음 이덕형의 유적지는 그 용진나루를 양쪽으로 하여 두 군데에 널려 있다. 다산이 자신의 집안 정원으로 여기면서 자주 찾았던 운길산의 수종사에서 멀리 떨어진 용진나루 위의 마을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이고 옛날에는 사제(莎堤)라 부르던 마을이다. 다른 하나는 사제마을에서 볼 때 북한강 너머 양평군에 있는 한음의 묘소이다. 한음의 15대 종손인 이시우(李時佑)씨의 안내로 이시우씨의 집 뒷산에 고즈넉이 잠들어 계신 한음의 묘소를 찾았다. 6년 만 지나면 돌아가신 지 400년이 되도록 긴긴 세월 한음은 그의 부인 이씨와 합장으로 그곳에 누워 계신다.
애초에는 한음의 부인 이씨의 묘소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9월에 강원도 안협(安峽)에 피란 중이던 이씨는 왜적이 접근하자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절하는 비운을 당한다. 그런 전란 중에도 정신이 똑바르던 한음은 순절한 부인의 시신을 챙겨 바로 지금의 묘소인 경기도 양근군 중은동(中隱洞)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 중은사(中隱寺)라는 이름난 절이 있던 맞은편의 산이었다. 지금은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라 부르는 마을이지만 중은사는 터만 남았고 중은사 절터에 있는 아름드리 큰 느티나무만 한음을 알고 있는 듯 녹음이 짙어 바람에 흐늘거리고 있었다.
뒷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한음은 부인의 묘소 위에 모시고, 자신이 죽으면 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에 따라 지금은 부부가 어버이 묘소 아래에 함께 계신다. 한음 집안 어른이던 영의정 이준경의 묘소도 근처에 있어 그 골짜기는 정승골로 불리던 곳인데, 정승이던 한음이 또 그곳에 묻혀 ‘정승골’의 이름은 더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의 공, 일제 때 보복당해
묘소의 유적지에는 당대의 대제학 용주(龍州) 조경(趙絅)이 지은 한음의 신도비가 비각 속에 수백 년을 버티며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한음의 반(反) 일본정신에 속상했던 일인들은 일제시대에 한음에게 보복하는 심정으로 신도비를 근처의 개울 속에 처넣었다. 왜경이 무서워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다가 해방된 뒤에야 후손들의 힘으로 다시 신도비를 꺼내다 세웠고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을 물속에서 닳았던 탓인지 세워진 빗돌이 낡고 닳아 글자는 거의 읽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후손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음의 공훈에 보답하려 나라에서 내린 그 많던 사패지도 일제 때 강제로 대부분 강탈당하여 땅 한 평 없는 신세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종손의 말에 의하면 묘소를 관리할 힘도 없었는데 문중에서 노력하여 겨우 묘소 인근에 토지가 약간 마련되어 신도비각과 영정각이 세워져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당당한 풍채와 늠름한 모습의 한음 영정은 백사 이항복의 영정을 그린 화가 이신흠(李信欽 : 1570~1631)의 솜씨로 그려져 오랜 전란의 와중에도 종손들의 노력으로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에는 모사본까지 많이 전해져 쉽게 접할 수 있다.
▲노계 박인로와 함께 노닐은 사제마을
임진왜란에 그만한 공을 세운 한음은 광해군 시절에도 임금의 총애는 식지 않았다. 그러나 소인배들의 무고와 질투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45세인 1605년 무렵에 복잡한 서울을 떠나 편히 쉴 별서(別墅·별장)로 마련한 곳이 한강을 기준으로 부모님 묘소와 반대편 10여리 거리인 용진강 위의 사제마을이었다. 노후의 휴양지로, 아버지를 편히 모실 장소로, 아내의 묘소를 찾기에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곳은 한강을 끼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다. 백사 이외에도 당대의 귀인과 명인들이 경치도 즐기고 한음과의 대화를 위해 찾아오던 곳이다.
백사 이항복 다음으로 친했던 사람은 승장(僧將)으로 유명한 송운대사(松雲大師)였다. 그들의 주고받은 편지나 송운이 세상을 뜨자 한음이 바친 제문을 보면 그들이 함께 왜적 퇴치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말년을 함께 지낸 노계 박인로(朴仁老)는 한음과 동갑내기로 무관인 만호(萬戶)라는 하급관료였으나 생각과 사상이 같았기에 그들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가사(歌辭)에 뛰어난 박인로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유명한 ‘사제곡(莎堤曲)’은 한음이 사제마을에 거주할 때 찾아와 즐기면서 지은 곡이라니 대단한 우정으로 여겨진다. 어떤 경우(한음문집의 기록)에는 한음이 지어서 박인로에게 주었다고도 하는데 박인로 문집에는 노계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 사제곡의 내용은 충성심 높은 한음이 중상모략으로 탈관삭직되어 병든 몸으로 산골에 머물면서 자신보다는 나라와 임금을 염려하는 우국지사로서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제마을에 거처하던 한음의 집은 ‘대아당(大雅堂)’이라는 당호를 내걸고 서실은 ‘애일(愛日)’, 마루는 ‘진일(眞佚)’이라 이름 짓고 따로 ‘이로정(怡老亭)’과 ‘읍수정(●秀亭)’의 정자를 지어 시를 짓고 편히 쉬면서 손님을 맞을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말을 탈 때 오르던 돌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풍우와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였으니 명인의 흔적이 너무나 초라했다.
▲혁혁한 한음의 공, 역사는 증명한다
한음의 묘소에서 가까운 중은사 옛날의 절터에는 한음의 역사가 있다. 그의 후배로 큰 학자이자 벼슬아치이던 용주 조경이 한음의 일대기인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이가원 박사의 번역으로 전문이 중은사 절터에 커다란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최근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니 400년을 이어오는 후손들의 위선심이 정말로 따뜻하다. 용주 조경은 그 글에서 이원익·이항복·이덕형 세 정승이 임진왜란을 당해 망해가는 나라를 서로 힘을 합쳐 중흥시켰다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한음이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음은 알지 못했다(知有國而不知有身)”라며 한음의 애국충정을 찬양하였다. 쌓은 학문과 축적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와 백성을 건지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는 평가였다.
일생의 지기 백사 이항복은 한음의 묘비문에서 한음의 지식과 인품, 사람됨과 높은 인격을 찬양하면서 그에 대한 바른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남겼다. “근세에 율곡이 돌아가시자 성균관의 학도들이나 말단 군졸들까지 모여들어 슬프게 울었고, 서애 유성룡의 죽음에도 저자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울었으며, 지금 한음공의 이름이 탄핵에 걸려 처벌하자고 빗발치는 상소가 올려지는데 한음이 죽자 꼭 같은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은혜를 베풀었기에 위아래 사람 모두가 그렇게 울고 있다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이 말했듯이 산 사람에게서는 뜻을 뺏을 수 없듯이 죽은 사람에게서는 명성을 빼앗을 수 없어서 그렇다”라고 설명하면서 한음의 훌륭한 명성도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남녀노소가 죽음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한음과 친했던 친구이며 영남의 대유(大儒)이던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한음의 행장을 짓고 문집에 발문을 지어 그의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찬양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또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일생을 정리하였으니, 이만하면 한음은 뒤에 죽은 사람들에 의하여 영원히 죽지 않을 업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찬양문
한음이 세상을 떠난 지 150년 뒤에 태어난 한음의 7대 후손에 실학자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이 있다. 바로 그와 막역하게 지냈던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한음의 화상(畵像)에 바치는 찬양의 글을 지었다. 아마 자신이 살던 곳과 가까운 수종사 아래서 살았던 한음이어서 더 가까운 마음으로 찬양사를 바쳤는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높은 정승 지위에 올랐으나
백성들은 노성한 선비로 우러렀네
임금의 은총 가슴을 맡길 듯이 친숙했으나
벗들이야 포의한사처럼 가까이 여겼네
유언비어가 몸을 죽일 듯했어도
임금의 마음의 본심을 꿰뚫어 알아주었네
뼈를 깎는 무서운 상소를 올려도
어리석은 임금 광해도 내쫓지 못했네
높은 충성심과 큰 절개가
모두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아무리 하늘과 귀신이 돌보고 보살폈어도
누가 그에게 그런 큰 복을 내렸으랴
아름답다 풍성한 광대뼈에 윤기나는 보조개
큰 체구에 근엄함까지 갖추었으니
뒷세상의 사람들
그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않을 건가
(故領議政漢陰李公畵像贊)
이만하면 한음 평생의 업적은 제대로 기록되었다. 다만 아무도 그런 글을 읽지도 않고 그런 글이 있는 줄도 모른다. 위인들의 업적이 이렇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아야 되겠는가. 백사의 ‘묘지명’, 창석의 ‘행장’, 용주의 ‘신도비명’에 다산의 ‘화상찬’이면 넉넉한 평자들을 만나 올바른 평가를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의 유적지를 살펴본 느낌은 너무나 허전하고 서운하다. 용진나루 위에, 운길산 산자락에 흔적이 겨우 남은 사제의 ‘대아당’이 복원되어 그가 평생의 지기 백사나 노계와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경륜할 계책을 세우던 우국충정의 본뜻을 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음의 5대조 이극균으로부터, 15대 종손 이시우씨 그리고 그 분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22대의 종통(宗統)이 적장손(嫡長孫)으로 이어져 왔다. 이토록 혈통이 이어지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그런 순수한 혈맥이 힘을 발휘하여 한음의 혼이 국태민안의 큰 역할을 해줄 것만 빌고 바란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