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동목사의 신비체험

손성은(삼일교회, 부산)

 

한상동목사의 신비체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윤선박사가 한상동목사에게 ‘애걸복걸’하여 구술해 두었던 것을 수년 뒤인 1954년도에 발간한 『주님의 사랑』과, 20여년이 지난 1977년 심군식목사에 의해서 발간된 한목사의 전기,『세상 끝날까지』에 보여주는 한상동목사의 신비체험에 대한 기록방식 간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각각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이기에 이런 차이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두 기록 중에 어떤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 것인가 하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질문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실제상의 체험에 있어서의 차이인가? 아니면 한상동목사가 박윤선목사나 심군식목사에게 기술할 때의 구술에서의 차이인가? 아니면 한상동목사가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세월이 지나면서 가지게 되는 해석의 차이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한목사로부터 직접 들어서 기록하게 된 박윤선목사나 심군식목사가 갖는 한목사의 체험에 대한 이해의 차이나 그 구술상에 있어서의 차이인가?

 

이런 질문들은 순전히 이론적인 관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최근에 한상동목사의 신비체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던지고 있는 견해들이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작년(2009년도)에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발간하는 『개혁신학과 교회』 제 22호에 발표된 글, <고신교회가 존속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글에서 “한상동목사가 부산을 고집한 이유에는 그의 꿈도 작용한다. 한국지도를 꿈에서 보았는데 유독 부산이 환하게 보였고, 송도에서 한 줄기 빛살이 나타나더니 부산을 덮고 위로 뻗어 전국으로 퍼지는 것을 보고 신학교 교사문제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박목사의 영해에 해당하는 한 목사의 신앙의 일면이다”(106, 각주42)고 한다. 이 글의 맥락을 보면, 박목사 곧 박윤선목사의 주석이 영해하는 곳이 많아서 신학적 미숙성이 있는 것처럼 한상동목사의 신학적 사고와 표현도 또한 미숙하기 때문에 송도의 신학교부지를 이런 방식으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제기는 바로 같은 해에 발간된 한 책자에 의해서이다. 『한국장로교회사』(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한상동목사의 체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무렵 한상동목사의 신앙 특징들 중 하나는 환상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옥중에서 특별히 밤에 자던 중 꿈을 통해, 혹은 비몽사몽 간에 환상을 자주 보았다. 그리하여 건강이 회복되기도 하고,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을 계시받기도 하고, 혹은 간수들의 박해를 면하기도 하고, 장래를 위한 소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옥중기에는 꿈이나 환상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적어도 고려파 창시자의 신앙세계에는 환상에 대한 거부반응과 그것에 대한 부정이 개입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환상과 계시에 대한 그의 해석이 과연 정확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238, 밑줄은 필자의 것).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언급으로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한상동목사는 “환상에 대한 거부반응과 그것에 대한 부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신앙세계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한목사의 “환상과 계시에 대한 해석이 과연 정확한 것이었는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는 고신총회의 설립자로서의 한상동목사의 위상을 고려할 때 많은 함축성을 지닌다. 과연 한상동목사의 체험을 어떻게 우리는 평가해야 할까? 놀라운 것은, 한상동목사의 체험에 대해서 지금까지 고신총회에서는 정식으로 문제제기가 되어서 그 진정성이나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평가가 한 번도 시도된 바가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는 분석을 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예비적인 관찰을 할 수 있겠다.

 

첫째, 위 저자의 비판적인 문제제기는 오해로 빗어진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한목사의 옥중의 환상체험은 “자주”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한목사의 옥중수감기간은 경남도경 유치장과 평양형무소에서의 기간을 모두 합쳐서 5년이 넘는다. 이 기간 중에 체험하게 되는 “꿈을 통해, 혹은 비몽사몽간에” 보았다는 “환상”은 “환상”이 아니라 대부분 “꿈”이었음이 분명하다. 심군식목사는 이것들을 기술하면서 비록 “비몽사몽”이라는 말로서 그 꿈의 내용들을 기술하지만 그 꿈에 대한 기술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명히 그것들이 “꿈”이었음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간수가 가져다 주는 밥을 한목사 자신이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연달아 꾸게 되는 네 번의 연속된 꿈과 취조실에서 매를 맞고 있는 모습을 세 번이나 연달아 꾸게 되는 꿈을 각각 하나씩으로 친다면, 한목사는 옥중생활 중에 다섯 번의 “꿈”을 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신비체험을 이해하고자 할 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환상”과 “꿈”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꿈”은 일반인들도 흔히 꾼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 자주 꾸게 되는 것이 이 현상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5년여 동안의 옥중생활 중 다섯 번의 “꿈”들을 꾸었다고 해서, 그가 꿈들을 “자주” 꾸었다고 하기는 지나치다. 1년에 한 번 정도의 꿈을 꾸었을 뿐이다. 더욱이나 그 “꿈”들을 “환상”들이라고 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둘째, 위 책의 저자는 한목사가 그 환상(실제로는 꿈)들을 통해서 “계시”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심군식목사는 한목사가 어떤 꿈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다는 식으로 표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위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한 목사의 꿈은 이렇다.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한 사나이의 싸늘한 시체가 언덕 밑에 누워있었다. 그 시체에서 이상하게 생긴 징그러운 벌레들이 기어나오는데, 그 벌레의 입에서 한 줄기 불줄기가 뿜어져서 길게 선을 그었다. 심군식목사는 한목사가 이 꿈을 꾸고 나서 이게 무슨 뜻인가 고민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꿈의 해석이 떠올랐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국이 망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결코 “계시를 받았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계시”라는 용어는 기독교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특별히 보수적인 신앙서클에서 이 용어는 “성경”의 권위와 방불하다시피 여겨진다. 한목사가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는 식의 언급은 상당히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한목사는 결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꿈을 기도하는 중에 “해석”하였던 것이다.

 

셋째, 한상동목사가 옥중에서 가진 신비체험은 환상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음”에 관한 것이다. 심군식목사는 옥중에서 한목사가 소위 “영음”을 듣는 체험을 세 번 갖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는, 수감생활 초기인 1941년경 한목사는, “상동아, 상동아!”, “한목사!”, “기도하라”는 음성을 너무나 똑똑하게 듣게 된다. 두 번째는, 1942년 봄, “한목사! 이 병으로 죽지 않는다”라는 분명한 음성을 듣는다. 세 번째는, 1942년 겨울, “상동아!”라는 음성과 함께 은은한 목소리로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는 세상에 살아서 나간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는 음성을 듣는다. 박윤선교수는 이 소위 “영음”이란 것에 대해서 한목사의 옥중기를 받아 적으면서 두 번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군식목사가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의 것을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의 것은 빠뜨린다. 1950년경의 한목사의 구술에서는 두 개였는데, 20년 뒤에 출판한 심군식목사의 한목사전기에는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으니, 한 개가 더 첨가 된 셈이다. 과연 이 “영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의 “영음”이 정확하게 문자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윤선목사는, “결단코 너는 세상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음성을 한목사가 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는 반면, 심군식목사는,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는 세상에서 살아서 나간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는 음성을 한목사가 들었다고 한다. 이런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명히 일치하는 바는, 그 중심메세지이다. 옥중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나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핵심메세지는 일치하지만 구체적인 표현은 다르다. 이런 차이는, 한상동목사가 박윤선교수나 심군식목사에게 자신의 체험을 구술할 때, 하나님의 음성 그 내용 자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그 음성을 내용을 어떤 영감된 내용이나 계시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자신의 옥중에서의 체험을 주관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간증하였던 셈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박윤선교수는 심군식목사보다도 더 조심스럽게 기술한다. 박교수는 옥중에서의 소위 “영음”체험을 심군식목사와는 달리 세 번이 아니라 두 번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소위 “영음”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된 하동 진교교회에서의 체험에서는 아예 “영음”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 “영음”이라는 표현은 심군식목사가 이때의 체험을 기술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때의 소위 “영음”은 실제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구절 그 자체이다. 마태복음28장20절의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에 보면 분명히 “너희”라고 하고 있다. 한상동목사 개인만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이 아니다. 이 성경구절 말씀이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자신을 향하여 하신 말씀으로, 들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윤선교수는 한상동목사가 하동 진교교회에서 가졌던 체험을 이렇게 구술하게 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참으로 기도의 재미를 맛보았으며 경험을 얻었다. 밤 2시, 혹은 3시, 늦으면 4시경에 일어나서 산에 올라가 숲속에 가서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바람 소리 나무 잎사귀 소리에 무슨 즘생이나 오는 것 같아서 무서운 중에서 기도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성령으로 은혜를 베푸시매 주님께서 저와 같이 계셔 주시마고 약속하신 말씀이 믿어졌다(마28:20).”

 

여기서 한목사는 “저”라는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을 구술하고 있는 박윤선교수가 분명하게 “마28:20”이라고 성경구절을 인용해놓고 있어서 그 성경구절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한목사가 체험하게 되었음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박윤선목사는 이것을 “영음”이라고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이 분명하게 믿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네째, 한상동목사가 옥중에서 들었다고 하는 소위 “영음”이라고 하는 것도, 실상은 하동 진교에서 체험하게 된 그 하나님 말씀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곧 마태복음28장20절에서 약속되고 있는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평양의 옥중에서의 개인적인 상황 속에서 적용되어 체험되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동아 상동아!” “한목사!”라는 음성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과 신자들이 가지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또한 영적인 차원에서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도하라!”거나 “이 병으로 죽지 않는다!”와 같은 음성을 들은 것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영적 확신 속에서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벗어나서 듣게 되는 소위 신비주의적 신비체험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묵상할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들을 하는 것과 본질상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보다 더 생생하게 듣는 것과 좀 희미하게 듣는다는 그 정도에 있어서의 차이일 뿐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듣게 되는 영광과 특권에로 초청받은 사람들이다. 신앙생활이란 신비체험을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신비주의적 신비체험과 성경적 신비체험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다섯째, 성경적 신비체험은 결코 “자아의 함몰”이나 “내부지향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신비주의적 신비체험은, 반대편에 서있다. 먼저, 신과 하나가 되는 연합에 있어서도 신비주의적 신비체험에서는 “자아의 기능”이 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성경적 신비체험은, 결코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에 있어서 자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한상동목사의 신비체험의 어떤 부분을 살펴보아도,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결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한목사는 “혹은 세상이 나를 향하여 신비가라고 할 지 모르나 나와 같이 계셔주시는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고 말한다. 한목사는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강조하면서 결코 주님이 자신과 함께 계심으로 자신이 사라져버린다든지, 자신의 어떤 정신적 기능이 스톱해 버리게 되었다든지를 암시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과연 신비가인가?

 

여섯째, 종교개혁가들과 그 뒤를 잇는 청교도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신비체험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루터의 귀신을 대적하는 신비체험은 너무도 유명하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표현하면서 강조하였다. “청교도들의 황태자”로 알려져 있는 존 오웬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아가서강해를 통하여 너무나 강조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그리스도인의 신비체험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고, 건전하고 성경적인 신비체험의 추구를 권하기조차 하였다. 신비주의적 신비체험과는 격조가 다른 이 성경적 신비체험을 살펴보면 현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천박하다. 한목사의 신비체험은, 이러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오히려 따끔한 일침을 준다.

 

 

출처:  삼일교회   http://www.samil.org/zbxe/17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