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3월 27일, 사순절 제4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예배의 부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2년 3월 27일, 사순절 제4주 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사순절 제4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경배찬송(일어서서):
찬송가 37장 (주 예수 이름 높이어)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일어서서):
시편 32:1~11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2)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 대표기도: 리지외의 테레사(St. Therese of Lisieux)
이 생이 저물어갈 때,
저는 빈 손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제 공로를 인정해달라고
간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모든 선은 얼룩이 묻고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선으로 옷 입고
주님의 사랑으로 영원히 주님을 영접하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이 없으면 어떠한 장소나 왕관도 원치 않습니다.
주님, 제 양심이 제가 범할 수 있는
모든 죄의 짐을 짊어지더라도,
저는 여전히 저 자신을 주님의 품에 맡기고
참회하며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주님께 돌아오는 탕자를
얼마나 친절하게 맞아주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통해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말씀: 누가복음 15:1~2, 11~32 (성경)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특별찬양:
찬송가 287장 (예수 앞에 나오면) 을 찬송합니다.
*. 말씀선포: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사순절 제4주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는 하나님 손길, 그 흔적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손길, 그 흔적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느낌, 의식도 담겨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호흡, 생기, 영(靈)을 불어 넣어주신 까닭입니다. 창세기 2:7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내재한 하나님의 영을 못 만나고, 하나님의 마음, 느낌, 의식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에 먼지가 끼어 혼탁하게 된 까닭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영)을 찾아,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 느낌, 의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나는 ~로서 -하다
저는 지금 목사로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경칭이나 시제 등을 빼고 단순하게 말하면 ‘나는 목사로서 설교한다’입니다. 패턴을 보면 ‘나는 ~로서 -하다’가 됩니다. ‘나는 누구인데(A) 무엇을(B) 하고 있다’입니다. ‘나는 A로서 B를 한다’가 됩니다. 이 패턴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하고 표현합니다.
이 패턴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은 이런 사유를 못합니다. 동물에게 ‘나’가 있을까요? 동물에게 부여된 ‘~로서’라는 이름이 있을까요? ‘-하다’는 의식이 있을까요? 사람이 붙이고 그렇게 서술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 사람이 붙인 이름과 서술에 불과하고 동물 스스로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즉,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는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으로 살아갈 뿐, 나는 누구인지, 어떤 때 어떻게 어떤 이름으로 드러나는지, 또 어떻게 행하는지, 먹는지, 자는지, 보는지, 사랑하는지, 등등의 의식이 없습니다. 인간만이 ‘나는 ~로서 -하다’라고 의식합니다.
사실 이 패턴은 하나님께서 사유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숨, 호흡, 영(靈)을 주시고, 따라서, 사람이 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방식에 따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지난 주에,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름의 의미를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마음, 느낌, 의식을 알아챌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해 말씀드리면, 신(神)의 속성인 성부하나님의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 우리에게는 고유명사로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속성인 성자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사역(事役)의 속성인 성령하나님의 이름은 ‘보혜사(保惠師)’이고 영(靈)이시고 ‘돕는 자(사랑)’입니다.
한 문장으로 하면 “’스스로 계신 하나님(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함께 계셔서, 임마누엘) ‘보혜사’로 사랑하며 도우며 사역(事役)하십니다”가 됩니다. 삼위의 일체입니다. 이 문장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적은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시 적는다면 “(스스로 있는) 나는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해서-임마누엘) 사랑하며 도우며 사역한다(보혜사)”가 됩니다. 곧 ‘나는 예수 안(A)에서 사역(B)한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높입니다. 빌립보서 2:9-11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믿음 생활에는 세 가지의 지평이 있는데, 곧 ‘닮기’, ‘믿기, ‘좇기’입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사역한다’라는 문장에서 ‘나’에 초점을 맞추면 ‘닮기’이고, ‘예수 안에서’에 초점을 맞추면 ‘믿기’이고, ‘사역한다’에 초점을 맞추면 ‘좇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 지평을 모두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사유를 합니다. ‘나는 A로 B한다’입니다. A는 B를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나는 장경현으로 불린다. 나는 학생으로 공부한다. 나는 손님으로 버스를 탄다. 나는 목사로 설교한다. 나는 성도로 믿음생활한다. 나는 집사로 섬긴다. 나는 엄마로서 사랑한다. 나는 죄인으로 수감생활한다. 등등. 여기서 ‘나’는 꼭 A[사람이나, 이름 (장경현), 학생, 손님, 목사, 성도, 집사, 엄마, 죄인 등등]를 따라다닙니다. ‘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A로서 B를(존재하고, 불리고, 공부하고, 버스를 타고, 설교하고, 믿음생활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수감생활하고 등등)합니다. 모든 B(-하다)의 드러낸 이름이 A이고 그 주체는 ‘나’가 됩니다. ‘나’가 없으면 우주도 없습니다. (*. ‘나’는 우주보다 귀한 한 영혼이고, 다중우주론의 시초가 됩니다. 다중우주론은 실제로 ‘나’가 없으면 우주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나’는 신묘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그리고 스스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이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정해준 것은 몸이요, 이름입니다. ‘나’는 그냥 스스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처럼 말입니다. 출애굽기 3:14a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방식으로, 성부하나님께서는 성자하나님으로 드러내어 성령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성부의 지평에서)나는 (성자의 지평에서) A로서 (성령의 지평에서) B의 일을 한다’가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행합니다.’ 할 때, ‘나’와 ‘그리스도인’ 그리고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의 지평 아래 - 곧 하나님의 영, 마음, 느낌, 사유 방식 아래 -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나) 구세주 예수님이(A) 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는데(B), 우리 각 사람에게 원하시는 A와 B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일을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A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B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일’입니다. 예를 들면,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일구며 사랑하며 섬기는 일 등등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일구며, 원수까지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3.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오늘 본문을 살펴봅니다. 본문의 배경은 1-2절에 나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하며 구시렁댑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세 번째로 말씀하신 비유가 오늘 말씀입니다. 세 비유는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는 양이라는 짐승으로, 다른 하나는 드라크마라는 물질로, 또 다른 하나는 탕자라는 사람으로 비유해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요구하고 그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납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는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맙니다. 어느 해 크게 흉년이 들고 배가 고파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나 그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배고픈 처지를 한탄 하던 중 아버지 집의 양식이 풍족한 품꾼들을 생각하고는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품꾼’으로서 살 생각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로 여기며 모든 이들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맏아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매우 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도 거부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와서 들어가자고 하니, 아버지에게 노기를 띠며 맏아들이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때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온전한 사람, 곧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일구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 [나=(A)하나님의 자녀=(B)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일-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섬김]’이면 참 좋겠는데, 이렇게 온전한 사람을 현실에서 찾기가 참 힘듭니다. 바울은 로마서 3:9-12에서 탄식하며 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나은 사람(a)이 있고, 조금 모자란 사람(-a)이 있습니다. 앞의 사람(a)은 뒤의 사람(-a)과 대척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a)이 있고 세리와 죄인들(-a)이 있습니다. 두 비유에서 울타리에 남아있는 99마리의 양(a)이 있고 길 잃은 양 한 마리(-a)가 있습니다. 주인의 손에 있는 9개의 드라크마(a)가 있고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a)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아버지 집에 남아 있는 맏아들(a)이 있고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둘째아들(-a)이 있습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면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그리고 둘째아들이 문제처럼 보이지만, ‘나(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문제입니다. 양은 100마리가 정상입니다. 99마리 입장에서는 한 마리를 잃어버린 것이고, 한 마리 입장에서는 99마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드라크마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드라크마나 아홉 개의 드라크마나 길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잃어버렸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의 시선에서는 집(아버지, 형)을 잃은 것이고, 집(아버지, 형)의 시선에서는 둘째 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나(하나님)’의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려면 양은 100마리가 있어야 하고, 드라크마는 10개가 있어야 하고, 아버지와 두 아들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길 잃은 양, 한 드라크마, 탕자도(-a) 그리고 99마리 양, 9개의 드라크마, 맏아들(a)도 모두 온전함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저 사람의 눈으로 조금 나아 보이거나 모자라 보일 수는 있어도 말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탕자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마리의 양도, 1개의 드라크마도 찾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주인은 큰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주인의 손에 있던 99마리의 양이, 9개의 드라크마가, 맏아들이, 돌아온 한 마리의 양, 찾아진 한 드라크마, 돌아온 탕자를 시기하여 분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 ref. 마태복음 20:1~16절,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같은 품삯을 지불하는 주인에게 더 많은 시간을 일한 품꾼이 적게 일한 품꾼을 시기하여 불평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 맏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합니다. 31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난 후에 맏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제 듣는 우리가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믿음 생활하시는 성도들의 대부분은 탕자(잃어버린 양 한 마리 혹은 한 드라크마)의 모습이 아니라, 맏아들(99마리, 9개의 드라크마)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돌아 온 탕자는 이제 아버지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0:16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신들을 맏아들에, 세리와 죄인을 돌아 온 탕자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속이 쓰리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살펴봅니다. 아버지의 말입니다. “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얘(teknon)’는 ‘나의 아들아~’하며 자녀를 다정하게 부르시는 단어로, 영어 성경은 ‘나의 아들아(Son, KJV; My Son, NIV), 내 자녀야(My child, NAS)’라고 표현합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이 놓치고 있나요? 나(하나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합니다. 임마누엘입니다. 나(성부 하나님)는 ‘하나님의 자녀(성자 하나님)와 늘 함께 합니다.
이것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면, ‘내 것이 다 네 것’이 됩니다. ‘아버지의 것이 곧 아들 자신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까?
‘나=아버지의 아들=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인 내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라는 말씀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4. 나가는 말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울 수 있는 길은 물 안에 항아리를 채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흠이 없는 항아리라도 물을 채우면서 새기 마련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은 혹,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흠이 있는 항아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하나님)의 시선에는 똑 같은 흠입니다. 탕자나 맏아들이나, 한 마리 양이나 99마리나, 한 드라크마나 9개의 드라크마나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상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모든 권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다 나의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이 마음에 믿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주님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
찬송가 277장 (양 떼를 떠나서)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봉헌찬송(일어서서):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봉헌합니다. (찬송가)
*. 봉헌기도(일어서서):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비-대면예배로 드릴 경우,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혹은 신협 131-019-734759 (주안대신교회)로 송금합니다.]
*. 교회소식:
*. 찬송(일어서서):
찬송가 295장 (큰 죄에 빠진 나를) 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축도 혹은 주기도문(일어서서):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