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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8
3월8일 [사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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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매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 속에서도 주님 안에 충만하고 의미있는 하루를 살아내기 위하여...>
오늘 사도단의 핵심 제자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타볼산 위에서 강렬한 신앙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변모되고,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고...일종의 천국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행복하고 꿈결같은 순간이 지극히 짧았다는 것입니다. 그 찰라의 순간이 너무나 황홀했고 행복했던 베드로 사도는 이제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속적인 초막을 지어 지금 이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했으면 하는 마음에 다음과 같이 외친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7장 4절)
우리 역시 가끔씩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좋은 사람들과 마치 천국처럼 풍광이 좋은 곳에 놀러갔을 때,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여기서 한 몇 년만 살았으면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런 순간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어제와 별 다를 바 없는 길고 지루하며 무미건조한 일상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베드로 사도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어서 일어나라고,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맛보았던 은총 체험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저 산 밑으로 빨리 내려가자고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노력입니다. 신앙 생활 안에서 신비스럽고 황홀한 신앙 체험의 순간은 잠시뿐입니다. 단 한번의 그 뜨거운 은총 체험, 그 짜릿한 감동이 생애 내내 지속되지 않습니다. 즉시 다가오는 것이 하느님 부재 체험이요, 무미건조함이요, 지극히 권태로운 일상생활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노력이 매일의 단조로움과 평범함 속에서도 주님 안에 충만하고 의미있는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또 다시 희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 뿐만 아니라 기도의 대가들, 전문가들인 성인성녀들께서도 많이 체험하셨습니다.
가장 구체적인 예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만인이 칭송하고 흠모하는 위대한 인물이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었습니다. 영성생활의 정점을 찍은 살아있는 성녀로 존경받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평생토록 따라다니던 무거운 십자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생애 내내 짙게 드리웠던 영적 어둠이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서한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저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편지 속에는 셀 수도 없이 자주 자신이 겪은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하소연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분이 시복시성에 합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뒤에는 더 큰 놀라움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계속되는 영적 메마름 속에서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하느님을 갈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울 때면 어김없이 영적지도자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고통스런 내적 경험들이 위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콜카타에서 봉사를 시작한 1947년 이래 1997년 돌아가실 때까지 약 50년간에 걸쳐, 다시 말해서 전 생애에 걸쳐 하느님 부재 체험, 영혼의 어둔 밤을 지속적으로 겪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위대한 사업이 시작될 무렵(1946~1947년) 약2년간에 걸쳐 그녀의 영적 생활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 순수한 사랑, 강한 믿음, 열렬한 기도로 충만했습니다. 더 나아가 환시, 탈혼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달콤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분과 나누었던 사랑의 밀어, 그분으로부터 오는 한없는 위로는 찰나였습니다. 길고도 메마른 영적 사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영적생활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느님 부재 체험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그녀는 더욱 더 예수님께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했고 특히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그분과 하나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가난한 이웃들인 콜카타의 빈민가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빈민가를 걸어가거나 어둡고 누추한 곳에 들어설 때 주님은 항상 그곳에 계십니다.”
계속되는 짙은 영적 어둠과 심연의 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 인생의 결론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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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깨어진 자 위에 영광과 권위가 내린다>
좀 길지만, 존 비비어 목사의 『순종』이란 책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퍼듀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로크웰 인터내셔널사에 취직하여 다니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등부 목사로 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고등부 부서장의 아들이 울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집안에서 온갖 경건치 못한 행동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떻게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애의 아버지가 나를 적대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 네 명이 찾아와 내가 곧 해임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서운해했습니다. 그의 아들에게서 나온 정보였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버지한테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아이 아버지인 부서장을 찾아갔습니다. 부서장은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담임 목사 탓으로 돌렸습니다. 나를 내보내는 것이 담임 목사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가 지났습니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교회에 남아 있게 될지 떠나게 될지 모르는 상태라서 우리 집에는 긴장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대출받아 집을 산 상태였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돈도 없었고 갈 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력서를 쓸 마음은 없었습니다. 우리를 그 교회로 인도하신 분이 하느님이라 믿었기에 아무 대안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는 결국 나에 대한 해임 안에 찬성했습니다. 나하고 개인적으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는 담임 목사와 그 부서장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게 자기변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튿날 담임 목사 사무실에 들어가니 담임 목사님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하느님이 이곳에 보내신 비비어 목사님을 내가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도했습니다.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에 나를 지키셨습니다.
담임 목사는 이어 이렇게 물었다. "부서장은 왜 목사님을 해임하고 싶어 했을까요?“ 나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는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당부했고, 나는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그 만남 직후 그 부서장이 내린 결정에 관련된 문서가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사악한 동기가 드러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담임 목사에게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담임 목사 모르게 일어난 일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떨쳐보려 45분 동안이나 방에서 왔다 갔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이 사람은 부정직했습니다. 그는 이 교회 사역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실상을 담임 목사한테 알려야 합니다! 입증할 자료도 있습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막지 않으면 그 사람의 타락한 행동이 교회 전체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러나 한껏 열을 내던 내 입에서 불쑥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진상을 폭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렇죠?”
그리고 그 순간 하느님의 평화가 내 마음에 흘러들었습니다. 나는 놀라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나는 증거물을 폐기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그 사건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야 나는 비로소 그때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호하고 복수하는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나 자신을 세뇌했을 뿐이었습니다. 정보는 정확했지만, 동기는 불순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던가, 내가 교회 뜰에서 기도하는데 그 사람의 차가 들어왔습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가서 겸손한 자세를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즉시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다. 20분 후 하느님은 다시 나를 떠미셨습니다. 즉시 그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사람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자 내 입에서 하느님이 나를 다루시지 않았으면 터져 나왔을 것과는 완전히 딴판인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는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그로부터 여섯 달 후 그간 그 사람이 했던 모든 잘못이 담임 목사에게 발각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해임되었습니다. 심판은 왔으나 내 손을 통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내게 하려던 일을 자기가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과 가족을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그를 놓아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 묵상을 하게 하고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 명확한 근거를 윗사람에게 내밀었을 것이고, 이것을 밝히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존 비비어 목사에게서는 ‘깨어짐을 통해 오는 권위’가 드러납니다. 권위는 내가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의 깨어짐을 보고 주는 것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권위를 세우셨을까요? 하느님이 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감싸는 빛나는 구름과 그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에 기겁합니다. 아버지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인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사람들뿐입니다. 그들도 결국은 깨어짐의 영성으로 교회의 권위를 가질 예수님의 후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러한 권위를 부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당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사랑받는 아들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중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다시 얻는 목숨이 곧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이고 권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감싼 ‘빛나는 구름’이 그 영광이요, 그 목소리가 권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교의 권위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서만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많은 신천지 신도들은 이만희의 잘못된 권위에 그토록 순종하게 된 것일까요? 사이비 교주들의 이런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재림예수라고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해냅니다. 그러면 성경을 진리라고 믿는 이들은 그 근거로 교주들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안에는 성경 말씀을 실현하기 위한 자신의 깨어짐이나 십자가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우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웁니다.
군마는 자기 뜻이 꺾이기 전에는 전쟁터에 나갈 수 없습니다. 마구간에서 가장 세고, 빠르고, 재주가 많더라도 일단 깨지기 전에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마구간에 남아 있고 재주가 덜한 다른 말들이 전쟁터에 나갑니다. 깨지는 것이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져야 권위에 대해 복종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자신의 등 뒤에 탄 장수의 권위와 하나가 됩니다. 자기를 지키거나 몸을 사리려 하지 않을 때에야 주인은 비로소 그 말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어떻게 깨어지실 것이고, 그 깨어지신 분을 위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높여주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권위의 근거는 그 사람 등 뒤에 있는 십자가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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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주일이다. 교회는 회개와 뉘우침의 분위기의 이 사순절 초기에 베드로 사도가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을 배치한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은 교육적인 의도가 깊다. 즉 사순절의 의미는 부활의 ‘영광’의 관점에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회개와 뉘우침의 생활과 더불어 사랑의 삶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마태오 복음은 묵시문학적 특징들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눈부시다든지, 제자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린다든가, 예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두려워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등등의 장면이다. 이것은 다니 10,1-11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나라의 특징을 말해주는 ‘표징’들에 의해 완전히 충만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까지도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영광을 보여주시고도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함구하기를 명하신다(9절 참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부활의 신비의 예표로서, 부활체험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이 만들어낸 어떤 가공적이고 환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하는 수난을 통해, 고통 받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구체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파스카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이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제자들도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사 42,1; 마태 3,17 참조)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고 하신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신앙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겸손과 영광 그리고 죽기까지 당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말은 ‘다시 체험하다.’, ‘다시 살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으로 사순절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창세 12,1-4: 하느님 백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소명
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통해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제부터 계속 넘어야 할 것들이며, 그가 이겨야 할 긴장과 고통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감쌀 수 있는 영광과 축복을 품고 있다.
그 첫째 단계는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당시에 자기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그 때문에 아브라함은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세는 하느님의 지혜와 전능하심에 의해 마련된 새로운 삶의 설계를 용감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의지나 활력을 마비시키거나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을 개방시켜 강화해 준다.
아브라함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신앙만이 미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제2독서: 2디모 1,8-1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빛나게 해 주십니다.
참된 쇄신과 변화의 힘은 ‘복음’에 있다고 사도 바오로는 가르치고 있다. 복음에는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의 선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8-10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에서 찬란히 빛났던 그 빛이 이제는 모든 이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복음’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이제 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신비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빛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변화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가야 한다. 나 자신이 변화하려고 하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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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이시자 온전한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복음서는 이런 예수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잘 드러내는 반면,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거룩한 변모는 부활하신 뒤에 드러날 신성을 미리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은 구약 성경의 중요한 사건을 암시하는 요소와 성경의 상징적인 요소들로 가득합니다. ‘높은 산’이나 영광스럽게 변모한 모습은 이집트 탈출과 광야의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초막에 관한 내용도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탈출을 통하여, 엘리야는 바알의 사제들과 하였던 내기를 통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드러낸 예언자로 복음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변모를 통하여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복음서는 그 영광을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의 반응이 그 영광을 잘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수난은 값지고 수난을 통하여 드러나는 사랑은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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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태 17,1-5)
1) 앞의 16장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마태 16,16).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은, 그 신앙고백이 옳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인해 주신 일입니다. <16장에서는 ‘말씀’으로 확인해 주셨습니다(마태 16,17).> 제자들 입장에서 이 일을 표현하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신 이유는, ‘수난 예고 말씀’(마태 16,21)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는 말씀 때문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은 그들에게 더욱 강한 믿음과 용기와 희망과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 뒤에 승리의 영광이 있음을 미리 보여주신 일입니다.)
2)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즉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마태 16,23)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구약시대와 연결되어 있고, 또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약속하셨던 ‘구원’을 완성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서 이스라엘 역사를, 또는 구약시대 역사를 생각했을 것이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구세주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 베드로 사도의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다.”는 말과 초막을 지어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께 드리겠다는 말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했음을 나타냅니다. 그의 말은, 그 행복이 너무나 황홀하고 좋아서,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하면 좋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단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하느님 말씀은, 십자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들으라는 뜻이고, 또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나라가 아무리 좋아도 지금의 인생을 생략하고 그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고, 누구든지 지상에서의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1) 하느님 나라는 아무나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승에서의 삶과 저승에서의 삶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 나라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에서의 삶은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2)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또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은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말로만 바치고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빨리 가고 싶다면서 자살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 빨리 가고 싶다는 소망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지상에서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중단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자살 자체도 대죄이지만, 지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도 대죄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관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았으면서도, 수난 때에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태 26,56) 달아났다가 되돌아와서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의 압박 때문에 엉겁결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태 26,69-74) 제자들의 그런 모습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인데, 그 모습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더라도 수난 때까지는 제자들의 믿음은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믿는 단계였을 뿐이고, 아직은 삶으로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랬던 그들의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삶으로’ 실천하는 믿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믿음은, 머리로 아는 단계에서 마음으로 믿는 단계로, 그 다음에는 ‘삶으로’ 실천하는 단계로 발전합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부활 때까지 ‘영광스러운 변모’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마태 17,9),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른 사람만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십자가는 외면한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 하나인 것처럼 신앙인들의 십자가와 영광도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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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근 베드로 신부님]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
매일을 힘들게 경쟁하며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지치고, 걱정으로 살아가는 때, 우리는 사순 제2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지쳐서 넘어졌을 때,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넘어 지시면서도 또 일어나셨습니다.
2000년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이 나를 힘들게 하여 넘어지더라도 내일은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순절은 회개와 보속의 시간입니다. 진정한 회개와 보속은 기도와 자선과 희망과 극기의 생활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의 합당한 태도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루카 9,23)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또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로마 8,18)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장차 미래의 영광에 희망을 두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심으로써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케 하며, 또한 오늘 복음말씀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와 두 번째 수난예고의 중간에 위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영광과 수난은 결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수난 없이 영광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여기 따뜻하고 안락한 생활이 있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텐트 세 개를 쳐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해와 같이 변하는 그 순간을 베드로는 결코 놓치기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도 베드로의 기억에서 떠난 지 오래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넋을 빼앗겨 얼른 텐트 셋을 치고 싶을 뿐입니다.
이를 마르꼬 복음에서 표현하기를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마르 9,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거지요.
이제 우리 베드로처럼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말하지 맙시다. 우리 제 정신으로 말합시다.
“주님,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이 산을 내려가면 이세상의 십자가가 저를 위협하고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주님, 저는 용기를 잃지 않겠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 하신 말씀을 듣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힘내십시오. 주어진 십자가를 두려워 말고 기꺼이 지고 가도록 합시다. 그 십자가에 우리의 희망과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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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사순 제2주일을 지내는 오늘, 교회는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대면시켜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산으로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십니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십니다.
구약의 대 예언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난데없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어떠한 대화를 나누셨는지 오늘 말씀에서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이 장면은 산 위에서 벌어지는 천상의 모습, 부활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걷는 여정의 한가운데서 말입니다.
오늘의 감사송에서는 변모의 참 의미를 이렇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어, 구약과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겪어야 할 수난, 또 누군가를 위해 짊어져야 할 십자가, 이는 부활의 빛과 생명을 보여 주는 약속인 것입니다.
오직 그 십자가와 수난을 통해서만 부활의 빛과 생명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내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뿌리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십자가가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한 것 때문이라면 그 안에는 예기치 않은 부활의 빛이 발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80세 후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그의 가족은 신앙이 돈독하고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가정에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치매입니다.
늘 어머니께 마음을 다하는 부부지만,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막을 길은 없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뿐인 형님 부부가 어머니의 치매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를 보던 그는 결심을 하고 형님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형님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할게! 나 때문에 보고 싶은 엄마를 찾아뵙지 못할까봐 그러는데, 엄마를 보고 싶거든 00곳에 위치한 데이케어센터(day carecenter)에 가봐. 뵐 수 있을 거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십자가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부활의 영광, 이를 가슴에 품고 신뢰하는 사람들, 그들은 항상 희망 속에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그들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실현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을 기억하며 십자가를 질 때, 위로와 부활의 빛이 나를 감쌉니다.
제2독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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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권혁동 세례자 요한 신부님]
<기대치 없는 하느님의 사랑>
우리는 항상 일이나 관계들에 대해서 어떤 기대치를 갖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올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할 것이다.’ 혹은 ‘내가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하면 하느님께서 내게 큰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 등 많은 부분에서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대치들은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를 좌절하게 하거나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함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삶의 여러 부분에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굴절시키는 기대치는 대부분의 경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것인데 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스러워지는 것일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에서 보면 큰 스님의 제안에 의해서 아래 스님들과 조직원들 사이에 대결이 펼쳐집니다. 그 대결은 ‘누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먼저 채우느냐’하는 것입니다.
스님들과 조직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물을 채워 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마지막에 조직원 두목이 밑 빠진 독을 들어 연못 속에 던짐으로써 대결은 조직원들의 승리로 끝납니다.
조직원들을 비호하는 듯 한 큰 스님의 모습에 아래 스님들은 불만을 가지지만 조직원 두목은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조직원 두목은 큰 스님에게 묻습니다.
“스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고 잘 대해주십니까?”
스님의 대답은 “그럼 너는 왜 항아리를 물속에 던졌느냐?” 조직원 두목은 이야기 합니다.
“그거야 그냥 집어 던졌습니다.”
큰 스님은 말하기를 “그래, 나도 밑 빠진 독 같은 너희들을 내 맘 속에 집어 던졌을 뿐이야.” “묻긴 뭘 물어.”
사도 바오로는 오늘 티모테오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2티모 1, 9)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고 구원을 주셨겠는가?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을 선포 하셨는가?
아마도 그것은 큰 스님의 말처럼 그 분은 당신의 사랑 속에 밑 빠진 독 같은 우리들을 집어 던지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당신이 부르신 제자들에게 거룩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려주시는 하느님을 묵상하며 우리가 진정 세상의 길로부터 하느님의 길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회개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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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장님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미국으로 왔고, 신문홍보와 강의가 있어서 미국에서도 여러 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두렵지만 길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고, 이것이 사랑의 길이고, 이것이 희망의 길입니다.
중국 우한에는 우리 교민들이 있었습니다. 정부는 3대의 전세기를 동원해서 교민들을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모두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 우한에 남아 있겠다는 교민이 있었습니다. 우한 한인 교민회 총무가 있습니다. 한국의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고, 본인도 한국으로 가고 싶지만 남아 있는 교민을 돕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의 탑승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다른 한분은 우한에 있던 한국인 의사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탐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으로 가면 우한에 한국인 의사가 한명도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남아 있는 교민을 돕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의 탑승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신앙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분들이 지는 십자가는 분명 신앙인의 삶입니다.
2주간의 격리 생활을 마치고 아산과 진천을 떠나는 날입니다. 아산과 진천의 주민들이 길에 나와서 따뜻하게 환송했다고 합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염성이 강하고, 위험하기에 주민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교민들에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 주었고, 교민들은 주민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민들은 아산과 진천 주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기억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태양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가리지 않고 빛을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아산과 진천의 주민들이 신앙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분들의 배려와 포용은 분명 신앙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타볼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하셨고,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주님께 다른 초막은 모세와 엘리야에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겁니다. 따뜻하고, 편하고, 아름다운 곳에 머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와 나의 가족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꽃이 필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 깊고 넓은 바다로 가듯이 신앙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깨어있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깨어 있는 신앙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회개하는 신앙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행동이 변한 사람은 이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변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외모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십자가가 있을지라도, 그 길에 고통과 좌절이 있을지라도, 그 길에 죽음이 있을지라도 길을 떠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길을 떠남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길을 떠남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길을 떠남으로서 침묵 속에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심으로서 부활의 기쁨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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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걸으며>
마태오 17,1-9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걸으며>
기억조차 희미한 어느 날
당신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감미로운 말씀을 달게 삼켰고
당신의 따스한 품에 포근히 안겼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기에
세상은 밝고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따뜻하고 정겨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끝까지 함께 하기를 바라는
슬픈 희망 머금고 말씀하셨습니다
벗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죽어야 한다고
벗들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밥이 되어야 한다고
벗들을 더 높게 올리기 위해서
우리가 발 디딤대가 되어야 한다고
당신이 앞서 가시고
내가 따라야 할 길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한 길이라고
당신과 내가 함께 걷는 길은
십자가를 넘어야만 이를 수 있는
찬란한 부활을 향한 길이라고
당신과 함께 하는 길이
나를 버려야만 하는 길이라면
굳이 당신과 함께 할 까닭은 무엇인가
당신과 함께 하는 길이
나를 죽이는 고통의 길이라면
더 이상 함께 할 수 있을까
몸은 당신과 함께 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길을 찾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제게 때때로
벗들과 함께 하는 기쁨으로
홀로 머무는 평화로
영원한 것을 품는 열정으로
당신은 다가오셨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당신의 십자가도
당신과 함께 걷기에
제게 주어질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다른 이야 무어라 하든
다른 이야 어떻게 살든
당신과 제가 그저 함께 있으면 좋고
당신과 함께 저만 행복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빛나는 영광에 싸인 당신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 받고 버림받은
벗들을 보듬기 위한
인간의 탐욕으로 물든
악한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위한
참혹한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는데
애써 십자가 뒤로 밀쳐내고
당장의 기쁨과 행복에
저를 담그고 싶었습니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제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의 목소리 안에서
당신의 간절한 부르심을 듣습니다
나와 함께 해 주렴
비록 멀고 험난할지라도
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걸어 주렴
그리하여 마침내
오직 십자가의 길을 건넘으로써 주어질
나의 영광스런 마지막에 함께 하렴
비록 내일 또 다시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에 휩싸일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해야지요.
당신을 떠나 누구와 함께 길을 걷겠습니까
저로 말미암아 당신의 십자가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시금 저를 추슬러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 여정에 함께 하렵니다
당신께서 불러주신 이 길
끝까지 당신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굳센 용기와 강인한 힘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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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예수의 거룩한 변모>
신학교에 입학해서 생활다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인간을 내버려두며 당신 스스로도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는가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학교 저학년이었던 시절, 제 온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가슴이 아픈데 하느님은 왜 이러한 이웃을 도와주시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가난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 불행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고통 중의 사람들, 반면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정의로운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걸까 의문이 가득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십자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해보였습니다.
수난의 순간,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라고 외치며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랐을 텐데, 나아가 자신의 죄를 반성하며 뉘우쳤을텐데 왜 꼭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셨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고통의 삶 중에 유일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오늘 복음말씀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고통의 그늘에 머물러 계시는 십자가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이질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이 변모의 전과 후를 살펴보면 이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예수님의 메시지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전 장면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고통 중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리라고 예언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합니다.
병행구절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겪으실 고통에 반박하는 이유는 그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갖 기적을 베풀며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가 고통 중에 죽을 것이라니! 그것은 당장의 평화를 바라는 베드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죽음을 예언하신 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우리는 수난 후에 있을 하늘나라의 행복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의 삶은 결코 행복하기만 하거나 매일매일 풍요로운 날만 있지 않습니다. 저마다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가 있으며 때로는 가시밭길처럼 끝없는 길을 걷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의 고통은 비록 죽음의 위협까지 주지는 않을지라도 지난하고 외로운 길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희망을 갖고 오늘 복음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은 때로 힘들지라도 예수님의 길을 성실히 따르다 보면 우리는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본 그 지복직관의 영광의 순간에 있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변모를 본 야고보 사도는 제자들 중 첫 순교자가 되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한 요한은 일생 동안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세상의 심판 때를 예언하는 요한 묵시룩까지 저술한 뒤 살아있는 증거자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모든 삶의 원천은 오늘 그들이 체험한 지복직관의 장면이 있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실천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국에 맞이하게 될 주님과의 평화와 사랑의 시간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발을 옭아매고 있는 고통들 혹은 이미 체험한 괴로움의 상처는 지금의 나를 힘들게 만들지만 영원한 하느님의 영광에 비교해볼 때 일시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중에 신음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구세주께서는 몸소 우리들의 세계 안으로 뛰어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의 종류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인데,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녀가 끊임없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고 사회적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도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각자에게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쳇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다 보면 마치 이 상황이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어려움은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며 이를 직접 체험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큼 고통을 받은 자가 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나도 너와 같은 고통을 이겨냈으니 너 역시 극복할 수 있단다’, ‘내가 지금도 너와 함께 한단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더불어 우리들의 세상은 현재의 시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세상에 있음을, 그러므로 고통을 극복하는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시는 분이 우리의 스승 그리스도이십니다. 별 수없는 사역으로 땅을 파고 있는 죄수의 곡괭이 질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행동에는 어떠한 희망도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금광에서 채광하는 광부의 곡괭이질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곡괭이 질은 어떠한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별 수 없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그치면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는 죄수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금광을 파는 광부의 기대처럼 또 다른 목표, 또 다른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 지복 직관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다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삶의 무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 이후에 있을 새로운 삶을 향한 승리자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이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나누어질 때 우리에게 새로운 힘이 생겨납니다. 오늘 2독서의 바오로의 선포가 이러한 기대를 온전히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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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기도합시다…>
언젠가 본당에 한 자매가 전화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정말 힘들어서 기도할 수 없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첫째 아들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서 죽었고요, 둘째 아들은 집에서 나갔습니다. 계속 찾아오는 고통과 불행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 울면서 지냈답니다. 제가 그 자매님에게 주었던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자매님에게 정신을 차리고 이 말씀으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데살로니카 1 서 5장 16-18절)
그 자매님은 이 말씀을 붙들고,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으며, 시간 나는 대로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면서 감사 기도를 올리면서 견디어 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식물인간이었던 남편이 다시 일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나갔던 아들이 1년 만에 돌아옵니다. 감사 기도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 자매님에게 빛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보게 됩니다. 그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이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고개를 보니 “오직 예수님” 만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 17장 14절 이하를 보시면,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와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다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간질병에 걸린 그 아이를 보시고 호통을 치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아이를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 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려가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인 산 아래에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질병, 아픔과 슬픔,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 놓인 불쌍한 영혼들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또한, 그로 인해 생긴 우리의 상처에 손을 대시며 고쳐주시고, 그리고 힘이 다 빠져버린 손을 잡아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고운님들은 예수님께서 “내려가자.”라는 말씀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주님께 은혜받았으니 세상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도망가지 말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서, 매일 감사 기도로써 이겨내고 극복하라.”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 외에는 세상에 그 어떤 문제를 풀 수도 없고, 몸과 마음에 치유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저 두레박은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먼 곳이 아니라 고운님들 곁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운님들이 알고 있는 한 영혼, 한 영혼이 ‘고운님들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금 어떤 일이나 큰 문제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가족이나, 특히 자녀들이 고운님들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괜찮아. 아들아! 딸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와 함께 한다.” 아멘.
저 두레박도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데살로니카 1 서 5장 16-18절)
지금 코로나 19와 함께 보내고 있는 사순 시기에 고운님들이 일에 힘들고, 절망하고, 그리고 쓰러져 일어날 기운이 전혀 없을 때. 주님께서 조용하게 찾아오셔서 고운님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말씀으로 손을 잡고 몸과 마음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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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30)
♧♧ 시편 77편 4절…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내 얼이 아뜩해지네." 셀라.
*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아삽이 하느님을 생각하면서도 불안해하고 근심하는 까닭은, 지금 곤경과 고통을 겪고 있는 아삽 자신이 간곡하게 고난으로부터의 하느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간구를(3절. 참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침묵하고 있는 듯한 상황에 대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진노의 채찍 아래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시편 42편 6절과 12절. 43편 5절. 참조)
* 내 얼이 아뜩해지네.
신앙적인 고민으로 인해 아삽의 마음이 점점 나약해졌다는 의미입니다.(시편 142편 4절. 요나서 2장 7절. 참조) 이는 하느님을 믿노라하면서도 그분이 주실 구원에 대하여 의심하며 불안해하기 쉬운 인간의 나약성과 한계를 드러내 줍니다.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 시편 77편 5절…
"당신께서 제 눈꺼풀을 붙잡으시니 불안하여 말도 채 못합니다."
* 당신께서 제 눈꺼풀을 붙잡으시니...
4절의 ‘하느님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고 생각을 거듭할수록...’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아삽은 하느님께서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삽은 자신이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구원과 평안을 간구했지만(시편 130편 6절. 참조), 하느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이 가중되었노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불안하여 말도 채 못합니다.
‘입술에 기도와 찬송이 사라지고 한숨과 침묵만이 있다.’라는 뜻으로 아삽의 지치고 상한 심령의 상태를 잘 나타내 줍니다. 이는 아삽이 아직 하느님의 섭리와 그분의 진실하심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 시편 77편 6절…
"저는 그 먼 옛날을 회상하고 아득히 먼 시절을 생각합니다."
‘먼 옛날...’은 하느님께서 과거에 아삽을 지키시며 보호해 주셨던 때를 가리킵니다.(시편 143편 5절. 참조) 이와 같이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에 과거의 좋은 때를 회상하는 것은 첫 번째로 사람에 따라 현재의 참담함 상황을 가중시킬 수 있으나, 두 번째로 신앙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신명기 32장 7절. 시편 77편 11-12절, 143편 5절. 이사야서 51장 9절. 참조) 아삽의 경우 두 번째에 해당하는데, 지난날의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회상하는 가운데 마음의 위로를 얻고, 아삽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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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형제님께서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초대에 기쁘게 응했고 그 집에 들어섰는데 화단에 마음에 들지 않는 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때 형제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 꽃을 뽑아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왜 이런 꽃을 키우냐며 주인에게 화를 내야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꽃을 키우는 것은 주인의 몫이지, 손님의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마 남의 집에 가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안에서 이런 모습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자기 생각만을 내세워서 상대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해주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이는 주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님께 얼마나 많은 원망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의 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꽃을 허락도 받지 않고 뽑아 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반응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주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의 비교가 부적절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곳에 주님을 위한 초막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러한 소리가 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자기의 판단을 드러내고 싶을 때, 하늘에서 들린 이 소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기 생각만을 드러내는 삶이 아닌, 주님의 말씀만 들으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둘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영광스럽게 변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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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이야기>
초등부 어린이가 교리 선생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하느님하고 예수님은 부자지간이 맞아요?”
교리 선생님은 “당연하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어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렇게 또 묻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하느님은 성이 ‘하’씨이고, 예수님은 ‘예’씨에요? 부자지간이면 성이 같아야 하지 않아요?”
바로 그때 다른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바보야! 서양 사람들은 성이 뒤에 붙잖아! 하느님과 예수님 두 분의 성은 ‘님’씨야.”
저는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의 상상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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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
-만남, 축복, 도반, 약속, 말씀, 떠남-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새삼 깨닫는 바 큽니다. 인류에게 주는 경고이자 회개하라는 표징입니다. 인류는 피아彼我도 좌우左右도 이념과 국적도 상관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운명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류 공동의 적’과의 힘든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참으로 가공할 무기들이 이젠 쓸모 없어졌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습니다. 이젠 보이는 무력의 전쟁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작금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전염병은 물론 무수한 병과의 전쟁, 기후 위기와의 전쟁, 미세먼지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빈부격차 불평등과의 전쟁등 끊임없이 이어지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악惡과의 전쟁’입니다. 이들 대부분 잘 들여다 보면 천재天災라기 보다는 인재人災입니다. 인간의 무지無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국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지無知와의 전쟁’입니다. 탐욕, 교만, 두려움, 어리석음, 무감각, 무자비, 허무, 광신, 맹신,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 군비경쟁등 모두가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覺醒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의 회개와 더불어 연민, 연대, 지혜, 겸손이 뒤따릅니다. 과연 무지와의 끝없는 전쟁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무지의 악이자 병에 대한 근원적 처방은 단하나 ‘사랑의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재앙이 바로 끊임없는 무지의 전방위적 공격입니다. 참으로 겸손히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무지로부터의 치유이자 해방이자 자유입니다.
첫째, 만남입니다.
만남의 선물입니다. 참 소중한 만남들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과거 향기로웠던 만남의 기억이 미래의 꿈을, 희망을 만듭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람과 하느님과의 만남이, 또 복음의 제자들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일종의 신비체험과 같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바로 이런 체험이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에 희망과 꿈이 되고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체험은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습니다(ever old, ever new)’.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으로 복된 추억입니다. 참으로 이런 체험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 영적 부자입니다. 이런 좋은 추억들에는 알게 모르게 주님께서 꼭 함께 하십니다.
어제의 행복했던 추억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아주 오래전 옛 제자로부터의 전화를 받고 사진첩을 찾아 44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참 새로운 감동의 사진이었습니다. 지금은 50대 후반의 제자들의 13세 5학년때의 사진, 이때 제 나이 28세였습니다. 대체로 가난했지만 평화롭고 행복한 아이들과 저의 표정들을 보면서 ‘오래된 미래’는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과거가 행복한 미래의 꿈과 희망이 됩니다. 참으로 좋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들이 얼마나 미래의 꿈과 희망에 직결直結되는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향기롭고 행복했던 만남의 기억이나 추억이 없이는 미래의 꿈도 희망도 없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 영광스러운 변모의 주님과의 만남의 추억은 파스카 여정중에 끊임없이 미래의 꿈과 희망을 만들어 줬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역시 주님과의 만남의 추억은 늘 새로운 용기의 원천이 되었고, 미래의 꿈과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함을 깨닫습니다.
둘째, 축복입니다.
축복의 선물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축복 받은 존재들입니다. 창세기의 축복받은 아브라함이 바로 우리 모두 축복 받은 존재임을 깨우칩니다.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는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새롭게 구원 역사를 펼치시는 주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복을 주시며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아브람의 ‘너’ 대신 오늘의 ‘내 이름’을 넣어 묵상해도 은혜로울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모든 이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잘 들여다보면 아브라함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복받은 복덩어리 존재들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평화의 복을 받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예수님과의 일치를 이뤄주는 미사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감격에 벅차 고백하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다음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구원의 복음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도반입니다.
도반의 선물입니다. 빨리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반들과의 연대가 절대적입니다. 떠남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의 여정’입니다. 형제들 도반과 더불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은 없습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고독과 고립은 엄연히 다릅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입니다.
“홀로 사는 사람이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아브람이 떠날 때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물론이고 보이는 도반인 롯과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세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늘 함께 했던 여정의 도반들이자 영원한 도반이자 스승인 예수님과 늘 함께 했습니다. 우리 역시 똑같습니다. 함께 사는 공동체 형제 도반들이 있고, 그리고 우리의 파스카 여정중 늘 함께 하시는 영원한 도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넷째, 약속입니다.
약속의 선물이자 희망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약속의 선물이자 희망이 됩니다. 창세기의 주님 역시 아브람에게 약속을 선물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바로 보여줄 땅이 아브람의 순례 여정의 궁극의 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늘 나라가 약속의 땅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 모두 하느님께 부르심의 축복의 약속을 받은 은혜로운 존재임을 선포합니다. 티모테오 제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께 부름 받아 구원 받고 거룩히 살게 되었다는 자체가 축복이요 약속의 성취입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이미 파스카 여정 중 하늘 나라의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부활의 약속의 기쁨을 앞당겨 사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바로 파스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순절 동안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순결하게 보존하며--- 자기 육체에 음식과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다섯째, 말씀입니다.
말씀의 선물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과 만나야 영혼도 삽니다. 창세기의 아브람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말씀을 들으며 삶을 새롭게 하지 않습니까?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뿐입니다. 오늘 주님은 복음에서 세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선물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 발에 등불, 우리를 비추는 빛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 따라 갈 때 성공적 파스카 여정이 됩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역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파스카 여정에 오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 새겨진 말씀입니다.
여섯째, 떠남입니다.
만남에 이어 떠남의 기쁨이요 선물입니다. 만남의 끝은 새로운 떠남의 시작입니다. 41년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 졸업식 때 칠판에 썼던 글귀를 어제 사진에서 보고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출발,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껏 노력하자!”
참으로 산티아고 순례중 가장 기뻤던 순간이 새벽마다 일어나 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만남의 여정은 바로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이 됩니다. 물도 고이면 썩습니다. 늘 흐를 때 맑은 물입니다. 집착함이 없이 끊임없이 떠나는 여정이 아름답습니다. 성서의 인물들 한결같이 파견받아 떠나는 떠남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모범입니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산에 올라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했던 세제자들 산에서 내려와 떠남의 여정에 오릅니다. 집착하여 머물려는 베드로의 모습 역시 우리의 면모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남의 여정에 오를 것을 명하십니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의 여정은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지나가는 것에 집착할 때 고통입니다. 그러니 밖으로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정주의 山’같아도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맑은 강江’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래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꼰대소리 듣지 않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떠남의 여정, 파스카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만난 우리 모두에게 축복과 더불어 약속을 선물하시고 당신 말씀에 순종하며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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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사랑합니다.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도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확진자도 계속증가하고 불안이 커갑니다. 속히 안정되어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3,13-15.19-21)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입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 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은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그저 죽은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 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마스크 하나 구입하기도 어려운 오늘의 위기 안에서 서로의 관심과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당신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강건하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고 하였는데 이제 해처럼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쉽지 않지만 이 선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단장을 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판공문제지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못하는 요즈음 성경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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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저마다의 명암이 공존합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마태 17,1)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곧 맞이하실 수난 전에 당신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신 겁니다. 그동안 예수님 곁 가까이에서 먹고 자고 배우며 살아온 제자들에게 지금의 빛나는 모습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자기들을 덮은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온 소리까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6)
신의 현현 앞에 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체험과 이해 범주를 벗어난 사건 앞에서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어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일 겁니다.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만큼 눈이 부실 지경의 빛 앞에서 어둡고 더러운 자기의 현실이 더 선명히 떠오를 테니까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마태 17,9)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제자들을 고무시키기도 하고 근심이 되기도 하는 양가적 요소가 될 겁니다.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서를 상징하는 위대한 성현인 동시에 누구보다 처절하게 혹독히 그 대가를 치르며 하느님을 증거한 대표적 존재들이니까요.
거기에 더해 스승이 죽는 이야기까지 또 나옵니다. 제자들이 이해했건 이해하지 못 했건 이미 예수님은 수난 예고를 한 번 하신 상태였지요(마태 16,21 참조). 방금 체험한 신비경에 들뜨다 말고 찬물을 끼얹어진 듯합니다. 잠시지만 상승과 하강의 편차가 마치 롤러코스트 같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어느 모습도 감추지 않으십니다.
제1독서는 아브람의 부르심 대목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누구라도 그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된다면 놀랍고도 영광스러울 겁니다. 아브람은 원래 목적지였던 가나안 땅에 이르지 못한 채, 본고장 칼데아 우르도 아닌, 하란에 몸붙여 사는 이방인에 불과했고 더군다나 자손도 없는 처지였습니다.(창세 11,27-32 참조)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했을 영예에는, 그러나 조건이 따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아브람은 무엇보다 먼저 익숙하고 안정된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안정은 지금 누리는 현재이지만, 복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친족의 보호를 떠나는 것은 위험에 자신을 고스란히 내맡기는 형국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복음의 양면성을 솔직히 드러냅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직설화법입니다. 요즘 말로 돌직구라 하지요. 감언이설로 상대를 안심시키거나 착각하게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복음을 믿고 수호하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에둘러 피하지 않고 던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2티모 1,10)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곧 새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것도 "환히"!!! 드러냅니다. 이 "환히"라는 단어는 몇 절 안되는 제2독서 안에 두 차례나 반복됩니다. 마치 복음의 "빛나다"라는 반복된 표현을 반사하듯 말이지요.
빛과 어둠은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하나만 선택할 수 없지요. 그것이 인생이건 신앙이건 다른 어떤 영역이건 간에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닙니다. 상승과 하강, 영광과 수치, 생명과 죽음,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성취와 상실... 약하고 죄인인 우리는 그 한가운데를 아슬아슬 균형 잡으며 걷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신 빛나는 영광의 얼굴 안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또한 일그러진 고통의 신음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어둠은 취사선택으로 하나만 골라낼 수 있는 개별 포장 세트가 아니라 한 덩어리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인내하며 주님을 모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주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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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사순시기에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4) 그 길은 비록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길이지만,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주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창세 12,3)이라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길에 우리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길입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9-10)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환히 드러난 영광된 변모를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본래의 신적 초월성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사순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마태 16,21-28)를 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수난으로 닥쳐올 절망과 위기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니 이 수난의 길은 동시에 생명과 부활의 빛나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내적 기쁨으로 차오르는 은총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을 덮은 그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또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시켜주십니다. 그러면서 그 변모의 길을 가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이 일은 예수님의 변모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곧 예수님의 변모와 함께 우리의 변모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나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마치 요즈음 ‘코로나19’로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려워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시련 속에서도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한갓 박테리아도 아닌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인 미물 중의 미물인 바이러스에게 우리가 정복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우리 사회에 침범하고 있는 또 다른 바이러스인 타인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이나 혐오 바이러스도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위한 수난에 동참하고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무디어지고 무관심해진 마음을 뉘우치고,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신뢰와 사랑, 배려와 존중을 심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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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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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그분의 형상>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사심이 없는 사람의 얼굴은
화장하지 않아도 환하고 빛이 납니다.
살다보면 어느날
예수님처럼 내가 빛날 때도 있고
상대가 빛날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영광을 보게 하실 때가 있는데,
그 빛나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면
황홀함만 찾으려다 현실은 부서집니다.
끝보다 시작을, 영광보다 고통을
먼저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분의 빛나는 형상을 우리는 보았고
그 빛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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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 2)
봄은 아프게
계절의 문을
두드리며
우리에게 옵니다.
건강한 변화와
건전한 변모가
간절히 필요한
우리 시대의
아픈 민낯입니다.
종교는 모두를
위하고 모두를
살게하는 그 마음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속이고 감추고
얼버무리는
거기엔 빛나는
변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캄캄한
사순시기에
우리에게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아프게 묻게 됩니다.
하느님조차
돈벌이의
이용수단이
되어버린 지독히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사람의 길을
생명의 길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그마음이 빛나는
변모입니다.
조직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모두를 위하는
사랑이
빠져버리는 그것이
재앙이며 사이비며
전염병입니다.
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를
함께 찾읍시다.
그것은 눈을 들어
우리의 비참함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이토록 망가진
우리 내면에서
상식과 도리
개방과 결단을
다시 배우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종교의 역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 했다고
용서를 청하는
그것이 종교의
정직한 역할임을
믿습니다.
참된 것은 빛나고
그릇된 것은
숨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모두를
위한 개방이며
모두를 위한
희망임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 자신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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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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