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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29
3월9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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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오늘 저는 이웃을 함부로 저울질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자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오늘 우리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부탁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복음 6장 36절)
이웃을 향한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이웃이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보기 시작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이미 물 건너 가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침마다 눈만 뜨면 주님 앞에 맹세해야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는 이웃을 함부로 저울질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죽었다 깨어나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를 매일 매 순간 마주 대해야 하는데, 백 번 천 번 마음 바꿔 먹어도 그에 대해서만큼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당부는 참으로 요구성이 큰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범하는 죄나 무례한 행동들은 자비를 실천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길이 용서하는 것이요, 두 번째 길이 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복음 6장 37~38절)
너그러운 용서를 통해 그와 나 사이에 가로막힌 철조망이 제거될 것입니다. 관대한 ‘줌’의 행위를 통해 그와 나 사이에 다리 하나가 놓일 것입니다.
심판관으로서 하느님의 태도는 오늘 우리 각자의 행위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오늘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에게 주면 하느님께서도 아주 후하게,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축복과 은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한 전원주택 작은 거실의 벽난로 속에 조심스레 간직해야 할 아슬아슬 작은 불씨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자비의 불은 점점 강하게 타오르는 불이며,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번져가야 할 불, 결코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충만히 체험한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 자비의 강렬한 불꽃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만으로부터 오는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옹졸하게 앞뒤를 따진다거나 벌벌 떨며 계산기를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인색하지도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터니 그분께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자신에게 넘치는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이웃들과 나눌줄 압니다.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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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영국의 어느 제과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빵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제과업자에게는 매일 아침, 버터를 만들어 공급해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납품되는 버터를 보니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납품된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 보았습니다. 예측한 대로 정량에 미달하였습니다. 화가 난 이 업자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농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관은 농부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그 제과업자가 파는 1파운드짜리 빵의 규격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서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제과업자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그 1파운드짜리 빵의 양을 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고 납품을 한 것입니다. 내가 주는 것이 항상 나에게 돌아오는 법입니다.
어떤 사진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도미노 벽 앞에서 어떤 신사가 서 있는 그림입니다. 그 도미노 벽을 밀어 쓰러뜨리면 다른 벽들도 하나씩 쓰러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의 등 뒤에 있는 벽이 그 도미노의 마지막 벽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내 앞의 도미노 벽을 밀어 쓰러뜨리면 그 도미노들이 쓰러지다 결국엔 그 신사 위로 벽이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내보내는 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에게 받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자연에게 주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에게 플라스틱과 공해를 주면 자연은 그 플라스틱을 먹은 생선과 여러 질병을 돌려줍니다. 만약 인간이 자연 때문에 힘들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힘들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악해질수록 자연재해나 질병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는 대로 되돌려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판단 받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웃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이 나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도 이웃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것이 곧 내가 무엇을 받고 싶은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사랑받고 싶다면서 이웃을 미워한다면 하느님 정의에 어긋납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인은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가게의 주인은 자기가 믿는 신이었습니다. 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이 무엇을 파는 가게냐고 묻자 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외쳤습니다. “제게 행복과 부, 아름다움과 지혜를 주세요.” 그러자 신은 조용히 웃으며 “미안하네. 여기서는 열매를 팔지 않고, 다만 씨앗을 팔 뿐이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은 열매를 주시지 않고 씨앗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씨앗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내가 선택한 씨앗입니다. 만약 성공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성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성공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개그맨이 자신이 사람들을 웃기고 나서 무엇을 받을까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을 보고 자신도 행복해합니다.
내가 우울하다면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우울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받고 싶다면 그대로 해주면 됩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것이 내가 거두어들일 열매의 씨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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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6,36-38 :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거룩한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45 참조)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건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단죄하면, 단죄 받는 것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라고 고백한 시편 저자는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내세우며 다시 용서의 탄원을 드린다.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소서.”(시편 103,14) 그러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이것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일단 올바로 심판한 사람은 은총에 따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정의에 따르지 않고 자기를 위해 보복하려는 심판을 하지 마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을 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 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아낌없이 후하게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라고 하셨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고 매사에 남을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함께 하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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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의 묵상
2016년 자비의 희년의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또한 자비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에서도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은 ‘자비’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행동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자비로운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미 그분의 자비를 듣고,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자비를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되와 그릇을 만듭니다. 또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합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자비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지라는,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 가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서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는 대신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것보다 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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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허찬란 임마누엘 신부님]
<후덕한 인생>
루카 복음 6장 36-38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MBTI 성격 유형 검사에서 ESFP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애니어그램을 했더니 1번 유형이 나왔습니다.
종합해보면 제 성격은 일을 무지 벌이는데다 완벽을 추구하는 유형인데 그래도 사람을 대할 때는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후덕을 가르치십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사목을 잘 한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을 많이 합니다.
우리 농촌 살리기 일을 해보았고 성전 신축도 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영성의 부족과 내면의 양심성찰에 대한 갈망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참 사목을 잘 몰라서가 아닐까 자문해봅니다. 사제란 어떤 사람일까요?
가르치는 자, 설교하는 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 면담과 치유기도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는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영적인 친교가 잘 다져진 사제는 이웃에게도 따뜻한 사목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후한 은총을 선물로 받으며 위로와 보람을 느껴야 하는 이가 바로 사제입니다.
바쁘다는 말의 남발이 아닌 조용하지만, 사제란 직분과 사제 영성 속에서 참 사목의 의미를 실천하며 후덕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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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용서의 삶>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선처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알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찾아와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큰 상처를 받고 복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우리가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이 있는 상대방을 용서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와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 밤낮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게 할 뿐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결국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진 분노와 증오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죄를 더 크게 확대할 뿐입니다.
죄 없고 흠 없는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통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승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선악의 판단이나 심판의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용서하기도 힘든 법입니다. 그러니 애써 마음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용서를 하려 애쓰지 말고 우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워가면서 작은 일에서부터 이해와 용서를 키워 가야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하느님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웃을 나와 같은 처지로 사랑하게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을 배우는 길입니다. 우리는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열매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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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황금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이 전하는 황금률이다.(38절) 이는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5장-7장)의 결론에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제시하는 황금률(7,12)과 같은 것이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가 루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6,20-49 참조)에 해당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루가복음의 황금률도 평지설교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피력하시는 산상설교나 평지설교에서 그 가르침을 꿰뚫는 정신은 황금률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므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것이다.
사실은 황금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에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마태오복음: 마음, 목숨, 뜻; 마르코복음: 목숨, 생각, 힘; 루가복음: 마음, 목숨, 힘, 생각)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신명 6,5)는 하느님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아껴라"(레위 19,18)는 이웃사랑, 즉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태 22,36-40; 마르 12,28-33),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10,25-28) 제시하고 있다.
요한도 하느님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계명'으로(13,34) 제시한다. 물론 모두 다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황금률의 정신을 가지고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신약의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늘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표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남을 용서하는 것, 남에게 주는 것' 등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황금률의 정신을 지키는 수준에 머물거나 단순한 사랑실천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거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준 만큼 받게 되고, 받은 만큼 주게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칙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38절)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한 처사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예수님의 요구가 평지설교의 새로운 핵심으로 부각된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엄청난 요구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3,34)는 새계명과도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오늘은 하느님의 후덕한 자비로움에 받은 것보다 적게 돌려주려 하고, 준 것보다 은근히 더 받으려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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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씩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제가 되고 싶었나요?’ 저는 준비된 답변을 하곤 합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손자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고, 제가 할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자랐고, 성당이 놀이터와 같았으니 자연스럽게 사제가 되는 길에 가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질문을 바꾸어서 ‘왜 사제가 되려고 했나요?’라고 물으면 저의 답변은 달라졌을 겁니다. 신학적인 성찰과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신, 순명, 신앙고백을 서약하면서 교회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길을 선택하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자주 하였습니다. 비유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가 아는 걸 가르치기 위한 질문이 있습니다. 불가의 선승들이 이런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질문을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상대방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논리와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은 주로 정치인들의 토론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을 하고, 예상 밖의 질문을 던지면 상대방은 꼬리를 내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탁자를 뒤엎고, 상인들을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을 허물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질문으로 답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죄를 용서하고, 세례를 주었던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한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온 권한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세례자 요한이라면 요한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온 세례자 요한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답변하십니다. ‘나도 누구로부터 그런 권한을 받았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오늘의 성서 말씀으로 답변하면 좋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 감사송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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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눈길 닿는 곳>
루카 6,36-38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내 눈길 닿는 곳>
내 눈길 닿는
첫 자리에 나를
놓아야 해요
그곳에서
만나겠지요
부족한 사람을
죄 많은 사람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 사람
빚으신 분 닮아서
자비로울 수 있고
너그러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힘 있으니까요
그 사람 만났으니
내 눈길 닿는 곳에서
만난 첫 사람
나와 함께
내 눈길 이제
벗들에게 돌려야지요
벗들을 품기 위해
벗들을 살리기 위해
벗들을 사랑하기 위해
벗들과 함께 하기 위해
벗들을 벗들이게끔 하기 위해
내 눈길 닿는 곳
나이든 벗이든
그 누구에게든
그곳에서 하느님 만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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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언제나 관대한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온전히 경험에서 비롯되었는데, 신학생 시절 유난히 엄격하셨던 신부님들이 다소 원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교수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학생들에게 F 학점을 많이 주는 신부님들도 계셨고 대하기 어려운 분들도 계셨습니다. 신학생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관대한 신부님들, 수업은 가볍게 진행하며 점수를 잘 주는 신부님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엄격한 신부님들께는 조금 더 너그럽게 우리를 대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사제가 되어 많지는 않지만 연차가 쌓여 신학생들을 만나게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지금껏 만난 많은 신부님들이 생각납니다.
아직 제 나이는 청년에 가까운 듯 하지만 앞으로 어떤 본보기가 되어야 할지 어떤 스승이 되어야 할지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엄격하셨던 분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 엄격함이 결코 신학생들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닌 진심어린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점차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고자 하셨던 진심어린 마음을 한참 지나서야 느끼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모습조차 일종의 ‘자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자비’라는 단어를 무한한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 진정한 자비란 ‘단순한 베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너그럽더라도 그 안에 사랑과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무관심입니다.혹은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무책임에 가깝습니다.
반면 조금은 엄격한 듯 하지만 그 안에 사랑과 애정 그리고 너그러움이 담겨져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다소 의아합니다. 실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인 자비로움은 오히려 정의를 무시하고 악인들과 선인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사람들에게 자비로울 수 있단 말입니까? 소위 말해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자비가 무작정 베푸는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마음”이라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조금 더 쉬워집니다.
우리가 때로 자녀들에게 훈계를 하고 따끔하게 혼을 낼 때가 있듯 그것이 사랑과 연계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자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또한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겠다고 자녀에게 훈계하지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화풀이가 될 수 있으며 더불어 나의 욕심이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명확한 조건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그것은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을 대함에 있어 심판과 단죄가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심판이란 나의 주관에 따라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이며 단죄는 이에 대한 벌을 부과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심판과 단죄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가 섞인 심판과 단죄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호주의 어느 성당에는,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행합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만큼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음을 뜻하며 잘못을 행한다는 것은 반성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워하는 누군가의 미래를 감히 우리가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과거에 어떤 실수를 했다고 한들 그것이 현재의 반짝이는 그를 어떻게 감히 해칠 수 있겠습니까?
한편, 누군가가 나의 실수를 이를 갈며 심판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비참함입니까?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깨끗합니까?
우리들이 그림자를 소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빛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바닥에 펼쳐진 그림자만 바라본다면 그는 자신에게 갇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반면 빛이 있음에 감사하며 그림자의 존재를 확인한다면 세상을 온전히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빛처럼 쏟아지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에 기대 타인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위한 조건으로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자비를 완성하는 것은 사랑을 주는 행위이며 그것은 배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용서를 베푸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사랑입니다. 사람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훨씬 크고 무한합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만난 어른 신부님들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만난 선배 신부님들 중에는 엄격함과 관대함을 떠나 인격적인 분들, 덕이 있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공통점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자비로움이라 부르며 저 또한 그렇게 기억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부족한 저를 사제로 쓰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힘을 내어 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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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행복한 구원의 선물…>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까?” 스승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용써.”
스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허, 이 사람아, 용을 쓰라니까, 용서가 그냥 되겠냐? 용을 써야 용서가 되지.”
용서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힘을 써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베이컨이란 철학자가 “용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수에게 복수할 때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용서할 때 원수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자.” 즉, “원수를 용서하는 순간에 우리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용서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힘듭니다.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의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십자가의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용서를 받아야 할 존재이다.”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이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자비로운 새 모습으로 주님의 자녀답게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구원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하느님의 말씀에는 누구든지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하느님의 자애가 있고, 치유와 회복이라는 은총을 가져다주는 구원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누군가에게 구원의 선물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제목은 “1초의 의미”라는 글입니다.
“고마워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사람의 따뜻함을 알 때가 있다. “힘내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용기가 되살아날 때가 있다.
“축하해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행복이 넘치는 때가 있다.
“용서하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인간의 강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이렇게 “1초 동안 짧은 말로” 누군가를 배려하고 용기를 주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러므로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서 “1초의 의미”을 실천하여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로운 새 모습으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 두레박도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로우신 모습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용써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잊지 않고 ‘1초의 의미’를 되새기며 용써 누군가에게 배려하면서, 하느님의 자애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라는 행복한 구원의 선물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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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31)
♧♧ 시편 77편 7절…
"밤새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묵상하며 전신을 가다듬어 헤아려 봅니다."
*밤새 마음속으로 되새기고 묵상하며...
아삽은 이전에 불렀던 감사 찬송을 이제 캄캄한 밤중과 같은 곤경의 날에 자신이 과거에 체험한 하느님의 은총과 그 때 불렀던 찬송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하며...’이란 말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 속에서 아삽에게는 찬송의 소리대신 울부짖음과 한숨, 그리고 침묵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삽은 단순한 침묵의 차원이 아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되돌아보며 성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신을 가다듬어 헤아려 봅니다.
‘헤아려 본다.’라는 말은 ‘부지런한 탐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아삽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이유와 하느님이 그 같은 시련을 허락하신 까닭 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 시편 77편 8절…
"주님께서 영원히 버리시어 더 이상 호의를 베풀지 않으시려나?"
* 주님께서 영원히 버리시어...
‘버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나흐’는 ‘옮기다’ ‘돌아서다’라는 의미로 관심과 은총을 거두어 버림을 뜻합니다.(시편 88편 15절. 애가 3장 17절. 참조) 이처럼 아삽은 자신이 당한 곤경에 대해 하느님께서 전혀 어떠한 도움도 주시지 않고 무관심해 하시는 것 같아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조차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과 고민 속에는 하느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람의 손길을 거두지 아니하신다는 확신이 내면에 깔려 있습니다.(시편 94편 14절. 로마서 11장 1절. 참조) 그러므로 이러한 고민은 신앙의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아삽의 몸부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더 이상 호의를 베풀지 않으시려나?
아삽은 이처럼 하느님께서 계속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인가? 에 대해 헤아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를 버리신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반대되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애가 3장 3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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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지 못하지만, 그전에는 매주 부모님과 미사를 하기 위해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빵을 사서 가는데, 한번은 빵을 모두 고른 뒤에 계산대에 줄을 서서 제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산대 옆에 아주 맛있어 보이는 빵이 있는 것입니다. 얼른 손을 뻗어 빵을 집어서 다른 빵들과 함께 계산했습니다. 만약 제 눈에 이 빵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즉 계산대 옆에 이 빵이 없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물건을 구매하러 가게에 들어가서 종종 체험하실 것입니다. 전혀 살 의사가 없었음에도 눈에 띄어서 구매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자신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저렴하다면 무조건 손이 가게 될 것입니다. ‘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주 유혹에 빠지는 것들은 아예 눈에 띄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를 짓는 유혹 거리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까운 거리에 두어야 할까요?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을 가까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멀리하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용서하는 것, 남을 향해 베푸는 것 등이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하시지요.
따라서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심판과 단죄는 멀리하고, 용서와 나눔은 가까이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보기에 좋은 모습이지만,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험한 이 세상 안에서 지혜롭지 못한 모습처럼 여겨지고, 이렇게 살다 가는 사람들의 이용만 당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구한테 받는다는 것일까요? 세상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사랑의 실천을 보고서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후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은총을 떠올리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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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을 바꾸십시오>
비교적 자주 가는 대형 상점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곳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그 위치를 대략 알게 되더군요.
지난번에도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 평상시에 갔던 위치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위치에는 전혀 다른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매장에서의 제품 위치들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형 상점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제품 위치를 바꾼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연구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매장의 진열이 바뀔 때마다 7%가량의 판매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원하는 물건을 찾다가 사려고 하지 않았던 물건을 보게 되고 이런 식으로 구매하는 양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 삶 안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인의 변화를 원한다면 내 주변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어서 아무런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리정돈, 재배치만으로도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스스로의 변화 7%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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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
-기도와 회개, 사랑의 실천-
인류역사를 보면 전쟁사戰爭史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나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많은 사람이, 참으로 잔인하게 죽어갔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인류가 시작되면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전쟁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일으킨 2차대전때만 해도 무려 2천만의 아시아인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전쟁은 계속중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작금의 상태도 흡사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전쟁은 결국 무지의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뿌리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이자 악이 바로 무지입니다. 참 많이 강론 때 강조했던 무지입니다. 우리의 평생 사랑 공부의 목표도 이런 무지의 치유治癒와 퇴치退治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식 공부보다는 사람이 되는 사랑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수도자 역시 수도원에 ‘무엇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왔다고 정의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은 동시에 참 내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이런 면에서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카톡으로 주고 받은 덕담德談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고마운 분들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자연을 통한 축복인사입니다.
-“영춘화迎春化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넘 예뻐요!”
“꽃보다 자매님 마음이 더 예뻐요!”
“너무나 송구스러워요!”-
사실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요 마음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사랑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끝없는 평생 사랑 공부를 통해 참 나를 깨달아 발견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깨달음을 통해 참 나의 발견이요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믿는 이들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평생과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자비의 모델이자 목표로 주어진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공부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를 일컬어 ‘예닮의 여정’,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여정이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파스카의 예수님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요? 이어지는 구체적 처방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가장 많이 고백하는 죄들입니다. 바로 모두 무지에서 비롯한 죄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를 모르기에 판단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절대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나눕니다. 뒷담화나 남말만 안해도 완덕에 도달한 이들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알 수 있을까요? 겸손히 마음을 열고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가는 것 역시 평생과정입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가 고마운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 없이 어디서 사랑을 겸손을 섬김을 배웁니까? 어제 읽은 저명한 수도승간의 대화 내용이 생각납니다.
-“성공은 때로 부패할 수 있다.”
“그렇다. 성공은 언제나 부패한다. 너도 알다시피 공동체 삶은 그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治療劑이다.”
“나는 너의 치료제로서의 공동체라는 표현이 좋다. 공주수도생활은 너를 겸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 공동체는 나를 계속 땅바닥에 닿게 한다. 바로 겸손이다.”-
그렇습니다. 공동체의 축복이 참 큽니다. 자기도취의 환상이나 착각을 깸으로 투명한 현실을 살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만이나 허영으로 자기도 모르게 위로 오를 때 아래로 끌어내리는 공동체입니다. 또 혼자 있으면 배우지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사랑도 섬김도 겸손도 모두가 그렇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하면서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자각하면서 보고 배웁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섬김의 배움터, 사랑의 배움터, 겸손의 배움터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한 공동체적 회개의 기도입니다. 공동체적 회개의 개인기도가 공동체의 회개와 더불어 공동체는 물론 개인도 동시에 정화하고 성화하며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게 거역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바 ‘저희’라는 복수 단어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주어가 ‘우리’인 것처럼 여기서도 개인기도이자 동시에 공동체적 기도임을 봅니다. 새삼 우리가 바치는 공동체적 개인기도인 찬미와 감사, 반성과 회개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는 물론 개인에게도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흡사 항구한 ‘회개의 시스템’과도 같은 공동전례기도가 중심이 된 수도원 일과표입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회개의 습관화’와 더불어 하느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하여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 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고 우리 모두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사람, 참 자유인으로 살게 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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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받는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을 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 하고 원고 없이 하면,“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 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 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 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라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시나요?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실 자비는 미흡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회개를 일으키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를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상대를 너그럽게 받아준다면 그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간구하는 삶의 여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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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 초대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다니 9,4)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격랑의 역사 속에서 당해온 유배와 식민지 상황의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습니다. 하느님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이시지만, 그 계약을 깨뜨린 자기들은 지금 그 대가를 혹독히 치르는 중이라고 고백합니다.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 9,7.8)
누구나 자기 죄를 인식하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건강한 부끄러움은 우리를 하느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게 만들지만, 지나친 수치심과 자기 혐오는 자신을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다니 9,9)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와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 주고 다시 일으키는 힘입니다. 처음 계약을 맺을 때의 순결한 결심을 회복시켜 다시 새 피조물로, 순결한 신부로 당신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비는 창조적 힘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자비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닮기 마련이니 성자이신 당신께서 먼저 자비가 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비의 실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심판과 단죄를 그치고, 용서하며 베푸는 것이 아버지의 자비를 닮는 길이라고 구체적으로 들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권고에는 퍽 매력적인 결과가 뒤따릅니다.
심판하지 않는 이는 심판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않는 이는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한 이는 용서받을 것이고, 준 이는 후하게 되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의 발자국을 뒤따르는 길에는 절대 손해볼 일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큰 보상이 따르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이 인식이 타인을 향한 손가락질과 비판을 멈추게 하고 용서와 베풂으로 이어진다면, 감히 닮을 엄두도 못 내던 자비의 길에 성큼 들어선 것과 다름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내게로 쏟아지는 자비가 내 영혼의 문간에 서서 내 자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흘러가도록 땀 흘려 물꼬를 터 주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비의 아버지를 닮은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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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통에 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는 존재목적에 패배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드러내놓고 그 앞에서 울부짖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는 존재의 목적에 패배로 응답 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성질들을 통합하는 몫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고통에 대한 강력한 흡입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끊임없이 망각하거나 거절하는 하나의 대상물이 되고 있습니다.
-「고통의 가치」: 제물의 내적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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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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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곧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 단죄를 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먼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사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푸는 일, 그것은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고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죄인임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았음을 체험하게 되면 자신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기 전에,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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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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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쿨하게>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어라."
용서하지 못해 속을 끓이면
위가 쓰리고 아프게 되죠.
잠도 안오고 북적거리는 마음이
더 힘들게 합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고 안 좋은 기억만
골 깊이 새겨두는 약한 인간인 우리
나를 위해서~ 용서합시다.
용서 못하며 써버린 에너지가
나를 성장하게한 거름이 되어 오늘이 있으니
이제 이해하려고도 하지말고 툭 놔 버립시다.
후하게 쿨하게 복을 빌어주면 끝!!
"쿨하게 말하는 순간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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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다시
봄(春)입니다.
돌고돌아
다시 돌아가고
돌아오는
우리들 삶입니다.
큰소리 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죄도 심판도
용서도 돌고돌아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돌아옵니다.
삶이란 선물 앞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언제나
단죄가 아닌
자기성찰입니다.
나를 알아야
너와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이 앞서지 않는
올바른 실천은
단죄를 멈추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닮고 비판하면서
그 길을 똑같이
답습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금 아프게
묻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나와 너
우리들 모습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단죄와
심판이 아닌
건강한 믿음입니다.
내어주는 사랑
너그러운 자비
따뜻한 미소가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쁨의
치유제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죄가 아닌
심판이 아닌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이 오늘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보는
은총의 아픈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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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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