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이 살아온 시대 (1)
청림 남택수
우리는 ‘등잔불’ 시대를 살았다.
오일장 날에 읍내에서 사온 석유를 등잔에 부어 불을 밝혔다. 그나마 비싼 석유가 달까 보아 공부를 안 하면 일찍 끄고 잤다. 전깃불 맛을 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전봇대를 세우고 전등을 달고 전깃불이 켜지던 날, 밤이 낮이 되고 신천지가 열리는 것 같았다. 밤이 되어 밝은 전깃불 아래서 책을 보니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뒷간’ 시대를 살았다.
안채에서 십 여 미터나 떨어진 뒷간의 재래식 변소에서 볼 일을 봤다. 큰 독 위에 걸쳐놓은 나무 발판 위에 쪼그리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포에 질려 소름이 끼쳤고 여름에는 인분 냄새,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로 변소에 가는 게 가장 두려운 일중의 하나였다. 집 안에 뒷간을 두고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고 더구나 요즈음의 집들처럼 방 옆에 붙은 수세식 화장실은 상상도 못하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는 ‘삭월세’ 시대를 살았다.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하면 대부분이 돈도 없고 집도 없어 보증금 약간에 월세를 주는 단칸 셋방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한푼 두푼 아껴 모아 전세로 가고 더 늘려서 집을 사기도 했다. 오직 아끼고 절약하는 것만이 잘사는 길이었고 당연히 가정의 덕목 일호는 절약과 저축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허리띠를 졸라 맨 채, 참고 이겨내며 살았다.
우리는 ‘우물물’ 시대를 살았다.
잘 사는 집에는 마당에 우물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마을의 공동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먹고 살았다. 주로 아낙들이 항아리에 퍼서 머리에 이고 날라 부엌의 단지에 담아 놓고 마셨다. 상수도가 들어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고 더구나 집 안의 부엌에서 더운 물과 찬 물이 콸콸 쏟아진다는 것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는 ‘가마솥’ 시대를 살았다.
사람들이 때를 미는 목욕탕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도시에 나온 후의 일이었고 시골에서는 가마솥에 물을 끓여 큰 통에 퍼서 온 식구가 목욕을 했다. 그것도 일 년에 몇 번, 아마 명절이 돌아올 때 뿐 이었던 것 같다. 히말라야의 산 속 오지마을에서 고양이 세수만 하는 새카만 아이들을 보니 어릴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멍해지고 마음이 짠해 졌다.
우리는 ‘강냉이’ 시대를 살았다.
당시에는 아주 부잣집도 횐 쌀밥만 먹는 집은 거의 없었을 때였다. 보통은 보리밥이나 조밥을 먹었고 간간이 쌀을 섞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알곡이 부족하여 죽과 고구마 등으로 연명을 했다. 배는 항상 고팠고 먹는 것은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입으로 밀어 넣었다. 특히 학교에서 배급으로 주었던 미국 원조물품인 강냉이 가루는 집에 가져와 빵과 죽으로 쑤어 먹었는데 그게 별미였다.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지금도 가끔 고소한 옥수수 빵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우리는 ‘손빨래’ 시대를 살았다.
온 동네 아녀자들이 개울가에 모여 손으로 비비고 빨래 방망이로 두드려가며 옷을 빨았다. 한 겨울에도 두꺼운 얼음을 깨고 맨 손으로 빨래를 했다. 스위치만 누르면 세탁기가 자동으로 빨래를 해 준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시대였다. 옛날의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그것도 힘들다고 서로 다투는 지금의 우리 꼴을 보시면 무엇이라 하실까? 차라리 그 꼴 안 보는 게 편하다 하시겠지? 물어보는 것마저 민망해 얼굴이 뜨거워진다.
우리는 ‘검정 고무신’ 시대를 살았다.
학교를 가나, 일을 하러 가나, 놀러 가나, 검정 고무신 한 켤레가 나의 유일한 신발이었다. 운동화는 초등학교 시절, 서울로 수학여행을 갈 때 아버지가 사 주신 것이 처음이었다. 지금은 구두와 운동화를 한 사람이 여러 켤레를 가지고 있어 집집마다 헌 신발이 넘쳐 난다. 신발이 떨어져 못 신는 것이 아니라 몇 번 신으면 질려서 새 것을 사고 멀쩡한 것도 함부로 버리고 또 산다. 우리 신발장에도 안 신는 신발이 자꾸 싸여 가끔 자루 째로 버린다.
우리는 ‘까까중’ 시대를 살았다.
이발소 갈 돈이 없어 집집마다 바리깡을 사서 아버지가 까까머리로 밀어 주었는데 얼마나 쥐어뜯고 아팠는지 눈물이 핑 돌기 일쑤였다. 그게 한이 되었는지 커서는 장발이 유행을 했는데 그것도 경찰한테 잡히면 가위로 왕창 잘라버려 다시 맨 머리로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 머리를 예쁘게 자르고 형형색색 염색까지 하는 지금의 아이들을 보면 다른 나라에 온 것 같고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
우리는 ‘보자기’ 시대를 살았다.
책가방이 없어 책과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동여매고 학교를 다녔다. 그걸 메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니 도시락 반찬인 고추장이 흘러 그 귀한 책을 벌겋게 물들여 애를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애는 그 보자기조차 구하기 힘들어 짚으로 만든 망태에 책을 넣고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은 어깨에 메는 가방도 지천으로 널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킬리만자로에 가는 길에 탄자니아의 오지마을에서 보자기에 땔감을 싸서 이고 가는 어린 여자아이를 보았다. 어릴 적 내 생각이 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고무줄’ 시대를 살았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놀이 기구는 고사하고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었다. 그나마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나 사방치기, 남자아이들은 말 타기나 자치기놀이를 하였는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시대라 남자와 여자가 같이 놀지는 않았다. 어쩌다 다툼이 벌어져 여자가 약을 올리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훼방 놓고 보복하는 제일 좋은 무기가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고무줄이 제일 간편하고 이어 쓰기도 편했으나 그것 하나 구하기도 그 만큼 힘들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때는 무엇이 그리 즐겁고 신이 났는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먹을 것이 없어도, 놀 것이 없어도, 고무공 같은 작은 것 하나만 있어도 모두 만족하고 행복해 했었다. 집에 어린애가 하나 생기면 장난감이 온 방을 차지하는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불만에 차 있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풍요가 반드시 행복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자전거’ 시대를 살았다.
자전거가 있는 집은 동네에서 몇 안 되었다. 중학교까지 8km를 걸어 다녔는데 그 때에 가장 부러운 것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친구였다. 비포장에 먼지가 자욱한 그 돌밭 길을 걸어가며 내가 크면 돈을 벌어 멋진 자전거부터 한 대 사리라고 다짐을 했었다. 지금은 우리가 뛰어 놀던 그 고향 동네 안길도 모두 포장이 되었고 마당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자가용도 서 있다. 가끔은 나도 ‘여기가 우리나라 맞나? 다른 나라에 온 것 아니야.’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상전창해(桑田蒼海)가 되었는데도 감사할 줄은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시대를 살았다.
학교에 갔다 오면 농사일을 돕고, 소먹이 풀을 베러 다니고, 동생을 돌보고, 지개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날이 추워지면 먼 곳의 민둥산까지 가서 고주박이라고 하여 나무뿌리조차 캐어다 온돌방을 덥히고 살았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하고 공부를 했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분기별로 수업료를 냈는데 1기분이 360원이었다. 20여리나 되는 자갈밭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는데 담임선생님은 자기 수업시간에 수업료 못낸 애들을 교무실로 불러 내렸다. 나와 네, 다섯 명의 가난뱅이 학동들은 얼굴도 못 든 채, 며칠까지 낼지 다짐을 받고서야 풀려 나올 수 있었다.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처럼 가난이 원망 스러워 서러울 때는 없었다.
우리는 ‘주판’ 시대를 살았다.
모든 계산이 주판에 의존할 때라 주판을 잘 놓으면 급수도 따고 취직도 잘되었다. 은행이 그랬고 회사도 그랬고 관공서도 그랬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컴퓨터가 들어오고 계산기가 나오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면서 인공지능 세상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래학자 폴 케네디도 30여 년 전에 그가 쓴 “21세기의 준비”라는 책에서 로봇과 자동화를 통한 신산업의 도래를 예상했지만 반도체의 발달로 인한 컴퓨터, 핸드폰의 폭발적 지배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지금의 놀라운 정보화의 물결을 누가 예견이나 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