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부
“괴정 4거리에 차가 섰어요!”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차 몰고 교회 가는 중에 시동이 꺼지면서 멎었단다. 처음은 다급한 목소리여서 사고로 다친 건 아닌가. 충격이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서둘러 문을 박차고 뛰었다. 건널목 신호가 길기도 하다. 빨리 오지 않고 지루하게 느리다.
택시를 타고 가까이 가는데 저기 내 차가 옆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게 보인다. 아내가 꾸벅꾸벅 “미안합니다.” 인사를 하고 있다. 차들이 옆으로 피해 달리는 큰 도로를 겁도 없이 가로질러 들어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이런 사거리에는 사고 차를 도와주는 교통경찰이 이내 찾아올 법한 데 보이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켜니 꿈쩍도 안 한다. 이게 왜 이러나 갑자기 막막해진다. 지난날 차들은 키를 꼽으면 찍찍 소리가 났는데 이건 아무 기척이 없다. 그러니 더 답답하다. 어디를 만져야 할지 가마득하다. 아내는 될 듯한가. 자꾸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살핀다. 곧 될 것이라 여기고 남편의 운전 솜씨를 믿는 모양이다. 이렇게 먹통인 차를 무슨 수로 달래나. 뒤늦게 차 열쇠를 들여다 주며 이것으로 해 보란다.
교회 화단의 향나무와 열대 상록수 허튼 가지를 알맞게 자르고 멋대로 엉성히 자란 풀을 베내련다. 옛날 자주 봐 왔던 채송화와 봉숭아, 분꽃을 심으려고 텃밭의 여러 꽃모종도 갖고 간다. 의기양양하다. 이런 일 하는 게 즐거운 아내이다. 산딸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조금 따 가지고 식사 준비하는 권사들과 나눠 먹으려 차에 실어놨다. 이리저리 바삐 서두르는데 푸른 신호에도 앞차가 꾸물거려 더디기만 하다.
차선을 바꾸면서 뒤 차에 미안하다는 깜빡이 신호를 보낸다는 게 시동 켜는 버튼을 눌렀다. 그만 그 자리에서 꺼졌다. 멈춰서서는 다시 켜지지 않아 낭패스러워하고 있다. 이런 다급하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나. 내려서 교통정리를 하며 그 와중에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대개 지나는 차들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피해 가는데 한 여자가 큰소리로 “깜빡이를 넣으세요.” 소리치곤 휑하니 지난다. 참 그러고 보니 위급 신호를 보내야 했다. 어찌해야 할지 당황해서 알 수 없다. 허둥지둥하고 있다. 보험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주말이어서 통화가 안 된다는 말만 나온다. 비슷한 쉐보레 말리부 보험사여서 엉뚱한 델 걸었는가 보다. 갑자기 찾으니 어디에다가 적어놨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동안 여러 차를 몰면서 보험회사 번호가 많다. 지우지 않고 뒀더니 헷갈린다. 휴대전화 속에 하도 많은 번호여서 찾기도 힘들다. 거기다 차 번호도 생각이 안 난다. 내 차가 몇 번이지 한다. 내려서 번호판을 봐야 한다. 엉겁결에 모든 게 엉망이다. 찾기 쉽게 ‘차 보험 말리부 1544 0000, 160호 0000’로 해야겠다. 이런 숨 가쁜 순간에도 번득이며 이렇게 적어야 하는데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는 사이 어찌어찌 만지작거리다가 “크르릉” 걸린다. 아내를 태워 가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마음을 위로했다. 여태껏 살면서 길거리에서 이렇게 난처해 보기는 처음이다. 권사 은퇴한 지도 오래됐는데 젊은 사람들 하도록 두지 않고 교회 일이라면 내 할 일 제쳐놓고 나가다가 맞닥뜨린 일이다.
나이 들고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을 잊은 채 지난다. 언제나 젊고 한창인 줄로만 알고 산다. 종심을 넘겼는데도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뭣이든 움직여야 하고 없으면 찾아 나서서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너무 부지런해서 잠시를 가만 있지 못한다. “보시랑댁”이라 불렀다.
내 마음도 거슬리는데 남남이 만난 부부가 찰떡같이 달라붙어 맞을 수 있나. 젊을 땐 내가 낸 데 하면서 싫으면 참지 않고 말을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아내 하는 일이 지나면서 보니 다 맞았다. 강 고집은 저리 가라 서 주장이 세다. 맞서다가도 내가 참으면 집안이 편하다 생각에 뒤로 슬그머니 물러선다.
남 주는 걸 좋아해서 텃밭의 채소를 봉지에 담아 이곳저곳 가져간다. 산딸기를 새벽마다 따는데 그것도 나 몰래 이래저래 싸서 나눠주려 실었다. 지나간 겨울 추위에 가지가 많이 얼어 죽어 말랐다. 그래도 남은 가지에 빼곡히 주렁주렁 열렸다. 오늘도 새벽에 나가 따고 밭일도 하며 움직였다.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까지 근 한 달이나 매일 새벽마다 따는 게 일이다. 오롱조롱 헤아릴 수 없이 달려 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초롱초롱하다. 오묘한 단맛이어서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싱그러운 자연의 맛이다. 홍시는 얼려두고 복숭아와 포도, 살구 등도 통조림으로 만들어서 먹는다. 새빨간 산딸기는 갈무리가 어려워 이웃에 나눠주거나 반값에 팔아야 한다.
모기에 물리고 비 오는 날은 온통 두들겨 맞으면서 가시에 찔려 거뭇거뭇 한 게 여러 곳이다. 아내가 한 줌 입에 넣어주면 그때야 비로소 우물우물 먹는다. 따면서 먹을 줄도 모른다. 잠 많은 나는 설치고 일찍 나오는 일이 어설프다. 이제 한숨 지나 숙지막해지니 텃밭 채소 가꾸고 딸기 땄던 고된 일이 좋았다.
아내와 함께 딴 시간이 즐거웠다. 싫증을 내고 안 하려면 모든 게 뒤틀린다. 돕겠다 맘먹으니 이리 편하다. 늙어서 뭐 다툴 일이 있겠나. 젊을 땐 철없는 남편에 짓눌려 살다가 늘그막엔 자유로워야 하잖나. 간섭하려 들면 말썽이 된다. 힘들었지만 주든 말든 내버려 둬야 한다. 속이 떨떠름해도 모른 척해야 한다.
그까짓 것 얼마 되겠나. 가족을 위하는 커다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온통 밤낮으로 무엇을 해 먹일까 골몰하는 아내에게 늘 감사해야 한다. 어디 부러지게 아픈 데 없이 사는 것도 보살피고 안녕을 챙겨주어서이다.
안전한 길가에 세워선 운전대를 맡기며 “교회까지 조심조심 갔다 일 보고 오세요.” 물 가장자리에 아기 세워놓은 듯 물 밀 듯 밀려오는 차량 사이로 어정어정 들어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낭패를 당할 때가 있어요
평생 해로 하시는 모습 롤 모델입니다
그저께 나무 딸기 가져오신다고 밤 운전
애 많이 잡수어 셨죠 어떻게 나 죄송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할 말 잊었습니다
저녁 먹고 바람 쐬었습니다.
밀양이 가깝고 도로가 좋아 쉽게 갔습니다.
택배가 안 돼 얼굴 보고 했으니 더 좋았습니다.
어릴 때, 밭에 딸기를 많이 심으셔서, 수확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하룻밤만 자고나면 딸기가 온통 빨갛게 익어버려서, 어린마음에 아주아주 지겨웠던 기억.ㅠ
지금 산딸기 따시는 쌤께서도 아마 그 심정이시지 않을까?싶네요.
지루하고 힘들었던 시간도 잠깐 이었던 것 같은데....지금은 그 시절이 너무 그립고..그럽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매일 새벽에 땄습니다.
이제 끝나가고 있어 내년에 드리겠습니다.
주소 알려주세요.
샘 사시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습니다.
독일은 이제 막 산딸기가 익기 시작했습니다.
제 밭에는 쑥~~ 잘 올라오던 새 순을 사슴이 몽땅 먹어 버려서,
삐죽삐죽 곁순이 다시 올라오는 중입니다.
더위에 건강 잘 살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