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 대한 짧은 기억
강길용
오늘도 날씨는 무척이나 더웠다. 잔잔한 하늘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하지만 빗방울만
위협을 하다가 만다. 그리고는 오래도록 침묵이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의 잎새들은 여전히
미동도 하질 않는다.
가시버시들은 아이들과 함께 어느 슈퍼의 파라솔 아래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마시며 한
가로이 오후의 한때를 보낸다. 얼핏 보이는 어머니 모습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렇게
화장을 하고 파라솔 아래 앉아서 아이들과 다정한 한 때를 보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단지 시골의 시장에서 풋과일이나 아이스박스에 들어 있는 '아이스 케키'라고 하는 얼
음과자를 받아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달콤한 사탕이나 요즘 나오는 햄버거, 그리고 바나나도 어머니가 사 주신 것을 먹어
본적이 없다. 그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의 삶이었다. 친구들이 우산을 쓰고 다닐 때 나는 비
를 맞으며 달려야 했다. 그랬기에 더욱 어머니가 사주시는 얼음과자의 의미가 무척이나 크
게 남아있다.
그런데도 오늘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는 가시버시 가운데 아주머니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린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어머니를 꿈꾸어 왔고, 시골의 풀물들은 푸르스
름한 손가락이 아닌 피아노 건반 위를 매끄럽게 달리는 손가락을 그려 왔기 때문에 그런지
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나 어린 나의 가슴이나 슬픈 빛깔의 노래였다.
파라솔이 무엇인지를 알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거기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
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을 해 왔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대
하여 반가움이나 그리움의 뜻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일 하나가 나타났다.
내가 알던 어느 아주머니는 아주 멋을 잘 내었다. 햇살의 강렬함을 가리기 위하여 쓰는 검
은 색안경을 쓰고 얼굴에 뽀얀 화장을 한 얼굴로 그 집 앞을 지나가는 나에게 가끔씩 미소
를 던져 주던 아주머니였다. 당시 나의 어머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
다. 그녀가 나에게 왜 웃음을 지었는지는 오늘까지도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모습임에는 틀
림없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린 느낌이지만, 그 아주머니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는 것은 한참 뒤에 얼굴에 든 멍을 보고 알았다.
물론 멍이 들었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 멍이 남편에게 맞아서 들었다는 소문이 파
다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언젠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길거리에서 마구 맞
는 것을 보았다.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동안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나의 어머니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 아주머니가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
린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한동안 그녀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궁금해지기도 하여 가끔 담 아래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면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올려다보곤 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또 그렇게 맞았고 멍을 감추기 위해서 시커먼 안경
을 썼다.
왜 그녀는 남편에게 그렇게 맞으면서도 또 다시 잘못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 당
시 나로서는 그 이유를 몰라 그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곤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맞으며 산다는 것과 나의 어머니가 하루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들에서 김을 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며 나를 반기던 모습이 항상 비교가
되었다. 어머니는 항상 맑은 웃음을 간직하셨고 아버지와 큰소리 치며 싸우는 모습을 한 번
도 보질 못했다.
그리고 나에게나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따뜻한 눈길로 아껴 주었다. 가끔 내가 돈을 달라고
졸라대면 그늘진 모습을 보이시곤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마련을 해주었다. 그래도 나는 어
떤 사람은 부자이고 나는 왜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 되었을 가에 대한 의문을 항상 가졌었
다. 그럴 때는 언제나 멍이 들어 있는 부잣집 아주머니가 기억난다. 나의 어머니에 대한 기
억도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늘어난 주름살과 병원에서 간경화로 투병을 4년이나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지하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돌아가시기 전의 얼굴은
기억난다. 심한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그저 "아야, 아야, 아야"라고 신음 소리만 내시던
모습을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눈물이 흐르질 않았다. 어떤 슬픔도 없었다. 단지 아직도 투병중이
란 것만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며 운명의 시간을 맞이하였다. 나의 형제 자매들은 모두 통곡을 하였지
만 나는 울지도 못했다.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생각 때문이다. 그런 혼란스런 가운데서도
부잣집 아주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비교해 보았다. 여전히 어머니의 순박한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안타까움이 있었다.
당신이 먹고 싶은 것은 뒤로하고 언제나 나와 8남매나 되는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던
안타까움, 애가 탔을 가슴, 그래서 운명의 시간을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나의 삶에 무척이나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아픔이란 것을 알게 하였고, 진실한 삶이 중요하지만,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너무나 아름
다운 삶이란 것을 인정하지만, 자신을 모두 희생하며 이루어야 하는 눈물과 애환의 건더기
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나의 어머니이다.
단지 고향인 강원도 영월의 시골 땅에 자리한 집 안방에 덩그런히 걸려 있는 초상화 한 장
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타 들어간 애간장의 모습은 하나도 볼 수 없다. 그냥 그려진 얼
굴만이 곱게 자리하고 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이유를 모른다. 지금 내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고 홀로 사는 31살
의 남자가 노트북의 작은 자판을 무겁게 두들기며 지나간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언
젠가는 나의 아이들의 어머니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녀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을
가를 생각해 본다. 여전히 난 자신이 없다.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으므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애써 믿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