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님
오늘 자매들 정모에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걱정하고 왔지요?
남자들은 자유로운데 여자들은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할거에요.
어떤 이슬람신자인 구두쇠 영감이 있었어요. 이슬람신자는 규율을 잘 지키지요.
그런데 부자가 되고 싶은 영감은 율법은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돈만 벌었대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니 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허망하죠.
애비가 아직 숨도 안 끊어졌는데 자식들은 재산 싸움에 빠졌고.
철이 들었죠. ‘내가 죽어서 천국엔 가야 되겠다.’하여 안하던 기도도 하고 기부도 하고.
‘마지막으로 정말 신이 보시기에 나를 천국에 보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메카로 순례를 결정합니다. 2년 정도를 걷기만하는 그야말로 고행이죠.
가족들에게도 그곳에서 죽을 거니 찾지 말라하고, 재산정리하고 몸둥아리 하나와 옷 한 벌만 갖고 구두쇠 영감은
보속하는 의미로 메카를 향해 순례를 떠났어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때 되면 기도 잊지 않고, 라마단 시절이 오면 칼같이 단식을 하면서 메카를 향해서 계속해서 순례를…
몇 달이 지나니 떠날 때 입었던 옷은 누더기가 되어 거지라고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바그다드의 시장을 지나갈 때 겨울이었죠.
사막은 항상 더운 것 같지만 해 떨어지면 영하 15~20도 까지 가죠.
추위를 피하려 바그다드 시장을 들어갔는데 거지라고 놀림만 받고...
너무 추워서 동사하게 생겼는데 추워 떨고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길고양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면서 동사를 면했지요.
메카를 향해서 계속 갔죠. 도착 후 성직자한테 복을 받고 일주일 후에 숨을 거뒀어요.
죽어서 그 영혼이 가는 길이 천국 방향이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문지기한테 천국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지만, 자선을 베풀어서도 기도를 많이 해서도 아니라했어요.
“그 이유는 바그다드에서 추워 벌벌 떠는 고양이 끌어안아 살려주었기 때문이다.”
“저는 추워서 고양이를 안은 것 뿐 인데요?”
“네가 고양이를 끌어안을 때만큼은 천국을 의식하지 않고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의식을 가지고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기대할 때가 많죠.
기도하면서도 그 결과물을 상상하고, 열심히 희생하며 나를 도와줄 의인을 바라고 있고..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비움의 은총’을 얘기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걱정하고 괴로워 할 때가 많습니다.
일부러 걱정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냉정히 보면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가 참 많아요.
하느님이 하셔야 될 일을 자기가 하고 있는 거지요.
오늘 복음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을 염려해도 소용이 없음을 몇 가지 이론을 들어 설명하고 계시죠.
첫 번째,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지만 우리의 생명을 무한정 혹은 원하는 만큼 연장시킬 수는 없죠..
내 목숨을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그 목숨 이어가는 것에 필요한 것도 나보다도 훨씬 더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
그러한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첫 가르침이죠.
두 번째로는 새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라고 얘기하고 계시죠.
당장 굶어 죽어도 먹을 걱정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 창조주의 섭리를 배워야 된다.
세 번째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이론은 염려는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염려해도 우리의 키를 한 치도 늘리지 못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 참 많아요.
그런 처지를 해결하려고 염려하고 애를 쓰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번째로는 꽃을 들어서 얘기하고 있어요.
하느님이 꽃을 어떻게 자라게 하시고 키우시고 피우시는지를 보며 쓸데없는 걱정 말라고 강조하죠.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불신한다는 뜻과 동의어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이 있다면 하느님을 불신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걱정과 근심을 없앨까?
첫 번째는 하느님 나라와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에 마음을 써야 됩니다.
근심 중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걱정은 물러간다는 뜻일 겁니다.
내 자신과 내가 진 짐을 하느님께 맡기면 염려는 없어진다는 뜻이겠죠.
두 번째 방법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오늘의 생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내일 걱정까지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지금 내가 하는 걱정은 남의 걱정을 하는 것이고 어리석음입니다.
그날그날에 충실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의식주에 대한 걱정에 매몰되어 있지만 미래의 것까지 당겨서 걱정하지 맙시다.
그렇죠? 뭐 하러 미리 댕겨서 걱정합니까? 그 때 부딪혀 보는 거죠.
미리 당기는 것은 오직 하나! 감사하는 겁니다.
제 믿음의 기초이고 여러분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며 거듭거듭 강조했던 말, 뭔지 아시죠?
첫 번째,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을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은 나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심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세 가지로 요약돼요.
첫 번째가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탕자의 얘기 아시죠? 집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가 그 이후에 다시 나가지 않았을까?
환대는 잠시였을 것이고, 형과 주변의 차가운 눈초리, 과거의 달콤했던 유혹으로 편치 않았을 거예요.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음.
내가 죄의식에 헤매지 않는 것은 아버지만큼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귀가 ‘너는 구제 받을 수 없는 인간이야. 어떻게 그 일을 하고 하느님을 찾아?’ 하더라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다가올 앞으로의 어려움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기가 하느님처럼 해결하려고 하면서 근심과 걱정을 하지요.
내가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끝까지 하느님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은 기도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은 나의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예비라는 것은 희랍어로 야훼이레입니다.
야훼이레라는 말의 뜻은 조용한 일만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야훼이레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이 나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우리에게는 좋은 건데 하느님 보시기에는 독일 수도 있어요.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하느님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다는 뜻이겠죠.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그 회교신자가 천국 간 이유는 자선을 해서도, 단식을 해서도, 순례를 해서도 아니었어요.
추워서 죽어가는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살려준 것.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추워서 안아준 것인데. 문지기가 뭐라고 했죠?
그 순간만큼은 네가 조건이 없었다. 천국 갈려고 하는 목적도 없었다. 순수했다 이거에요.
순수하다는 것은 피드백,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것, 비움의 은총이라는 거죠.
살아가면서 많은 인간관계가 있지만, 왜 인간관계가 흐트러지겠어요?
줄 때 뭔가 무의식 속에는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죠.
자기 나름대로는 기대치를 많이 낮추었는데도 그 기대치가 안 채워져요.
아예 안 올 때가 많아요. 그럴 때 서운함의 씨앗이 뿌려지죠.
그런데 그 씨앗은 물 안 주고 비료 안 줘도 얼마나 잘 자라는지 몰라요.
서운함의 씨앗에서 미움의 싹이 나오고, 그 싹에서 분노의 줄기가 올라오고 마지막 무관심의 열매가 맺어지죠.
무관심은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영적 살인이라고 부릅니다.
무관심의 단계에 가면 상대방을 인격체로 보는 게 아니죠.
영어로 디스(this), 댓(that)이라고 부르죠. 사람은 디스(this), 댓(that)이라 하지 않고 유(you)라고 부르죠.
무관심의 단계에 가면 that과 같은 거죠.
무관심을 만들어내는 서운함의 씨앗이 싹트기 전에 죽이는 방법은 애초 줄 때 바라지 말고 주는 것에 행복해하는 겁니다.
그러면 싸울 일도 없죠.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비우는 것. 주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이에요.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화내는 것은 결국 성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 반드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내 앞길 선하게 예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세 가지의 기준으로 살아가 여러분이 삶이 훤하게 열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