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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신판
Pan
크누트 함순 Knut Hamsun(1859~1952)
「노르웨이 중남부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 때부터 상점 점원, 제화공 도제, 사무 보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여덟 살 때 짧은 소설<수수께끼의 남자>를 발표했다. 이후로도 도로공사 인부로 일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으나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1882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서 1년 동안 외판원과 농장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어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몇 년 뒤 다시 미국으로 가지만 또다시 정착에 실패했다. 1890년 생활고와 싸우는 작가로서의 경험이 반영된 장편소설<굷주림>을 발표해 커다란 호평을 받고 자국을 넘어 유럽 문단 전체에 이름을 알렸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후에도대도시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당시 노르웨이와 유럽 문단에 지배적이던 사회적 리얼리즘 경향의 소설에서 벗어나 인간 의식의 우연성과 섬세한 내면의 흐름을 간결하고도 서정적인 문체로 표현한 함순만의 독특한 소설 미학은 이후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막심 고리기,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20세기 문학적 거장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20년 <흙의 혜택>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르웨이를 점령한 나치에 동조한 일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반역 행위’로 정신병원에 구금되기도 했다. 당시 나이 86세였다. 평생을 방랑자로서 문명사회와 동떨어져 독자적인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온 함순은 1952년 93세를 일기로 시골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 토마스 글란 중위의 수기
(1)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노를란의 그 끝없는 여름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여기 앉아서 그 여름날을 생각하고, 내가 살았던 오두막을 생각하고, 오두막 뒤에 펼쳐져 있던 숲을 생각하면서 그때의 일들을 적는 데 열중하고 있다.
오래전에 아문 총상 때문에 이따금 왼발에 류머티즘이 도지는 것을 빼면 나는 아무런 불만이 없는 사람이다.
여름은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지나가버렸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 아니 내가 그 일을 꿈속에서 본 것은 2년 전인 1855년이었다. 이제 나는 그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 일을 기록하려고 한다.
바닷가에는 하연 칠을 한 커다란 집이 한 채 있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한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제는 그녀를 끊임없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살았던 오두막에서는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 암벽과 후미, 조각난 바다, 푸르스름한 산봉우리 따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두막 뒤에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날마다 이솝을 데리고 구릉지를 산책하곤 했는데, 땅은 아직 눈과 진창으로 반쯤 덮혀 있었지만, 나는 날마다 그곳을 산책할 수 있기를 바라곤 했다. 내 길동무는 이솝뿐이었다. 지금은 코라가 있지만 그때는 이솝이 있었다. 나는 나중에 이솝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2)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비 오는 날에도 작은 즐거움에 사로잡혀 남모를 행복감에 잠길 때가 많을 것이다. 거기에 서서 똑바로 앞을 바라보다가 이따금 낮은 소리로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떤 창문에 끼워진 깨끗한 유리창, 유리창을 비추는 한 줄기 햇빛, 작은 시내,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나는 어떤 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나는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런데 소나기를 만나는 바람에 잠시 비를 피하려고 열린 보트 창고로 들어갔다. 나는 콧노래를 조금 불렀지만, 즐겁게 열심히 부른 것은 아니고 그저 심심풀이로 불렀을 뿐이다. 이솝이 함께 있었는데, 녀석에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귀를 세웠다. 나도 콧노래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목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우연한 일이지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두 남자와 한 소녀가 보트 창고로 불쑥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웃고 있었다. “빨리 와! 여기서 잠시 비를 피할 수 있겠어.” 나는 일어났다. 한 남자는 가슴 판에 덧대 인 희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흠뻑 젖어 축 처져 있었다. 이 젖은 셔츠 가슴 판에는 다이아몬드 장식 핀이 꽂혀 있었다. 그는 제법 멋있어 보이는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 당신이군! 그가 나를 알아보고 말했다. 방앗간에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지 뭐요. 지독한 날씨군. 그런데 중위, 시릴룬엔 언제 올 거요? 그는 옆에 있는 작달만한 남자를 소개했다. 검은 턱수염을 기른 그 남자는 교회 근처에 사는 의사였다.
소녀는 베일을 코 위로 약간 들어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이솝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의 딸인 에드바르다였다.
마크 씨는 내 사냥에 대해 물었다. 주로 무엇을 쏩니까? ~~~그들이 떠날 때 나는 의사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3)
오두막 앞에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아주 높은 회색 바위였다. 그 모양은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섬들 너머에는 납빛 바다가 누워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 있을 때는 그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곤 했다. ~~~저 멀리 암초 하나가 외따로 떠 있었다. 파도가 그 암초에 부딪치면 미친 고둥처럼 벌떡 일어섰다.
(4)
그 무렵에는 사냥감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5)
더 쓸까? 아니, 조금만 쓰자.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2년 전에 봄이 어떻게 왔는지, 시골 풍경이 어땠는지를 이야기 하는 것은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니까.
봄은 나한테도 온 게 분명했다. 이따금 내 피가 발소리처럼 탕탕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이솝이 벌떡 일어나더니 짧게 한 번 짖었다. 누군가가 오두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모자를 벗었을 때, 벌써 문간에서 에드바르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바르다와 의사가 약속한 대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더없이 소녀다운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어제도 왔었는데, 안 계시더군요.” ~~~우리는 잡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사냥감이 모두 금렵기일 때는 뭘 먹고 살아요? 이드바르다가 불쑥 물었다. 몰고기를 먹고 살지요. 먹을 음식은 항상 있답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셔도 돼요. 작년에는 영국인이 이 오두막을 썼는데, 그 사람은 자주 우리 집으로 식사를 하러 왔어요.
(6)
한 남자가 나더러 사냥을 그만 두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틀 동안 후미에서 낚시를 했는데, 내가 구릉지에서 총 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오두막에 남아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사냥을 하러 나갔다. 숲은 푸르름을 더해가고 있었다. 흙과 나무의 냄새가 향기로웠다. 골파의 초록빛 잎이 얼어붙은 이끼를 뚫고 벌써 삐죽삐죽 돋아나고 있었다. 내 머리는 생각으로 가득 찼고. 나는 여러 번 앉아서 쉬었다.
사흘 동안 나는 어제 만난 낚시꾼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밤 집에 갈 때는 지난번에 의사와 에드바르다를 만난 숲 가장자리에서 누군가와 마주치게 될 거야. 어쩌면 의사와 에드바르다가 또 그곳을 산책할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왜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을 생각했을까? 나는 뇌조 두 마리를 쏘아 잡고, 그 중 한 마리를 당장 요리했다. 그런 다음 이솝을 묶었다.
나는 마른 땅바닥에 누워서 뇌조를 먹었다. 사방은 조용했고, 살며시 한숨을 쉬는 듯한 바람 소리와 여기저기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가벼운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꽃가루를 가져가 순결한 암술머리를 채우며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숲 전체가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초록빛 자벌레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따라 걸어갔다. 결코 쉴 수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쉬지 않고 걸어갔다. 자벌레는 눈이 있지만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이따금 몸을 꼿꼿이 세우고, 허공에서 몸을 의지할 무언가를 이리저리 더듬어 찾는다. 그것은 나뭇가지를 한 땀씩 천천히 바느질하여 솔기를 꿰매는 초록빛 실처럼 보인다. 아마 저녁때쯤이면 그 자벌레는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7)
나는 저녁 내내 마크 씨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내가 술잔을 엎질렀다. 나는 참담한 기분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내가 술잔을 엎질렀네요! 내가 말했다. 에드바르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건 아주 명백하군요. 그들은 모두 웃으면서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에드바르다의 웃음에 대한 막연한 분노가 내 마음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은 평범해져 있었고 전혀 예쁘지도 않았다.
(8)
며칠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내 친구는 숲과 고독뿐이었다. ~~~봄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들판에서 벌꽃과 톱풀을 발견했고, 검은 방울새와 되새가 도착했다. 나는 모든 새를 알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짤랑짤랑 소리를 내곤 했다. 디데릭과 이셀린이(함순이 지어낸 신화적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함순의 여러 작품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또한 크고 작은 역할로 나온다.)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태양은 바다로 가라앉자마자, 술을 마시러 잠깐 내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원기를 되찾고 불그레한 얼굴로 다시 떠올랐다.
숲이 온통 바스락거렸다. 짐승들은 코를 킁킁거리고, 새들은 서로를 부르고, 그들의 신호가 대기를 가득 채웠다.
(9)
나는 에드바르다와 대화를 나누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지금 몇 시예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해를 쳐다보고 대답했다.
다섯 시쯤.
해를 보고 시간을 그렇게 정확히 알 수 잇어요?
그럼 알 수 있지.
침묵.
하지만 해를 볼 수 없으면, 그때는 어떻게 시간을 알죠?
그때는 다른 것들을 보고 판단하지. 만조와 간조가 있어. 정해진 시간에 내려앉는 풀도 있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변하기도 하지. 다른 새들이 조용할 때, 어떤 새들은 지저귀기 시작해. 그리고 오후에 입을 닫는 꽃을 보거나, 때로는 밝은 초록색이었다가 때로는 짙은 초록색을 띠는 나뭇잎을 보고도 시간을 알 수 있지. 게다가 나에게는 육감이 있어.
알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가 정말로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지, 왜 사냥을 하러 가는지, 왜 이런 일들을 하는지를 물었다. 결국 이솝은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게 내버려두고, 식량으로 꼭 필요한 것만 사냥하나요?
그녀는 얼굴을 붉혔고 겸손해 보였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녀가 엿들었고,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감정이 움직였다. 그녀가 너무 쓸쓸해 보였다. 그녀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 때문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내 가슴을 울렸다.
나는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총을 쏘는 거야. 오늘은 멧닭이 한 마리 필요했고, 그래서 두 마리는 쏘지 않았어. 나머지 한 마리는 내일 쏠 작정이야.
비가 오는군 내가 말했다.
네 비가 오네요. 그녀도 말하고 떠났다.
나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았다. 내가 서둘러 오두막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혼자 멀어져갔다. 몇 분이 지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에드바르다였다. 달려오느라 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깜빡 잊었어요.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건조장으로 소풍 가는 거 말이에요. 대구 말리는 바위로 올러 가기로 했잖아요. 의사 선생님이 내일 올 건데, 당신은 시간이 있나요? 내일? 좋아. 물론 시간이야 있지. 깜빡 잊었어요. 그녀는 다시 말하고 방긋 웃었다. 그녀가 떠나자 나는 그녀의 날씬한 다리를 바라보았다. 다리는 위쪽까지 흠뻑 젖어 잇었다. 그녀의 구두는 오래 신어서 낡아빠진 것이었다.
(10)
어느 날 하루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 여름이 온 날이었다.
나는 오후에 부두로 나갔다. 바닷물은 잔잔했다. 우리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물고기를 말리느라 바쁜 섬에서 나는 웃음소리와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행복한 오후였다. 행복한 오후가 아니었나? 음식과 포두주가 몇 바구니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보트 두 척에 나누어 타고 있었다.
보트에서 나는 이 젊은이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주지사와 시골 의상의 딸들이 있었고, 여자 가정교사 두어 명. 목사관에서 온 여자들이 있었다.
에드바르다는 어제 입었던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잇었다. 다른 드레스가 없거나, 있는데도 일부러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구두도 어제 신었던 낡은 구두였다.
우리는 섬에 상륙했다. 물고기를 말리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보냈다. 마크 씨는 일꾼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데이지와 미나리아재비를 발견하여 단춧구멍에 꽃았고, 초롱꽃을 찾아낸 사람들도 있었다.
중위님은 아주 재미난 오두막을 갖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예 나의 보금자리지요. 내가 진심으로 바라던 집이랍니다.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모두 그녀를 보았다. 에드바르다였다. 그녀는 나에게 곧장 다가와 몇마디 하고는 내 목에 달려든다.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더니 내 입술에 몇 번이고 키스를 한다. 그녀는 입을 맞출 때마다 뭐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나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수가 없었다. 내 심장은 멎어버렸고, 나는 그저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보앗을 뿐이다. 그녀가 나를 놓아주었을 때. 그녀의 작은 가슴은 격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에드바르다? 내가 물었다. 내 혈관에서 피가 고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별일 아니에요.
(11)
밤중에 나는 이솝이 자리에서 일어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잠을 자면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침 그때 사냥에 대한 Ran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솝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내 꿈과 어우러져 잠에서 깨지 않았다. 밤 두시쯤 오두막 밖으로 나가보니 풀밭에 발자국이 나 있었다. 누군가가 내 오두막에 와서 창문 하나를 들여다보고 이어서 다른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자국은 다시 길을 따라 사라졌다.
누군가가 어젯밤에 내 오두막 밖에 와 있었어. 내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풀밭에 난 발자국을 보았지.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녀는 길에서 내 손을 잡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너였겠지? 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요. 그녀는 나에게 바싹 다가붙으면서 대답했다. 저였어요. 당신을 깨운 건 아니죠? 나는 최대한 조용히 걸었어요. 네, 그건 나였어요. 당신 가까이 있고 싶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12)
나는 말마다 매일같이 그녀를 만났다. ~~~그것은 2년 전이었다.
(13)
여름밤과 잔잔한 바다. 그리고 끝없이 조용한 숲. 울음소리도, 길을 오가는 발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내 가슴은 진한 포도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14)
기쁨은 사람을 도취시킨다. 내가 총을 쏘면, 잊을 수 없는 메아리가 험한 바위산에서 바위산으로 응답하고, 바다위를 떠돌다가 잠들지 못하는 어느 키잡이의 귀에 울려 퍼진다.
(17)
마루 한복판에 서서 나는 총의 공이치기를 당기고 총구를 내 발등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은 내 발을 관통하고 마루를 통과한다. 이솝이 놀라서 짧게 짖는다. 그 직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찾아온 사람은 의사였다. ~~~~지팡이는 찾았지만, 이드바르다는 잠자리에 들었더군요. 아니 그건 뭐요? 맙소사 피를 흘리고 있군!
(19)
오두막 밖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피가 머리로 올라온다. 에드바르다의 목소리다. 글란! 글란이 아프다면서요?
파출부가 문밖에서 대답한다.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그 글란, 글란 하는 목소리가 내 골수에 사무쳤다. 그녀는 내 이름을 두 번 말했다.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바라보았다.
(20)
마크 씨의 어선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들의 뱃노래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잇나? 바다 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산이 하나 있다. 나는 두 가지 기도를 한다. 하나는 내 개를 위해,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우리는 산으로 들어간다. 우리 뒤에서 문이 꽝 닫힌다. 나는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22)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대장장이의 보트를 빌려,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낚시를 하러 갔다. 에드바르다는 남작이 저녁에 바다에서 돌아오면 항상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물방앗간에서 한 번 보았다. 어느 날 저녁에 그들은 함께 내 오두막 앞을 지나갔다. 나는 창가에서 물러나,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아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어깨만 으쓱했을 뿐이다. 어느 날 저녁에는 길에서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남작이 먼저 나한테 인사하게 한 다음, 무례하게 굴려고 손가락 두 개를 내 모자에 슬쩍 대기만 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치면서 무관심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이솝을 묶어놓은 다음, 낚시 도구와 총을 들고 부두로 내려갔다. 평소와는 달리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부두에 도착하자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에게 물었다. 우리 집 쪽으로 가실 겁니까? 아니요, 마크 씨가 나한테 일거리를 주었는데, 그 일을 하려면 자정까지는 계속 바쁠겁니다. 나는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확물을 들고 출발하여, 대장장이의 집 쪽으로 돌아갔다. 에바는 혼자 집에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너를 그리워했어.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를 보고 나는 감동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돌아서려다 망설이고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한 시간쯤 뒤에 나는 에바에게 작별 키스를 하고 떠난다. 문간에서 나는 마크 씨를 만난다.
(23)
오후다. 나는 집에 간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그때 무언가 놀라운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에드바르다가 내 앞길에 서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비를 맞으며 서 있었던 모양이다. 흠뻑 젖어 있지만 미소를 짓는다. 다음에는 뭐지? 나는 분노에 사로잡혀 당장 속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걸어가면서 성난 손가락으로 총을 움켜잡는다. 안녕! 그녀가 외친다. 나는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인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그녀는 내 익살스러운 말에 당황한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소심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오늘 산에 올라가셨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젖었을 게 분명해요. 여기 머릿수건이 있어요. 이걸 두르세요. 나는 없어도 돼요. 아니, 나를 모르는 체하는군요. 내가 머릿수건을 받지 않으니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젓는다. 머릿수건? 나는 분노와 놀라움으로 빈정대면서 대답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 재킷이 있어. 이걸 빌려줄까? 나는 없어도 돼. 아무한테나 빌려줄 거니까. 이걸 받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나는 생선장수 아줌마한테도 기꺼이 빌려줄 테니까.
이튿날 아침 내가 밖으로 나가보니 에드바르다가 오두막 앞에 서 있었다. ~~~글란, 오늘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 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알려고 가만히 서 잇었다. 당신이 대장장이 집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느날 밤에. 그때 그 집에는 에바 혼자 잇엇고요. 나는 당황하여 대꾸했다. 그건 누구한테 들었지? 나는 염탐군이 아니에요. 어젯밤에 들었어요.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아마 당신은 에바의 보살핌을 받으면 되겠죠. 에바가 유부녀인 건 정말 안 됏어요. 에바가? 유부녀라고? 그럼요. 남편이 누군데. 당신도 아시잖아요? 에바는 대장장이의 아내에요. 딸이 아니었어? 딸이 아니라 마누라에요.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요? ~~~이젠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요!
(24)
가엾어라, 에바, 너는 결혼했잖아?
몰랐어요?
그래, 몰랏어
그녀는 말없이 내 손을 쥐었다.
가엾어라, 우린 이제 어떡하지?
나뭇잎이 더 노랗게 변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잇다. 하늘에는 더 많은 별들이 나타났고, 이제부터 달은 금에 잠긴 은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춥지는 않다. 숲 속에는 서늘한 고요와 분주한 생활이 있을 뿐이다. 모든 나무가 거기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무 열매가 익었다. 이윽고 8월 22일이 되어, 사흘 동안 계속되는 ‘철의 밤(※8월 하순, 첫 서리가 내리는 사흘 동안의 밤)’이 왔다.
(25)
첫 번째 철의 밤
해는 아홉 시에 진다. 희미한 어둠이 땅 위에 내려앉는다. 별이 몇 개 보인다. 두 시간 뒤에는 달빛이 희미하게 빛난다.
인간과 짐승과 새들이여. 숲 속. 깊은 숲 속에서의 고독한 밤을 위해 건배. 어둠을 위해 건배. 나무들 사이에서 들리는 신의 속삭임을 위해 건배. 내 귀에 들리는 감미롭고 단조로운 침묵의 화음을 위해 건배. 초록빛 나뭇잎과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위해 건배. 내 귀에 들리는 생명의 소리를 위해 건배. 풀에 대고 킁킁거리는 코. 땅을 냄새 맡고 다니는 개를 위해 건배. 어둠 속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턱을 땅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린 채 먹잇감을 노려보며 참새한테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는 살쾡이를 위해 건배. 대지를 뒤덮은 자비로운 정적을 위해 건배. 별들과 초승달을 위해 건배. 이것저것을 위해 건배.......
나는 일어나서 귀를 기울인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다시 앉는다. 나는 외로운 밤에 감사한다. 신들에게,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어둠과 바다의 포효에 감사한다! 나는 내 삶과, 내 숨결에, 오늘 밤 살아 있다는 은총에 감사한다. 마음속으로 감사한다! 동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서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들어라! 영원한 신이다! 내 귀에서 속삭이는 고요는 자연의 끓는 피, 나와 세계에 스며든 신이다. 나는 내가 피운 불빛 속에서 빛나는 거미줄을 본다. 오로라가 북쪽 하늘에 미끄러지듯 올라오는 동안, 항구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보트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내 불멸의 영혼을 걸고 진심으로 감사한다!
조용하다. 솔방울 하나가 쿵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진다. 솔방울이 떨어졌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달은 하늘에 높이 걸려 있다. 반쯤 탄 땔나무 위에서 불꽃이 너울거리며 꺼지려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철의 밤
이솝이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인다. 이솝은 발소리를 듣는다. 에바가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나는 오늘 밤 생각할 게 많고, 너무 슬퍼. 내가 말한다. 그녀는 동정심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나는 세 가지를 사랑해. 언젠가 꾸었던 사랑의 꿈을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고, 지구의 이 부분을 사랑해. 제일 사랑하는 게 뭐죠? 꿈. 또 다시 조용하다. 이솝은 에바를 안다. 이솝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에바를 쳐다본다. 나는 중얼거린다.
집에 가 에바.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너야. 내가 어떻게 꿈을 사랑할 수 있겠어? 그건 농담이었을 뿐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하지만 이젠 집에 가. 내일 너한테 갈게. 나는 네것이라는 걸 잊지마. 그래, 그걸 잊지마. 잘 가. 에바는 집으로 간다.
세 번째 철의 밤
몹시 긴장된 밤이다. 서리가 조금이라도 내려주면 좋겠는데! 서리 대신, 낮에 햇볕이 쨍쨍 내리쬔 뒤의 열기가 고인 채 남아 있다. 밤은 미적지근한 늪 같다. 나는 불을 붙인다.
(26)
가을이다. 여름은 갔다.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아, 여름은 얼마나 빨리 가버렸는가! 이젠 날씨가 춥다. 나는 사냥을 하고 낚시를 하고 숲에서 노래를 부른다.
짙은 안개가 바다에서 밀려와 모든 것을 어둠으로 뒤덮어버리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 무슨 일이 일어났다. 나는 교구의 숲 속에 들어갔다가 의사의 집 앞으로 나왔다. 그 집에는 손님들이 있었다. 내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젊은 여자들, 춤추는 젊은이들, 파티에 열중한 풋내기들. 마차 한 대가 다가오더니 정원 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 안에는 에드바르다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안녕!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의사가 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눈에 띄게 핼쑥해 보였다. 안개가 그녀의 얼굴에 잿빛으로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내일 밤 작은 파티를 열거예요. 내주에 떠나는 남작님의 송별 파티죠. 나는 여러분을 초대하는 일을 맡았어요. 춤도 출 거예요. 내일 밤, 잊지 마세요. 모두 고개 숙여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는 다시 나에게 말했다. 꼭 오세요, 막판에 가서 핑계 쪽지나 보내지 마시고요.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직후, 그녀는 마차를 몰고 떠났다. 나는 이 예기치 않은 배려에 감동하여, 그것을 혼자 음미하려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나에게 얼마나 친절했는가! 그 보답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내 손이 무기력해졌다. 달콤한 냉기가 내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휴식은 한순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방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잇다. 모든 게 또 속ㅇ미수일 뿐이야! 다른 사람들이 초대될 때 내가 우연히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초대받지 못했을거야. 게다가 그녀는 파티에 오지 말라는 분명한 암시까지 주었어. 핑계를 적은 쪽지를 보내라고.......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개가 골짜기와 산 위에 두껍게 내려앉았다. 끈적끈적한 서리가 내 옷에 달라붙어,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내 얼굴은 차갑고 축축했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잠자고 잇는 안개를 오르내리게 했다.
그때 문슨 일이 일어났다. 30분 뒤에 나는 안개를 뚫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듣는다. 몇 분 뒤에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아차린다. 나는 시릴룬의 가장 큰 건물 근처에 있었다. 내 나침반이 내가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곳으로 나를 잘못 안내한 것일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의사의 목소리. 그 직후 나는 안으로 안내된다. 아아, 어쩌면 내 총신의 영향으로 나침반이 고장 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올해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잇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도 운명이었을 것이다.
(27)
나는 저녁 내내 이 파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씁쓸한 느낌을 받았다. ~~~~에드바르다는 나를 별로 환영해주지도 않았다.
글란 주위님은 바깥 계단에서 하녀들과 몰래 만나면서 즐기고 있네요. 에드바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문간에 서 있었다. 몇 사람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소리 내어 웃었지만, 얼굴은 아주 창백했다.
나는 남작에게 가서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싶은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의 귀에다 침을 뱉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나는 그가 에드바르다한테 그 일을 일러바쳤고 에드바르다가 화가 난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작별 인사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시릴룬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28)
남작은 떠날 것이다. 나는 총을 장전하고 산에 가서, 남작과 에드바르다에게 경의를 표하여 총을 쏠 것이다. 절벽에 깊은 구멍을 내고, 남작과 에드바르다에게 경의를 표하여 산 하나를 날려 보낼 것이다. 그러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 남작이 탄 배가 지나갈 때 바다에 풍덩 뛰어들 것이다. 나는 산의 갈라진 틈, 전에 바위들이 굴러 떨어지면서 바다까지 길을 만들어놓은 곳을 알고 있다. 저 밑에는 보트 상륙장이 있다. 정 두 개 나는 대장장이에게 말한다. 그러면 대장장이는 정 두 개를 날카롭게 깍는다.... 에바는 마크씨의 말을 타고 방앗간과 부두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곡식과 밀가루 부대를 나르는, 남자가 할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그녀를 만난다. 생기 있는 얼굴이 멋져 보인다. 아아, 그녀의 미소는 얼마나 부드럽게 빛나는가. 나는 저녁마다 그녀를 만났다.
“너는 세상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여. 내 사랑 에바.”
“나를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군요! 나는 배우지 못한 여자지만, 당신에게는 진실할 거예요. 그 때문에 죽어야 한다고 해도 당신한테 진실할 거예요. 마크 씨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엄해지고 있지만, 나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요. 마크 씨는 마구 호통을 치고 고함을 지르지만,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아요. 마크 씨는 화가 나서 내 팔을 움켜잡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답니다. 나한테는 딱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어요.” “그게 뭐지” “마크 씨가 당신을 위협하고 있어요. 마크 씨는 나한테 말해요. ‘아하, 너는 그 중위한테 홀딱 반했구나!’ 나는 대답하죠. ‘그래요, 나는 그 사람 거예요.’ 그러면 마크 씨는 말해요. ‘기다려, 내가 이제 곧 그놈을 없애버릴 테니까!’ 마크 씨는 어제 그렇게 말했어요.”
(29)
나는 산 위에서 바위에다 정으로 구멍을 뚫고 있다. 수정처럼 맑은 가울 공기가 나를 감싸고 있다. 정이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율동적으로 울려 퍼진다. 이솝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이따금 만족감이 솟아나와 내 가슴속을 흐른다. 내가 여기 쓸쓸한 산 속에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철새들이 떠났다 - 즐겁게 여행하고 돌아오렴! 이제 북방쇠박새들은 다른 박새들과 이따금 보이는 바위종다리들과 함께 바위로 뒤덮인 산비탈과 덤불숲에서 외롭게 살고 잇다. 삐삐삐삐!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변했다. 자작나무는 회색 바위들을 배경으로 붉은 피를 흘리고, 히스 들판에는 초롱꽃과 분홍바늘꽃이 여기저기 돋아나 바람에 흔들리며 부드럽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쉿! 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서는 물수리가 목을 쭉 뻗은 채 맴돌면서 산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다.
저녁이 온다 나는 정과 망치를 바위 밑에 치우고 휴식을 취한다. 모든 것이 잠든다. 달이 북쪽 하늘에 미끄러져 올라오고, 절벽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던진다. 보름달이다. 달은 빛나는 섬처럼 보이기도 하고, 놋쇠로 만든 둥근 물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뭔지 알 수 없는 그 신비로운 물체 주위를 돌면서 이게 뭘까 하고 궁금해한다. 이솝이 일어나서 불안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뭘 원하니, 이솝? 나는 슬픔에 지쳤어, 슬픔을 잊고 싶어. 슬픔을 달래고 싶어. 이솝! 명령하겠는데, 가만히 엎드려 잇어.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겠다. 에바가 물었어. 이따금 나를 생각하세요? 내가 대답했지. 그럼 항상 생각하지. 에바가 다시 물었어. 나를 생각하는 게 당신한테 기쁨을 주나요? 나는 대답했지. 완전한 기쁨을 주지. 기쁨밖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 그러면 에바가 말했어. 당신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하고 있어요. 그러면 나는 대답했지. 그래, 백발이 되고 있어. 하지만 에바는 물었어. 당신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때문인가요? 그 질문에 나는 대답했지. 어쩌면 그럴지도. 마지막으로 에바가 말했어. 그러면 당신은 나만 생각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이솝, 가만히 엎드려 있어. 다른 이야기를 해줄게....
하지만 이솝은 계속 선 채 흥분하여 아래쪽 골짜기로 코를 향하고 킁킁거리다가 낑낑거리며 내 옷을 잡아당긴다. 내가 마침내 일어나서 이솝을 따라가자....... 내 오두막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30)
불은 마크씨가 지른 것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나는 잠자리를 부탁하러 시릴룬에 가지 않고 이틀 밤을 노숙했다. ~~~잠은 산에서 월귤나무 히스를 한 수레 가져다가 깔고 그 위에서 잤다. 나는 다시 위기에서 벗어나 여유를 되찿았다.
에드바르다가 내 재난에 대해 들었다면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시릴룬의 방을 한 칸 내주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아드바르다가 감동했나? 에드바르다가 관대한가? 나는 아무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이제 잠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르바르다의 제안을 무시하는 것은 나에게 자긍심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길에서 남작과 함께 있는 그녀를 만났다.
나는 폭파용 구멍을 뚫고 있는 곳으로 와서 놀라운 일과 마주쳤다. 누군가가 거기에 온 것을 알아차리고, 자갈길에 난 발자국을 조사했다. 그리고 마크 씨의 길고 뾰족한 구두 발자국을 알아보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 근처를 냄새 맡고 다닐까?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의혹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어떤 해를 끼치게 될지 전혀 모른 채 정을 망치로 때리기 시작했다.
(31)
우편선이 도착하여 나에게 군복을 갖다 주었다. 우편선은 남작과 다양한 조가비와 해초가 든 그의 상자를 모두 싣고 떠날 예정이었다. 우편선은 지금 부두에서 청어와 간유를 싣고 있었다. 우편선은 저녁에 떠날 것이다.
나는 총을 움켜잡고 총신 두 개에 화약을 충분히 채웠다. 그 일이 끝나자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산에 올라가서 폭파용 구멍에도 화약을 채웠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배를 기다리려고 드러누웠다.
뱃머리의 끝부분이 작은 섬 뒤에서 나타나자마자 나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재빨리 물러섰다. 1분이 지난다. 갑자기 꽝! 소리가 나고, 바위 파편들이 공중으로 치솟고, 산이 뒤흔들리고, 바위가 굴러간다. 메아리가 주위의 절벽에서 되울린다. 나는 총을 움켜잡고 총신 하나를 발사한다. 메아리가 수없이 울린다. 잠시 후 나는 두 번 번째 총신도 발사한다. 나의 예포는 공기를 진동시켰고, 메아리는 굉음을 넓은 세계로 내던졌다. 주위의 산들이 일치단결하여 떠나는 배에게 힘찬 외침으로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몇 분이 지난다. 공기가 가라앉고 메아리가 절벽 사이에서 잠잠해지고, 대지가 다시 조용해진다. 배는 황혼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정과 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무릎을 후들거리며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산사태가 남긴 흙먼지를 지켜보면서 지름길로 내려갔다.
보트 상륙장으로 내려왔을 때 내가 마주친 광경은 격렬하기 이를 데 없는 동요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그곳에는 보트가 굴러 떨어진 바위에 짓눌려 짜부라져 있고, 에바가 그 옆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굴러 떨어진 바윗돌에 맞아 박살나 있었다. 옆구리와 배는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에바는 즉사했던 것이다.
(32)
에바는 하얗게 칠한 마크 씨의 집배에 실려 교회로 옮겨졌다. 나는 육로로 가서 무덤 옆에 나타났다.
(34)
그러던 어느 날 밤 눈이 내렸다. 그리고 오두막이 썰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을은 지났고,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첫눈은 아직 햇볕 때문에 녹아버려서 다시 땅바닥이 드러났지만 밤에는 추워서 물이 꽁꽁 얼었다. 그리고 풀과 곤충들은 모두 죽었다.
(35)
처음으로 나는 군복을 입고 시릴문으로 내려갔다. 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르바르다가 나에게 달려와 모든 사람 앞에서 나를 끌어안았던 그 첫날의 일을 기억해냈다.
나는 마당에서 마크 씨를 만났다. 그의 얼굴은 더 잿빛이 되었고 눈은 전보다 더 퀭해 보였다. 떠날 건가? 하긴 요즘에는 별로 유쾌하게 지내지 못했겠지?
에드바르다는 거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녀는 내 군복 차림을 보고 잠깐 놀란 듯했다. 새처럼 곁눈질로 나를 슬쩍 보고는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당장 일어났다. 그녀가 내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떠난다고요? 지금요? 배가 오는 대로. 나는 그녀의 손을,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어리석은 기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나는 외쳤다. 에드바르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잘 있어. 에드바르다. 안녕히 가세요.
그러자 그녀는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떠나니까, 당신의 기념품을 갖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솝을 나에게 주실래요? ~~~좋아. 그럼 내일 이솝을 데려다 주지.
나는 이솝을 불러서 토닥여주고, 이솝과 머리를 맞대고 총을 움켜잡았다. 이솝은 우리가 사냥을 가는 줄 알고 기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또다시 나는 이솝과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총구를 이솝의 목에 눌러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나는 사람을 불러서 이솝의 시체를 에드바르다에게 보냈다.
(36)
우편선은 오후에 떠날 예정이었다. 나는 부두로 내려갔다. 내 짐은 이미 배에 실려 잇었다. ~~~그때 의사가 에드바르다와 함께 다가왔다. 나는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에드바르다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개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작달막한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차갑고 견실한 남자였다. 그는 계획을 세우고 끝까지 거기에 따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그는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절대로 얼굴 근육을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배에 올라탔다. 에드바르다는 여전히 부두에 서 있었다. 내가 배에 탄 뒤 의사가 작별 인사를 외쳤다. 나는 해안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에드바르다가 돌아서서, 의사를 훨씬 뒤에 남겨둔 채 서둘러 부두를 떠났다. 그게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슬픔의 물결이 내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37)
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노를란에서 보낸 그 여름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때 나는 종종 시간을 헤아렸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날들은 이제 더 이상 덧없이 흐르려 하지 않는다.
나는 군대를 떠났고, 왕처럼 자유롭다. ~~~~에드바르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코라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전에는 이솝이었지만, 지금은 코라가 저기 엎드려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우체부가 편지 한 통을 건네 준다. 편지에는 보관이 새겨져 있다. 나는 누가 보낸 편지인지 알아차린다. 당장 알아차린다. ~~~편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봉투 안에는 초록빛 깃털 두 개만 들어 잇을 뿐이다. 얼어붙을 듯한 공포가 나의 온몸을 달린다. ~~~당신의 깃털이에요. 선생님! 당신의 깃털, 선생님....!
■ 글란의 죽음
-1861년 기록
글란 가족은 오래전에 실종된 토마스 글란 중위를 찾기 위해 아직도 신문에 광고를 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r서이다.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고 있다.
1859년 가을에 만났을 때, 그는 서른 두 살로 나와 동갑이었다. ~~~우리는 강을 오가는 배에서 처음 만났는데, 알고 보니 같은 곳으로 사냥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우리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우리 행선지의 지명을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글란 가족은 그를 찾는 광고를 중단해도 된다. 그는 우리가 간 곳, 내가 지명을 밝히기를 삼가고 있는 그곳에 죽어 있기 때문이다.
깜박 잊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주 매력적으로 생겼지만 결코 완벽한 남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왼발에 오래된 총상이 있었고, 이 상처는 날씨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류머티즘처럼 콕콕 쑤신다고 했다.
[Review]
“나는 산 위에서 바위에다 정으로 구멍을 뚫고 있다.” (본문).
“글란”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에드바르다”에 대한 증오심에, 자기 발등에 총을 쏘고, 그녀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남작이 떠나갈 때, 그가 탄 배가 풍랑으로 침몰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는 산으로 가서 절벽 바위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화약을 넣었다. 총을 쏘고 절벽의 바위가 바다에 무너지고, 떨어진 바위가 납작이 탄 배를 박살해 버리려고 마음먹었다.
“남작은 떠날 것이다. 나는 총을 장전하고 산에 가서, 남작과 에드바르다에게 경의를 표하여 총을 쏠 것이다. 절벽에 깊은 구멍을 내고, 남작과 에드바르다에게 경의를 표하여 산 하나를 날려 보낼 것이다. 그러면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 남작이 탄 배가 지나갈 때 바다에 풍덩 뛰어들 것이다.”(본문)
노르웨이 작가인 크누트 함순( Knut Hamsun 1859~1952)은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거치면서 정규 교육받지 못하였지만, 자연과 인간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로 헤르만 헤세, 헤밍웨이, 카프카 등 당대의 문학적 거장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의 글은 섬세하다. 바닷가 숲 오두막에 떠돌이 같은 사내가 혼자 사냥하고 또 낚시하며 한가한 날을 보내고 있다. 달을 사랑하거나, 소나무 가지가 흔들리거나 풀잎이 가볍게 살랑거리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민감하게 흔들리고 생각에 잠긴다. 외로움에 눈물이 솟구칠 때도 있다. ‘이셀린’(함순이 지어낸 신화적 인물. 이 인물들은 함순의 여러 작품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등장한다.)의 환상을 보고, 사방팔방의 나무를 향해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으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마을에 영향력 있는 ‘마크’ 씨의 딸이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했을 때 ‘에드바르다’는 ‘글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냥감이 모두 금렵기일 때는 뭘 먹고 살아요? 에드바르다가 불쑥 물었다. 물고기를 먹고 살지요. 먹을 음식은 항상 있답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셔도 돼요. 작년에는 영국인이 이 오두막을 썼는데, 그 사람은 자주 우리 집으로 식사를 하러 왔어요.”(본문)
두 사람은 극적으로 가까워지며 파티에 초대받고, 깊은 사랑에 빠진다. 여기서 작가는 ‘글란’이 세상일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약간의 얼치기로 묘사한다. 그는 파티에서 술잔을 엎지르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된다. 오직 그에게 익숙한 것은 자연 속에서 총을 쏘며 낚시하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이다. 이에 비해 ‘에드바르다’는 세상일에 익숙하다. 용모에 신경을 쓰고, 자신의 상대를 자연에서 찾기보다는 마음을 열고 맡길 수 있는 인간에게서 찾는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관념과 공상이 만들어낸 세계에 갇혀 있는 공통점이 있지만 대상은 다르다. 이런 사귐에서 사랑은 늘 그녀 쪽에서 적극적이었다. 남자의 이런 모호한 태도는 급기야 오해를 불러오고 두 사람은 회복할 수 없는 결별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며 증오로 변했고. 남자는 다른 여인과 사귀고, 여자는 자기 집에 찾아온 다른 손님인 남작과 의사와의 관계를 어렴풋하게 드러낸다.
‘글란’의 새로운 여인 ‘에바’는 불쌍한 여인이다. 그는 앳된 나이에 대장장이의 아내가 되어 ‘에드바르다’의 아버지가 주는 일감을 받아서 살아간다. ‘글란’은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에드바르다’ 에게 있었다. 두 사람이 냉랭하게 지내는 동안에도 그녀가 작은 친절을 보이면 혹시나 하고 마음이 설레였다. ‘에드바르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글란 앞에서는 쌀쌀맞은 것 같았지만 관심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에드바르다’가 마음을 준 것으로 생각했던 남작이 배를 타고 떠나던 날 ‘글란’은 절벽의 바위가 떨어져 그의 배가 파선되기를 바랐지만, 그 바위는 불쌍한 ‘에바’가 일하고 있던 보트에 떨어지고, 그녀는 처참하게 죽었고, 남작의 배는 먼 바다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을 체념한 ‘글란’은 마을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에드바르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러 갔다. 그때의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에드바르다는 거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녀는 내 군복 차림을 보고 잠깐 놀란 듯했다. 새처럼 곁눈질로 나를 슬쩍 보고는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당장 일어났다. 그녀가 내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떠난다고요? 지금요? 배가 오는 대로. 나는 그녀의 손을,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어리석은 기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나는 외쳤다. 에드바르다! 그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잘 있어. 에드바르다. 안녕히 가세요.”(본문)
무엇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일까? 서로를 잊지 못하면서도 증오하는 것일까? 이 책의 해설은 제목인 ‘Pan’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목축의 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 ‘글란’은 ‘Pan’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인물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작가가 처음부터 구상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런 암시는 없다. ‘Pan’이라는 제목이 의아하지만 꼭 목축의 신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번역자는 이 책을 ”목신Pan‘ 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이 책의 제목에는 “토마스 글란 중위의 수기”의 앞에 붙여진 접두사“Pan"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나름대로 들었다.
저자는 이 책을 그의 작품 활동 초창기인 1894년에 썼다. 당시 그의 이름은 문단에 그리 유명하지 않았지만, 훗날, 1920년 <흙의 혜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자 새롭게 부상하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의 불우했던 시절에 미국에 두 번이나 정착하려고 했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은 그 무렵에 쓰인 것으로, 에필로그에서 '글란'이란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덧붙이면서 그는 자신과 함께 인도에서 사냥터로 가던 중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제멋대로이며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글란'은 자기혐오에 빠져서 스스로 자학하는 인물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끝내, 자신(작가인 함순)을 겁쟁이라고 모욕하는 바람에 그를 총으로 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쩌면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글란’이라는 인물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글란’은 마지막, ‘에드바르다’와의 이별에서 기억할 수 있도록 그녀가 요구한 글란의 개 “이솝”을 주고 가라고 했지만, 그는 잔혹하게 개를 총으로 쏘고 그 시체를 우편으로 그녀에게 보내 주는 잔혹함을 보여 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에드바르다는 부두에 나와 그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
“에드바르다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개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본문)
사랑이 서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독자는 이 마지막 결별에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섬뜩한 인간의 증오심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가 의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토리의 전개가 호기심의 연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작가만이 지닌 자연에 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고 마음에 담아 둘 아름다운 구절들이 들어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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