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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가 선교지이다. / 生活の現場は宣教地である。 (2024년 3월 10일 주일예배)
본문; 다니엘 12:1-3
단 12:1 "그 때에 너의 백성을 지키는 위대한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생긴 뒤로 그 때까지 없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그 책에 기록된 너의 백성은 모두 피하게 될 것이다. 2 그리고 땅 속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깨어날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수치와 함께 영원히 모욕을 받을 것이다. 3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
1. その時、大天使長ミカエルが立つ。彼はお前の民の子らを守護する。その時まで、苦難が続く/国が始まって以来、かつてなかったほどの苦難が。しかし、その時には救われるであろう/お前の民、あの書に記された人々は。2. 多くの者が地の塵の中の眠りから目覚める。ある者は永遠の生命に入り/ある者は永久に続く恥と憎悪の的となる。3. 目覚めた人々は大空の光のように輝き/多くの者の救いとなった人々は/とこしえに星と輝く。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전도할 때 왜 영적인 저항이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대상자가 우리의 전도를 꺼리고 거부하는 것은 바로 마귀가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위해서 먼저 전도대상자를 위해 사랑과 축복의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귀가 속삭이는 것에 반대의 정신으로 살며 정결함과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문화와 가치관 속에 포함된 영적인 어두움의 흐름을 대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할 때 발생하는 영적인 저항에 담대하고도 여유로운 태도로 맞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말세에 심판이 있을 것을 다니엘의 입을 통해 계시하시고, 그 심판에서 멸망할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축복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진정 풍복한 축복의 열매를 거두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전도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면서 반복하는 내용은 전도라는 것은 마케팅이나 영업사원의 활동이 아니라, 고백이요 영생을 선물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복음이란 곧 나를 사람답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소식이라고 고백하였는데요. 세상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되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고 나서 이렇게 선포하셨지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사람은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축복과 사랑의 약속에 대해서 거절하고 불신하므로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도 주시고, 사람(선지자)들도 세우셨습니다. 끝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모든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믿는 자들은 이제 멸망의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래서, 요 3:16은 구원의 복음을 가장 간략하게 증언하는 구절이 되는 것인데요. 복중의 복은 곧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여기에는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의 구별이 없는데요. 사람들은 물질과 명예와 권세 등의 복을 받는 것만 축복이라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소유의 문제, 관계의 문제, 그리고 권력의 문제는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존재의 본질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인데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20:7)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선언할 때 첫번째로 고백하느 구절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거룩함을 스스로 확인하는 시간이며, 거룩의 은혜를 회복을 위한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인데요. 저는 이렇게 거룩함을 회복하고, 경건한 일상을 사는 것은 곧 인간존재로서 영적인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바꾸어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예의를 갖추어 주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은혜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 수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마음껏 재물을 사용하고, 명예를 얻고, 권세를 누리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축복이며, 또한 이런 축복의 자리로 가족과 이웃과 친구, 지인들을 초대하고, 소개하는 것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인 것이지요.
꼭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 인생에 단 한 번만 만나고 헤어질 사람에게도 그 복음의 삶에 초대하고 소개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축복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런 전도자의 사명으로 일상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삶의 목적을 예수님께 두는 것입니다. 둘째, 전도자가 누릴 축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자리로 파송받은 선교사라는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인생을 사는 목적을 예수님께 두어야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생존과 관련된 것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사는 것을 봅니다. 의식주에 관한 것이 살아가는 의지가 되는 것이지요. 좋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넉넉한 옷을 가질 수 있는 것을 삶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태도인 것이지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대체로 자신의 의식주가 어떠한 수준에 있는 지를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것이지요.
게다가 생존이 어느 정도 확보가 되면 사람들은 보다 편리하고 윤택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생존과 생활이 윤택하고 풍요로우면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스스로 묻고 답을 해 보시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5:10)
그렇다면 우리의 헛된 인생은 무엇으로 참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 때입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1-2)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신약의 시대에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로 얼마나 봉사를 열심히 하느냐, 얼마나 많은 소유로 헌신하였느냐, 얼마나 큰 실력과 재능을 갖추었느냐.. 그 자체를 주목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봉사와 헌신과 재능과 실력에 주목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바울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로 결단한 이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주문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곧 예수님의 관심사에 자신도 관심을 갖는 사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희생이 되셨습니다. 믿는 자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순종이지요. 그 안에는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는 죄인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주님의 관심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것이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예수님께 삶의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이 곧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복음을 믿고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증인의 삶을 자원하여 기쁨으로 나서서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둘째, 전도자가 누리는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자의 축복은 세상에서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나 성공과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결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멋진 말로 격려하고 칭찬하지요. 물론 노력을 통해 실력을 갖추고, 자신의 재능을 통해 삶의 보람과 유익함, 그리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노력의 결과일 뿐, 축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이 약속하시는 축복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받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다니엘서에는 전도자가 받을 축복을 명확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막 16:20)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3)
특히 다니엘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기도 한데요. 전도자에게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역사가 표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께서 함께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때는 바로 전도할 때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님께서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관여하고 계심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표적을 나타내 주십니다. 그것이 기적처럼 나타날 수도 있고, 매우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요. 전도자는 분명히 성령님의 터치를 체감하고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도자는 마지막 날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지요.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7)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심판주로서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 19:11)
그 때 그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거듭한 의인으로 판결을 받을 자들은 완벽한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복음을 듣고도 끝까지 거부하여 주님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은 영원 형벌에 처하여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로 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며, 수많은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복음을 믿어 거듭나지 않으면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멸망과 함께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고생스럽고,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 삶의 자리에 있더라도 복음을 믿고 거듭난 자의 거룩하고 경건한 일상을 소중히 지키는 일상을 사는 사람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궁창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지혜로운 존재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고 기억하시는 삶은 비록 인생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없어도, 그 자체로 이미 알차고 풍성한 삶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에서 채울 것을 고민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가 곧 주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파송하신 파송지임을 믿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여러분이 꼭 기억하며 매일 고백할 수 있기를 또한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사는 이름의 사명을 맡기시지는 않았지만, 분명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복음을 전할 전도자이며 선교사의 책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것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에 남겼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지상과제라는 제목이 붙은 구절입니다. 특별히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을 받는 이들에게 이 구절은 복음의 약속 다음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요. 우리도 엄연히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해 활동하는 종교인이 아닌 제자인 것을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한 사람으로 보여지지만, 우리의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 목적도, 우리가 살림을 사는 목적도,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그 어떤 사소한 일들의 목적과 이유는 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이 명령에 순종하며, 목적의식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즉 가정, 직장, 학교, 이웃 등등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접하는 모든 장소와 시간과 관계가 곧 선교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상 가운데 세미한 음성으로라도 “전도하라”는 감동이 느껴진다면 여러분 순종하시길 권면합니다. 전도하라는 음성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믿어도 됩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하면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적인 축복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축복과 혜택까지도 얻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당장에 나타나는 열매가 아니라도 주님은 반드시 차고 넘치도록 상급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상에서 전도자로서 순종하여 받는 놀라운 상급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하는 사명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작용도 없고, 완벽한 복을 베풀어 주시려고 허락하신 분명한 기회입니다. 또한 자기 힘으로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여 겨우 얻게되는 풍족함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과 풍요함을 주시는 통로이며 복된 자리입니다. 이런 복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자에게 주실 축복과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삶의 자리가 어쩌다 살게 된 운명이나 팔자, 혹은 자기 선택의 결과가 아닌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주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파송하신 특별한 선교지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가 곧 영원히 주님과 동행하며, 거리낌없이 마음껏 누리게 될 인생의 축복을 받는 가장 분명한 통로인 것이 믿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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