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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단번에 얻어지는가? 장구한 세월의 율법순종으로 얻어지는가?
( 하토브 본문글)
단번에 주신 구원
님께서 주장하시는 단번구원에 대한 성경구절을 제시해주시겠습니까?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흠정역 히브리서 10장 12~14절)』
잘보았습니다^^
그외에 또 다른 구절들은 없으신지요? 있는대로 다 제시해주시면 합니다
그래야 종합해서 설명을 드릴수 있을것 같군요...요절만 적어주셔도 됩니다...
유다서 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구원은 장구한 세월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거듭남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임하실 때 몇달동안에 걸쳐서 혹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번개처럼 순간에 들어오십니다!
안믿어집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경험들을 고백하는 파스칼, 요한 웨슬레, 스펄젼 등의 간증도 들어보시고,
제가 쓴 < 나의 거듭남> 도 읽어보시고, 님의 구원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보시기 바랍니다.
(광남님 답변)
하토브님의 글 잘 읽고 깊이 묵상했습니다...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위의 주제로는 단번에 구원에 이르렀다는 주장으로는 아주 빈약하다고봅니다...그런 면에서 제가 단번에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글들을 한번 평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흠정역 히브리서 10장 12~14절)』
『단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이부분을 언급한 히브리서는 모세의 보이는 성막과 보이지않는 성전을 비교하면서 완전함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것입니다. 즉 모형과 그림자되는 구약의 보이는 성전에서의 제사과정을 통하여 우리시대에 보이지않는 영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그림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것이지요..그런면에서 예수님의 단 한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다는 의미는 제물로서의 역할인데.. 구약의 동물들은 죄를 지을때마다 반복하여서 새롭게 계속 드려야하는데(동물제사는 단회적인 효과밖에 없는 한시적인)...반면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는... 죄에 대하여 영원한 속죄효과가 있으므로 옛 언약안에서처럼 매번 드려지는 것이 아닌...즉 우리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즉각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중보가 매번마다 적용되어지는 영원함(단번의 제사가 계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영원함)을 말하는것이지요
이를 알기쉽게 성전제사와 마음성전제사를 구분해본다면?
1, 구약의 제사는 죄를 지을때마다 동물을 끌고가서 율법에 따라 짐승을 잡고 태우고...하는 제사를 반복하여 드립니다(나중에는 백성들이 진절머리를 내지요^^---말라기시대)
2, 신약의 새 언약하에서는 마음 안에 성전을 지어주십니다(고전3:16) 그리고 그 마음성전안에서 옛 언약의 죄 사함의 제사가 동일하게 이루어지는데(율법을 기준으로 죄를 지으면) 그 속죄제물이 옛 언약에서는 동물이었는데(불완전—그래서 매번 반복하여) 이후로 마음성전안에서는 우리들의 죄를(마음 판에 기록된 율법을 따라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 주님이 드리신 십자가때 흘려주신 보혈의 효능이 지속되어서 우리의 고백된 죄가 사해진다는 의미입니다...그리고 또 이후로도 죄를 깨닫고 입으로 시인하면 또 주님의 십자가제사의 효능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요일1:9)...그런 면에서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3, 이런 면에서 하토브님이 생각하시고 주장하시는 것처럼 단번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이 이루어졌다면? 우리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은 완전한 상태가 되어야하는데 그렇게 못하다는 것이지요...그래서 마음성전을 지어주시고 그렇게 지은 죄를 처리할 수 있게하신 것입니다...이같은 의미는 광야백성들이 말씀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데 죄를 지은상태로는 하나님을 알현할수 없으니..그 죄를 씻어내고 하나님을 만나면서 교제하듯이...예수를 영접한 새 언약의 백성들도 이런 여정가운데서 마음으로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는 그 죄를 씻어내는 과정이 필요한데...그렇게 해주신 것이 바로 마음안에 지어주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고전3:16)...이런 과정을 세월이 지나가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다보면 어느덧 신앙이 성장하면서 웬만한 죄를 다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이 같은 과정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하는데...그 끝자락이 바로 영혼구원을 이루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벧전1:9)
(하토브 답변)
위의 본문글은 다른 글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주제를 이어가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2-14절의 글은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를 예수님이 단번에 이루셨다는 뜻이고 그것을 단번에 깨달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증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광남님 글)
유다서 3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구속사적으로 볼 때..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도(창18;19)를 말하는것입니다. 이 같이 여호와의 도가 구속사의 계보를 거쳐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믿는백성들의 마음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도로 완성된 것이지요.(참고로 제 글중에 여호와의 도에서 믿음의 도까지..라는 글이 있는데 한번 참고해보시지요)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도는 시내산에서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규례라는 성문화된 문서로 이어지고...그 성문법을 두돌판에 기록하여 시내산언약이 됩니다...그리고 그 법을 순종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친백성이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품고(보이는 성전의 두돌판으로) 나가는 이스라엘백성들앞에는 수많은 난관이 닥치면서 ...넘어지고...배교하고...멸망당하면서 피의투쟁사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그 법은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한 백성들의 마음판으로 이전되어서 믿음의 도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유다는 이렇게 우리 마음에 기록된 믿음의 법, 즉 여호와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고 한것입니다. 이 싸움은 구약백성들의 여정처럼 치열하게 전개될 것 입니다. 이는 구약백성들은 보이는 육신의 싸움이었지만 예수안에서 영의 세계를 향하여 나가는 새 언약백성들은 영혼을 담보로하여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싸움을 다니엘은 주전 약 550년전에 때와 법을 변개하면서 등장하는 작은뿔세력을 경고하였습니다(단7:25). 즉 진리인 하나님의 계명(새언약)을 바꾸거나 폐하여서 온전한 믿음의 도를 따라가지못하게 한다는것입니다. 유다는 바로 이런 점을 내다보면서 믿음의 도(마음으로 순종하는 새언약의 진리)를 위하여 싸우라고 한 것 이지요. 이런면에서 하토브님이 유3절을 단번의 구원으로 인용하신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란 것을 말씀드립니다.
영적전쟁을 이끌어가시는 우리 대장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록의 일곱교회를 권면하고 용기를 주실때마다...꼭 하신 말씀이 있지요...이기는자는!!!!이라는 말씀입니다...만약에 하토브님이 인용하신것처럼 예수를 영접한 그 순간에 예수의 보혈에 의하여 단번에 구원이 완성된 것 이라면? 무엇 때문에 사도들이 거룩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주를 보지못한다....또한 멸망에 이른다는 경고를 하셨을까요?(이런 멸망경고구절들은 너무 많아서 생략합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전한 복음의 비밀은? 바울사도가 겪은 성전예배와 율법을 기초로하여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어진 영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의 말씀을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전혀 기초가 안된 이방인들에게 전하는데 얼마나 많은 애로가 있었을까요? 주어진 단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내적인 깨닮음의 비밀들을 전하는데...바울의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곡해하여서 멸망으로 간다고 경고합니다.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저는 이전에는 베드로사도의 이 말씀이 무슨말인지 전혀 몰랐는데...바울이나 베드로사도가 경험한 안식일, 절기, 월삭(골2:16—예수님의 교훈)들을 순종하면서 깨닫게 되었지요. 즉 바울이나 베드로사도가 말한 중심점이 무엇인지 같은 그림을 보면서 알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영, 육간에 몸에 익숙해지는, 즉 말씀과 우리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느꼈지요...그런이후로는 누구든지 성경과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을 보면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끼게되더군요....그러면서 주님께서 왜 그렇게 언급하셨는지도 알게되구요^^
주님의 언급입니다...하토브님도 유의해서 묵상하시고 순종하시면서 뒤따라 오시는 분들에게 모법을 보이시면서(고전11;1) 주를 향하여 전진하시기를 권면합니다
(하토브 답변)
광남님: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구속사적으로 볼 때..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도(창18;19)를 말하는것입니다.
유다서 3절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광남님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으로 둔갑시키고 계십니다!
이것을 둔갑술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긴 설명은 동일한 수준에서 둔갑시키는 공교한 설명으로서 별 답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광남님)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 하토브 답변)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들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와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하셨습니까? 광남님은 율법을 안지키면 구원 못받는다고 하시는데,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기는 가는데 그곳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네요?
제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광남님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예수님만 믿기로 하였습니다!
( 광남님 글)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9절과 20절은 반복하여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히브리적 교수법이지요...그러므로 같은 내용인데..19절을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시는데...20절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순종하는 율법 그 자체를 지적하신것이 아니라...이들이 외식하면서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면서 속사람으로는 더러운 모습으로 그냥 남아있는것을 지적하신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속사람의 거듭남을 통하여...주님영접이후로는 겉으로의 율법순종뿐만이 아닌 속사람의 율법순종(그리스도의 율법)을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이 육신을 벗은후에 주님앞에 설때는 그 율법의 순종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면서 영적으로도 흠과 티가없는 거룩한 신부의 모습으로 서있게 될것입니다. 저는 그때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할렐루야~~
( 하토브 답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교황 할애비라도! 목사 할아버님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천국 못갑니다!
광남님은 언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셨습니까?
저는 1973년 9월 5일의 참혹한 죽음을 앞두고 사흘전 9월 2일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이 저와 함께 죽어주신 것을 알았습니다(갈 2:20) 우리의 모든 의는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성령께서 율법의 의 ( 디카이오마: 요구) 를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알고 믿으며 그분께 순종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요?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며 오직 주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대속의 사역과 죄사함의 은혜를 믿음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엡 2:8-9, 롬 3:20-25)
그런 다음에 성화를 이루어가는 것은 다음의 문제이며, 그 성화를 성경은 종종 2차적 구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해왔듯이, 내가 임재하여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더욱 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더불어 너희 스스로의 구원을 실현해내라 ( 하토브역)
이 말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이 아직 구원을 못얻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구원을 놓치거나 잃어버려서 나중에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2차적 구원 곧 성화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2차적 구원이나 3차적 구원 곧 영혼이 주 하나님께 거두어지는 구원으로서 부활이나 휴거를 의미하는 것과 거듭남이라는 1차적 구원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혼동하면 모든 신학이 뒤엉켜질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였으면 아무리 안식일을 백만번 지켜도 천국에 못갑니다!
마태 5장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넘치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넘치는 의를 언제부터 갖게 되었습니까?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 그 의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안식일을 죽기까지 지켜도 천국 못갑니다!
율법의 행위는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은 사람은 인류 역사상 한 명도 없습니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중 일부인 희생제사법이 예수님 십자가로
성취되면서 이전 법은 무효화된 것입니다(히 7:18-19)
율법중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것은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유효할 것입니다(마 5:17) 그것을 성령께서 성취해가실 것이며( 롬 8:4)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굳게
세워갈 것입니다(롬 3:31)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고
권면한 말씀입니다(갈 6:2)
사도 바울 또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었으며(고전 9:21) 명절을 지키자고 말하고( 고전 5:7-8) <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오는 명절을 예루살렘에서 지켜야 하리니> ( 행 18:21) 라고 말하였으며,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기념하고자 일정을 서둘렀습니다(행 20:12). 죄수로 끌려가는 배위에서도 그는 욤 키푸르를 기억하였습니다(행 27:9).
그는 율법에 반하여 행동한 적이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행 25:8).
그러나 그의 말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안지키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갈 5장
4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졌도다.
율법은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도구가 아닙니다!
율법은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도구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율법을 지켜서 구원얻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도구이며, 그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율법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수시로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동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스도께로
인도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몽학선생이며 도구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선생님들은 초대교회에도 있었습니다!
행 15장
1 그리고 유대로부터 어떤이들이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기를 “ 너희가 모세의 관습대로 할례받지 않으면, 너희가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이 사람들과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못얻는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 고 말하는 사람은 같은 부류입니다!
안식일 예배는 일요일 예배보다 훨씬 더 성경적입니다!
예배요일은 성경 안에서는 바뀐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설교하였습니다( 행 13:42)
사도 바울은 다음 안식일에 설교하였지,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날 모이라고 하여
강론한 적이 없습니다( 행 13:44)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안식일마다 모여 기도함이 그들의 습관이었습니다(행 16:13)
사도 바울은 또다시 안식일에 강론함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행 17:2)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안식일마다 설교하였습니다(행 18:4) 고린도 전서를 읽는 고린도 교회는 안식일마다 모였고 예배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안식후 첫날에 저축하라고 한 말은(고전 16:2) 자기 집에 저축하라는 말씀이었고, 그 구절은 안식일들 중 하루에, 로 번역될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일요일에 교회에 나와 헌금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행 20장 7절의 안식후 첫날 저녁에 모인 것은 유대인들의 합딜라로서 한주를 시작하기에 앞선 애찬을 말합니다.
계 1장 10절의 주의 날은 안식일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상교인 로마 카톨릭은 자기들의 권위로 예배요일을 토요일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배요일이 안식일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게 된 결정적 사건은 363-364AD 연간에 있었던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안식일에 예배하는 자들에게 아나떼마 곧 저주를 발령하고 그 이후 안식일 예배를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요일이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상교 제사장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법보다 더 높은 권위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까닭에 예배요일에 관한한 안식일 예배가 일요일 예배보다 훨씬 더 성경적이라는 것이 분별됩니다. 그러므로 이에 관한한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도록 기도하고 바라며 주목할 일입니다.
예배요일을 바꾸는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휴일과 근무일들의 변경문제등 사회 전반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들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날에는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요일에 예배한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거나, 그들의 구원여부는 알수가 없다는 해석은 분명 잘못입니다.
일요일에 예배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협박에도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요일에 예배했던 사람들 중에도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죠지 뮐러, 로버트 채프만, 스펄젼, 무디 등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에 예배한 사람들이 조지 뮐러, 스펄젼이나 무디 보다 더 훌륭한 기여를 한 사람들이 얼마나 있으며 누구이겠습니까?
따라서 이 예배요일 문제로 구원여부를 따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단번에 얻는 구원에 관한 더 많은 구절들을 제시합니다.
골로새서 1장
5 너희를 위하여 하늘들에 쌓인 소망을 인함이니, 그것을 너희가 기쁜소식의 진리의 말씀에서 앞서-들었으니
6 이것은 온 세상에서처럼 너희에게 이른 것이요, 너희가 진리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깨달은 날로부터, 너희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어느날 부터 모든 열매들이 시작됩니다!
마태 13장
23. 좋은 땅에 씨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니 과연 열매맺어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 결실하는 자이니라.”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이지, 장구한 세월동안 교회 생활하고, 예배를 안식일에 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결코 없습니다!
요한 5장
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현재),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고(Present)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느니라(Perfect).
예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졌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며, 안식일을 안지키면 다시 생명에서 사망으로 돌려보낸다는 말씀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안식일을 안지키면 사망으로 다시 옮겨졌다가 다시 회개하여 지키면 다시 생명으로 돌려보내졌다가 다시 안지키면 사망으로 던져진다는 일회용 구원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9 그러나 너희는 육체안에 있지 아니하고 령안에 있나니, 이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심이라.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라.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았느니라.
구원여부는 안식일이나 어떤 특정 계명 준수 여부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으면, 안식일을 백만년 지켜도 구원 못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사람안에 임하시는 것은 순간의 일이지 장구한 세월동안 신앙생활 하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성령을 주십니다!
마태 7장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으리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달라하면 그에게 돌을 줄 사람이 있겠으며 10 또 생선을 달라하면 그에게 뱀을 주겠느냐? 11.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너희 자녀에게 줄줄 알거든 얼마나 더욱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그분께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느냐?
루카 11장
11 너희 중에 어느 아버지에게 아들이 빵을 구하면, 저가 그에게 돌을 주겠느냐? 또는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그에게 주겠느냐? 12 또는 그가 달걀을 달라하면 그에게 전갈을 주겠느냐? 13 그러므로 너희가 악하면서도 선한 선물을 너희 자녀들에게 줄줄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시고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의 핵심은 바로 성령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이 새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천국에 못갑니다!
요한 3장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코데모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던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다고.
안식일을 지켜야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님을 간구하여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살면 됩니다. 그분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실제 체험해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생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 일을 경험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밤에, 파스칼은 1654년 11월 23일 밤에, 스펄젼도 1850년 1월 6일에, 저도 1973년 9월 2일 낮에 경험하였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분이 들어와 사시기 시작한 시작점이 없으면 자기의 구원을 의문해보아야 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언제 들어오셨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구원이 분명히 믿음으로, 단번에 주시는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지 여부는 중요합니다. 그런 분들이 안식일을 계속해서 지켜야 구원이 유지된다거나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유지된다거나 물침례를 받으면 구원얻는다고 말할 때에는 그런 분의 구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런 분들중에 오직 믿음으로 단번에 구원을 얻는다고 인정한다면 긍정적으로 분별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단번에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2015. 5. 17 하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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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찬송가들을 빼먹었습니다.
찬송가들중 많은 수가 단번에 주신 구원을 증거합니다.
< 내죄 사함받고서 구주를 안뒤, 나의 모든 것이 변했네. 지금 내가 가는 길 천국길이요.. >
<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내 주의 도 첨받은 날, 참 기쁜날이 아닌가? 기쁜날 기쁜날>
< 내 속죄함을 입은 후 내 맘이 새로와>
<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찬송가의 대부분은 진심으로 거듭나야만 부를 수 있습니다.
기쁜날이 있었어야 부를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불가에서도 유사한 논쟁이 2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돈오점수頓悟漸修냐 점수돈오漸修頓悟냐의 논쟁인데요, 선종은 전자를, 교종은 후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들 '불교라는 종교'의 사람들 이야기를 그리 길게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도끼로 장작을 내리쳤을 때 단 번에 쫙! 갈라지는 경우처럼 분명 어느 한 순간 죄사함 받는 찰나가 있었고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돈오점수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점수돈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그 '환희의 순간'이 하나님에 의해 사는동안 언제든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토브님 명쾌합니다^^Thank you
성경말씀만이 우리에게 무기가 됩니다. 정말 명쾌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