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선종의 방법으로 “염불하는 이 누구인가?” 화두를참구(참구염불)하면 이는 참선으로깨달음을 구하는것으로,정토의 종지를크게 잃는다. 이는 (정토법문을 성공적으로 닦음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관건이다. 언제나 「선정쌍수」를 닦겠다는 미명 하에 힘써 화두 참구를 주장하고자 하면 얻는 이익은 매우 한계가 있다. 극처에 이르도록 염불하면 오히려 깨달을 수 있건만, (참구염불로) 잃는 이익은 오히려 무궁하다!
믿음과 발원으로 왕생을 구함을 중시하지 않아 부처님과 감응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염불하는 이 누구인가?” 화두를 직접 볼지라도 부처님의 접인을 받아 서방극락에 왕생하기 어려운데, 믿음과 발원으로 왕생을 구하는 마음이 없는 연고이다.
또한 번뇌 혹업을 아직 다 끊지 못해 자력에 의지해 생사를 요탈할 수 없다. 큰소리치길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이러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정토법문이 일체법문보다 수승한 원인은 「불력에 의지함」에 있다. 그러나 갖가지 법문은 무두 자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자력을 어떻게 불력과 한데 섞어 논할 수 있는가? 이는 정토법문을 닦는 가장 중요한 관건의 하나이다.
[보충] 바르게 깨뜨리니, 참구할 필요가 없다(正破不必參究)
묻건대, 천기선사. 독봉선사 등 여러 조사스님께서는 모두 「염불하는 이 누구인가?」 참구하라 주장하셨는데, 왜 참구할 필요가 없다 하는가?
답하되, 이 말은 천기 등 여러 주사들께서 나온 것이다. 이전 조사들께서는 염불인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철저한 자비심에 맞지 못한 까닭에 여러 조사들께서 옆에서 달갑게 여기시지 않고 그 자리에서 힐문하며 홀연히 일깨워 주시니, 어찌 긴 밤 지나 아침이 밝아옴에 그치겠는가?
【친문기】 묻건대, 천기본서선사, 독봉본선선사 등 여러 조사께서는 「염불하는 이 누구인가?」 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왜 참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가?
답하되, 만약 염불할 수 있다면 굳이 참구를 겸할 필요가 없이 이치를 깨침을 기약할 수 있다. 만약 참선을 하는 경우 반드시 염불을 겸해야 길을 잘못 들지 않을 수 있다.
옛날 사람은 근성이 견고하고 예리하여 곧장 묵묵히 참구하여 곧 자성을 단박에 깨달아 진여에 맞게 증득할 수 있었고, 염불을 중시하지 않아도 여전히 가능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근기가 점차 둔해져서 선에만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염불인도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니, 이 마음이 부처를 짓는다(是心作佛 是心是佛)」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번번이 마음 바깥에 부처가 있고 극락으로 가는 길은 멀다고 여겨서 자포자기하고 끝까지 가지 않으려 한다. 입으로 비록 염불할지라도 마음은 원숭이처럼 날뛰고, 뜻은 말처럼 사방은 뛰어다녀 줄곧 바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자심을 이미 깨닫지 못하고 극락에도 또한 왕생하지 못하니, 이는 부처님께서는 무문자설無問自說하신 철저한 자비심과 어긋난다.
그래서 천기, 독봉등 여러 조사들은 기꺼이 진실로 참구하고 진실로 염불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달갑지 않은 방법을 능숙하게 벗어나도록 「염불하는 이는 누구인가?」 참구를 제창하였다. 염불로 득력하지 못하는 경계에 빠져 혼미하게 될 때 직하에 「염불하는 이는 필경 누구인가?」 한마디 송곳으로 아프게 힐문하여 맹렬하게 일깨우고 그 정념을 돈독하게 하여 그 마음이 열리고 뜻을 이해하도록 하여 그 망상과 외부에 반연하는 생각(緣慮)을 깨뜨려 「이 마음 그대로 부처를 짓는다(心是心作)」하신 뜻을 통달케한다.
진실로 바로 염불할 때 한마디 아미타불 전체 그대로 심성이다. 심성은 (일체유정은 모두 본각진심을 가지고 있어 무시이래 늘 청정에 머물러) 밝고 밝아 어둡지 않고(昭昭不昧) 분명하게 항상 아나니(了了常知), 전체 그대로 아미타불(일심, 진여불성, 여래장, 원각)이다.
이미 염불의 대상인 부처님이 그대로 마음이고, 염불의 주체인 마음이 그대로 부처님이면, 정토의정淨土依正은 자심일념自心一念을 여의지 않는다. 자심일념은 저절로 극락의정이다. 만약 이 뜻을 밝히면 어찌 미친 듯이 반연함을 단박에 멈추지 않겠는가? 마음을 확실히 정하고 염불하면 절로 자성미타를 보고 유심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어찌 긴 밤 지나 아침이 밝아오는 것에 그치겠는가?」 라 말함은 위와 같이 참구하여 철저히 깨닫는 것을 뜻한다. 혹은 산란한 마음으로 염불함은 무시이래 무명으로 말미암아 청정각심에 우매하고 미혹하여 망녕되이 육진의 그림자(六塵緣影)를 집착하니, 항상 어두운 긴 밤 동안 하늘에 떠있는 해를 볼 수 없다. 지금 「염불하는 이 누구인가?」 맹렬하게 망치로 쳐서 환망을 남김없이 다 날려 버리고, 진심을 홀로 밝히고 자성유심의 뜻을 이해하니, 실로 아침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백주대낮 아래 항상 있는 것과 같다.
우익대사께서는 우리에게 질책하신다. 옛날에는 근기가 예리하여 참선으로 깨닫는 일 조차 근기에 맞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염불하는 이 누구인가?”를 간하면 여전히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만나는 이들은 장애가 무겁고 마군이 강력하여 참구는 이미 수행하기에 적당하지 않는데, 여전히 건성건성하는 마음을 절박한 마음으로 끝내고서 노실하게 염불하지(死盡倫心 老實念佛) 않고, 아직도 간절히 참구일법을 가슴속에 품고 자성미타를 보아 생사를 요탈하려고 한다.
실로 스스로 자신이 낳은 자식을 포기하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부서진 기와조각을 골라 지극한 보배로 여기며 멀고 오래도록 집에 계신 부모님을 구타하니 어찌 부모 뜻을 거역하고 불효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부서진 기와조각」은 참구 공안을 비유한다. 「집」은 오음색신을 비유한다. 「부모님」은 자심을 비유한다. 색신은 자심의 친상분이다.
그래서「자신이 낳은 자식」이라 한다. 「구타」는 반항을 비유한다. 여러 조사스님들은 원래 고구정녕 노파심에 때와 근기에 잘 수순한다. ㅡ보정법사, 《아미타경요해친문기》
【역주】 염불정진으로 명자위 후심에 이르도록 정진하면 염불한 까닭에 아미타부처님의 명훈가피로 계위가 증상하여 관행위 초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염불공부로 곧 마음을 거두어 삼매에 들어가 미혹을 조복한 사일심불란에 이르면 임종시 결정코 자재왕생한다.
자재왕생이란 임종시 모름지기 다른 사람의 조념 없이 단지 마음을 거두어 염불삼매에 들면 곧 부처님을 친견하여 자재왕생하는데, 대부분 때가 아름을 미리 알고 선 채로, 앉은 채로 가니 소탈 자재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니, 이런 부류의 자재왕생하는 염불인은 여전히 자력. 타력에다 겸해서 불력에 의지한다. 즉 자력으로 얻은 염불삼매의 힘이 강해 자력과 타력에 의지해 자재하게 마음을 거두어 삼매에 들어(삼매경에 들어 세 가지 힘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 임종시 왕생이 자재할 수 있다.
산심위의 염불인은 임종시 부처님을 친견하고 왕생하는 경우 자력으로 얻은 염불삼매력이 없거나 자력으로 얻은 염불력이 약해 자력과 타력에 의지해 삼매경을 형성할 수 없는 까닭에 왕생하여도 자재할 수 없다. 반드시 임종에 가까와져서 며칠 전 혹은 십여 일 후 제6식이 점차로 사라짐에 따라 견혹. 사혹 등 미혹을 조복하지 않아도 조복하고, 끊지 않아도 끊되 부처님 명호를 끊임없이 계념하여 미혹을 끊지 않고서 점차 “임종시 특수한 삼매경”에 들어가 부처님의 가지력이 점차 증승하여 죄가 멸한 즉 부처님을 친견하여 왕생할 수 있다.
이 십여 일내에 만약 염불인의 발심이 간절하고 염불이 용밍하다면 자력으로 명자위 후심에 이르도록 염할 수 있고, 또한 왕생할 수 있다. 산심위 염불인의 경우 단지 자력에만 의지하면 근본적으로 명종삼위(命終三位: 명료심위. 자체애위. 난심위)에 있을 수 없다.
특히 난심위에서 자력으로 정념을 청명하게 유지하고 아미타불의 타력으로 증상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관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광대사께서는 언제나 “온전히 불력에 의지할 것(全仗佛力)”을 말한다.
그러나 이 불력에 의지함은 단지 상대적으로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 가지의 역용이 전혀 무궁하게 큰 것이 아니고, 전혀 자력으로 염불하여 정념을 유지함과 별개로 아미타부처님 타력의 가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임종시에 염불(산심정념 및 정심정념을 포괄함) 할 수 없고 오히려 처자식, 재산 등의 세속 일에 미련을 가지면 아미타부처님의 가지력이 이를 따라 숨는다.
게다가 임종 십여 일 전 며칠에 오근이 먼저 점차 쇠약해지지만 제6식은 결코 약해진 적이 없기 때문에 임종인의 의식은 매우 청명하다. 비록 지심으로 염불할지라도 여전히 산심의 정념 염불이고, 아미타부처님께서 비록 동시에 명훈가피로 증상할지라도 여전히 자력과 타력 하에 삼매에 들 수 없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다.
임종 전에 밟는 계단 하나는 당연히 산심을 포괄하니, 염불인이 생전에 비록 정진 염불하였을지라도 동시에 겸해 불력의 가지가 있을지라도 산심위의 사람은 부처님 가지의 역용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한 것으로, 자력과 타력의 화합 아래 마음이 삼매경에 들 수 없으며,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자기 작용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본원법문의 잘못된 방향으로 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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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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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염불의 대상인 부처님이 그대로 마음이고, 염불의 주체인 마음이 그대로 부처님이면, 정토의정淨土依正은 자심일념自心一念을 여의지 않는다. 자심일념은 저절로 극락의정이다. 만약 이 뜻을 밝히면 어찌 미친 듯이 반연함을 단박에 멈추지 않겠는가? 마음을 확실히 정하고 염불하면 절로 자성미타를 보고 유심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수고하셨습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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