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연구㉒
염려하지 마세요
참고말씀: 마8:10; 10:30,31; 15:28; 막9:24; 엡5:10; 약4:15
읽을말씀: 마6:25-34
주제말씀: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첫째, 믿음이 작으면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염려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25절 상)
어째서입니까?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옷)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하) 왜 덜 중요한 것들을 염려하고 있느냐? 이제라도 더 중요한 목숨이나 몸에 대해 염려해야 할 것을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것들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까? 공중의 새(26절)와 들의 백합화(28절), 들풀(30절)입니다. 즉 공중의 새가 심거나 거두지도 않는데 굶어죽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는 까닭이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26절 상)
들의 백합화가 수고나 길쌈도 아니 하는 데 그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기 때문이며,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8,29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나 믿음이 작은 자들아.”(30절 상)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들보다 누구를 더 귀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까? 우리입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절 하) /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절 하)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까? 의식주에 대한 염려, 곧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의 염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다 먹이시고 기르시며 입히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더 염려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절)
한편, 이 같은 염려는 무엇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믿음이 작으면 이 같은 것들을 염려하게 되지만, 믿음이 큰 사람은 더 이상 이런 것들을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30절 하)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즉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되, 이왕이면 큰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9:24 하) /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마15:28 상) /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둘째, 믿음이 자랄수록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구합니까? 믿음이 자랄수록 무엇을 더욱 찾게 됩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 상)
어째서입니까? 나머지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채워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절 하) 즉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기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이것들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시는 우리를 내버려두실 리 없다고 확신하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거나 포기하실 리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0,31)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의식주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문제들을 염려하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절) 아니면 이것들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까?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후자라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또 자라가고 있다는 증거이지만, 전자라면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무엇을 지금 염려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유무와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무엇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내일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34절 상) 어째서입니까? 이런 것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염려한다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일이 나쁜 일일지 좋은 일일지도 현재로써는 도무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일의 일은 내일이 염려하라고 하고,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34절 중)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동안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지워진 짐들을 묵묵히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하)
물론 이 말을 어떻게 오해해서는 안 됩니까? 무계획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즉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저 운(運)이나 요행(僥倖)이나 바라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성도는 미래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