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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6 - 왜국 중국에 “해 뜨는곳 천자가 해 지는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왜국은 607년 다리사비호(多利思比孤)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왜가 보낸 국서에는
其國書曰 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 無恙 云云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 탈이 없으신지? 어쩌고...” 하여 수 양제를
노하게 만듭니다만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지라 다음해 사신을 왜국에 보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무례한 국서를 보낸 연유가 궁금한데, 일본은 훗날 1274년 몽고군이 고려군을 앞세워 일본을
침공한후 쿠빌라이는 복속하라며 사신을 보내자 가마쿠라 막부 도키무네는 무례하다며 사신의
목을 베니 14만 대군의 재침을 받았고, 히데요시는 명을 친다며 전쟁을 일으켜 화친조건으로
공주를 요구했으며 1941년 화와이를 폭격하고 미드웨이를 기습해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을 합니다.
그러데 이웃한 조선(朝鮮) 과 일본(日本) 은 전혀 다른 글자 처럼 보이지만 조선(朝鮮) 의 朝(조)
는 “아침 조” 이고 鮮(선) 은 “고울 선 ” 이니 “빛나다, 선명하다” 라는 뜻으로 아침 해가
비치는 나라를 뜻하며..... 일본(日本) 의 日(일) 은 “날 일 ” 자로 해를 뜻하고 本(본) 은
“근본 본” 자로 뿌리를 뜻하니 “해의 뿌리” 라, 그럼 해뜨는 곳이니 “동쪽에 해뜨는 나라” 라는
뜻으로 조선(朝鮮) 과 일본(日本) 이 같은 뜻이라면 가야인과 백제인이 건너가 일본을 세웠다는....
다른 예로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한(韓)
은 같은 나라이고, 주몽은 주몽(朱蒙), 추모(鄒牟),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
(仲牟), 주배(朱背) 와 도모(都慕) 로도 기록되었으며.... 신라(新羅) 는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
(徐那) · 서라벌(徐羅我) · 서야(徐耶:徐耶我) · 서라(徐羅) · 서벌(徐我) 과 계림(鷄林) 으로 적었습니다.
가야나 주몽에 신라 이름이 하나가 아니고 구구각색인 것은 한국과 일본은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말로만 나라를 다스리다가 훗날 원수이자 적국이며 이방인의 나라 중국에서 한자가 간헐적
으로 들어오게 되니.... 처음에는 글자를 읽을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문자의 유효성과 필요성을 깨닫고는 시대를 달리해 여러 사람들이 각자 한자로 옮겼기 때문 입니다.
왜국의 첫 사신으로는 중국의 사서인 후한서에는 서기 57년에 후한(後漢) 광무제가 왜노국(倭奴國) 의
왕에게 사신을 통해 금인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금인이 규수 서북부 지가도에서 발견
되었는데, 이때의 왜노국은 왕국 이라기 보다는 규슈 북부 지방의 작은 성읍 국가 였다고 짐작됩니다.
(1)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왜국(倭國)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산과 섬에 의지하여 거주하니, 무릇
1백여국(國) 이다. 무제(武帝) 때에 조선(朝鮮) 을 멸한 이래로, 한(漢) 에 사신을 보내
역통(驛通) 한 곳이 30국이었는데, 그 나라들이 모두 왕을 칭하여 세세로 이어져 내려온다.
그 대왜왕(大倭王) 은 야마타이국(邪馬臺國) 에 거(居)한다. 낙랑군 바깥 쪽에서 그 나라까지
2만리이고, 서북 경계인 구야한국(拘邪韓國 김해)까지 7000여리이다. 토지는 벼와
모시, 양잠에 마땅하며 길쌈하여 비단[縑布] 짜는 법을 알았다. 흰 구슬과 푸른 옥이 나왔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부모와 형제는 다른 곳에 거처하며, 회동(會同)함에도 남녀의
구별이 없다. 음식은 손으로 먹으며, 변두(籩豆)를 사용한다. 맨발로 다니며, 웅크려 앉는
것으로써 공경함을 표한다. 사람들의 성품이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대인(大人)들은 4~5명
의 처를 두었으며, 나머지는 2명, 혹은 3명이었다. 여인들은 음란하지 않으며 질투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하지않고, 쟁송(爭訟)함이 적었다. 법을 어긴자는 처자를 몰수하였고, 무거운 자는 문족(門族)
을 멸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10일간 상을 멈추고, 가인들은 울며 곡하였는데, 술과 음식을 쓰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겼다. 뼈를 태워 길흉(吉凶) 을 점쳤다. 바다를 건널때 한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
빗고 목욕하지 못하게하며,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고 아내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니 지쇠(持衰) 라 한다.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서기 57년), 왜노국(倭奴國)이 조공을 바치며 조하(朝賀)하였는데, 사신이 대부
(大夫)라 하였으니, 왜국의 남쪽 끝 경계이다. 광무제는 인수(印綬)를 내려주었다. 안제(安帝) 영초
(永初) 원년(107) 왜국왕 수승(帥升) 등이 생구(生口) 1백 60인을 바치며 알현하기를 원청 (願請) 하였다.
환제와 영제 때에 왜국에 대란(大亂)이 있어 서로를 공벌(攻伐)하였는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주인이
없었다. 비미호(卑彌呼) 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결혼하지 않았고 귀신을 부리는 도(道)를 행하여
사람들을 요혹(妖惑)하였으니 즉위하여 왕으로 세웠다. 시중드는 비[侍婢]가 1천 명인데, 본 자는
드물며 누관(樓觀)과 성책(城柵)이 있는 궁실(宮室)에 거주하였는데 병사를 두어 수위(守衛)하였다.
법속은 엄준하다. 여왕국(女王國)으로 부터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1천여리면 구노국(拘奴國) 에
이르는데, 왜종(倭種)이었으나 여왕에 속하지 않았다. 여왕국으로 부터 남서쪽으로 1천여리
이면 주유국(朱儒國)에 이르는데, 사람들의 키가 3,4척이다. 주유로부터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면 나국(裸國) 과 흑치국(黑齒國) 에 이르는데 사역(使驛) 이 전하는 바가 여기에서 끝난다.
(2) 위지 동이전 倭(왜)
'왜' 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의 읍이 있다. 백여개의 나라
가 있어 '한(漢)' 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으며 이제 통역으로 통교하는 곳이 30 나라이다.
군(낙랑과 대방)에서 나아가 '왜' 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 이 나오고 남쪽
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狗邪韓國 김해가야)' 의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 칠천여리나 된다.
처음 하나의 바다를 건여 천여리에 '대마도' 에 이른다. 그 큰 관리를 '비구' 라 하고 부관
을 '비노모리' 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사백여리이다. 땅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호수는 천여호이고 좋은 밭은 없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 스스로 생활하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리에 '한해(瀚海)' 를 건너면 큰 나라(이키섬 일지국)가 있는데 관리를 '비구'
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 라 한다. 사방 삼백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많은 산림을 이루니
삼천가가 있으며 차이는 밭이 있어 밭을 경작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역시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末盧國 북규슈)' 에 이르는데 사천여호가 있으며 산기슭의 바다에
거처하는데 초목이 너무 우거져 길을 갈 때 앞사람을 볼수가 없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하는데 물이 깊지않고 얕아 자맥질하여 이를 잡는다. 동남쪽 육지를 따라
오백리에 '이도국(伊都國)' 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 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 '병모고' 라 부른다.
이도국은 천여호가 있으며 세세토록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 에 속해 있어 고을에
사신이 왕래하고 항상 머물러 있다. 동남으로 백리에 '노국(奴國)'이 있는데 관리
를 시마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는데 호수가 이만여호 이다. 동쪽으로 백리에는
'불미국' 이 있어, 관리를 다모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며 호수는 천여가이다.
남쪽으로 '야마타이국(邪馬壹國)' 이 있어 여왕이 거하는 도읍으로 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는
한달이 걸린다. 관리를 '이지마' 라 하고 다음을 '미마승', 다음을 '미마획지', 다음을
'노가제' 라 하니 칠만여호 이다. 이 '여왕국' 의 북쪽에 있는 나라의 호수와 길을 얻어
기록한 것인데 그 나머지 주변의 나라는 너무 멀어 끊어져 가히 자세히 얻을 수가 없었다.
<사마국>, <이백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사마국>, <궁신국>, <읍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 있는데, 여왕 경계의 끝이다. 남쪽에 '구노국(狗奴國)' 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관리를 '구고지비구'라 하는데 여왕에 속하지 않으며 이 국은 '여왕국' 에서 만이천여리나 된다.
벼가 있고 모시 삼 양잠이 있어 길쌈하고 가는 모시와 비단이 있고 그 땅에 소와 말, 호랑이, 돼지, 양,
까치가 없다. 병기로 창과 방패 나무활을 쓰고 목궁은 아래는 짧고 위가 길다. 대나무로 화살에
쇠나 혹은 뼈로 화살촉을 하기도 하는데 '이(耳)' 와 '주애 (朱崖)' 와 같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다.
풍속에 어른들은 모두 사오명의 부인이 있는데 하호들도 혹 이삼명의 부인이 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 하지 않는다. 도둑이 없고 송사가 적다. 법을 범하면 가벼운자는 그 처자를 죽이고 무거운 자는
그 집안에서 종족까지 멸한다.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으니 복종해야 하며 세금을 거두고 문설주가 있다.
본래 남자가 왕이었으나 칠팔십년후 '왜국' 에 난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비미호(卑彌呼)' 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으며 남자 동생이
다스림을 도왔다. 왕을 보았다는 사람은 적고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경초이년 유월 '왜여왕' 이 대부 '난승미' 를 보내어 군(낙랑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 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 에게 말하길 대방태수 유하가
대부 난승미와 사신 도시우리를 보내와 남자 4명과 여자 육명, 포 두필이장을 받치니 받았다.
먼데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니 충효가 이와 같아 '친위왜왕'( 今以汝爲<親魏倭王>) 을 삼는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 에게 보내는 것이니 당신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당신이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 를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 를 솔선교위
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 보내는 바이다.
그리고 강지교룡금 오필과 강지추속계 십장, 청강 오십필, 감청 오십필을 주어 당신이 받친 공물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또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
보내는 터이니 너희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서 우리 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정시 원년 '태수 궁준' 이 건중교위 제휴등을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왕'
에게 절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사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등 팔인을 보내 포로 몇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다.
(3) 후한에 조공한 왜노국(倭奴國)
“ 건무(建武) 원년(서기 57년) 왜노국(倭奴國) 이 공(貢)과 조하(朝賀)를 받들어 사람을
시켜 자칭(自稱) 대부(大夫)를 보냈다. 광무(光武)가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
인수(印綬)로 사(賜)했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元年), 왜국왕(倭國王)
이 승(升) 등을 거느리고 생구(生口) 백육십(百六十) 명을 바치고 뵙기를 청원(請願)했다. ”
(4) 위나라에 조공한 야마타이국(邪馬壹國)
“왜국(倭國)에 대란(大亂)이 있어 공벌(攻伐)하며 주(主)가 없었는데 한 여자(女子) 비미호
(卑彌呼)로 노처녀가 있어 귀신(鬼神) 섬기는 도(道)에 능하여 무리들을 요혹(妖惑)
했다. 이 때 공립(共立)으로 왕(王)이 되었다. 시비(侍婢) 천(千)명이 본 사람은
적고 전사(傳辭)에 말하길 거처(居處)는 궁실(宮室)이며 누(樓)에서 성책(城柵)을 본다.”
야마타이국(邪馬壹國 7만호) 히미코(卑弥呼) 여왕은 경초 2년 (서기 238년)
대방군(帶方郡)을 통해 조위(曹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위(魏)나라
명제(明帝) 는 히미코를 친위 왜왕(親魏倭王) 에 봉하고 사례품을 하사했습니다.
(5) 한반도에 나와 신라 서울을 포위한 왜군
1) 396년 : 광개토대왕비 1면 9행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
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
*병신, 왕궁솔수군, 토벌*잔국.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2) 399년 : 2면 7행 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왕순하평양. 이신라견사백왕운, 왜*인만기*국경, 궤파성지, 이노객위민*, 귀왕청명.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3) 400년 : 2면 8행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
方至, 倭賊退. 특견사환, 고이밀*계. 십년*경자, 교견보기오만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 왜적퇴. 10년 경자에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해 신라를 구원
하게 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했다.
2면 9행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자왜* 배급추지임나가라*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수병. 발신라성, 염*성, 왜구대궤*,
왜의 배후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자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
으로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과 염성을 장악하여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3면 1행 殘*倭潰(逃;2행) 잔*왜궤(도:2행) 나머지 왜구는 무너져 흩어져 도망갔다.
404년 :3면 3행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 청###조공. 십사년갑진*, 이왜불궤, 침입대방*계, 화통잔병#*석성, #연선###, 왕궁솔왕*
토, 종평양 14년 갑진에 왜는 양국의 관계를 파괴하고 대방(황해도)의 경계를 침입하여
백잔병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했다. ...왕이 몸소 병사를 영도하여 토벌했다. 평양을 떠나
3면 4행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봉상우, 왕당요절탕자, 왜구궤패, 참살무수. 십칠년정미*, 교견보기오만, ########. 왕사
선봉이 적과 만났다. 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왜구는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17년 정미~ 이후 해석 누락됨, 빙혼 :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왕사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하자 구원 요청을 받은 왜군은 391년부터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해 393년에는 신라 수도 서라벌을 공격했는데 성이 무느지지 않자 왜군은
5일후 철수 했으며 이후 증원군이 건너오니 김해가야군과 함께 399년에 다시
서라벌을 포위하니 함락 직전에 고구려군 5만 대군이 구원오자 왜군은 철수합니다.
추격해온 고구려군에 의해 김해 종발성이 함락되자 철수하는데 훗날 백제 멸망때 백제인들이
왜군을 따라 대거 일본으로 달아났듯이 이때 김해가야는 망하니 그 주민 상당수가 왜군
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하는데 훗날 532년에 신라에 흡수되는 구형왕의 김해가야는 신라
의 부용국으로 김해가야 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부산 복천동 고분군 세력으로 보입니다.
일본으로 이주하기전 한반도 왜인으로 추정되는 포상 8국이 김해가야(아라가야?)를 공격했을 때 신라군의
구원으로 실패하자 3포가 몇 년후 신라땅 울산을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4년후인 404년 왜군은 백제
의 길안내로 서해를 돌아 대방(황해도) 에 상륙해 북상하니 광개토대왕이 직접 출진해 물리쳐야 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내려보내면서 선비족 후연에 정성을 다해 조공했으나 이때 후연은 북위의
공격으로 수도 중산을 뺏기고 북쪽 용성으로 쫃겨가 영토와 인구가 4년전 모용수 때의 25% 로
줄어든지라, 장차 북위의 재공격 전에 국력을 회복해야 하니 모용성은 모용희를 선봉으로 3만군은
400년 2월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700여리 땅을 빼앗으며 고구려인 5천명을 포로로 잡아갑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병사가 없으니 저 두 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인들이 끌려가는 것을 비통한 심정
으로 지켜보기만 했는데.... 급히 파발해 김해까지 내려간 5만군을 불러 올렸으나 부상병에다가
피로도가 심한 병사로는 성을 공격할수 없으니 2년간 휴식한 후 방비가 엄중한 두 성 대신에 멀리
숙군성을 공격하는데 후연의 침공만 없었으면 이때 한반도는 구구려에 의해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6) 중국 남조에 조공한 왜국의 5왕
5호 16국 시대에 강남의 남조 동진을 이은 중국의 송(劉宋 유송)서 이만전(夷蠻傳)
과 남제서 및 양서에 왜국의 다섯왕이 조공을 바쳤기로 책봉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데... 그 계보는 산(讚 찬)- 친(珍 진)- 사이( 濟 제)- 고오( 興 흥)- 부( 武 무) 입니다.
413년과 421년, 425년과 430년에 왜국왕 찬(讚 오오진이나 닌토쿠 천황으로 본다) 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438년에 찬의 뒤를 친(珍 진)이 송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使持節都督(사지절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六國諸軍事(육국제군사) 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 倭國王(왜국왕) 으로 자칭합니다.
왜국왕이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송에게 요청하나 거절당하고 안동장군 왜국왕의 직위만 수여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한반도 남부 지역이 자신의 속국이라고 주장한 것이니 당시
백제 또한 남조와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정을 알고 있는 송이 거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3번째 왕 제(濟) 는 443년 송에 사신을 보내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지위를 받았으며 이후
451년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 진한·모한 육국제군사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
加羅 秦韓慕韓六國諸軍事) 에 임명되고, 그의 신하 23인은 군(軍)과 군(郡)을 제수받았습니다.
앞에서 2번째 왜왕 진(珍)이 요구했던 이름과 비슷하지만 백제 하나만 빠진 것인데.... 이미 백제는
중국 남조와 황해를 건너 조공하고 있었고 425년에 사지절 도독 진동대장군 백제 제군사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송에서도 일본이 주장한 칭호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라와 가야
등은 중국과 거리가 너무 멀어 교류가 드물었기에 왜왕의 관할 지역을 잘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4번째 고오( 興 흥)는 462년 송에 사신을 보내 직위를 승계 받았으며 477년 사망하고
동생인 왜왕 무(武)가 왕위를 이었는데, 5번째 왜왕인 무(武 유랴쿠천황)는 478년에 조공
하면서 사지절 도독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이라고 자칭 했습니다.
스스로 개부의동삼사라는 문관 1품 관직을 임시로 자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송에 요청했지만
백제는 빠지고 육국제군사로 수정해서 받게 되는데 이 역시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에 영토가 없는
신라나 가야는 중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국 측이 잘 몰라서, 일단 자기들도 잘
알고 확실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독립국 백제는 뺐고, 신라나 가야는 일본 주장대로 수락한 것입니다.
다만 가야의 경우는... 왜왕이 사신을 보낸 478년 다음해인 479년에 대가야의 하지왕이 처음으로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기 때문에 적어도 가야가 왜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것을 479년에는 중국도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중국 사서에 478년에 왜왕 무가 보낸 국서가 실려있는데 양이 너무 많은지라 줄였습니다.
"봉해진 나라가 먼 곳에 번국을 이루고 있는데 조상부터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산천을 누비느라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으로는 모인(毛人)55국을 정벌하였고 서로는 중이(衆夷) 66국을 복종
시켰으며 바다 건너 해북(海北) 95국을 평정하니, 왕도는 화락하고 편안하며 땅을 넓히고
왕기를 아득히 크게 하였으며 , 여러 대에 걸쳐 조종 (朝宗) 하여 해마다 어긋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구려(句驪)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지체되어 좋은 바람을 놓치게 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원수가 천로(天路)를 막는 것에 분노하니, 활을 쏘는 병사 100만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일어나고자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을 잃으니 수성(垂成)의 공을 이루고자 했으나 마지막 한 삼태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쉬고 있었으므로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갑옷과
무기를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하니, 의롭고 용맹스러운 병사들이 문무로 공을 이루어
번쩍이는 칼날이 눈앞에 닥쳐도 또한 눈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세상을
뒤덮는 덕으로써 강적을 무찔러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관작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조하여 왜왕 무(武)
를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에 제수하였다.
장수왕은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남조인 동진
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
대장군으로 승급되었으며... 590년 영양왕은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동생 영류왕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한편 왜국 왕조에 의해 대왕(大王)으로 불리우던 백제는 동성왕때 중국 남제국에 청하여 왕자
와 신하에게 주기 위해.... 왕의 칭호 5명, 제후 칭호 3명, 태수칭호 7명을 하사 받습니다.
다섯명의 왜왕은 중국에 여러차례 거듭해서 사신을 보내 신라, 임나, 진한, 마한왕,
안동대장군을 끈질기게 요구해 마침내 관철하는데.... 문제는 왜국왕들이
자신들의 나라도 아닌 한반도 여러나라의 관직과 칭호를 왜 중국에 요청했느냐?
김해 금관가야가 규슈에 진출해 가야-왜 연합왕국을 세우고 391년에 왜군을 이끌고 한반도에
상륙해 가야군과 연합해 399년에 서라벌을 포위하니 함락 직전에 신라 내물왕이 애걸한
결과 고구려군 5만이 남하해 김해 종발성까지 하락되자 왜군과 김해가야는 일본으로 도주
한지라 그 후손들이 세운 왜국은 조상들이 한반도인이라 연고권(?)을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백제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자 왜국에서는 장차
모국 백제가 망한다면 이를 부흥하기 위해 왜군이 한반도로 진출해야 하는데,
그때 한반도의 가야와 신라 및 백제 땅에서 현지인들을 모병 내지 징집해 고구려군과
싸우기 위한 명분으로 권한(직위)이 필요한지라 계속해서 중국에 요구한 것으로 봅니다.
477년 문주왕이 해씨들에게 살해되고 479년에는 삼근왕이 진씨들에게 살해되자 왜국 웅략천황
(일왕)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란 열다섯살 동성의 머리를 쓰담으며 격려한후, 왜군 500명
의 호위를 붙여 한반도로 내 보내 백제왕위를 잇게하니.... 동성대왕 때에 백제가 안정을 되찾자
고구려에 의해 망할 염려가 없어지니 이제 왜국은 중국에 더 이상 저런 직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전인 461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공을 염려해 동생 곤지에게 임신한 후궁을 내주며
왜국으로 도피시키는데 바다를 건너는 중에 후궁은 태기를 느껴 규슈 가라쓰 가카라
시마 동굴에서 왕자를 출산하니 섬에서 태어났다고 섬왕, 시마(사마) 로 부르니 무령왕 입니다.
곤지가 왜국에서 16년동안 살다가 귀국할때 장남 무령왕을 대동했으나 진씨들은 궂이 번거롭게도
멀리 일본에 살고있는 곤지의 차남인 어린 동성을 왕으로 세운 것인데, 남제에서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에 봉해졌지만 501년에 위사좌평에서 지방의 가림성주로 좌천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자... 이부형인 무령왕이 백제 왕위에 오르는데 1145년 삼국사기는
무령을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했고 720년 일본서기는 형으로 기록했으니 어느 기록이 맞을까요?
1971년 충남 공주시 에서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니 송산리 고분 에서
벽돌 무덤을 발견했는데, 지석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462년에 태어나 523년에
죽었고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25
대 무령왕의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임금 무제로 부터
책봉 받은 관직이라 무령왕의 무덤이 확실한 것이니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입니다!
(7) 수나라에 조공한 왜국
1) 수서(隋書) 열전(列傳) 왜국(倭國)
(왜국은 6차례 견수사를 파견했는데...) 왜국(倭國)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동남쪽에 있다. 물과 뭍을
통틀어 거리가 삼천 리 떨어져 있으며 큰 바다 한가운데 뫼가 많은 섬을 끼고 산다. 위(魏)나라 때
통역을 써서 말을 주고 받으며 사신을 보냈다. 서른 나라가 있는데 우두머리들마다 자신을 임금이라
고 일컫는다. 오랑캐들(왜)은 거리를 잴 때 리(里)를 쓰는 법은 모르고 다만 걸린 날수로만 셈할 뿐이다.
나라 전체는 동서로 다섯 달 걸리고 남북으로 석 달 걸린다. 각 나라는 전부 바다와 접하였다. 땅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사마퇴(邪靡堆)를 서울로 삼았다. 곧 위지(魏志)에서 사마대(邪馬臺)
라고 부르는 곳이다.(우리나라에서는 '邪馬臺' 를 사마대로 읽지만 일본에서는 야마타이(やまたい)
로 읽으니 에도시대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居宣長 1730-1801) 가 처음으로 제시한 말이다).
'邪馬臺' 가 야마토(大和)나 산도(山島)와 관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듯한데 한국말“뫼”는 중국말로는
산(山) 인데 일본말로는 야마(やま) 라고 읽으니 수서(隋書)에 나오는 산도(山島)는 단순히 산이 많은
섬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말을 그 뜻을 살려 적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마대(邪馬臺)는 사마(邪馬)와 대(臺)로 나눌 수 있는데 사마(邪馬)는 우리말 '섬' 이나 일본말
'시마(島)' 와 관련 있다고 보고, 대(臺) 는 우리말 '다(땅)' 나 일본말 '타(田)'
와 관련 있다고 보니 그렇다면 사마대(邪馬臺) 는 '섬터', '섬땅', '섬나라' 가 된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말에서 섬을 사마로 부른 예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니 삼국사기 백제본기
를 보면 무령왕(武寧王)의 휘(諱)가 사마(斯摩)라고 하는데 일본서기에는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적혀 있으니 삼국사기와는 달리 사마가 斯麻 로 적혀있으며 백제신찬에는 무령왕을 사마왕이라
부른 연유가 적혀 있으니 곧 무령왕이 섬(사마, 筑紫嶋) 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마로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1971년 공주 송산리(宋山里)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땅문서(買地券)에는 사마가 백제신찬과 같은
'斯麻' 로 적혀있는데,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에 보면 개로왕은 자신의 후궁을 아우 곤지(混支)
에게 배필로 주고 둘이 함께 왜로 가게 하는데 왕비는 임신한 몸이었으니 왜로 가는 도중 북규슈 카라쓰
가카라시마섬에서 아이를 낳으니 무령왕으로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사마(섬)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지만 다른 기록에는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로 적혀
있는데 (諱斯麻王 是混支王子之子) 김부식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東城王,
말다왕)의 둘째 아들로 적혀있지만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아들
이거나 아님 동성왕의 형(일본서기 권 제16 무열천황 武烈天皇 4년) 으로 적혀 있습니다.
왜국왕은 날이 밝기 전에는 책상다리를 한채 대전(大殿)에서 정사를 듣다가 해가 뜨면
곧 일을 멈추고 내 동생(해, 太陽)에게 맡긴다 한다고 하였다. 고조가 말하기를
"이거 정말 법도가 없구먼." 하고는 이에 훈령을 내려 그런 짓을 고치게 하였다.
내관(內官)은 열두 품계가 있다. 첫째는 대덕(大德), 다음 소덕(小德), 대인(大仁), 소인(小仁), 대의(大義),
소의(小義), 대례(大禮), 소례(小禮), 대지(大智), 소지(小智), 대신(大信), 소신(小信)이고 군니
(軍尼)는 백스물명이 있으며 팔십 집마다 이니익(伊尼翼) 한명을 두니 열 이니익이 한 군니 밑에 속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왜에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신라는 실성마립간
(實聖尼師今)이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냈고(402년), 백제는 아신왕(阿莘王) 이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는데(397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3) 때로 큰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왜에 볼모
를 보내고 화친정책을 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두나라가 왜국을 섬겼다고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적었습니다.
2) 수(隋)나라로 사신을 보내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왜국은 대업(大業) 삼 년(607년) 왜 임금 다리사비호(多利思比孤) 가 오노노 이모코를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듣자오니 바다 서쪽 보살천자(菩薩天子)께서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킨다 하므로
사신을 보내 예불(朝拜) 드립니다. 아울러 중(沙門) 수십명이 이곳에 와서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했다.
왜가 보낸 국서에 적히기를 其國書曰 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 無恙 云云
帝覽之不悅 謂鴻臚卿曰 蠻夷書有無禮者 勿復以聞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 탈이 없으신지? 어쩌고저쩌고 하였다.
양제(煬帝)가 글을 보고 몹시 언짢아 홍려경(鴻臚卿) 에게 일러 가로되
"오랑캐 놈이 보낸 글이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두번 다시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하였다.
왜국이 저런 무례한 국서를 보낸 이유는.... 당시 스이코(推古) 여왕 대신 섭정했던 쇼토쿠 태자에게는
고구려 승려 혜자라는 스승이 있었으니 혜자는 스이코(推古) 일왕 3년(595년)에 왜국에 파견되어
20년간 체재했고 쇼토쿠(성덕) 태자에게‘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등 3개 경전을 강했는데 고구려
영양왕의 지시를 받고 두나라를 이간질 하기위해 혜자가 저런 국서를 초안하도록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저건 왜국이 보낸 6차례 견수사(遣隋使) 중에 하나인데 양제는 이로 부터 4년 후인 611년
에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는데 4년전인 이때쯤이면 머리속에 고구려
침공을 생각하고 준비에 들어갔다고 여겨지니..... 양쪽에 적국을 가지면 안되는지라 화를
삭이고는 왜국과 우호를 위해 다음해 608년에 문림랑(文林郎) 배청(裴清)을 왜에 사신으로 보냅니다.
백제를 지나 죽도(竹島)에 이르렀다. 남쪽으로 ○라국(○羅國) 을 바라보면서 도사마국
(都斯麻國)을 지났다. 큰 바다를 건너 동쪽 일지국(一支國)에 이르고 또 죽사국
(竹斯國)에 다다랐다. 또 동쪽으로 가서 진왕국(秦王國)에 이르렀다. 그 사람들은 지나
사람과 똑같으므로 이주(夷洲)라고 불렀다. 의심은 가지만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리기 어렵다,
또 열 나라 남짓 지나서 (왜가 있는) 바닷가에 이르렀다. 죽사국(竹斯國)부터 동쪽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 왜(倭)를 섬긴다. 왜 임금이 소덕(小德) 아배대(阿輩臺)와 종자 수백 명을 보내 의장
(儀仗)을 세우고 북을 치고 뿔피리를 불며 배청을 맞게 하였다. 열흘 뒤 (왜 임금은) 또
대례(大禮) 가다비(哥多毗)와 기병(騎兵) 이백여 기를 보내 교외(郊外)에서 (배청을) 맞이하였다.
이윽고 그 나라 서울(나라현 아스카)에 이르니 왜 임금이 배청을 보고 무척 기뻐하였다. "내가 듣기로
바다 서쪽에 큰 수(隋)나라가 있는데 예의를 잘 아는 나라라 하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소.
우리 오랑캐는 바다 한 모퉁이 외진 곳에 있어 예의를 듣지 못하였소. 길을 쓸고 머물 집을
꾸미며 대사(大使)를 기다리는 것은 큰 나라가 늘 새롭게 변신하는 법을 듣고싶기 때문이오."하였다.
배청이 답해 "황제의 덕은 해와 달(二儀)을 아우르고 은혜는 네 바다로 흘러 듭니다. 왕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므로 저희 일행을 보내 깨우침을 베풀게 하였습니다." 배청이 사람을 보내 왜왕에게 이르되 "조정
에서 명(命)이 왔습니다. 곧 길 떠날 채비를 하게 해주십시오."하였다. 잔치를 열어 배청을 대접한뒤 떠나
보냈다. 사신(使者)에게 배청을 따라가서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다.(수서(隋書) 권 81 열전 제46 동이(東夷)
이후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왕족 복신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왜국에 임금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니
사이메이 여왕의 아들 섭정 나카노오에 태자는 인질로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동생?) 풍에게
5천 왜군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왕위를 잇게 한후.... 수도를 아스카에서 후쿠오카로
옮기고 왜국의 전력을 다해 2만 7천의 왜군을 1천척 배에 태워 백제에 보냈으나 패하자 이후
수도를 옮긴 왜국(倭國) 은 모국 백제와의 탯줄을 잘라 버리고 국호를 "일본(日本)" 으로 바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