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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과 구원파 (3) – 장로교와 침례교의 차이, 거듭남의 메시지 를 전하는 분들
"칼빈은 거듭남의 체험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전에 "칼빈은 거듭남의 체험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택함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지 않을 것임으로 거듭남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택함 받은 자는 어차피 거듭날 터이요, 택함받지 못한 자는 응당 거듭남과 무관할 터이니까요.
루터는 이에 반해서, 자신이 겪은 바와 같은 중생의 체험을 요구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현대 침례교와 플리머스 형제단, 그리고 근본주의 그리고 미국식 복음주의의 근간을 이루었거나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재침례교도들에게는 거듭남의 체험이 중대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암튼 "거듭남"이라는 이슈와 관련해서 장로교와 침례교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역사적, 신학적, 정치/사회적 배경이 어느정도 있었다는 것을 아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거듭남繭?교리를 강조하고 "거듭나라, 거듭나라"라고 윽박지른다고 거듭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노력이나 강조가 아닌, 온전히 주님의 전폭적인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사실 거듭남이라는 용어 자체가 (be) born again이라는 '수동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탄생을 임의로 정할 수 없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또한 우리의 뜻과 노력, 그리고 강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결정되는 바 아닙니다.
암튼 침례교쪽은 장로교쪽에 비해서는 "거듭남, 중생, 회심, 죄사함, 구원"등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문화적인 차이는 저도 느낄 수 있겠더군요. 제가 장로교를 오랫동안 다닌 이후에, 한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적 침례교회에 다녀봤는데, 그 점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자 독립 침례교회당엘 다녔습니다. 역시나 기대했듯이 "거듭났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이런 질문을 하는것이 서슴없는 환경인지라...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만) 교회당 출석인원 중에서 거듭난 신자의 수가 장로교보다도 침례교 쪽에 더 많다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도전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언제라도 자기를 이 준엄한 질문 앞에서 비춰볼 기회가 있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입니다.
기성교단 안에서도 거듭남을 강조하는 분들이 있더군요.
물론, 장로교단이라고 다 같은 장로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현실세계에서 '장로교'라는 이름은 너무 큰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어버렸지요.
한 극단에 기장이 있는가 하면... 개혁주의 신앙에 철두철미한 "독립개신교회"라는 교단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김홍전 박사님의 책을 출간하는 성약출판사라는 곳이 그 정신을 물려받은 책을 출간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죠.
제가 한 독립개신교회당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계신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 분은 "중생과 거듭남"의 체험에 대해서 구원파 이상으로 강조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분도 구원파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단 아닌 형제라고 보시는 시각이셨습니다.
구원파의 극단적인 성향은 바로 일반 개신교 신자들의 극단적 성향을 보게 되는 거울이라면서 구원파를 넓은 아량으로 끌어야 한다는 입장이셨습니다.
그리고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은 신자의 회심에 대해서 아주 강한 어조로 강조하시는 또 다른 분이십니다. 이분의 거듭남과 회심이라는 설교시리즈 http://yullin.org/Sermon/SeriesView.aspx?sid=161 에서 그분은 수차례, 기도하면서 이 말씀여행에 동참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설교 중간중간에 청중들을 가리켜.... "이곳에는 구원받은 자들도 있지만,
오랫동안 교회당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얻은 것으로 착각하고 계시는 분이 있을 수 도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신 분들은,
주님께서 은혜를 베불어 이번 기회에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게 되도록 기도하십시요."라는... (사실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는 그분의 마음의 일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란노에서 나온 이현수 목사의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라는 책도 강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분의 음성설교(클릭: 십자가의 도 로마서 강해) 또한 거듭남에 관한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분이 있으시겠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순회선교단(www.wmm119.org)의 김용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순회선교단이 주최하는 복음학교가 있습니다.
일 주일간 메시지만 듣는 강행군인데요. 그곳에서 온갖 죄와 규례와 율법에 짓눌렸던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난생 처음 죄와 지옥에 대한 성경의 준엄한 말씀들과 율법 앞에서 꼬구라지고 중생을 체험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배도의 징표중 하나가 죄와 지옥에 대한 선포를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여기는데, 복음학교에서는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 가감없이 전한다고 느꼈습니다.
얼마전에 이곳 숭사리 카페에 거듭나지 않았던 신학생 회원께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 주님을 진정 믿게 된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곳에서도 어떤 신학교에 다닌다는 신학생(전도사) 형제가 저희 조원이었는데, 죄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설교된 이후에 저에게 그러더군요...
"형, 저 지옥가면 어떡해요? 너무 무서워요."
그 형제는 오랫동안 교회당에 다녔지만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게 된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던가 봅니다. 암튼 그 형제는 후에 십자가를 정면으로 부딪혀서 자신이 죽고 예수님께서 그 형제 안에 사시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님도 얼마전에 복음학교에 다녀오셨는데요. 어머님이 예전에는 제가
"엄마, 거듭나셨어요? 구원받으셨어요?"라고 여쭈게 되면, "야, 인석아. 내가 권사 된지가 몇 년 째이고, 내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이.... 주저리 주저리..." 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으시는 체험을 하게 되신 이후에는 제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네가 왜 '복음, 복음'하고... '복음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말했는지 이제 알겠다. 오로지 십자가 뿐 이다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예전에도 그런 것이야 지식으로 알았지만 말이다."
(아이고... 넘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나 싶네요... 이거야 원... 이 다음에는 거듭남을 강조하는 구원파 내부의 문화적 요인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과 '내적 변화', 껍데기만 남은 "죽은 정통주의" 기독교가 조장하는 '외적 변화'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거듭남과 구원파 4) '거듭남'이라는 문화의 장점과 단점
제 주변에는 구원파 신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대학원 지도 교수님은 구원파 교회당에 출석하십니다. 이분은 학계에서 명성이 꽤 있는 학자이십니다. 주일 오후에 교수님의 주도로 대학원생들과의 전공 그룹스터디가 있는데요. 이분이 최근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과 최근에 유행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 대해서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며 권하시더군요.
암튼 교수님은 예수님을 참 사랑하시는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신앙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 다른 대학원생들은 무반응입니다.
그들 또한 기독교인입니다만, 그들이 알기론 "구원파는 이단"인데 "교수님도 이단"이고... 그런데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별반 다를게 없다는 것이 내심 이상하기도 할 것이요.
"내 논문을 심사하고 학위를 주는데 관여하시는 그 분의 말씀이니 그분이 설사 이단이라고 해도 그냥 무시할 수 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대충 그렇습니다. (교수님이 성경에 대한 말씀만 하시면 나타나는) 그 분위기는 꽤 어색합니다.
제 지도 교수님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저희 교수님의 이야기로 시작된... 그리고 그분으로 대표된다고도 할 수 있는... 구원파 형제들의 장단점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파 형제들의 대부분은 소위 정통이라 불리우는 기성교회당에 다니던 기독교인들 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서 구원파 교회당에 다니게 됩니다.
1. 복음전도집회에 친구의 '반강제'에 끌려와서 말씀을 듣다가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되고 다니던 교회당에 발을 끊는 경우
2. 자신의 죄사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
3. 가족, 친구, 친척이 이단에 빠졌다고 해서 구하기 위해서 왔다가 오히려 자신이 넘어가는 경우 등등....
1번의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아는 저희 과 선배는 무신론자였느데, 고 권신찬 목사(일명 삼각지 교회)의 복음집회에 참석했다가 다음의 말씀을 보고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그 형은 그 어느 교회당에도 다니지 않고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제게 구원간증을 나눠주는데... 그런 지독한 무신론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암튼 저희 교수님도 그렇고 그 형도 그렇고, 이들의 경우 그들이 체험한 말씀을 통한 죄사함의 체험은 아주 강렬한 것입니다. (거의 미쳤다는 소리를 주변사람들로부터 듣습니다.)
제가 만난 구원파 형제들은 그러한 점에서 저와 교제를 나누는 데 사실 무리가 없습니다. 저의 경우, 다음의 성경 구절을 보고는 저의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해짐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이 구절을 제시하면 구원파 형제들은 저를 의심없이 형제로 믿어주더군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 9:12)
(잠시 저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구원파 형제들의 체험과 저의 체험에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의 확신으로 인해 지옥과 정죄의 공포에서 벗어난 저는 그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가 되어서 어쩔 땐 막 울었고, 어쩔 땐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던 성경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이 쏙쏙 들어오고, 제 심비에 새겨지는 체험을 처음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꽤 크다는 장로교회의 장로이신 아버지는 별안간 성경에 빠진 절더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왜 안하던 짓을 하니? 학생이 공부나 해야지... 무슨 성경이야? 신학생이냐? 목사될 거야?"
-"아빠, 저 거듭났어요."
"무슨 얼어죽을 거듭남이야. 네 책상 어질러진 것을 봐라 그게 거듭난 자냐?"
-"......" "근데 아빠, 히브리서 9:12 한번 봐 보세요. 주님의 피가 저의 죄를 단번에 그것도 영원히 사하셨어요."
(그럴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상하네.... 내 한 번 목사님께 여쭤보지."
그 이후로 성경말씀보다 목사님을 더 신뢰하시는 장로님이신 저희 아버지로부터서 저는 어떤 말씀도 들을 수 없었고,
저는 구원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원파 이단"으로 아버지에게 찍혔습니다.
몇일 후에 아버지께서는 탁명환씨가 쓴 '구원파의 정체'라는 책을 읽고 계시더군요.
암튼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습니다만...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제가 느꼈던 것과 대동소이하게 구원파 형제들은 죄사함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죄사함을 확신하게 되면서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체험이 그들이 아직도 저리 팔팔 뛰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사회의 문화에서는 누구에게나 거듭남의 체험이 강조됩니다.
거듭나야만 그들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파 사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거듭남'이라는 요한복음 3:3 말씀의 키워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한번은 말씀 앞에 꼬꾸라져 죽는 체험을 하던지 아니면 직간접적으로 맺고있는 구원파 형제들과의 인간관계를 끊던지 해야하니까요.
위와 같은 점은 (저의 제한적이며 주관적인 체험에 의거한 것입니다만...)
제가 경험한 기성교단의 분위기와 문화에 비해서는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 자체가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계속 이어서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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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7년 숭사리 카페에서 최야곱 형제가 올렸던 글입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제목에서 개인 이름은 빼는 것이 좋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분은 이 카페에 계시지 않아서 변증할 기회도 못갖고 계십니다.
다만 누구의 이름을 언급해야할 상황이 부득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칼빈 자신이 유아세례 카톨릭에서 받은 것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장로교에서도 거듭난 분들을 보았습니다(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
장로교 신자들중 많은 경우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것을 봤습니다. 즉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행위로 구원을 보존해야 한다는 식...,
어쩌면 그들이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들은 그렇게 행위로 입증되어야 그것이 구원받은 증거라고 믿고 았었습니다.
아무리 오랜 설명을 해도 견해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만 그리게 되더군요
"이것이 거듭남이다"의 저자이신 목사님(장로교 합동)도 직접 교재를 했었는데 장로교에는 칭의론만 있지 죄사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고
@jacob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계신분들 중에도 이런 저의 이러한 글에 의심이 가는 분들이 있으리라 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택함 받은 증거라는 식
내가 예배를 드리고 또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주님의 축복 가운데 초청받았다는 식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