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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시편131편, 133편,134편
제목 :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모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 제목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모두 확실치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그 의미를
1) 음조(音調=음악이나 시가의 가락)로 보기도 하고,
2) 성전 앞의 15개의 각 층계에서 불려 졌던 노래라기도 하고,
3)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려졌던 노래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뜻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는 시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열다섯 편 모두 매우 짧은 구절로, 깊은 경건심과 신앙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노래하던 시입니다.
이 시들은 포로기간 이후 유다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때 시온에 올라가는 사람들에 의해 불려졌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때 그들은 그냥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편들을 외우며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 자신들의 마음을 점검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노래하며 올라갔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례자로서 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성을 향해 올라가는 여정을, 어떻게 하면 순례자의 삶을 올바로 살 수 있을까?
이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루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순례자라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 자세 중 중요한 삶의 자세 하나를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 나타난 순례자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잠간이 아니라 일생을 더불어 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 순례자는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전할 메시지가 뭡니까?
바로'샬롬'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정직하게 살며, 어떤 사업에서든 무엇을 하든지 평화롭게
대인관계를 맺기를 원해서, 이 순례자는 '샬롬!' 평화를 외쳤습니다.
1. 어린아이 같은 믿음(시131편)
1) 겸손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평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1절).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의 능력에 대해 자만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는 교만이며, 교만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은
인간의 능력을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 모든 미덕들이 한 몸을 이룬다면 그 몸의 머리는 겸손일 것인데,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겸손에 관해 감히 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선 겸손은 자포자기의 체념적인 상태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가 겸손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사 57:15).
*사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또한 이것은 바라세인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며 자신이 그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였는데(눅 18:9-14), 여기에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덕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인한 내적 상태를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본절의 전반절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았음을, 그리고 하반절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각각 나타냅니다(Kidner).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 - 여기서
전자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 과중하여 그것을 맡을 수 없는 임무나 의무들'을,
후자는 '너무 신비롭고 어려워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리킵니다.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 문자적인 뜻은 '내가 내 자신을 걷게하지 않았다'입니다. 여기서 '걷는다'는 것은 삶, 혹은 어떤 행동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스스로의 야망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무모하게 앞서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다윗의 모습을 통치자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시인은 지금까지 교만하지 않았고, 지금도 교만치 않습니다.
교만은 곧장 눈에서 반영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낮추고, 극히 겸손한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2) 겸손한 자가 누리는 평화를 읊고 있습니다(2절)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그 평화는 엄마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의 평혼함과 같습니다.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 이것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신앙으로 극복해 낸 한 영혼의 겸손에 대한 아름답고 순수하고 또한 감동적인 비유적 표현입니다.
대체로 젖 떼는 나이를 세 살 가량으로 본다면, 그 나이가 지나도 여전히 젖을 떼지 못한 아이는 모유의 양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아이는 젖이 부족하여 안달하고 우는 때가 많을 것입니다.
반면에 적절한 때에 자연스럽게 젖을 떼었다는 것은 만족스럽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Anderson).
또한 이 표현은, 아이가 젖을 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요구되어지는 바, 젖 뗀 후의 편안함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 및 그가 얻은 평안함의 순수성과 비이기성(unselfishness)을 읽게 합니다.
젖 뗀 아이는 젖 떼기 전처럼 더 이상 안달하거나 짜증스러워하지 않고,
어머니의 가슴을 바라며 그것에 기대어 만족해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모든 불만족스러운 생각들, 땅의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다가 생기는 모든 안달하는 마음들로부터 벗어나고 나면 조용히 하나님만을 기다리며 그분의 임재 속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의 팔 안에서 평화롭게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1절과 연관시켜 볼 때, 젖을 뗀다는 것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요 4:34).
*요4:3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젖 뗀 아이”는 세상의 헛된 것을 추구하는 모든 욕심을 버린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젖 뗀 아이”는 더 이상 젖을 구하여 울지 않고,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으로 평온과 만족을 가지는 것입니다(130:5~6).
*130:5~6 “[5]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근거요 또한 인간이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자만심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 거한 사람은 진정 어린아이가 어비의 품에 안겨 잠든 것과 같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절)
시인은 자신처럼 이스라엘 전체가 굴욕 중에서라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평온과 만족을 가질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130:7).
*130: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시인은 개인의 경험이 만족의 경험이 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로 본 시편을 끝맺고 있습니다.
2. 연합한 형제의 아름다움(133편)
이 시에 대해서는
① 예루살렘 축제 때 불려졌다는 견해
② 다윗 집안과 사울 집안의 싸움이 끝났을 때를 배경으로 씌었다는 견해 ③ 압살롬의 배반이 막을 내리고 다윗 왕이 돌아올 때를 배경으로 씌었다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이 시는 초대교회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합을 노래하는 데 많이 인용되었고, 지금도 화합과 일치를 나타낼 때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형제화목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그것은 해마다 3대절기(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때 온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한 큰 소득이었습니다.
내용은 형제화목의 아름다움과 그 축복입니다.
1) 형제 연합의 아름다움(1절)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 아름다움은 해마다 세 차례의 순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이스라엘 각 지파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같이 동거하며 좋아하는 모습은 참으로 좋고도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 문자적인 뜻은 '형제가 함께 거처하다'입니다. 따라서 '연합하여'라는 말이 원문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의 삽입이 원문의 의미를 변경시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동일한 정신으로 충만한 가운데 상호 관용과 동일 목적을 추구하는 운명 공동체요,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동일 민족 및 동일 혈족을 가리킵니다(Perowne).
한편 신25:5 내용과 평행을 이룬다는 점에 근거하여 혹자는 본절을 신명기에 언급된 사회 유형을 회복, 보존하기 원하는 기원으로 이해합니다.
*신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또는 '시온'이라는 표현에 강조점을 둔 3절에 근거하여, 본절을 민족적 대절
기 때마다 순례자들이 모여 형제들의 연합, 동거가 가능케 된 데 대한 찬양으로 보기도 합니다.
2) 머리데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2절)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형제화목의 아름다움이 대제사장의 수염에 흐르는 향유에 비합니다.
아론이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 바른 기름이 온몸에 퍼져 향기를 발하듯, 형제의 우애가 매우 아름다운 것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절의 비유는 대제사장의 성직 수임식 때 그의 머리에 부어졌던 기름으로부터 따온 것입니다(출 29:7; 레 8:12; 21;10).
그런데 본절의 초점이 그 기름이 비싸다는 사실에 있는가, 아니면 바로 그 앞절에 언급된 형제 공동체의 전체적 성별 사실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견해 중에 후자의 견해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관건은
바로 본 구절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즉, 머리에 부은 기름이 값비싼 기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경우 본 구절은 단순히 형제의 동거함이 귀하고 아름답다는 의미만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나 머리에 부은 기름을 형제 공동체의 전체적 성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비유로 볼 경우에는 본절 전체의 영적 의미가 풍성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 영적 의미란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하여 귀한 기름과 같은 사랑과 우애를 나누게 될 것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의 내용을 중시하였을 때 본절은 영적 공동체 전원이 동일한 축복에 참여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구절이 됩니다(고전 12장).
보배로운 기름(쉐멘 하토브) - 직역하면 '좋은 기름'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용도에 쓰일 물건이나 사람을 성별(聖別)할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준비된 거룩한 기름을 가리킵니다(출 30:22,23).
결국 이 구절은 바로 앞절의 '형제'공동체가 한 몸과 같은 공동체라는 사실뿐 아니라 성별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
아론 -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을 대표하기 때문에 거명되었습니다(출 28:41; 41:30; 40:13).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산”은 가나안 북방, 레바논 산맥에 있는 가나안의 최고봉입니다.
그 산정의 눈이 녹아 내려 가나안에 물을 주고, 이슬을 줍니다.
우량이 적은 가나안에서는 이슬이 곡초를 살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여튼 북방의 헐몬과 남방의 시온이 서로 돕는 아름다운 모습을 형제화목에 비한 것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 직역하면 '시온 산들 위에 내린 헐몬의 이슬같이'입니다.
직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본문의 초점은 '이슬'에 있습니다.
저자는 형제적 화합의 축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슬로부터 그 이미지를 빌리고 있습니다.
본 이미지가 강조하는 바는 이슬의 새롭게 만드는 특성이나 부드럽게 스며들어 풍요롭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뿐만 아니라, 높고 고상한 산 헐몬 위에 내리는 동일한 이슬이 낮고 작은 시온에도 내린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 형제적 화합입니다(헐몬 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즉, 사회적 신분 등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형제 공동체 일원은 동일한 활력을 마시게 된다는 사실을 본 이미지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본 비유는, 시온이 비록 외관상으로는 낮고 보잘 것 없게 보이나 특별히 성별(聖別)된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곳보다 귀하고 복되다는 사실도 암시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화목의 축복입니다. 저희는 영생을 얻고, 그 형제화목도 기리 계속되는 것입니다(레25:21, 신28:8).
시온에서 형제 화합의 축복된 열매를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곳을 모든 축복과 모든 생명의 중심지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3. 밤에 여호와를 찬양하라(134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결론편으로, 순례자가 순례를 마치고 떠나면서 성전에서 밤에 봉사한 제사장들에 대한 노래(1~2)와 제사장의 응답의 축복으로(3) 구성됩니다.
1) 모든 종들아 밤에 여호와를 송축하라(1절)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순례자들이 제사장에게 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집인 성전에서 밤에 봉사한 여호와의 종들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입니다.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 - 이스라엘에는 밤에도 찬양을 통하여 성전에서 봉사를 했었던 일련의 노래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많은 수도원들에서 그랬었듯이 그 당시 성가대원들은 밤새 계속해서 찬양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물론 정규적인 야간 성가대 회집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 밤에도 성가대들은 성전에서 찬양을 하곤 했었습니다. 대상 9:33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런데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자들을 밤에도 찬양했던 레위인들로 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여호와의 모든 종들'이란 경우에 따라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 또는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나 여기서는 직업적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일하는 모든 자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2절)
“손을 들고는”는 기도와 찬양의 자세입니다(63:4, 119:48, 141: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 '성소'에 해당하는 '코데쉬'는 '거룩함', '거룩한 장소', 혹은 '거룩한 물건' 등 다양한 뜻을 지닙니다.
여기서는 부사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혹자는 이를 '거룩함으로'(in holiness, LB)라고 번역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손'과 연결시켜
'거룩한 (손)'으로 이해합니다(딤전 2:8).
그러나 대부분은 '성소에서'(in the sanctuary, KJV, NIV)혹은 '성소에서'(to the holy place, RSV)라고 번역합니다.
또한 손을 든다는 표현은 기도하는 것을 나타내지만 좀더 포괄적으로는
'찬양하다' 혹은 '예배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손을 드는 행위는 온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입니다.
3)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절)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제사장이 순례자들에게 축복하는 말입니다.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송축이 주제였으나 본절의 주제는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와 성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반면에,
인생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키고 인생에게 없는 것을 은혜로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115:15, 121:2, 창1:1),
그가 거처하시는 시온 성전에서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어다(20:2, 53:6, 128:5)하는 것입니다.
시온의 복 3가지 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보호 (시편17:8), 둘째 , 평화(히12:22, 삼하6:12,16), 셋째 구속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평안과 시온의 복을 누리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