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석(金昌錫) 1652년(효종 3)~1720년(숙종 46) 안동 천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
고조부는 운천. 조부는 야암(野菴) 임(㶵). 아버지는 일류당(一柳) 이기(履基)
168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있을 때 `재약(齋約) 6조`를 지었다. 16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겨울에 제원찰방(濟原察訪)으로 옮겨 청렴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듬해에 아계찰방(丫溪察訪)으로 옮겼다가 1692년에 박사(博士)가 되었다. 이어 전적(典籍)으로 승진한 후 곧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그 후 부모가 연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몽선각(夢仙閣)`을 짓고 부모를 평안히 모셨다. 이후 전라도사(全羅都事), 충청도사(忠淸都事), 강원도사(江原都事)에 제수되었으며, 특히 강원도사 부임시 『금강일록(金剛日錄)』을 지었다.
갈암집
시(詩)
김천여(金天與) 창석(昌錫) 의 몽선각(夢仙閣) 시에 차운하다.
좋을씨고 층암절벽 아스라한 누각에 / 好是層巖縹緲樓
좋은 날 벗들과 맑은 유람 즐겼나니 / 携朋勝日辦淸遊
바람 불면 수면에 이는 잔잔한 물결 / 風來水面波紋漾
달 솟으면 봉우리에 계수나무 그림자 / 月出峯頭桂影浮
꿈을 노래한 시편이 권축을 이뤘으니 / 記夢瓊章聯卷軸
경치 찾는 묵객 몇 번이나 머물렀을꼬 / 探眞墨客幾淹留
조각배로 공명에 노를 저어 가고 싶노니 / 扁舟欲棹空明去
소선의 임술년 놀이가 불현듯 떠오르누나 / 忽憶蘇仙壬戌秋
[주1]공명(空明)에 노를 저어 : 공명은 달빛이 물에 비치어 텅 비고도 밝은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공명을 치며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桂棹兮蘭槳 擊空明兮泝流光〕” 하였다.
[주2]소선(蘇仙)의 임술년 놀이 : 소동파가 적벽(赤壁)에서 놀았던 시기가 임술년 7월 기망(旣望)이었다.
갈암집 속집 부록 제4권
만사 [김창석(金昌錫)]
사문이 추락하지 않았으니 / 斯文不墜地
동해가가 바로 하남이어라 / 東海卽河南
명도에다 이천이요 / 明道曾伊老
존재에다 갈암이로세 / 存齋又葛庵
참된 근원은 활발한 물을 전하고 / 眞源傳活潑
바른길은 넓은 골짜기로 올랐으며 / 正路升蹊
학술은 천인의 이치를 궁구하고 / 學術天人究
문장은 천지의 조화에 참여했어라 / 文章造化參
높은 이름은 학구에서 들렸고 / 高名聞鶴九
높은 관작은 전삼에서 점쳤으며 / 尊爵卜鱣三
장각에서는 엄주를 넓혔고 / 章閣恢淹奏
형당에서는 혜엄을 꺾었어라 / 衡堂折惠啽
유임을 원함에 인망이 무거웠고 / 願留人望重
선생을 고대함에 성은이 깊었건만 / 虛佇聖恩涵
땅을 쓰는 풍상이 모질었고 / 掃地風霜緊
허공을 가르는 기상이 매서웠지 / 橫空氣像嚴
처음 결을 받고 북관으로 유배 갔고 / 北關初受玦
남극으로 또 배소를 옮겼어라 / 南極又遷擔
충신으로 풍파를 내맡겨 두었고 / 忠信風波任
행장은 사달의 이치 익히 알았어라 / 行藏舍達諳
이익과 위세에 흔들리지 않았으니 / 利威元不疚
용모와 모발이 쇠할 수 있으리요 / 髭髮肯成鬖
일월의 빛은 여전히 밝았으나 / 日月光猶燭
전원생활을 기꺼이 감수했어라 / 田園分所甘
범중엄은 천리 밖에서 근심했고 / 范憂千里遠
안연은 일표의 삶에도 즐거웠느니 / 顔樂一瓢堪
춘복은 기석의 뒤를 따랐고 / 春服追沂晳
운거는 노감의 뒤를 이었지 / 雲裾接魯戡
그윽한 곳 골라 세속을 떠났고 / 選幽離俗臼
산사 가까이에 집을 지어 사니 / 卜築近禪龕
제자들은 시례의 가르침 들었고 / 弟子聞詩禮
강산의 좋은 경치 차지했어라 / 江山入討探
미천한 이 몸은 장님과 같아 / 鯫生同墑埴
혼매한 채 길을 헤매었는데 / 茅逕任昏憨
잘못 의진의 무리 속에 들어갔고 / 誤被衣塵流
이어서 강석의 앞에 나아갔지 / 仍進丈席函
용문에서는 비록 선생을 뵈었으나 / 龍門雖奉袂
난실에서는 실로 부끄러움 품었나니 / 蘭室實懷慙
집이 방록과 이웃하여 다행이고 / 家幸隣龐鹿
이참을 몰게 되어 마음이 기뻤어라 / 心欣御李驂
정문일침(頂門一鍼)인 양 가르침 주셨고 / 規箴針下頂
병통을 깨끗이 씻어 주는 약을 주셨지 / 洗滌藥開
지난해 강가 누각에 가서 / 昨歲臨江閣
깊은 가을 대나무 가마를 탔는데 / 深秋住竹籃
바위틈 단풍은 한 빛깔로 곱고 / 巖楓露一色
구름 비친 물은 달빛 함께 머금었지 / 雲水月同含
쇄락하게 맑은 시를 남겼더니 / 灑落留淸製
세상에 전파되어 미담이 되었어라 / 騰傳作美談
만년의 선생을 모시고 다니며 / 長年陪杖屨
길이 장수를 누리시길 축원했건만 / 遐壽祝喬聃
천상에서 홍교가 한번 끊어지자 / 天上虹橋斷
인간 세상에 큰 꿈이 깊어졌어라 / 人間大夢酣
새로 지은 집은 처량하고 / 凄涼新宅舍
옛날 그 강물은 쓸쓸한데 / 寥落舊江潭
아름다운 명망 북두성처럼 높고 / 令望看星斗
그 유풍 자제에게 남아 있도다 / 遺風屬子男
불쌍히도 밝은 세상에 버림받은 몸 / 自憐昭代棄
나는 누굴 의지해 흐린 눈을 틔울꼬 / 誰仗翳眸鐕
만사를 적어 한 번 길게 통곡하노니 / 題挽一長痛
위태한 세상길은 날로 험악하여라 / 畏途日險嵁
[주1]사문(斯文)이 …… 갈암(葛庵)이로세 : 도학(道學)의 명맥이 이어져 중국 하남(河南)의 정자(程子) 형제와 같이 존재 이휘일(李徽逸)과 갈암 이현일 형제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주2]참된 …… 올랐으며 : 도학의 진수를 이어받았고, 학문의 바른길에 올랐다는 뜻이다.
[주3]학구(鶴九) :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구고의 늪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 하였는데, 이는 은거하는 군자의 덕이 멀리까지 알려지는 것을 비유하였다.
[주4]전삼(鱣三) : 후한(後漢) 때 양진(楊震)은 호학(好學)하여 호(湖) 땅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뿐 주군(州郡)의 초빙이 잦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강론(講論)하는 강당 앞에 황새가 세 마리의 전어(鱣魚)를 입에 물고 와 떨어뜨렸다. 이에 도강(都講)이 전어를 집어 들고 말하기를 “사전(蛇鱣)은 경대부의 복장의 무늬이고, 셋이란 숫자는 삼공(三公)을 상징하니, 선생께서는 이제 높은 자리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주5]결을 받고 : 결(玦)은 패옥(佩玉)의 일종인 노리개인데 환(環)은 완전히 이어진 반면 결은 터져 있으므로 결별(訣別)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고대에 유배를 보낼 때에는 결을 주고 석방할 때에는 돌아오라는 뜻으로 환을 주었다 한다.
[주6]충신(忠信)으로 …… 두었고 : 자장(子張)이 ‘어떻게 하면 뜻이 행해지는지’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이 충성스럽고 미더우며〔忠信〕 행(行)이 돈독하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만맥(蠻貊)과 같은 오랑캐 나라에서도 뜻이 행해질 수 있겠지만 말이 충성스럽고 미덥지 못하며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면 비록 고을이나 마을에서인들 뜻이 행해질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여기서는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사나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갔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7]행장(行藏)은 …… 알았어라 :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초야에 물러나는 것에 있어서 모두 이치에 달관한 자세를 보였고 사사로운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부릉(涪陵)에서 배를 탔는데, 풍랑이 극심하여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정이는 신색(神色)이 자약하였다. 배에서 내리자, 언덕 위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를 높여 정이에게 묻기를, “사(舍)해서 이러한가, 달(達)해서 이러한가?〔舍去如斯 達去如斯〕” 하였다. 여기서 사(舍)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고 달(達)은 모든 이치를 달관한다는 뜻이다. 《心經 卷2》
[주8]일월의 …… 감수했어라 : 임금의 지혜가 밝아 여전히 갈암을 조정에 불렀으나 갈암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은거했다는 뜻이다.
[주9]범중엄(范仲淹)은 …… 근심했고 : 범중엄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묘당(廟堂)에 높이 있을 때는 그 백성을 근심하고 강호에 멀리 있을 때는 그 임금을 근심하니, 이는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 즐거운가. 반드시 천하가 근심하기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5》
[주10]안연(顔淵)은 …… 즐거웠느니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一簞食 一瓢飮〕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자면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주11]춘복(春服)은 …… 따랐고 : 기석(沂晳)은 기수(沂水)의 증석(曾晳)이란 뜻이다. 증석은 공자의 제자이며 증삼(曾參)의 아버지인 증점(曾點)의 자이다. 증점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슬(瑟)을 울리다 말고,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라고 하자 공자가 그의 쇄락(灑落)한 기상을 인정했다. 《論語 先進》
[주12]의진(衣塵) : 육기(陸機)의 〈위고언선증부(爲顧彦先贈婦)〉 시에 “집 떠나 먼 객지에 떠도는 몸 아득히 먼 길은 삼천 리이어라. 경성에는 풍진도 많아서 흰옷이 검게 변했다오.〔辭家遠行游 悠悠三千里 京洛多風塵 素衣化爲緇〕” 하였다.
[주13]용문(龍門)에서는 …… 품었나니 : 용문은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살던 곳이다. 난실은 지란지실(芝蘭之室), 즉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이란 뜻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선(善)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 그 향기는 못 맡더라도 오래 지나면 동화된다.” 하였다. 여기서는 작자가 갈암을 방문한 적은 있으나 갈암을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공부한 적은 없어서 아쉽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14]집이 …… 기뻤어라 : 작자의 집이 갈암과 가까워 자주 모시고 다닐 수 있어 기뻤다는 뜻이다. 방록(龐鹿)은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녹문산(鹿門山)에 살았기 때문에 만든 명칭이다. 제갈량(諸葛亮)이 방덕공을 찾아가면 반드시 방덕공이 앉은 상(牀) 아래서 공경히 절하였고 방덕공은 제지하지 않고 태연히 절을 받았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65》 이참(李驂)은 후한 때 이응(李膺)이 타던 수레를 뜻하는 말이다. 순상(荀爽)이 이응을 배알하고 이응을 위해 수레를 몬 뒤에 집에 돌아와서 “오늘에야 내가 이군(李君)을 위해 수레를 몰았다.” 하였다. 《後漢書 卷97 李膺列傳》
[주15]홍교(虹橋)가 한번 끊어지자 : 고인(故人)이 되었음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무이도가(武夷櫂歌)〉에 “홍교가 한번 끊어진 뒤로 소식이 없는데 만학천봉(萬壑千峯) 바위에는 푸른 안개만 자욱해라.〔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翠煙〕” 하였다. 진시황(秦始皇) 때 위자건(魏子謇)이란 사람이 십삼선지(十三仙地)의 주인이 되어 무이산(武夷山) 위에 승진관(昇眞觀)을 짓고 무지개 모양의 다리, 즉 홍교를 연결하여 오르내리며 연회를 열었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에서는 ‘위자건이 신선이 되어 승천한 뒤로 홍교가 끊어지고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朱箚輯補 卷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