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0. 주일예배 설교(요한복음강해 32)
요한복음 8장 1~11절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
■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잘 모시는지, 잘못 모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인 것 같습니까? 예배 참여도와 집중도로 알 수 있을까요? 중요한 척도인 것 같습니다. 교회 봉사의 정도로 알 수 있을까요? 이것도 중요한 척도인 것 같습니다. 교회의 리더십에 순종의 정도는 어떨까요? 이것 역시 중요한 척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 것 같습니까?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모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써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 5장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이후 급속히 높아졌습니다. 물론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에게 곤혹을 치르게 되셨지만, 군중들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발표하고 나신 이후의 여론은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보시다시피,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여론은 급반전 되어 소위 예수님 스토커들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가 급속히 솟구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밥으로 소개하자, 치솟던 인기가 급락하였습니다. 더욱이 예수님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자, 군중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등지고, 모두가 떠나고, 모두가 반발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니고데모와 같은 유력 인사의 용기 있는 지지(支持) 발언도 있었습니다. 7장 51절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니고데모의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들어 보고, 알아보고, 물어 보고, 따져 보고’ 난 후 신중하게 판결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태도가 아니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 이러한 율법의 정신과 태도에 대한 실제적 적용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니고데모의 발언을 예수님이 해석해주신 사건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몸을 파는 거리의 여인을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처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3~6절을 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들의 행동은 예수님을 고발할 건수를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명색은 율법을 앞세운 변명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공동번역개정판) 법과 원칙에 의해 이 여인을 잡아 왔고, 법과 원칙에 따르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법과 원칙을 앞세워 가장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과 기관들이 참 많습니다. 소위 선택적 정의에 의해 불의는 교묘하게 정의가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방의 정국에서 일제부역자들이 경찰이 되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후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국민들을 옥죄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을 베껴 만든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무수한 인권탄압을 자행하지 않았습니까?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수한 불법과 탄압이 우리 근현대사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에 대한 비판 없이 쇠뇌 당해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둡기만 합니다.
■ 이 여인을 잡아온 사람들은 이 여인을 율법을 통해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6~8절을 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If any of you have never sinned, then go ahead and throw the first stone at her!) 예수님의 대답인즉, 죄 없는 자는 이 여자를 정죄하고, 더욱이 처형할 자격이 있지만, 죄가 있다면, 이 여자를 정죄하고 처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잠시 시간을 두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시간을 두고 지켜보셨습니다.
결과는? 그 누구도 이 여자를 정죄하지도, 처형하지도 못했습니다. 9절로 확인해보죠.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여자를 정죄하고 처형할 만큼 깨끗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는 일을 정의의 관점에서 행합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정죄하고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과연 던지던 돌을 계속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억지로 꿰맞추자면 예수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10~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정죄할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그런데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에서 풀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해방이지 정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는 누구에 대해서도 정죄자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해방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굳이 정죄를 해야 한다면, 예수님에게만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권한이 없습니다. 이유를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 중 누구도 누구보다 죄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유별나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태도입니다.
■ 우리는 설교 서두에서 이런 질문을 나눴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잘 모시는지, 잘못 모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답이 나왔죠?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태도로 사느냐, 사람을 해방시키는 태도로 사느냐로 신앙의 여부를 가름할 수 있습니다.
혹시 신분으로, 성별로, 출신지역으로, 재산의 정도로 해방과 정죄 사이를 오고간다면 이것은 더욱 안 될 일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매우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타자에게서 나타내십니다. 이를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타자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 외에 모든 존재인 타자에게 나타내십니다. 나는 타자를 통해서, 타자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대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잘 모시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부터 예수님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태도를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너 보다도 훨씬 큰 죄 가운데 있으면서 너를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해방의 나라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