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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감조식금촉귀일풍류도 스크랩 [민족사상] 삼일사상과 카발라의 우주관 비교
불망 추천 0 조회 45 19.01.08 17: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민족사상] 삼일사상과 카발라의 우주관 비교

  • 글쓴이: 농욱
  • 09.08.26 13:57
http://cafe.daum.net/gookiksuho/J44d/57

들어가기

 

한동안 어디를 좀 갔다 왔더니 지난 글과 연결이 잘 되지를 않습니다.

우선 시동을 다시 거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리를 해 보죠.

 

향후 글의 방향이기도 한데요...

*두 문명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인류문명의 시원이지만 그 흔적조차 거의 지워진 정신문명의 주체세력인

한민족의 원형사상을 더듬어 보고 있고요...

또 하나는 지금 우리의 몸과 정신, 마음을 거의 장악한

이 서구문명의 시원과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문명은 BC2600년경 환웅천황의 신시배달국으로 부터 시작하였으나 점점 쇠락의 길을걸어 오늘에 이르렀고...

서구의 물질문명은 BC2300년경 수메르의 엔릴/엔키로 부터 시작하여

바빌론-이집트-로마-영국을 거쳐 미국을 올라타고 전세계를 그 영향권에 넣고 있습니다.

 

 

                               

 

그림과 같이 이 문명의 순환도 반극(이태극)과도 같이 음양운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극에 달하면... 변화가 필연적으로 오는것이 변화의 원리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우주의 주기가 이와 같습니다.

한때 세계를 전부 채웠던 찬란한 문화와 문명세계가 온데간데 사라지고 이제 그 흔적도 찾기 힘들뿐더러

 제 스스로도 정체성을 거의 망각한 단계에 직면했음은 물론...

외부세력은 이민족을 끌어들여 '세계화'란 언어적 유희로 희롱하며

유전적 혈통마저 씨를 말리려하는 다민족 다문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후손된 입장으로 마땅히 우리의 핵심정신이 무엇인지를 궁구해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하루빨리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겠다 하겠습니다.

 

결코 국수주의적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삼일사상은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말살직전에 와 있지만... 그 작은 한조각의 편린속에서도 웅장한 진리의 불꽃을 내 뿜고 있습니다. 진실과 진리는 크기의 무게로 가름하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아래의 글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새겨보실 수 있겠지만... 세계의 어느 사상과 철학, 종교에서 볼 수없는 완전한 진리의 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사상에 가해진 거대한 왜곡의 문제를 벗겨내면... 그 스스로 빛을 발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일 중요한 우주관/우주탄생론/인간관에 관한 내용으로 삼일사상과 카발라(신지학)을 주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아직 삼일사상을 온전히 들어내기엔... 많은 세월과 인고의 고통이 따르는 연구작업들이 병행되어야 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체계는 서양식의 변증법적 논리전개로 단순비교 될 수 없습니다. 어차피 극명한 물질문명의 세계에 우리가 당도하여 소위 '현대화'란 개념에 세인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야만 하는 작업이 필요하기 합니다. 이 연재글들을 정리해 올리며 예전에 홅어 보았던 카발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매우 정교하고 놀라운 우주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하늘로 부터 전수된 우리의 사상은 그들의 매우 전문적인 秘傳에 비해 더욱 대단함을 알게 합니다. 카발라가 한 분야에 깊숙히 파악된 전문교재의 색채가 느껴지는 반면에... 우리의 사상은 전체적이며 함축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차이는 기본적인 출발 자체에서 나오는 문화적인 차이입니다.

 

 

 

 

위 그림은 예전에도 제가 두 문명을 비교하며 인용한 그림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도단의 절대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오감에 의지한 지식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나누고 분해하지 않고 전체를 한꺼번에 전달하기 위해 '직관'적인 방법을 훈련시키고 그 소통의 방법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상을 말합니다.

 

반면에 서구문명은 분석하고 실험하고 나누고 쪼개서 가급적 현재의 인간의식(영/마음이 아닌 의식차원) 속에서 이해를 구해가는 방식으로 부터 발전해 왔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를 보면 금방 이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시/문학/음악/춤... 등 모든 영적인, 정신적 활동인 문화의 차이를 보면 두 문명의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문화적 특질의 차이로 인해서...

우리의 사상체계나 우주관/인간관의 표현은 매우 관념적이고 함축적이며 상징적입니다. 저는 이런 상징적인 체계들을 가급적 '현대적 표현'으로 이끌어 보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전체를 보는것....

한꺼번에 관조하여 통찰해 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방식이었고 이 때문에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서가 부족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부족한 부분은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전개한 이론들을 보충하는 방법이 필요할것 같습니다.

과학이 오늘과도 같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이러한 '전승'이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극한에 다달한 과학은... 이제 물질세계를 관통하여 이원성을 넘는 관념의 의식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현실은 안이 밖이고, 밖이 곧 안이되는 안과밖이 관통한 세계로 이미 진입하였습니다.

 

 

삼일사상과 카발라의 우주관 비교

우선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사대사상부터 청산합시다.

우리 고유의 훌륭한 정신자산이 있음에도 이를 애써 무시하며 하챦게 여기고 외래의 사상에 열광하는 노예근성을 버립시다.

 

우리의 삼일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의 머릿골에 설치된 메트릭스부터 철거해야만 합니다.

잠시 나열해 보죠.

*천/지/인의 그릇된 해석

*성/명/정의 왜곡

*오행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이 글은 사실 성/명/정의 올바른 자리찾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윗 그림은 오행사상이 만들어 낸 '웃지못할 우주론'입니다. 무극과 반극(이태극), 황극을 그럴듯하게 연결시켜 놓았으나... 사실은 서로가 전혀 무관한 어불성설의 내용들입니다. 특히 황극이란 도형은 전혀 출처를 알지 못하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같은 거대 왜곡의 만행은 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란 책에서 주장하고 있고 증산계열의 종교계에서 열심히 인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위의 내용을 수정하면 아래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위의 그림은 부도지를 바탕으로 창세의 과정을 요약해본 그림입니다.

사실 간단한 도형이라 무시하실지 모르지만... 매우 간단하고 알기쉽게 되어있고 축약된 한시처럼 이 속에서 우주의 거대한역사가 쏟아져 나옵니다. 놀라운것은 이러한 우주관이 힌두이즘이나 카발라의 핵심내용들과 상충되지 않고 우히려 상호 보완적 관계로 미진한 부분들에 대한 숨어있는 의미를 잡아내도록 안내자처럼 상호간에 보완작동을 한다는 겁니다.

 

삼일사상과 카발라를 비교해 보면 더욱 이 관계가 명확해 집니다.

 

 

힌두이즘의 니구나브라흐만은 우리의 표현으로 '한', 하늘, 理, 무극, 무위, 道 등에 해당하겠네요. 일과 삼의 체용관계는 아직 힌두이즘에 대해 잘 모르는 관계로 나중에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대계인 사구나브라흐만이 마야와 이슈와라 둘로 표현하는것이 흥미롭군요. 마치 짐세(우주)와 마고(신)으로 표현하는것과 일치합니다.

 

 

 

 

 

 

 

카발라에서는 절대계를 아인/아인소프/아인소프오르의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아인(AIN) :  무(無) 또는 비현현성

아인 소프(AIN SOPH) :  현현 이전의 절대공간

가장 초월적인 상태에 있으며 궁극의 근원에 해당하는 절대공(Absoulte VOID). 이 절대공의 상태를 아인 소프(AIN SOPH)라고 칭한다.
아인 소프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초월 상태의 상징적인 표현.

아인 소프 오르(AUR) : 무한광(無限光) 혹은 무한한 빛
아인 소프는 아인 소프 네거티브와 아인 소프 포지티브로 나뉠 수 있는데, 아인 소프 포지티브의 처음 상태를 보이드. 네거티브의 단계는 호아(HOA) 아이요드(I.YOD), 심연(ABYSS), 혼돈(KAOS) 등으로 세분되며 이 호아는 가장 거룩한 태고의 존재(Acient of Days)라고 불리는데, 이를 진정한 우주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無, 無限의 관념으로 아인/아인소프/아인소프오르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하고... 호아 이후에 등장하는 창조의 세 국면으로 로고스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제1 로고스 : (의지)/카오스(혼돈)

제2 로고스 : (지혜)/에로스(사랑)

제3 로고스 : (할동성)/가이아(대지)

 

상기 그림에서 편의상

아인(AIN) --> 제1 로고스

아인 소프(AIN SOPH) --> 제2 로고스

아인 소프 오르(AUR)  --> 제3 로고스

로 대응시켰습니다. 하지만 카발라나 신지학에서는 우리의 一/三 삼신의 이름이 불분명하며 더욱이 상대계로 나타나는 이 삼신의 현현과정에 대한 정확한 대응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아래 첨부한 내용은 이 과정(우주창세민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탄생과정)에 대한 놀랄정도로 세부적인 과정들의 묘사가 잘 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것은 절대계의 비현현존재와 상대계의 우주/神 등의 상관관계가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삼일사상은 표현은 간단하지만 1=3, 1-->3-->7의 창조 과정과 차원층차의 형성과정에 대한 결정적인 인과관계를 제공하고 있음이 특징입니다. 1영 - 3혼 - 7백에서 보듯이... 인간의 혼이 세가지이며 물질몸은 일곱차원의 다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7의 수리는 자연에서도 나타납니다.

 

1(백색광) - 3(빛의 삼원색) - 7(빛의 산란으로 나타나는 무지개의 일곱색깔)

 

3혼이 특이한데 생명계를 관찰해 보면 이 삼혼의 정체를 알 수 있을것도 같습니다. 예전의 글에서 命을 설명하며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비유하였는데 1)BIOS 2) 운영체계인 OS(Operlating Software) 3) 응용소프트웨어로 비유할 수 있고... 칼융의 표현으로 표면의식,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저는 슈퍼에고를 靈적인 영역으로 판단합니다)으로 혼을 나눌 수 있을것 같습니다.

 

아래의 신지학 관련글은 좀 길지만... 또 삼신의 자리와 잘 매칭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많은 영감을 여러분께 선사할 겁니다. 많은 참고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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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의 우주여행


육체 밖으로
몇 년 전, 나는 작은 체험을 하나 하였다.

명상을 한 후 어슴푸레 잠이 들었을 무렵, 갑자기 내가 내 방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방의 한쪽 벽과 창문이 보였으며, 창문 밖으로 뭔가가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 이상한 것을 깨달았는데, 잠을 자느라 누워 있었던 내 눈엔 천장이 보여야 했던 것이다. 순간 두려움이 일었으며, 때마침 다른 방에서 나는 것 같은 짤막한 부저 같은 소리에 그 이상한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그때서야 나는 눈을 떴다. 물론 나는 누워 있었고, 눈앞에 있는 것은 어두운 천장뿐이었다. 창문은 고개를 들어야만 볼 수 있었다. 방금 꿈을 꾼 걸까? 그러나 그건 분명 꿈이 아니었고 너무나 생생했다. 더욱이 나는 내 방의 것과 똑같은 벽과 창문을 보았는데, 그런 광경을 보려면 서 있거나 상체를 일으킨 자세에서만 가능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잠시 후에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는 걸 눈치챘는데, 한밤중에 불이 꺼져 있었으므로 내 방은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벽과 창문도 윤곽만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야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희미하게 발광하는 듯한 비교적 밝은 벽을 보았던 것이다.

유체이탈! 나는 비록 그 경험이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났고 몸을 완전히 떠나지도 못했지만 말로만 듣던 유체이탈이 내게도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유체이탈에 대한 경험담을 더 많이 접하게 되었을 때, 내가 겪은 경험이 유체이탈의 초기에 일어나는 현상들과 정확하게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이런 유체이탈, 그리고 임사(臨死)체험과 같은 사례들은 육체를 넘어선 또 하나의 몸 또는 영혼의 존재를 시사하며, 동시에 육체의 죽음과 관계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육체를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육체는 죽고 형태는 변하지만 생명은 지속될 것이다. 그래도 남아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나 대학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사춘기 청소년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인식의 변화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데 대한 인식의 변화도 함께 요구한다. 나는 생명이 떠나면 썩어 문드러지거나 7년마다 몸의 전세포가 완전히 바뀐다고 하는 육체는 분명 아닌 것이다. 냄새나 소리, 통증과 같은 감각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여러 감각기관이나 신경덩어리도 나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기뻐하고 슬퍼하며, 사랑에 지쳐 울거나 두려워하기도 하는 이런 감정들이 나일까? 아니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 생각 자체가 나일까? 그것도 아니면 앞서 말한 생명이나 영혼이 진정한 나일까? 하지만 생명과 영혼이 진정한 ‘나’에 해당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아직 생명과 영혼의 실체와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유체이탈시(또는 유체이탈이 일어나려고 했던 순간)에 보았던 벽이 보통 우리가 보는 물질의 벽이 아니라는 데 주목하였다. 그림자 없이 희미한 빛을 내던 비정상적 벽의 모습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색깔도 원래의 벽과 달랐다.

추측하건대 나는 에텔 질료로 된 벽을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 유체이탈에서 유체(幽體)란 1차적으로 에텔체를 가리키는데, 에텔체는 바로 에텔계의 여러 자극과 인상을 받아들이기 위한 신체적 도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잠시 육체와 분리된 나의 에텔체가 의식의 채널로 작용하여 같은 진동대(존재계)에 속하는 에텔계의 벽을 보았던 것이다.

사실 모든 물체는 그 자신과 형체가 닮은 에텔 질료로 둘러싸여져 있으며, 이것이 유체이탈을 경험한 사람들이 보통의 평범한 물체를 보았다고 착각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유체이탈 상태에서 본 탁자는 일반적인 탁자와 형태가 똑같을 뿐이지 실은 에텔 질료로 된 에텔계의 탁자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체이탈과 관련해 충분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우주에 여러 차원의 존재계가 있는 것처럼 유체이탈에도 여러 차원의 등급이 있다는 점이다. 육체를 벗어난 에텔체는 그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에텔체를 넘어서면 아스트랄체라는 또 하나의 몸이 있는데,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아스트랄체는 아스트랄계의 질료로 이루어졌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의식은 아스트랄체를 통해 유영을 하며, 더 이상 물질계에서 보던 것과 닮지 않은 전혀 다른 차원의 풍경을 보게 된다. 아스트랄체를 넘어서면 또 멘탈체라는 의식의 매체가 있다. 이렇게 유체이탈은 마치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식으로 차원을 높여가며 여러 단계로 탈바꿈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러 의식의 체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마치 신경계와 순환계, 그리고 임파계와 골격이 하나의 육체 속에 중첩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의 커다란 수직적(차원간) 시스템을 이룬다. 바로 이 시스템이 인간이라는 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신체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육체로만 이루어졌다고 하거나 단순히 육체와 ― 애매모호한 개념의 ― 영혼으로만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 등 여러 겹의 몸이 중첩하여 이루어진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위의 체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까? 보통 우리는 화학원자들만이 물체와 형상을 형성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화학원자가 아닌 아원자 입자나 고차원의 원소가 어떤 형상이나 에너지 그물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 물리학의 이해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고차원은 실제적 의미가 없는, 소립자 내부에 쓸모없이 압착된 수학적인 개념으로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새로운 현상들이 종종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쉽게 부정적인 속단을 내릴 일만은 아니다. 한 예로 로버트 로그린은 분수전하를 가진 양자유체의 새로운 형태(양자 홀 효과)를 발견하여 전자들이 집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이 업적으로 1998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또 최근에는 하나의 전자와 복수의 자력선이 결합한 복합 페르미온(composite permions) 같은 모델이 제시되어 입자 행동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한편 생명체와 전류의 관련성을 깊이 있게 연구한 헤롤드 버나 로버트 베커 같은 이는 모든 생명체에는 전자기적인 생명장이 존재하여 생명체를 형성하고 조절하는 일종의 틀로서 작용한다고 보았는데, 그 기능이나 전자기적인 성질은 에텔체 혹은 아스트랄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체전자기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자기적인 격자구조가 먼저 형성된 뒤에 이 에너지장의 영향에 따라 물질이 이합집산한다는 것인데, 이는 생명체의 발생과정이나, 특히 일부 저급한 동물들에서 볼 수 있는 신체 일부의 놀라운 재생능력 같은 현상들을 쉽게 설명해준다.

결국 생체전자기장의 존재 가능성은 생명체의 모델이 되는 ‘원형(原型)’이 존재함을 뜻하고, 이 경우 생명체의 발육과 성장이 유전물질(DNA)에 의한 것만은 아님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물질은 보다 높은 차원, 즉 영적인 차원의 작용으로 물질에 영향을 받아 어떤 특정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을 물질만으로, 또는 물리화학적 작용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예가 인간으로, 인간은 원자의 집합 그 이상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과 의식이 없는 에너지뿐이고 생명활동이나 의식활동은 복합적인 유기물 시스템이 만들어낸 이차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기실 이 우주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영적인 측면이 있고, 그런 의식활동에 비하면 오히려 물질이 부차적인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영적인 측면을 다루는 것이 이번 장의 주된 목적이다. 또 영혼과 의식의 진화, 그리고 전진화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의식과 형상, 또는 의식과 물질의 관계를 알아봄으로써 우주가 운영되는 방식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는 물질과 형상을 위주로 다루어왔다.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와 물질의 형성에 있어 형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명쾌하게 밝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는 적지 않은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독자들이 이 책의 내용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면, 물질의 기초인 원자에 대한 개념 역시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원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원자는 힘의 센터라는 대답이 아마도 가장 적절한 대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찌감치 1920년대 앨리스 베일리 여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이러한 개념은 이미 그 당시 과학계에도 생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19세기를 말함)에 원자는 분리할 수 없는 질료의 단위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적인 힘 혹은 에너지의 센터로써 여겨진다." (원자의 의식, p.18)

사실 원자는 에너지와 물질의 경계에 존재한다. 에너지가 물질화된 첫 번째 구조물이 원자다. 원자는 모든 물질의 기초이고, 에너지의 센터이자 에너지의 형상이다. 바로 앞 장에서 보았듯이 원자와 물질은 에너지가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형상화한 것이다.

반대로 순수한 에너지, 즉 영은 형상을 갖지 않는다. 그렇지만 질료와 영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블라봐츠키 여사가 표현하였듯이 “영과 물질은 영도 물질도 아닌 그 하나의 두 가지 상태이다.” 다만 우리가 보기에 질료와 영은 분리된 것으로 나타나며, 이렇게 질료와 영을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주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 오히려 더 편리할 수도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물질 내부에서 작용하는 측면에서 보면 영은 형상 속을 흐르고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영은 의식 또는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용어는 경우에 따라 구별해서 써야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동일한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이라고 할 때에도 매우 다양한 차원의 의식이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리학에서 다루는 영역만 해도 현재의식(표면의식), 잠재의식, 무의식, 집단무의식 등이 있고, 인간의 의식이 있는가하면 동물의 의식, 식물의 의식, 그리고 단세포 생물이나 세포, 심지어 광물이나 원자에 해당하는 단순의식이 있고 행성 차원의 의식이나 우주의식과 같은 초월의식이 있는 것이다.

또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인간 의식의 작용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오식(前五識)과 의식(意識, 제6식), 말나식(末那識, 제7식), 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오식은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알게 되는 식(識)으로 사고(思考)의 과정을 포함하지 않으며, 제6식인 의식은 주로 두뇌작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표면의식이라고 말할 때의 의식과 가까운 것이다. 제 6식인 의식을 표면의식에 비유하면 제7식인 말나식은 잠재의식에 비유될 수 있는 것으로, 나중에 언급하게 될 에고(ego)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말나식은 마음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제8식인 아뢰야식은 아다나식(阿陀那識) 또는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아라야(alaya)에서 연유한 것으로 아(a)는 부정, 라야(laya)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는 영원히 존재하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 즉 중생(衆生)의 근본생명이다. 바로 이 아뢰야식이 육체가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의식은 표면의식일 뿐이고, 가끔 꿈이나 예지를 통하여 심층의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해온 신비학의 맥락에서 이해하면, 하위 차원의 의식과 생명의 본질은 영이고 그 본체는 우주의식, 즉 로고스이다. 우주의식은 다시 파라브라만, 즉 물질과 별개일 수 없는 하나의 위대한 초월의식에서 분화된 것이다. 물질은 로고스의 신성한 의식이 외부로 현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연극의 각본이 로고스의 의식이라면, 영은 배우들의 연기이고 물질은 배우와 무대, 무대장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신의 생명은 형상 속으로 들어가 진화한다. 바로 이것이 형상이 존재하고 물질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형상과 물질을 통해서 영은, 또는 우주의식은 그 자신을 표현하고 진화해간다. 결코 물질이 의식이나 생명, 영혼 따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한편 진화하는 영(의식)은 한층 진보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낡은 형상을 벗고 새로운 형상으로 항상 거듭나야 할 운명에 있는데, 이는 마치 여행 중인 사람이 일정한 목적지에 도달하면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타는 것과 같다. 애니 베산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주어진 우주 속에서 신의 생명은 형상들의 향상적(向上的)인 계열을 통한 많은 생명(체) 속으로 진화한다. (로고스의) 생명력은 에너지로서 현현하며, 형상에 의하여 겉으로 드러나고 더욱 계발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생명이 계발되기 위해서는 형상들을 계속하여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형상은 처음에는 생명의 표출과 계발의 수단이 되지만 나중에는 속박의 틀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생명 ― 나무가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신의 생명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 속의 잠재적인 힘이 주변환경의 작용에 의해 표출되기는 하나, 유용한 탈것이었던 형상은 생명을 속박하는 틀이 된다. 생명은 형성된 형상에 의해 질식해 소멸할 뿐 아니라, 형상은 조각조각 분해되어 더 높은 형태의 형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생명을 놓아주어야 한다. 형상은 분해되지만 생명은 소멸하지 않는다. 언제나 확장, 발전하는 생명을 중심으로 한 형상들의 분해는 진화를 의미한다.” (영적인 삶, p.52)

생명뿐만이 아니라 질료와 형상도 함께 진화한다는 개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형상들 속에 진화하는 생명이라는 개념과 자연이 보여주는 질서정연함,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들의 존재는 진화과정 속에 어떤 지성적인 요소가 있음을 암시하고 이는 수많은 형상 속을 흐르는 의식의 진화를 고려하게 만드는데, 엘리스 베일리 여사는 이 진화하는 의식이 밟는 경로는 인간 이전의 의식 상태로부터 진화하여 어느 순간에는 인간의 단계를 거치게 되고 이윽고는 초인간적 의식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질 형상과 그 형상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지성의 배후에 ‘나’의 기능에 해당하는 것, 혹은 인간의 자아에 해당하는 그 무엇의 진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자의 의식, p.19)

물질과 형상의 배후에서 진화의 추진력을 제공하는 이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앞서 의문을 품었던 ‘진정한 나’와 동일한 존재일까?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이며, 동식물의 의식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 윤회의 주체, 아뢰야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의식의 단위 모나드
흔히들 의식과 물질은 별개의 것이며, 따라서 의식이 떠난 물질은 완전한 불활성의 죽은 물질이라고 여기기 쉽다.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물질을 배척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의식은 소립자 수준의 물질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게다가 의식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비단 전자만이 아니다.

빛의 경우를 한번 보자. 비동조성의 평범한 광원으로부터 방출된 광자들은 일반적인 상식대로라면 검출기에 도달할 때 고른 분포를 보여야 되지만, 실제로는 무리를 지어 다발로 검출되는 현상이 있다. 이것은 마치 광자들에게 사회적 성격이 있어 저희들끼리 뭉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보고 독일의 물리학자 프리츠 포프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란 양자 수준의 공유상태가 많고 적음에 따른 것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림 9.3> 무리를 지어 도착하는 광자의 다발 효과



휠러가 제안한 이중슬릿 실험에서도 빛의 특이한 성질이 드러난다. 두 개의 슬릿이 뚫린 스크린을 빛이 통과하도록 장치하고 스크린의 오른쪽에 두 개의 입자검출기를 그림과 같이 놓으면, 빛은 하나의 슬릿과 하나의 입자검출기를 향하는 한정된 통로를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입자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중슬릿과 입자검출기 사이에 검출을 위한 스크린을 설치하면 빛이 이번에는 파동처럼 반응한다. 빛은 두 개의 슬릿 모두를 통과하여, 스스로 간섭한 후 검출 스크린 위에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실험자의 행위나 의도 자체가 실험결과에 영향을 미치거나, 빛이 마치 전체 실험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9.4> 휠러의 이중슬릿 실험 개략도>



빛(광자)은 2장에서 언급한 입자의 분류에 의하면 보존에 속하는데, 특히 이 보존들의 성질은 파동에 가깝고 동일한 공간에 중첩하여 존재하는 등 고전적인 물질 개념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자연의 입자들을 서로 이어주는 힘의 매개역할을 하며, 동일한 양자상태를 공유하는 보존의 성질은 어찌보면 물질이나 입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식과 유사한 것이다. 물리학과 함께 철학을 공부한 다나 조하르는 두 개의 보존이 만나서 상호작용하는 것이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단계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페르미온 역시 쌍을 형성하면 보존처럼 행동하므로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원자 입자들은 의식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입자의 속성은 이미 앞선 장들에서 언급했듯이 사실상 물질과 의식이 별개가 아님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비록 초보적인 단계일지라도 아원자 입자들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은 모든 만물에 의식이 편재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을 연상케 한다. 사실 범신론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함께 있어온 보편적 철학사상이며, 지금과 같이 생명 없는 물질이라는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된 것은 최근 몇백년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들이 이런 범신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양자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물질이 동일한 원질로부터 분화되었지만 원자라는 물질의 기본 단위를 갖는 것처럼, 의식 역시 기본 단위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을까?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진화된 유기체들이 있으며, 각 생명체 또는 유기체마다 다른 유기체와는 구별되는 개개의 의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의식 역시 근본은 하나이지만, 어느 한 지점에 초점을 맺거나 바다에서 떨어져 나온 물방울처럼 개체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가 영혼이 ‘영혼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으며, 에피쿠로스 역시 ‘영혼의 원자’라는 것이 온 몸에 흩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개체화를 이룬 의식 혹은 의식의 단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앞에서 거론한 진화의 주체, 또는 물질과 형상의 배후에서 진화의 추진력을 제공하는 ‘나’에 해당하는 요소일 것이다. 바로 이 의식의 단위를 신비학에서는 ‘모나드’라 부른다. 신플라톤주의에 영향 받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브루노는 모나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하나이므로 그 신에서 변화한 바의 만물은 일(一)이라는 존재의 양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만물의 생명은 신이 주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극미의 것이 되면 여기에서 물심(物心) 양면성을 띠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단자(單子), 즉 모나드다. 단자는 그 상태에서 신을 나타내는 것인즉, 단자란 것은 바로 우주 자체의 영사경이다.” (우주변화의 원리, p.176)

과거 부루노나 라이프니쯔의 철학을 깊이 접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이들이 원자론자의 원자를 대체하는 의미에서 모나드(단자론)란 개념을 만들어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학에서는 원자(궁극원자)와 모나드를 서로 구별하고 있으며, 부루노 역시 결코 이 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신비학에서 모나드는 공(VOID)이 하나로 응결된 점이자 제1로고스의 존재의지가 불꽃의 섬광들로 나타나는 의식의 단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모나드들은 최상의 불(지고의 불)의 섬광들로, 즉 ‘신의 단편들’로 묘사되고 있다.” (원인체, p.8)

<비교>의 한 문답에서 스승의 질문에 제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머리를 들어라. 오, 라누여! 너는 네 머리 위의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불타는 하나, 혹은 수많은 빛들을 볼 수 있느냐?” “하나의 위대한 불꽃을 느낍니다. 오, 구루데바여! 저는 분리되지 않은 무수한 섬광들이 불꽃 안에서 빛나는 것을 봅니다.” (비교 1권, p.120)

하나의 위대한 불꽃은 이쉬바라이며, 제1로고스로서 현현해 있다.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섬광들은 ―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 모나드이다. ‘분리되지 않은’이란 표현은 모나드들이 로고스 자신임을 의미한다.

“태초에 오직 유일한 존재만이 있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태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따름이며, 그 무의 상태에서 우주가 나왔다고 말한단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존재가 어떻게 무로부터 나올 수 있겠느냐? 아니다, 내 아들아. 태초에는 오직 유일한 존재가 있었느니라. 그가 바로 유일한 존재였으며, 그 스스로가 온갖 많은 존재들을 내려고 생각했단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신으로부터 우주를 만들었으며, 그 자신으로부터 우주를 창조하고 난 후에 모든 존재들 속으로 들어갔느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직 그의 안에서만 모습이 있었단다. 모든 사물들 가운데에서 그는 미묘한 바탕이었으니, 그는 진리이니라. 그는 신이니라. 그리고 스베타케투야, 그는 바로 너이니라.” (찬도갸우파니샤드)

이렇게 무수한 의식 단위들이 태어나게 된 것은 제1로고스가 현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작용된 결과이다.

“언제나 생명을 더욱 완전하게 현현시키고자 애쓰는 이 신성한 충동은 자연계의 모든 곳에서 보이는데, 종종 존재의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 확장하고자 하는 것, 증대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존재의지에서 온다” (원인체, p.10~11)

한편 모나드가 물심양면성을 띠는 존재라는 것은 다음 문구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모나드는 질료라는 가장 엷은 막에 의해 하나의 개별 실체로서 분리된 신성한 생명 그 자체의 일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 질료는 너무나 엷어서, 비록 각각의 모나드에게 별도의 형태를 부여하지만, 이렇게 질료에 둘러싸인 한 생명이 주위의 비슷한 생명들과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원인체, p.8)

“모나드는 순수한 의식, 순수한 자아(Self), 삼빗(samvit)이 아니다. 그 개념은 추상적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현현된 물질우주에서는 항상 자아(Self)와 그의 집들(혹은 체들)이 ― 아무리 그 질료가 엷을지라도 ― 함께 존재하고 있어, 의식의 단위를 질료(물질)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나드는 의식과 질료를 합친 것이다.” (원인체, p.9)

하지만 모나드가 입고 있는 엷은 질료는 최저 한도에서 개별성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해서, 그것이 물질 속에서 진화해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외적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제1로고스의 소산인 모나드들은 두 번째 계인 아누파다카계(아누파다카계를 모나드계라고도 한다)에 머물면서 자신들을 표현할 외부 여건을 제3로고스가 조성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림 9.5는 자신들이 진화하게 될 무대인 세계가 만들어지는 동안에 자신들의 고유영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나드들을 나타낸다.

“생명의 근원이 아디계에 있지만, 모나드 자신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체들도 없이, ‘신의 아들들이 현현할(나타날)’ 날을 기다리면서 아누파다카계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기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제3로고스는 물질우주의 질료를 형성하면서 외부적인 현현작업을 시작한다.” (원인체, p.9)




<그림 9.5> 모나드의 출현



제3로고스가 물질우주의 질료를 형성하는 과정을 <원인체>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제3로고스 혹은 우주심은 공간의 질료 ― 물라프라크리티 ― 에 작용하여, 자신의 세 가지 속성 타마스(관성), 라자스(이동성), 그리고 사트바(리듬)를 안정된 균형상태(대칭)에서 불안정한 균형상태(대칭성의 파괴-역주)로 만들어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계속해서 운동을 일으킨다.
제3로고스는 이리하여 다섯 개의 하위계인 아트마, 붓디, 마나스, 카마와 스툴라(마나스는 멘탈계, 카마는 아스트랄계, 스툴라는 물질계를 일컫는다)의 원자들을 창조한다. ‘포하트’는 원초적인 물질 혹은 창세 전의 질료에 전기적인 에너지로 생명을 띠게 하여 원자들을 분리(형성)시킨다.” (원인체, p.12)




<그림 9.6> 다섯 하위계의 형성



그러나 원자(궁극원자)의 형성에 관여하는 것은 제3로고스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하부계들의 질료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질료가 아니다. 그 질료를 더욱더 강하게 통합(결합)시켜서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태들의 물질을 형성시키는 것은, 지혜 혹은 사랑의 측면인 바로 제2로고스의 ‘더욱 강하게 끌어당기는 응집력이 있는’ 에너지들이기 때문이다.” (원인체, p.12~13)

제2로고스는 제3로고스에 의해 활성화된 질료 속으로 그 생명력을 하강시키며, 제3로고스에 의해 준비된 질료들은 이 신성한 생명의 두 번째 유출에 의해 섬유처럼 짜여져 장차 정묘하고 조잡한 여러 형체들로 발전하게 될 원초적인 조직들(tissues)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자의 스파릴래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제1로고스의 일이다.

“원자인 그 소용돌이 자체는 제3로고스의 생명이다. 이 소용돌이의 표면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원자의 벽은 제2로고스의 생명이 하강함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러나 제2로고스는, 마치 막이 쳐진 통로를 흐르듯이 스파릴래의 외곽선을 따라 단지 미약하게만 나아갈 뿐이다. 그는 그들을 활성화시키지는 못한다.” (원인체, p.38)

“스파릴래로 알려져 있는 원자들 속에 있는 ― 소용돌이 모양으로 ― 회전하는 흐름들은 제3로고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나드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원인체, p.13)

신비학에 따르면 현재 4개의 스파릴래만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제5라운드, 제6라운드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스파릴래가 활성화된다고 하는데, 이는 모나드와 원자의 관련성과 진화를 동시에 시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원자 내부에는 의식의 세 측면에 대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들이 ― 필연적으로 ― 포함되어 있으며, 이 가능성들은 진화하는 과정의 원자 속에서 펼쳐져간다.” (원인체, p.13)

모든 원자의 핵심에는 영혼 또는 모나드가 있다. 원자 또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비학의 관점이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의식과는 다른 종류라 해도 원자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물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한다. 원자의 형성에 로고스가 작용하는 것만 보더라도 물질과 의식을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물질의 궁극원자, p458-478에서 인용)


한편 모나드는 그 자신의 계인 아누파다카계(모나드계)에서는 전지(全知)하고 편재(偏在)하지만, 나머지 하위계에서는 무의식적인, 다시 말해 ‘지각이 없는’ 상태이다. 모나드는 모든 계에서 전지하고 편재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서 단지 최고의 높은 계의 진동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성한 진동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즉 하위계들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광채를 가리는 질료의 옷을 입고서 하위계로 하강하였다.

먼저 모나드는 아트마, 붓디, 멘탈계(마나스계)의 궁극원자들과 차례로 결합하는데, 이렇게 모나드와 결합된 궁극원자를 ‘영원한 원자(permanent atom)’, 또는 ‘생명 원자(life atom)’라고 한다. 영원한 원자는 물질계로 직접 내려올 수 없는 모나드가 하위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용하는 좋은 매체 겸 도구이다. 모나드는 이 아트마-붓디-마나스의 영원한 원자를 통하여 3중적인 영, 또는 소위 상위의 삼개조를 형성하였다. 이 상위의 삼개조(아트마-붓디-마나스)는 질료의 베일에 의해 비록 그 힘이 제한되고 약해지기는 했지만 본질상 모나드와 동일하다. <원인체>에서는 그것은 사실상 모나드라고까지 말한다.




<그림 9.7> 모나드와 상위의 삼개조 (원인체, p.31)



이 상위의 삼개조를 영적인 3개조, 천상의 인간, 지바트마(Jivatma), 상위 자아, 신성한 아들, 순례자, 모나드의 광선 등으로도 부르는데, 순수한 영인 모나드 및 육체를 포함하는 하위 자아와 함께 삼중으로 구성되는 인간 구조의 중간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다.

나중에 상위 멘탈계에서 원인체라는 것이 형성되었을 때, 이 상위의 삼개조는 에고(ego)라고도 불리며 원인체를 그 체로 사용하게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인간의 영혼(soul)은 바로 이 에고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된다. 영혼은, 순수의식의 불꽃인 모나드조차 질료적인 측면을 갖고 있듯이, 더 높은 영(spirit)의 하위 매체(질료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가 되는 인간 본성의 중간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의 하위 자아는 하위 마나스(하부 멘탈)계와 아스트랄계, 그리고 물질계의 체들로 구성된다. 즉 유체이탈 등의 경험을 통해서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에텔체와 아스트랄체, 멘탈체 등이 모두 하위 자아에 속하는 것이다.




<그림 9.8> 인간의 3중적 구조



인간은 이렇게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다양한 체들로 구성된 복합적인 존재이며, 각각의 체들을 통해서 그 체가 속한 계의 진동과 경험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원인체라는 것은 에고와 함께 인간을 동물이나 식물 같은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구별짓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만이 원인체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개체성의 확립을 뜻한다.

개체성은 진화의 산물이다. 개체성이 확립됨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자의식이 생겨났으며, 이때부터 개별 생명체로서의 영속성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인간은 죽어도 원인체라는 것이 남아 있어 또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더라도(즉 하위의 체들이 새로 구성이 되더라도) 그 몸은 동일한 원인체의 지배를 받게 된다. 즉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나는 비록 몸은 다르지만 동일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원인체는 바로 이런 반복적인 삶, 즉 윤회의 주체가 된다.

반면에 동물들은 죽게 되면 그 개체성이 사라지고 만다. 다시 말해 죽기 전과 동일한 영혼으로서 물질계에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대신 동물들은 집단영혼이라는 것에 연결되어 있어서, 동물이 죽게 되면 그 영혼은 이 집단영혼이라는 거대한 연못 속에 녹아든다. 각각의 개체가 경험했던 모든 진동들은 이 연못 속에서 하나로 뒤섞이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한 물질적 개체의 경험이 집단영혼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고스란히 보전되지는 못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동물이 태어나게 되면, 이 집단영혼의 연못으로부터 한 바가지만큼의 물이 퍼올려져 그 동물의 영혼으로 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원인체라는 개별 영혼의 저장장치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인체가 형성되기 전에는 인간은 오직 모나드로서만 존재했으며, 다만 모나드는 하위계의 형성과 동식물의 등장, 그리고 동물의 집단영혼이 원인체로 발전하기까지의 전진화과정에 걸쳐 미미하게 작용했을 뿐이다. 모나드는 인간의 출현으로 진화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진화의 전과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 번으로 나누어져 이루어지는 신성한 생명력의 하강을 살펴보아야 한다. 원자의 형성에 로고스의 세 측면이 차례로 작용하듯이 우주 전체의 진화에도 이 신성한 생명력이 삼위일체로 현현하여 작용하는데, 각각을 제1로고스, 제2로고스, 제3로고스, 또는 로고스의 첫 번째 측면, 두 번째 측면, 세 번째 측면이라고 부른다. 비록 우리가 전자의 용어를 즐겨 쓰고 있지만, 사실은 후자의 표현이 보다 정확한 것이다.




<그림 9.9> 로고스의 세 측면



제3로고스 혹은 로고스의 세 번째 측면으로부터 비롯된 첫 번째 생명력의 유출은 하위계의 원자들을 조성하고 다른 로고스의 측면들이 하강할 수 있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질료들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질료들이 아니며, 이를 더욱 강하게 결합시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들의 물질로 만드는 것은 지혜 혹은 사랑의 측면인 제2로고스의 ‘더욱 강하게 끌어당기는 응집력 있는’ 에너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포하트가 제3로고스의 생명력을 대변한다면, 제2로고스의 생명에너지는 프라나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보통 우리가 생명체 또는 유기체라고 여기는 생명형태가 생명을 이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생명형태는 제2로고스의 생명력이 그 형체를 유지하여 가는 동안 존속하게 된다.

이 두 생명력의 흐름은 하위계들을 통과하여 점진적으로 하강한 끝에 광물계에까지 이른다. 그후 이 두 흐름은 식물계와 동물계를 거쳐 인간계로 상승하는데, 인간계에서 로고스의 첫 번째 측면으로부터 하강하고 있는 세 번째 유출과 만나게 된다.




<그림 9.10> 진화무대의 형성과 로고스의 신성한 생명력의 하강



위의 그림을 보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제3로고스에 의해 형성된 각 존재계의 원자는 제2로고스의 생명력이 부가되어 모나드 에센스가 된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단계의 원자(모나드 에센스)가 모나드와 결합하여 ‘영원한 원자’가 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원자가 모나드와 결합하게 되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모나드와 결합하여 ‘영원한 원자’가 되지 못한 원자들은 계속 모나드 에센스로 남아있게 된다.

한편 모나드 에센스가 멘탈계 및 아스트랄계의 분자들과 결합하여 이들 질료를 영화(靈化)시키면 엘리멘탈 에센스라고 부르는 것이 된다. 독특한 이름의 이들은 멘탈계와 아스트랄계의 질료로 이루어진 일종의 원소적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계의 특정한 진동에 반응하는 법을 배우면서 영겁의 세월동안 경험을 축적해나간다.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는 진동의 차이에 따라 상위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와 하위 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로 나뉘는데, 상위 멘탈계에 속한 엘리멘탈 에센스들의 생명계를 제1엘리멘탈계라 부르고 하위 멘탈계에 속한 엘리멘탈 에센스들의 생명계를 제2엘리멘탈계라 한다. 엘리멘탈 에센스들은 먼저 제1엘리멘탈계에서 오랜 진화의 기간을 거친 후에 비로소 제2엘리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로 진화한다.

제2엘리멘탈계에서의 경험을 완수하면 이번에는 제2로고스의 생명이 아스트랄계라고 하는 더 아래 단계의 진동 영역으로 내려오는데, 이 곳에서 제2로고스의 생명은 아스트랄 질료로 된 형태들을 취하여 제3엘리멘탈계를 형성한다.

제3엘리멘탈계에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보낸 제2로고스의 생명은 비로소 광물계의 에텔적인 부분에 생명을 불어넣어 광물계를 활성화시키는 생명이 되고,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광물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광물 속에서는 멘탈 단위라고 부르는 일종의 멘탈 분자와 아스트랄계, 그리고 물질계의 영원한 원자들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모나드, 그리고 상위의 삼개조와 연결된 하위의 삼개조라 불리는 원자(또는 분자)들의 조합이다. 이들은 붓디계의 질료로 둘러싸인 가느다란 실로 상위의 삼개조와 연결되어 있다.

상위의 삼개조와 하위의 삼개조를 이루는 영원한 원자들의 용도는, 진동의 힘들로서 그들이 겪었던 모든 경험의 결과들을 그들 속에 보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원자들은 진화하는 에고와 함께 영원히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상위의 삼개조가 고도로 진화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이들 영원한 원자들과 연결되어 있는 모나드가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작용할 뿐이며, 그때까지 상위의 삼개조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제2로고스로부터 부여받는다.

제2로고스의 생명력 또는 두 번째 유출이 광물계의 중심에 도달했을 때, 하강하는 압력은 중단되고 진화의 물결은 상승하는 성향을 띠게 된다. 이에 따라 신비학에서는 전체의 진화과정을 둘로 구분하는 전통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진화과정을 하강 진화 또는 내적 진화(involution)라 하고, 이후의 진화과정을 상승 진화 또는 외적 진화(evolution)라 한다.

내적 진화의 일반적인 계획은, 신성한 생명의 거대한 물결이 점진적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의미하고, 결국 반복되는 분화와 세분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명확한 개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세분화가 된 후에는 더 이상의 세분화가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인간적인 실체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위 혹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물계와 식물계, 심지어 광물계에 존재하는 집단영혼은 개별적인 인간의 실체들 혹은 단위(영혼)들로서 완전한 분화에 이르기 전의 중간 단계들을 나타낸다.

최초의 집단영혼은, 하위의 삼개조가 형성될 때 그 주위로 층을 이루며 모여든 제2엘리멘탈계의 엘리멘탈 에센스와 아스트랄 모나드 에센스, 그리고 에텔 질료가 보호막을 만들면서 생겨난다. 그러나 삼중의 막으로 형성되어 있는 집단영혼의 벽은 식물계와 동물계를 거치면서 차츰 엷어져 동물에서는 제4하위 멘탈계의 멘탈 엘리멘탈 에센스만으로 구성된 단지 하나의 층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광물과 그 집단영혼의 활동영역이 주로 물질계에 국한된 데 반해 식물계와 동물계에선 아스트랄계와 멘탈계로 활동영역이 넓혀졌고, 따라서 그 자신의 에텔체 및 아스트랄체를 강화시키는 데 집단영혼의 물질적 층이 사용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집단영혼에 속한 영원한 원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영원한 원자들끼리는 서로 강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데, 이렇게 시작된 분리는 결국 집단영혼의 분열을 가져온다. 식물계와 동물계로 올라갈수록 영원한 원자들은 훨씬 다양한 진동들을 경험하게 되고, 집단영혼들이 분화하는 속도도 더욱 빨라지게 된다. 하나의 집단영혼 속에 있는 하위 삼개조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게 되어, 결국에는 각각의 하위 삼개조가 별도의 자신의 체를 가지기까지에 이른다.




<그림 9.11> 동물의 집단영혼과 분리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집단영혼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게 된다. 한편으로 영겁의 세월동안 다양한 경험을 마친 하위의 삼개조는, 마침내 한층 더 많은 양의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각성된다. 즉 세 번째 유출로 알려진 제1로고스의 생명력이 본격적으로 하강할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제1로고스의 소산인 모나드의 생명력이 크게 증대함에 따라 상위의 삼개조에 속한 영원한 원자들 사이의 흐름 역시 증대되고, 멘탈계의 영원한 원자가 각성되어 진동을 발산하게 된다. 이어 다른 멘탈 원자들과 분자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어 상위 멘탈계에 소용돌이 하나가 형성된다. 이와 유사한 소용돌이 운동이 집단영혼 속의 멘탈 단위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 같은 질료 속에서도 일어나는데, 집단영혼의 벽은 그후에 갈갈이 찢어져서 위에 있는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올라간다. 여기서 그것은 해체되어 제3 하부 멘탈계의 질료로 용해된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가 가라앉을 때 그것은 정묘하고 엷은 막과 같은 하나의 체로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원인체(causal body)다.




<그림 9.12> 원인체의 형성 (원인체, P.68)



원인체가 형성됨으로써 상위의 삼개조 혹은 영적인 삼개조는 훨씬 더 고도로, 그리고 훨씬 더 효과적으로 진화를 계속하기 위한 영원한 체를 하나 갖게 되었다. 원인체는 만반타라 기간동안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인 삶, 즉 윤회의 주체이다. 원인체를 원인체라고 부르는 것은 원인체 속에 하위 여러 계들에서 결과로서 나타나게 될 모든 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인생관과 그에 따라 취하는 행동의 원인은 원인체 속에 저장된 과거 생의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원인체는 ‘카라나 샤리라’라고 하는데, 카라나는 원인을 의미한다.

앞에서 아뢰야식의 말뜻이 아라야, 즉 영원히 존재하며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했는데, 이로부터 아뢰야식은 원인체, 또는 에고(에고는 영, 직관, 지성 이 세 가지 측면의 통합으로서, 원인체에 거주하고 있다)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원인체가 개체성을 지닌 영원한 생명의 주체가 되는 반면, 인간 본성의 하위 부분, 즉 육체를 포함한 하위 자아(인간의 하위자아를 보통 인격 혹은 인성이라고도 한다)는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먼저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에고가 각각의 체를 비워감에 따라 아스트랄체와 멘탈체가 분해되고 마침내 원인체만 남게 된다. 에고가 원인체만 입고 있을 동안에는 한때 하위자아를 형성했던 물질계의 영원한 원자, 아스트랄계의 영원한 원자, 그리고 멘탈 단위가 비활성화되어 원인체 내로 철수하게 된다. 이렇게 영원한 원자가 비활성화되어 수면상태에 들어가면, 스파릴래 속을 흐르는 정상적인 생명력의 흐름도 감소하게 된다. 상위 멘탈계에서의 삶이 끝날 때, 즉 원인체로서의 삶이 끝날 때 하위계에서의 더 많은 경험을 원하는 에고는 다시 천계의 문턱을 넘어서 환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림 9.13> 윤회의 과정 (원인체, p.147)



이렇게 에고는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탄생과 죽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불멸의 개체성이 되고, 원인체는 상위의 생명력(우주적 영)을 부여받아 하나의 점으로 집중시킴으로써 분리를 일으키는 수용체가 된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영은 우주적 영(로고스)과 동일하지만, 하위계에 현현했을 때는 개체로서 분리된다. 이런 분리 또는 개체화의 목적은, 하나의 개체가 형성되어 성장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 개체화된 생명이 우주의 모든 계에 나타나며, 그 생명이 영계에서 아는 것처럼 물질계와 다른 계에서도 알고서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그 생명이 자신의 계를 벗어나서도 의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체들을 스스로 만들고, 나아가서는 서서히 그 체들을 하나씩 정화하여 체들이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고 모든 계의 지식 전부가 들어오는 순수하고 반투명한 매체로서 작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식물의 진화, 또는 지금까지 언급한 진화과정의 목적은 개체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개체성의 달성이 진화의 마지막 종착역은 아니다. 그림 9.10에서 보듯이 인간은 ‘초인(超人)’이라고 표시한 진화의 다음 단계를 향해 중단없이 나아가는데, 그것은 자신이 나왔던 근원인 신성을 향하여 되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화의 과정은 어느 한 방향만을 쫓아서 흘러가는 일방적인 것이거나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맹목적인 과정이 아니라, 근원으로부터 물질을 향하여 내려오는 하강의 과정과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상승의 과정이 어우러진 것이다. 이를 하강 진화와 상승 진화, 또는 내적 진화와 외적 진화라고 구분을 하며, 개략적으로 다음 그림과 같은 단계를 밟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림 9.14> 진화의 일곱 단계 (<원인체> p.77)



생명의 물결이 하강하는 1, 2, 3단계는 점차 견고한 물질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영과 물질이 균형을 이루는 4단계를 지나서 유기체는 다시 영화(靈化)되는 과정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영의 상태로 원상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진화과정에서 경험한 수많은 체험과 지혜를 통해 의식의 각성상태를 이룸으로써, 자각을 가진 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인 것이다.

인도에서는 영이 하강하여 질료 속으로 들어가는 전과정을 프라브리티 마르가, 즉 떠나는 길이라 불렀으며, 그 반대의 길을 니르브리티 마르가, 즉 귀환의 길이라 불렀다. 사실 우주라는 활동영역은 모나드들, 즉 의식의 단위들이 질료를 통해서 진화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모나드는 영원한 원자와 에고라는 옷을 입고, 또는 하위의 여러 체들과 집단영혼 혹은 원인체라는 우주선을 갈아타며 마치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순례자처럼 보인다.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 p.479-493 에서 인용)
 출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 김동석

좋은 글을 올려주신 농욱님께 감사드립니다.~  09.08.26 16:19
 

★ 人物同出三神歸一之眞(기오왈 인물동출삼신귀일지진): 사람과 사물은 같이 삼신에서 나와
하나의 참으로 돌아가나니 是爲大我也(시위대아야): 이를 대아라 하느니라  09.08.26 21:56
 

★ 하나이며 곧 三眞(삼진)은 셋인 성명정(性命精)이라고 하고
이것은 선악과 청탁과 후박을 다 통달하고 善業(선업)을 닦아 공덕을 ?는다면
천제님의 기틀을 아는 것으로 곧 성품을 통달하고 선업을 ?는 것으로
곧 性通功完(성통공완)이 되는 것이다
곧 천덕 지덕 인덕을 밝히는 말씀이다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終)  09.08.26 21:58
 

일전에 무상님께서 삼진=성/명/정이 절대계에 배치하는 것이 좀 무리가 아닌가? 하는 반론을 주셨습니다. '인물편에 서만 거론되었기에 사람 내에만 존재구성하는 무엇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09.08.26 22:00
 
상기 환단고기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의 주해를 보면 굳이 성명정 삼진이 그렇지 않음을 볼수 있습니다.
 人物同出三神歸一之眞 --> 삼진을 삼신으로 보고있음을 알수 있습니다.(삼진귀일을 삼신귀일로 표현)  09.08.2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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