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교權敎는 여래께서 중생의 근기에 수순하여 자세한 사정을 보살펴 방편으로 중생을 접인함을 이름이다. 실교實敎는 부처님께서 자기의 내심(自心)으로 증득한 의리에 따라 직접 선설함을 이름이다. 돈교頓敎는 점진적 단계와 차제를 빌릴 필요 없이 재빨리 곧장 질러가 일문(보문)으로 좇아 범부의 경계에서 단번에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경계에 들어감을 이름이다. 점교漸敎는 점차 한걸음씩 나아가며 수행하고 점차 한 계위씩 증득하여 들어가기에 반드시 다겁. 다생이 지나가야 실상을 직접 증득할 수 있음을 이름이다.
저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 법문을 직지인심. 견성성불하는 법문으로서 당연히 실교이자 돈교라고 생각하지만, 참선은 설사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혀 견성할 수 있을지라도 마음 그대로 본래 갖추고 있는 이체인 심성의 부처님(理性佛)을 친견할 뿐임을 모른다. 만약 대보살의 근성이면 깨침 그대로 곧(사상을)증득함(卽悟卽證)일 수 있고, 저절로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고 삼계를 높이 뛰어넘으며, 이로부터 위로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며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장엄을 짓는 기초를 사용한다. 이러한 근성은 이미 확철대오한 사람 중에서 논하면 또한 백천인 중에 단지 한두 명만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혹 근기가 조금 하열하면 설사 미묘한 깨달음을 얻었을지라도 견사번뇌를 아직 끊어 없앨 수 없어 여전히 삼계에서 생사를 받아야만 한다. 이미 생사를 받으면 깨달음(開悟)에서 또 미혹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개오開悟에서 증오證悟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 그래서 참선 법문은 비록 실교이자 돈교일지라도 만약 대보살의 근성이 아니면 실교와 돈교의 진실한 이익에 이를 수 없고, 여전히 권교와 점교의 법을 이룰 뿐이다. 왜 그러한가? 참선법문은 단지 자력에만 의지하는 연고이다.
자력을 십분 갖춘다면 무엇이 이만큼 다행이겠는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단지 이체의 심성을 개오할 수 있을 뿐 이체의 심성을 증오할 수 없다.
오늘날 확철대오한 이러한 사람조차 찾기 어렵거늘 하물며 그 깨달은 것을 몸소 증득한 사람이겠는가? 염불법문은 위로 철저히 닦고 아래로 철저히 닦으며, 권교 그대로 실교이고, 점교 그대로 돈교이니, 평범한 교리로써 비판해서는 안 된다.
위로 등각보살에서 아래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종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습해야 하므로 이를 위로 사무쳐 닦고 아래로 닦음이라 한다.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는 목적은 오직 중생이 생사를 요탈하도록 함에 있다. 그 나머지 법문은 상등의 근기가 이번 생에 생사를 끝마칠 수 있고, 하근기는 누겁에도 생사를 끝마치기 어렵다.
오직 이 염불법문만이 이와 같이 곧장 질러가니, 어떻게 점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어떤 중생근기는 평범한 원돈의 근기만 못하고 점교의 자취가 있는 것 같을지라도 정토법문의 위신력, 아미타여래의 서원은 이러한 열등한 근기로 하여금 단박에 큰 이익을 획득할 수 있으니, 그 원인은 이익이 모두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하는 부분에 있다.
선강을 하는 사람은 만약 정토종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면 염불법문을 알기 쉽고 가벼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다. 만약 정토종을 깊이 연구하면 심력을 다하여 널리 홍양해야 하거늘 어찌 다시 선은 돈교 및 실교이고, 정토는 점교 및 권교라는 잘못된 이론에 집착하여 자신을 잘못되게 하고 남을 잘못되게 하겠는가?
【역주】 선과 정토는 모두 극원極圓. 극돈極頓의 무상법문으로 권교. 실교. 돈교. 점교 모두 중생의 근성으로 인한 구별은 사람에게 있지 법에 있지 않다.
육조혜능 대사의 《단경》에서는 “이 법문은 최상승으로 대지혜인을 위해 설하고 상근기인을 위해 설한다.....” 참선자는 반드시 이근자라야 성취가 있고 반드시 자력으로 견사혹을 끊어야 삼계를 수직으로 벗어날 수 있고, 상사위에 이르도록 닦아야 「위불퇴」를 증득하고 내세에 환생하여 더 이상 퇴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염불은 상중하 세 근기에 두루 이롭게 하고 둔근기도 전부 섭수한다.
단지 관행위觀行位 초품에 이르도록 닦기만 하면 곧 정토에 자재왕생할 수 있고 영원히 윤회를 벗어난다. 산심위散心位의 염불인도 임종 최후의 무렵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염불하여 왕생하면 삼계를 횡으로 벗어난다.
【보충】 선종은 불법의 심종이다. 심종心宗이란 곧 불법의 심요心要이고, 심요란 오로지 자신의 본심을 보고, 자신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밝힐 뿐, 바깥에서 구하는 것에 힘쓰지 않는다. 선종에서 증오證悟는 곧 이 심성을 깨달은 것으로 자성自性이 부처를 이루고 자심自心이 성인이 된다고 말한다.
오悟란 이 이理를 깨달음이고, 증證이란 이 사事를 증득함이니, 이 이理와 사事에서 쌍으로 증오에 이른다. 이를 간단명료한 말로 홀로 오라고 이른다.
오직 오悟란 글자의 함의를 두루 쓰면 여기에는 이치를 깨달음의 오이고, 체득의 오, 자심. 자성. 자증분을 증오함의 오悟에 있다.
이치를 깨달음의 오는 이해에 속하니, 이른바 그 이치를 이해하여 앎으로 또한 해오解悟라고 한다. 이는 선종이 숭상하는 것이 아니다.
체득함의 오는 감오感悟에 속하니, 사로 인해 이를 밝힘으로 이와 사가 잠깐 상응함을 얻음이다. 선종에서는 깨달음(省)이 있다고 말한다. 성省이란 사事로 인해 그 이치를 감오하여 깨친 것이 있다.
증오할 때의 오悟는 선종에서 특히 숭상하는 것이다. 증오證悟란 사와 이에서 쌍으로 융화하고 해解와 행行에 함께 이름이다. 즉 사事에서 경계의 상이 있는 까닭에 사상事相이라 한다.
이理에는 경계상이 없어 오직 지각智覺에 의지한다. 사와 이에서 쌍으로 원융하여 경계상은 곧 지각된 이理가 사라지는 것으로, 지각의 이理는 다시 사물의 경계상 가운데 융화하여, 이 가운데 경계상이나 지각을 분별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이름할 수 없다.
설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말한다.
그러나 오에는 정도의 깊고 얕음이 있다. 그 소견, 소중의 사와 이에서 크고 작은 차별이 있기 때문에 교리와 차제의 그 차별에 의지해 처음 깨달았을 때 “부처님의 지견을 열었다.” 말하고, 더 정진하여 말하길,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갔다” 말하며, 확철대오한 후 “부처님의 지견을 증득하였다” 말한다. 그 정도에 깊고 얕은 다름이 있을지라도 같은 오이고, 그 실제는 하나이다.
이理의 극진에 이르면 본래 일체이다. 일체이지만 억지로 부분을 나누고, 또한 한 지점에 근거하여 말한 것일 뿐, 일체 바깥에 달리 깨달음의 경계가 있지 않다.
사람은 이 마음이 같고, 마음은 이 이치가 같다. 그래서 범부와 부처는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이 마음, 이 이치를 함께 갖추고 있다. 깨닫지 못한 자는 미혹하여 (거울에 비친) 자기 머리의 그림자가 진실하다고 여긴다. 깨달은 자는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듯이 스스로 진짜 머리를 보나니, 본래 이것에 있다. ㅡ남회근 거사, 《선종 육조와 중국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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