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나무
이재영
당나라 사람 섭이중(聶夷中)이 지은 ‘군자행(君子行)’이라는 시(詩)에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라는 구절이 있다.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뜻이다. 군자는 괜히 남으로부터 의심이나 오해받을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내가 초등시절에 살던 집은 경남 진주시 외곽에 있는 교육대학교 근처였다. 일제 강점기 때는 사범학교였고, 학교 담장 끝에 정부미(政府米)도 보관하고 쌀을 찧는 큰 방앗간인 정미소(精米所)가 있었다.
정미소 앞 도로 건너편에 화장실이 집 안에 딸린 일본식 적산(敵産) 가옥 세 채가 나란히 자리했는데, 가운데 있는 우리 집이 제일 큰 집으로, 아마도 왜정(倭政) 때 일본인 정미소 소장이 살던 집이 아니었나 싶다.
대지가 270평이나 되었고, 자전거를 타고 놀 정도의 널따란 마당 가 화단에는 라일락 등 온갖 화초가 무성했으며, 지붕보다 높은 큰 감나무가 서 있었다.
화단 옆에 나중에 시멘트 블록으로 아래채를 지었고, 아래채와 기역 형태를 이룬 길쭉한 양계장과 돼지우리가 붙어있다. 그 맞은편에 넓은 위쪽 채소밭이 있고 양계장과의 사이에 아래쪽, 푹 꺼진 채소밭으로 리어카를 끌고 가는 길이 나 있다.
80평쯤 되는 위 채소밭에는 주로 오이, 고추, 가지, 무 등 사철 채소를 심었고, 100평이 넘는 아래 채소밭에는 배추, 대파, 감자, 고구마, 겨울 시금치와 소(燒)풀 또는 전구지라고 불렀던 부추를 심었다.
양계장에는 암탉을 200마리 키웠고, 잠자는 닭장의 두 배인 놀이터에 수탉도 댓 마리 키워서, 수시로 암탉 위에 올라타고 괴롭혔다. 그래도 시내 병아리 부화장에 팔면 종란(種卵)이라서 무정란(無精卵)보다 두 배가 넘는 값을 받았다. 닭똥도 긁어서 거름으로 쓰고, 남는 건 다른 집에 팔았다.
돼지는 새끼를 열 마리쯤 낳았는데, 잘 길러 인근의 가축시장에 몰고 가서 파는 재미가 쏠쏠했다.
부엌 앞 장독대 곁의 앵두나무 열매는 나의 심심풀이 땅콩이었고, 통로 건너 큰 창고 옆 양지쪽에 땅을 파고 비닐 문짝으로 덮는 온실을 만들어 겨울에는 제라늄, 베추니아, 선인장, 국화 등 화분 수십 개를 들여놓았다.
온실 앞에 작약인 희고 붉고 분홍빛 함박꽃을 잔뜩 심어, 여름 한 철은 정말 향기로운 꽃밭이 되었고, 뿌리는 가을에 한약방에 팔기도 했던 기억이다.
이웃집과의 경계는 잘 전지된 키 높이 탱자나무 울타리였는데, 안쪽에 듬성듬성 몇 가지 과실 나무가 서 있었다.
잎사귀와 열매가 감처럼 생겼지만, 열매가 너무 작아서 먹지도 않는 고욤나무와 까기만 힘든 작은 알밤이 달리는 밤나무는, 그 사이에 철봉을 매어 중학교 입학시험 체력장 턱걸이 연습용으로 사용했다.
뽕나무는 까맣게 잘 익은 오디를 골라가며 오랫동안 따먹는 재미가 좋았고, 빨간 열매가 굵어서 제법 먹을만한 물앵두나무도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하숙하며 고등학교 다니던 6촌 형이 큰 풍개나무 가지를 얻어와서 밋밋하던 양계장 앞에 심었다. 열매가 달걀 크기로 동그란 풍개는 발갛게 익기 시작하면 과즙이 새콤달콤하고 먹기도 쉬워 아주 맛있는 과일인데, 의외로 풍개나무가 집 안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정성껏 물을 줬더니 금세 키 높이로 자랐고, 다음 해에는 하얀 꽃도 피었는데, 열매는 달리지 않았다. 더 크면 열릴 줄 알고 기다렸지만, 해가 거듭돼도 큰 나무에 잎사귀만 무성하고 먹을만한 열매는 없어서, 개 풍개도 있나 보다 하고 안타까워했다.
국민학교 교장이던 아버지의 늦둥이 외아들인 태조 21대, 효령대군 19대 후손으로 태어나, 벌 나비가 날아다니는 그런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서, 양반답게 선비처럼 고고히 살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교는 부산에서 다녔고, 졸업하여 취직하자마자 결혼해서 장남을 낳자, 부모님도 내 직장이 있는 경기도 오산으로 이사해 함께 살게 되어, 진주는 천 리 길 머나먼 고향이 되고 말았다.
내가 전주 이씨(氏)인데, 한자로 오얏 이(李)자다. 나무 밑에 아들이 있는 형상이라 오얏나무 자손이라는 전설이라도 있나 보다 싶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후박나무 박(朴)자이고, 임꺽정의 임 씨(氏)는 수풀 임(林)자로 아예 나무숲이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휴식을 취하는 한가한 때 만들어진다고 한다. 휴식의 휴(休) 자도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댄 형상이다.
먹고 살기 위해 중노동 하는 천민에게서 시가 나올 리 없고, 계절 따라 한가히 풍류를 즐기는 선비로부터 좋은 시와 그림이 나왔다는 글도 읽어봤다.
그런데 왜 내가 오얏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진작 물어보거나 알아볼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먹고살기 바빠서 한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7년 전 직장생활 은퇴한 뒤에 글이나 쓰고 지내면서 좀 한가해졌다. 우리 아파트에서 걸어 10분쯤 거리의 대로변 상가 앞 인도에 5일마다 장이 서는데 가끔 구경도 하고 물건도 사러 간다. 한 번은 과일 상점에 맛있는 풍개가 있길래 “풍개 저거 얼마요?” 했더니, “자두요? 한 바구니에 5천 원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풍개는 경상도 사투리고, 자두가 표준말인 줄로 알게 됐다. 그전에도 자두라는 말은 가끔 듣거나 글을 보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과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자두나무를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자두나무가 일명 오얏나무라는 것이다. 내 성씨 오얏나무가 자두나무이며, 우리 집에 심었던 바로 그 풍개나무라니! 무척 놀라우면서도, 일찍 알지 못한 큰 아쉬움이 스쳤다.
신기해서 좀 더 검색해봤더니, 중국에서 2천 년 전쯤에 들여왔고, 원래는 복숭아를 닮았다고 하여 자도(紫桃)라 불렀는데, 오늘날 보는 자두나무는 대부분 1920년경부터 심기 시작한 개량종 서양자두란다. 중국 양쯔강 유역이 원산지인 자두는 열매가 둥글거나 갸름하고, 방울토마토보다 약간 크며 과육도 적단다.
조선왕조가 이씨(氏) 왕조이긴 하지만 자두를 상징물로 쓰지 않은 탓에 자두나무를 특별히 우대한 흔적은 없고, 다만 대한제국에 들어서면서 왕실의 문장을 오얏꽃으로 했으며, 덕수궁 석조전의 삼각형 박공지붕, 구한말 우표 등에 사용되었고, 지금은 전주 이(李)씨 종친회 문양이란다.
자두나무는 자가수분(自家受粉)이 안 되는 수종이라서 다른 나무가 근처에 있어야 열매가 달린다고 한다. 한 그루만 심으면 안 되고 두 그루 이상 심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개 풍개로 치부하며 웃고 말았으니! 잘난 줄 알았던 내가 참으로 한심한 사람인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칠순이 넘은 요즈음 내가 익히 알고 함부로 인용하던 상식들이 전혀 아닌 경우가 종종 밝혀져, 이제는 말하고 글 쓸 때 극히 조심하며 신경을 쓴다. 물망초가 안개꽃인 줄 알고 지냈는데, 학명이 전혀 다른 꽃이라는 등.
오얏나무를 검색하다가 이 글 맨 앞에 인용한 ‘이하부정관’이 나오는 ‘군자행’ 시(詩)를 삼국지 조조의 아들인 조식이 지었다고, 버젓이 블로그에 올린 걸 발견했다. 하마터면 나도 그걸 그대로 여기에 옮길 뻔해서 아찔하다.
한번 뱉은 말이나 글은 주워 담거나 고칠 수가 없다. 특히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글을 맘대로 써 올릴 수 있는 SNS(소셜 네트워크) 시대인데, 그 맛에 들려서 아무 글이나 마구 쓰고, 함부로 퍼다 날라서는 절대로 안 된다.
혹시 내가 전에 쓴 글 속에 전혀 사실과 다른 엉뚱한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심히 걱정된다. 지금부터라도 한 번 더 사실과 진실을 확인하고 쓰는,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겠다 싶다.
위에 부추를 사전에 나오는 ‘정구지’ 대신 전을 부쳐 먹는 재료란 뜻인 ‘전구지’로 썼고, 소풀도 소가 먹는 풀이란 뜻이 아니라 불타 번지는 불길 같다는 의미로 ‘사를 소(燒)’ 자를 썼는데,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맞는지, 저으기(적이) 걱정된다.
나와 아내가 묻힐 고향 부모님 묘소 옆에 새콤달콤한 자두나무를 여러 그루 심어야겠다. 그러면, 내 오얏나무 후손들이 자두 맛에 끌려서라도 자주 오겠지.
< 종합문예지 『문예감성』 2022년 겨울호 등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