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이사야(96)/고난
제목 : 많은 사람의 죄악을 담당한 종
성경 : 사 53:7~12
찬송 : 303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103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에게 약속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본문이 명시하는 사실은 종의 고난과 죽음이 부당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자신의 잘못 없이 부당하게 학대당하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악인들과 함께 묻히는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의 죽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종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는 ‘속건 제물’이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나타납니다. 그는 죽음으로 패역한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했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한 종에게 구원받은 백성을 주시고 영화를 약속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는 윤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은 것을 정당화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또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초윤리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초윤리적이면서 초자연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초윤리적(超倫理的) : 무고하게 고난당하는 종(7~9절)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본문에서는 종이 순종으로 이룬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에 대한 영화의 약속이 소개됩니다. 먼저 종이 당한 고난과 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다’와 상황절 ‘그가 순종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로 대조를 이룹니다.
사 50: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괴로울 때’로 번역된 ‘나아네’라는 말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다’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종의 순종적인 반응은 놀라울 뿐 아니라 자기들의 죄로 인한 징벌에 대해 불평하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사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고난을 대하는 종의 태도는 도수장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저항하지 않는 양의 모습에 비유됩니다. 가끔 유투브에 보면 양털 깎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때 양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조용하게 몸을 맡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발버둥치거나 도망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바리깡으로 털을 깎는데 순식간에 모든 털을 말끔하게 깎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렘 11: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이사야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평하지 않았다는 말이며,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지도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분은 폭압적인 판결로 인해 끌려갔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이라는 말씀은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 세대 중에 누가’라는 말씀은 ‘그 세대 중에 누가 그의 죽음에 대해 신경이나 썼겠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는 말씀은 종의 죽음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의 종이 죽기 전에는 악인들이 묻히는 무덤을 부여 받았으나 정작 죽고 나서는 부자와 함께 묻혀 그의 의로움을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묘실 즉 부자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을 보면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묵묵히 형 집행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분명 인간의 상식으로 볼 때에 자연스럽지도, 상식적이도, 윤리적이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의 허물을 대신해 자기 종에게 이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잔인한 형틀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 처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미리 보여 주셨던 이 모습 그대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초자연적(超自然的) : 죽은 자의 형통과 만족(10~12절)
여호와의 종이 이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이런 억울한 일을 자기 종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이 자기 영혼, 곧 생명을 속건 제물로 드리면 자손(씨)을 보게 되어 그의 날이 길고, 또 그의 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게 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는 것은 곧 생명을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어떻게 후손을 볼 수 있으며, 죽었는데 어떻게 ‘그의 날이 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이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여긴다고 노래합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으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것은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기적,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예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가장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헛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존귀하게 되고 강한 자와 함께 탈취물을 얻게 되셨습니다.
초월적(超越的) : 범죄자를 위한 기도(12절)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형벌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유대의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발변하지 못했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지도자들은 집요하게 빌라도를 몰아세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죄라도 짓지 않은 분인데 졸지에 범죄자가 된 것입니다. 더욱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주님은 범죄자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귀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셔서 가장 존귀한 자리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기도는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도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가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덕분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 죽음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연약함과 영적인 연약함을 고려하더라도 우리 기도의 양과 질이 현저하게 부족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시다. 언제나 기도를 최우선순위로 두고 하나님 앞에 더 자주 엎드려 간구합시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삼상 12:29).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살전 5:17).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도 주님의 기도 모습을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신 주님, 그러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그분은 초윤리를 뛰어 넘어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초자연을 뛰어 넘어 죽은 자의 형통과 만족을 이루셨습니다. 초월적인 기도를 지금도 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도 기도에 동참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와 기도로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