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의 조화, 거대하고 복합적인 언어
―사공경현의 시
권온
1.
사공경현은 한국시의 새로운 개성이 될 수 있다. 그의 문인(文人)으로서의 출발은 수필가였다. 2022년 시인(詩人)의 이름을 얻은 사공경현은 운문과 산문, 시와 수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는 우리 시단(詩壇)의 낯선 스타일리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조금은 난해한 국면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다가서다 보면 사공경현 시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될 테다. 그의 신작시 5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그러거나 말거나 남이야 무얼 먹든 먹는 것 가지고 참견하지 마라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우리는 너희 우월한 종들이 무심하게 방기한 뒤를 먹고 사는 지구촌 제일의 미식가이자 신사로다 우리 없는 자존심, 우리 없는 환경이 어디 있겠느냐 우리야말로 신이 보낸 헌신의 사도이니라 우리 없는 하루를 생각해 보았느냐 하이힐 정도로는 어림도 없나니 눈부신 날에도 세상은 장화로 넘쳐날 것이로다
그런데 우리 박애주의 일동은 노파심으로 주문하는 바 우리의 무량한 식욕을 보고 지레 겁먹지 마라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결코 너희 음식을 탐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 또한 우리의 알량한 양식에 대해 절대 눈독 들이지 말지라
―「그들의 항변」 4연~5연
사공경현이 이 시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크게 둘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 또는 “그들”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너희’ 또는 ‘그들’은 “먹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유기체들”일 수 있다. 사공경현은 독자들에게 유기체들의 다양한 유형을 소개한다. “순한 부류”, “지독한 놈”, “비단족”, “어둠의 존재”, “불한당 같은 종자”, “파렴치한 족속”, “인면수심” 등은 유기체들의 다채로운 면모를 제시한다.
시인이 생각하는 “우리”는 “유기체들의 뒤처리”를 담당한다. 곧 “우리는 너희 우월한 종들이 무심하게 방기한 뒤를 먹고 사는 지구촌 제일의 미식가이자 신사”이다. 사공경현에 의하면 ‘우리’는 “신이 보낸 헌신의 사도”이자 “박애주의자 일동”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놀라운 찬사는 “생태계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우리’를 향한 빛나는 존경일 수 있다.
그때는 마냥 꽃길인 줄 알았지
무지개 별빛 언덕이길 바랐지만
잡초가 자라는 길 언저리
새 소리조차 날아가 버린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오기도 했지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총총총 징검다리를 건너듯
산을 넘어 예까지 왔네
어릴 적 그 꽃길 보이지 않고
허물어진 초가집 옆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수풀 우거진 언덕에 덩그러니 서 있네
아버지는 색색의 꽃을 심었고
그 벌판을 휘돌다가
벌이 되고 나비가 되셨지
이제는 나도 그 길을 가야겠네
―「꽃길」 3연~6연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길이 있다. 시적 화자 ‘나’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왔다. ‘나’가 기억하는 “어릴 적”의 길은 “들길”이다. ‘들길’은 “봉숭아”, “채송화”, “코스모스” 등이 피어있고 “종달새”가 “하늘”로 비상하던 “꽃길”이었다. 유년(幼年)의 ‘나’에게 그 길은 평화롭고 아득하며 이상적인 공간이자 시간이었을 테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유년에 머무를 수 없다. “어릴 적” 또는 “그때”의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들길’이 “마냥 꽃길인 줄 알았”으나, 사실 ‘들길’은 “산길”이기도 하였다. ‘나’가 걷는 길은 “잡초”, “먹장구름”, “징검다리”, “산” 등 다양한 장애물이 내재한 공간이자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길은 “꽃길”이 될 수도 있고 “산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들길’을 ‘꽃길’로 가꾼 사람이다. ‘아버지’는 ‘산길’이 될 수 있는 ‘들길’을 ‘꽃길’로 다듬은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이제는 나도 그 길을 가야겠네”라는 마지막 진술을 읽으며 아버지를 추억하고 인생을 상상하게 된다.
백 년에 한 번 피는 선인장이 있고
일생에 단 한 번 꽃 피우는 대나무도 있다지만
모름지기 생명의 씨앗을 품은 존재이련만
꽃 한 번 피워보지 못하는 신세라니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요
물망초처럼 청초하지도 않아도 되어요
밤에 숨어 피는 달맞이꽃이거나
아침저녁에 지는 나팔꽃도 괜찮아요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호박꽃도 부러워요
눈에 띄지 않는 꽃으로 태어났지만
꽃인 줄도 몰라주어 야속합니다
나도 한번 꽃 피워보고 싶은 존재랍니다
―「배추꽃을 본 적이 있나요」 4연~6연
세상에는 다채로운 “꽃”이 있다. 매우 드문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선인장”의 ‘꽃’이나 “대나무”의 ‘꽃’도 있고, “장미”, “물망초”, “달맞이꽃”, “나팔꽃”, “호박꽃” 등도 있다. 사공경현이 이 시에서 주목하는 꽃은 “배추꽃”이다. 시인은 ‘배추꽃’의 근원으로서의 ‘배추’를 ‘나’로 표기하여 형상화한다. ‘나’는 “소녀”이자 “숙녀”이며 “처녀”이다. “가녀린 손”, “두 뺨”, “청록의 부푼 가슴”, “하얀 속살” 등은 여성으로서의 ‘나’를 구체화한다. 특히 3연의 “욕조에 끌고 가서 소금물을 먹이고/ 온몸에 맵고 따가운 불순물을 처바르더니/ 장독 안에 감금하는 것 아니겠어요”라는 진술은 배추를 활용한 김장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시인은 작품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6연에서 ‘배추’와 ‘배추꽃’을 향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한다. 우리는 “나도 한번 꽃 피워보고 싶은 존재랍니다”라는 배추의 발언을 들으며, 특별한 꽃으로서의 배추꽃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한시적인 학교로 생각한 조물주는 애초에 인간의 범위를 확장해 놓았다 잡다한 인간류가 섞여 살며 부대끼면서 공부하라는 취지다 세상에서는 호모사피엔스 중간 정도의 진화 과정에 있는 부류를 ‘인간’이라 부르고 그 이상 수준의 인간을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인간’ 이하 단계의 인간을 ‘짐승 같은 인간’, 그 하위 수준을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조물이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준 이하의 인간들에게는 인두겁이라는 투명한 가면을 씌워 놓았다 하여 도둑이나 강도 강간 사기범 같은 부류는 짐승 같은 인간으로 분별된다 짐승들도 목숨을 다해 새끼를 보호하는데, 자식을 죽이는 아비가 있고 부모를 살해하는 자식도 있다 이러한 패륜과 살인자 등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 범주에 속한다 한편, 살신성인이거나 대자대비하거나 세상의 빛이 된 고매한 인격을 가진 최상위 수준에 있는 소수의 사람을 ‘성인’이라 칭하며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로 인식한다
인간은 오랜 세월 진화를 계속해 왔으며 상위 수준으로 거듭 발전하기 위해 광범위한 인간류의 복마전에 던져진 고립무원의 존재와 다름없다 그러나, 인간들이여 정신 바짝 차리고 인두겁에 휘둘리거나, 인간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할지라
―「인간의 범위」 3연~5연
사공경현이 포착하는 시적 대상의 스케일은 방대할 수 있다. 그는 앞에서 살핀 시 「그들의 항변」에서 “그들” 또는 “너희”로 지칭되는 “유기체들”을 다양한 유형과 함께 포괄적으로 분석하였다. 시인의 이번 시 「인간의 범위」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공경현이 여기에서 천착하는 시적 대상은 “인간” 또는 “사람”이다.
시인이 파악한 ‘인간의 범위’는 “수준” 또는 “단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위치하고 분류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가 파악한 “인간”은 “호모사피엔스 중간 정도의 진화 과정에 있는 부류”이다. 곧 “인간”은 “동물” 또는 “짐승”보다는 위에 있으나,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지는 못한 상태이다. ‘인간’의 아래에는 “짐승 같은 인간”이 위치하고 그보다 아래에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자리한다. 또한 ‘인간’의 위에는 “사람”이 위치하고 그보다 위에는 “인간 진화의 최종 단계”로서의 “성인”이 자리한다.
사공경현은 독자들에게 “인두겁에 휘둘리”는 “기준 이하의 인간들”이 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도둑”, “강도”, “강간”, “사기범”, “패륜”, “살인자” 등이 ‘기준 이하의 인간들’과 관련된 어휘이다. 시인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이상이 되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기분이 아주 좋은 날에는 상식과는 달리 무채색을 즐겨 이용하신다 주로 검은색과 회색 계열의 어두운 색감을 칠하신다 삶에 지쳤거나 부끄러움에 잠긴 자라도 편하게 올려 보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이에 더하여 빗줄기를 그려 넣기도 하고, 기분이 아주아주 좋을 때는 산봉우리 사이에 일곱 색깔로 커다란 아치형 다리를 그려 놓으신다 시련과 낙담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눈짓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시려는 의도다
그에게 무슨 난해한 고민거리가 있을 때는 색이나 형체를 무시한 초현실주의 학풍을 취하신다 이에 반해 평범한 날에는 고전적 기법으로 주로 자연을 표현하신다 그러나 만일 캔버스가 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날이면 그날은 그가 무언가에 꼬여 있거나 심기가 불편한 날이다 관료들이 옷깃을 여미며 살금살금 눈치를 봐야 하는 날이다
―「캔버스 기상도」 4연~5연
이 시의 새로움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캔버스 기상도”라는 제목은 ‘캔버스’와 ‘기상도’를 포괄한다. ‘캔버스’는 유화(油畫)를 그릴 때 쓰는 천이고, ‘기상도’는 기상(氣象) 상태를 표시한 지도를 가리킨다. 사공경현은 ‘미술’ 또는 “예술”과 연결되는 ‘캔버스’와 ‘기상’ 또는 ‘일기(日氣)’와 연결되는 ‘기상도’를 통합함으로써 ‘낯설게 하기’를 실천한다.
이 시에서 ‘캔버스’ 계열 어휘로는 “그림”, “스케치”, “크로키”, “색감”, “형체”, “조형미”, “색조”, “역광 기법”, “색채”, “흰색”, “바탕색”, “무채색”, “검은색”, “회색”, “색깔”, “색”, “초현실주의 화풍”, “고전적 기법” 등이 있다. ‘캔버스’와 관련된 어휘가 직접적으로 다양하게 포진한 반면 ‘기상도’와 관련된 어휘는 다소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 “만백성”, “백성”, “궁창”, “큰 물난리”, “빗줄기”, “산봉우리”, “커다란 아치형 다리”, “백성들”, “자연”, “관료들” 등은 ‘기상도’ 계열 어휘로 볼 수 있다.
사공경현은 ‘캔버스’와 ‘기상도’를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한 인물로서 “그” 또는 “당신”을 제안한다. 독자들은 “백성이 우러르는 크나큰 궁창을 캔버스로 여기”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상상해야 할까? ‘조물주’나 ‘임금’ 또는 ‘왕’이라는 이름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들의 항변」이나 「인간의 범위」가 그러하듯이 이번 시 역시 시인의 남다른 스케일을 입증한다.
3.
사공경현의 신작시 다섯 편을 점검하였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듯이, 그의 시는 독특하다. 시인의 시는 수필의 장점을 포괄한다. 그의 시는 운문과 산문의 조화를 추구한다. 사공경현이 집중하는 시적 대상은 거대하고 복합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항변」에서의 “유기체들”이 그러하고, 「인간의 범위」에서의 “인간”이 그러하며, 「캔버스 기상도」에서의 “캔버스”와 “기상도”가 그러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과학’을 배우고, ‘역사’를 익히며, ‘예술’을 향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또한 사공경현의 시 세계가 포괄하는 시적 대상에는 ‘식물’과 ‘인간’과 ‘자연’도 있다. 「꽃길」이나 「배추꽃을 본 적이 있나요」 같은 시를 보면 ‘꽃’과 하나가 되는 ‘인간’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노출된다. 요컨대 우리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서 ‘과학’, ‘역사’, ‘예술’, ‘자연’ 등을 통합하는 사공경현의 시가 앞으로 한국시의 새로운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임을 굳게 믿는다.
필자 : 권 온(문학평론가)
약력 : 2008년 계간 문학과사회(문학과지성사) 신인문학상 평론(비평) 부문 수상(문학평론가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