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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すぐに出血の源が乾いて…
본문: 마가복음 5장 25절~34절
5: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9 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25. さて、ここに十二年間も出血の止まらない女がいた。26. 多くの医者にかかって、ひどく苦しめられ、全財産を使い果たしても何の役にも立たず、ますます悪くなるだけであった。27. イエスのことを聞いて、群衆の中に紛れ込み、後ろからイエスの服に触れた。28. 「この方の服にでも触れればいやしていただける」と思ったからである。29. すると、すぐ出血が全く止まって病気がいやされたことを体に感じた。30. イエスは、自分の内から力が出て行ったことに気づいて、群衆の中で振り返り、「わたしの服に触れたのはだれか」と言われた。31. そこで、弟子たちは言った。「群衆があなたに押し迫っているのがお分かりでしょう。それなのに、『だれがわたしに触れたのか』とおっしゃるのですか。」32. しかし、イエスは、触れた者を見つけようと、辺りを見回しておられた。33. 女は自分の身に起こったことを知って恐ろしくなり、震えながら進み出てひれ伏し、すべてをありのまま話した。34. イエスは言われた。「娘よ、あなたの信仰があなたを救った。安心して行きなさい。もうその病気にかからず、元気に暮らしなさい。」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생각의 지평과 태도의 지평을 넓히는 것에 대해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단지 종교생활에 몰입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성장하여 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복음의 약속에 대해 배웠던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죄의 가치관에 함몰되지 않고, 언제나 건강하고 신실한 영생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요청에 응하여 그 딸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이로와 함께 가는 예수님의 일행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가르침에 반해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지위와 인지도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모았을지도 모르지요. 사람들은 ‘야~ 예수님이 회당장의 죽어가는 딸도 고쳐주러 가시는 구나….’하면서 관심을 갖고 웅성웅성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한이 많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살던 여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입니다. 혈루증이란 부인과 질병으로 “기능성자궁출혈”이라는 질병이라고 합니다. 여성이 생리를 하는 기간과 상관없이 자궁에서 출혈이 일어나는 병인데요. 지금은 호르몬제를 투약하거나 수술하는 방식으로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의료라는 것은 그리 과학적이지 못했지요. 그래서 당시 의사들은 매우 미신적인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던 때였습니다. 여인은 많은 돈을 들여가며 용하다는 의원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재산을 다 탕진하고도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병이 더 악화되어 힘겹다 못해 고통스럽고 저주스럽게 하루 하루를 살았던 것인데요.
유대인 공동체의 법인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생리기간의 여인은 성결하지 못한 존재 즉, 부정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생리기간 중의 여인과 접촉하는 모든 것은 세탁하여 청결을 유지해야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생상태와 의료환경이 좋지 못하던 구약의 시대, 특히 광야의 40년 동안 생리하는 여성을 특별히 관리함으로 해서 공동체와 가정의 위생과 질병을 미리 예방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시도 때도 없이 출혈하는 질병을 앓던 이 여인은 얼마나 더 힘겹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마 나병(한센병)에 걸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분리되어 늘 억눌린 채 소외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병자들과 사회적인 약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바로 부조리하고, 문제투성이이며, 갈등이 가득한 지금의 세속사회를 힘겹게 혹은 걱정과 온갖 탄식, 불안 속에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임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혈루증 여인과 예수님이 만나는 성경의 고백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과의 만남(예수님과의 동행)을 기대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늘 그 일행과 무리들이 함께 움직이는 틈을 타서 그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낫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서서 고쳐 달라고 하지는 못하고 그저, 옷자락 한 번 만져보겠다고 그 무리 가운데 섞여서 주님을 따라오는 것이지요. 물론 군중의 관심은 예수님과 그 일행이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리 가운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심이 닿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결국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목표를 달성합니다. 자신의 몸에서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 즉 몸이 나은 것을 알게 되지요.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기뻐할 사이도 없이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 여인을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하고 반문합니다. 물론 제자들의 대답은 사실적으로 옳았습니다. 수많은 군중들 속에 어느 한 사람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과 제자들은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옷자락뿐만 아니라 몸에도 손을 대고, 머리에도 손을 대고, 팔뚝에도 손을 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여인이 스스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믿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 몰래 자신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다고 해서 예수님과 그 일행이 알아채지는 못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 알아채지 못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율법적으로 부정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던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의 질병을 치유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두에게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그저 군중이 밀려들며 아무런 생각과 마음 없이 손을 대는 것과 간절하고 간곡한 마음을 담은 한 많은 그 여인의 손길과 그 믿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가서 여인의 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간곡함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남들 따라서 의미없는 하루 하루를 흘려보내듯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루 하루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시간의 궤적들이 가진 의미들을 감사하며 하루의 삶을 주님 앞에 쌓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간곡하고 신실한 태도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삶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쌓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간증으로, 증언으로 우리가 주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인정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8)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는 것은 물론,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 것을 잊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창조주 하나님을 시인하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아무리 바쁜 길을 가도록 재촉하고 있어도 그 간절하고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온 여인과 대화하시며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고백하길 원하신 것입니다.
물론, 간절하고 간곡하게 살아야 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뭔가에 쫓기듯 치열하고 분주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죽지 못해 사는 무미건조하고 허무한 시간이 흘러가 없어져 버리는 삶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좋은 일, 나쁜 일, 원하는 일, 원치 않는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내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가를 궁금해 하며(관심사를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의 사명으로 주어지는 삶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를 담을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또한 예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언제나 어디서나 동행하며 살겠다고 결단하는 삶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간절함과 신실한 믿음을 계기로 우리는 각자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능력, 성경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선포해 드리지만,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태도이 자세인 것을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찾으시자, 치유 받은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일행과 군중들도 회당장의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춰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이 반드시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할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딸아!’ 하고 부르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의 피조물이며 동시에 그분이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우리의 존재가치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비록 지금 잠깐 병들었다 하여도, 혹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라 하여도, 문제투성이의 인생을 살고 있다 하여도, 한 많은 인생을 살고 있다 하여도, 패배주의에 휩싸인 인생을 살고 있다 하여도, 이웃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그 어떤 삶을 살고 있다고 하여도…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겔 16:6)
주님은 우리에게 피투성이가 되어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그 사명의 자리를 지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물론 병을 고쳐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간절하고 신실한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퍼 가는 귀한 그릇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의미없이 건드려보는…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하는 식의 믿음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담은 손길과 그 믿음이 예수 이름의 능력을 받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실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도하는 정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지금까지 신앙생활의 경륜을 믿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믿는 믿음이 그 능력을 실감나게 체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영육간에 강건하게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이제는 ‘구원받았으니 건강하게 살라’고 축복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문제 많은 인생에서 문제없는 인생으로, 갈등 많은 인생에서 갈등 없는 인생으로, 한 많은 인생에서 한없는 인생으로 전환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삶의 예배를 드릴 것인가를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 예배하는데,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할 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표징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 우리는 이렇게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태도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직접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기쁨과 자원함으로 예배를 드리며 사는 일상은 주님 앞에 곱게 쌓여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그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은 세상이 말하는 대로 그저 흘러 떠내려가 버리고 마는 아쉽고 헛되고 헛된 인생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저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데 어느 정도는 효과적이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없이 그저 의무적이고 교리적으로 예배하게 합니다. 단지 교리를 지키고, 율법을 지킴으로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경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저지르게 되는 것에 근심하여, 자신을 절제하고 계명을 지키며, 예배자다운 예배자가 되어 거룩한 손해 보는 예배 드리기를 자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점점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기에 죄와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혈루병에서 해방된 여인의 경험이 단지 기적을 체험한 성공사례이기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구원하셨다며 성경이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과 치유의 경험이 그녀를 하나님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영생의 관계로 회복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구원받았다고 증언하며 간증하고 기록까지 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복음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단지 흘러가는 인생이 아닌, 주님 앞에 일상의 은혜를 쌓아가는 건강하고 축복된 삶으로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며 탄식하는 병든 인생으로부터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 앞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은혜롭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된 것에 감격하며 기쁨과 자원함으로 예배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믿음을 가지고 간절하고 신실한 마음을 담아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군중은 예수님의 이적과 표적을 구경꺼리로 생각했습니다. 군중의 손길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낭비하는 허망한 삶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믿었습니다. 그의 행위가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그런 믿음을 아셨고, 그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12년 동안을 병으로 고통받다가 병나음을 얻었던 여인이 주님께 소중한 존재가 되었듯이, 구원받고 거듭난 우리도 주님께 소중한 존재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존재답게 허투루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 충만한 삶을 주님 앞에 매일 하루에 하루만큼 쌓으며 기적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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