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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환 바오로 신부
연중 제32주일
마카베오 하 7,1-2.9-14
2테살로니카 2,16─3,5
루카 20,27-38
여러분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찬미 예수님! 11월 위령성월의 첫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연옥영혼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지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디 열심히 기도하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부활을 하면 어떠한 모습일까요?
단순히 끊겼던 숨이 다시 붙고 심장이 뛰며 피가 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유일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황을 기억해 봅시다.
불과 2,3일 전에도 함께 있었을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죽었을 때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방법은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 못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 이것 역시 끔찍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저의 모습이 딱 좋은데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 잘생긴 사람이 제 기준에는 없거든요.
농담인 듯 농담 아닌 농담 같은 말이었습니다.
아무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부활 때의 우리 모습은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간직한 모습이 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의 모습은 가장 아름다우셨던 ‘거룩한 변모’때의 모습에
인간 사랑의 절정이었던 ‘십자가’상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순히 외모가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학생이었을 때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첫 직장에서
또 어떤 사람은 희끗희끗한 머리로 손자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장애가 있는 분들은 그 장애가 사라지고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
어린 아기들은 멋지게 성장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모습 등등
부활의 모습은 우리가 겪었던 아직 겪지 못했던 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혹은 주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부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입니다.^^
춘천교구 이일환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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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섭 신부
연중 제32주일
마카베오 하 7,1-2.9-14
2테살로니카 2,16─3,5
루카 20,27-38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교회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신비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교리는 우리 교회의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인 교리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바오로 사도께서도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코린 15,13-14)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부활 신앙으로 인하여 우리는 현세의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제1독서에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한 가족의 형제들이 보여주는 행위야말로 참된 오늘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 7,14).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요, 생명을 거두시는 분도 하느님이시라는 이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과 모든 시련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아니 바로 나를 세상에 있게 하신 다음 그냥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나와 함께 계시며 나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여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여유 있고 기쁨 중에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 이 세상의 짧은 삶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는 영적인 존재를 부정하며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리는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가르치며
하느님께서는 항상, 현재와 미래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고엘이라는 모세의 법에 의하면 형이 결혼하여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첫 번째의 자식은 형의 아들이 되어
형의 대를 이어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집안에 칠형제가 있었는데 제일 큰 형이 대를 잇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법에 따라서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였으나
그도 또한 대를 잇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해서 막내에게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있다고 하면, 마지막 부활의 날에 칠 형제가 다 부활하면
그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사두가이파의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걱정과 질문은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하면서
부활 후의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인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우리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어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은
당신의 손길을 거두어 멀리서 바라만 보시거나 또는 잊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함께 하시며 계시는 분이 신 것입니다.
그분이 영원하시듯이 그분이 창조한 모든 것도 그 분 안에서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쉬고 계시는 분도 아니며,
또 우리와 무관하게 다른 일로 바빠서 우리들을 잊고 계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며,
당신의 그 사랑을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더욱이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맞이하셨던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부활에 대한 교리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우리들에게 살아계신 하느님을 죽은 하느님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자세를 지적하고 계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만들도록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이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은 과연
우리들의 생활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계신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들의 생활과는 별도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까?
하느님이 실제로 우리들이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죽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이웃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또 혹시라도 우리들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들은 과연 누구에게 제일 먼저 우리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있습니까?
정말 하느님이 우리들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우리들은 한 두 번의 하소연이 아니라 죽자 살자 하고 그분에게 매달릴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이 왔을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그 소식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변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주변의 친구들에게 먼저 말하고 있다면, 과연 주님은 그 친구보다도
우리들을 잘 봐주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우리들은 매일 매일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으며,
매 주일 성당에 찾아와서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진정 우리들의 생활은 아직도 주님과의 삶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것과 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혹시 하느님이 우리들의 생활에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죽은 신처럼 존재하는,
곧, 네임덕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 가톨릭의 한 사제가 유대인을 자기네 종교 쪽으로 개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유대인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개종하기 위해서 할 일은 그저 하루에 세 번씩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나는 유대교도였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나는 유대교도였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나는 유대교도였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그는 사제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사제는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정말 개종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윽고 금요일 사제가 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 유대인은 마침 닭을 튀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말하였습니다.
“이제 금요일엔 닭고길 먹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아시겠죠.”
그러자 유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 그럼요. 그러나 전 이놈을 냄비에다 딱 세 번 넣다 뺐다 하면서 말했거든요.
‘난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
난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
난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유대인이었지만 지금은 가톨릭교도다’ 라고 말만함으로서
가톨릭신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치 ‘닭고기였지만 지금은 물고기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닭고기가 물고기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도 성당에 와서 신앙을 고백만 한다고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으로 바뀌지도 않으며,
우리들의 신앙이 살아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 또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죽은 하느님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만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을 여러분들의 삶에서 실제로 느끼기를 원하십니까?
그러하다면 먼저 여러분들의 신앙의 생활을 살아있는 삶으로 바꾸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들의 신앙의 삶이 살아 있을 때,
바로 주님은 우리들 앞에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만이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전교구 민병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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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마티아 신부
연중 제32주일
마카베오 하 7,1-2.9-14
2테살로니카 2,16─3,5
루카 20,27-38
우리의 믿음은?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부활의 삶이 분명히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요한 복음서(5, 19~29)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5 ,21)
이에 우리는‘사도신경’을 통하여‘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인은‘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임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 ‘부활신앙’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수년 전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에
‘절대로 믿는다’는 사람은 불과 약 55%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 믿는다’는 사람과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사람은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미사에 나올까요?
‘어느 정도 믿는다’는 신자의 마음에도 불확신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전혀 믿지 않는다’는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믿음의 본질과는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논쟁을 하였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신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한 시기에
현실과 결탁한 일부 제관들과 지방 유지들이 의기투합한 조직이었고,
모세오경만을 인정함으로써 죽은 이들에 대한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단지 현세적인 윤택한 삶을 지향하였기에
그들의 희망도 자연스럽게 현세적인 풍요로운 삶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인이 부활신앙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여전히 현실적인 삶에만 집중하여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이러한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를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 16~17)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구원 및 부활)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역설적으로 현실을 더욱 의미와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부활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희망이며 삶의 의미이고
모든 현실적인 가치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위령성월인 11월에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품에 안기신 많은 영혼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우리 자신의 삶을 이 순간부터 주님 안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부산교구 이기환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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